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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채원연구소공감]대표 :: 세종이야기꾼 :: 실록연구자 :: 소통 디자이너 :: 010-8014-7726 :: chewonoh@gmail.com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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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대에는 인재가 있기 마련이고, 그는 충분히 그 시대의 일을 성취해낼 수 있다. 그런데도 늘 옛사람들을 우러러보며 지금 사람들은 따라갈 수가 없고, 자질이 떨어져서 큰일을 하기에 역부족이라고만 한다. 이 역시 잘못이다. 대개 인재는 구하면 있다. 다만 구별이 쉽지 않고, 다 찾아서 쓰지 못하는 것이 염려스러울 뿐이다."

[一]

(정조正祖, 홍재전서弘齋全書卷 178, 일득록得錄 18, 훈어訓語 5)

(일득록은 정조의 개인 문집인홍재전서(弘齋全書)』에 수록된 부분으로, 得錄이라는 말 그대로 하루를 반성하고 그날 얻은 깨달음을 기록한 정조의 일기이다.)


최근에 둘이 함께 길을 걷다가 옆 사람이 천 원짜리 지폐를 줍는 것을 보았다.

처음엔 신기하다가 그 다음엔 당황스럽다가 절망스럽기까지 했다.

나도 같은 길을 걸었는데, 나도 두 눈으로 앞을 보았는데, 나는 못 본 것을 내 옆 사람은 보았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그리고는 휘둥그레진 내게 그 돈을 건넸다ㅎㅎ).

내게는 눈이 달려 있지만, '보는 눈'은 없는 것이다.

나는 눈 뜨고도 얼마나 많은 부, 기회, 사람을 놓쳤을까?


정조께서도 말씀하셨듯이, 국가와 기업에서는 인재가 없다고 하소연한다.

사실, 인재는 있지만, 그를 알아보고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리더가 없는 것 뿐이다.

우리는 주변에 좋은 사람이 없다고들 이야기한다.

하지만 작은 욕망에 가리워진 내 눈이 따라가지 못하는 것 뿐이다.

눈 씻고 귀 열고 레이다를 촤악 펼치고 주변을 둘러봐야지.

좋은 사람을 찾았다면 그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다가가야 할 것이다.

만약 내 힘만으로 관계의 발전 혹은 개선이 힘들다면, 주변에 도움을 청하고.

'용기 있는 자만이 미인을 쟁취한다'는 말은 남성이 여성에게 어필할 때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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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장산에는 임진왜란 때에 왜군을 피해 실록을 숨겨놓았던 암자가 세 곳이 있다.

용굴암, 은적암, 비래암.

관련 스토리를 접하고는 부르르 열정이 끓어올라, 실록 이안(移安) 과정의 연구를 시작했다.

이에 따라 올 1월에, 세 곳 중 하나인 그리고 유일하게 접근로가 공개돼 있는 용굴암 답사를 시도했다.

그.러.나. 낙석의 위험 탓에 눈물을 머금고 통제선 근처에서 바라만 보다 왔다.

 

4개월 후인, 올 5월에 재도전!

감사하게도 좋은 날씨 속에 용굴암 답사에 성공했고, 천우신조로 이안 사적지의 발굴을 담당한 전문가도 만났다.

반년을 별러, 이달에는 그 전문가 분의 안내를 받으며 용굴암 뿐 아니라,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은적암과 비래암까지 답사하기로 되어 있었다.

내일이 바로 그 날!

그.런.데. 오늘 아침에 그 전문가 분께 문자를 받았다.

 

"어제 비가 솔찮이 오고, 오늘 아침에는 눈발이 날렸답니다. 용굴암은 가능하지만 나머지 2곳은 위험. 다 보려면 다음 기회를 봐야할 듯."

 

아아. 연애보다 더 애태우는 이노무 답사.

내 마음을 한 번에 허락해주질 않는 나쁜 남자와 같구나.

언제 또 님을 볼 수 있을꼬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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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에서 캐럴(헬렌 헌트)이 멜빈(잭 니컬슨)에게 칭찬 한 마디 해보라고 하자, 멜빈이 끙끙대다가 한 말, "You make me want to be a better man".
여기에서 알 수 있는 몇 가지 :


1. 남자에게는 칭찬하는 것이 중노동이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가 칭찬으로서, 자신에 대한 존중을 확인시켜주길 여자는 바란다.


3. 마음만으론 관계가 유지 그리고 발전되기 힘들다. 특히 여자는 마음을 말로 표현해주기를 바란다. 
영화 <광식이 동생 광태>의 대사 "여자는 짐작만으로 움직이지 않아요." 에서 볼 수 있듯, 남자가 상대에게 품은 감정을 확실한 언어로 표현하는 것은 둘 사이에서 공증과 같은 효력이 있다.


4. 누군가가 여자에게 '당신을 위해(or 당신의 마음을 얻기 위해), 나는 더 나은 사람이 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라고 말한다면, 웬만한 여자들은 그를 감싸 안아줄 것이다. 연인 관계가 아니더라도.


경청도 습관이고, 메모도 습관이다.
즉, 훈련에 의해 몸에 익게 만들 수 있다.
표현 또한 그러하다.
주변 사람들에게 입이 비뚤어지고 귀가 닳을 만큼 표현하고 살자.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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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사랑방에서 발표한 내용. <세종 유통분(流通分 경전의 결론부분으로 기독교의 복음과 유사함)> 시간)



정조실록에 조선시대 글자체의 계보가 기록되어 있다(정조 20/12/15).

* 태종 : 주자소(鑄字所)를 궁중에 설치하고 처음으로 글자를 주조. 조선 최초의 구리 활자인 계미자(1403년).

* 세종 : 경자자(庚子字1420년)·갑인자(甲寅字1434년)

* 문종 : 임신자(壬申字1452년)

* 세조 : 을해자(乙亥字1455년)·을유자(乙酉字1465년)

* 성종 : 신묘자(辛卯字=갑진자1484년)·계유자(癸酉字)

* 정조 : 정유자(丁酉字1777년),《정리의궤(整理儀軌)》를 편찬하려고 주조한 정리자(整理字1795년).

 

글자체는 대체로 지은 해의 간지를 따서 명명한다(정리자만 주조의 목적을 밝힌 명명).

현대의 유명 글자체인 안상수체(안상수 디자인), 공한체(공병우, 한재준 디자인)는 일종의 실명제라고 할 수 있다.

만일 안상수체를 조선식으로 명명했다면, 세상에 나온 1985년이 을축년(乙丑年)이므로 '을축자'가 되었을 것이다.

아울러 공한체는 1989년인 기사년(己巳年)에 지었으니 '기사자'가 되었을 것이다.

 

왜 글자체를 디자인했을까?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그 뿐일까?

현대식으로 말하면 국민윤리 교과서인《삼강행실三綱行實》반포 교서에서 그 힌트를 찾았다.

 

세종은 갑인자 주조 3개월 전에《삼강행실》의 인쇄, 반포, 가르치도록 하는 교서를 반포한다.

“모두 자기의 도리를 다하게 되어, 사람들은 의리를 알고 스스로 새롭게 하려는 뜻을 진작(振作)할 것이니, 교화(敎化)가 행하여지고 풍속이 아름다와져서 더욱 지치(至治)의 세상(유교문화권의 유토피아)에 이르게 될 것이다.” (세종 16/4/27)

 

국가 비전의 실행방법으로 삼강행실을 배포하려 하나 인쇄의 문제가 발생한다.

따라서 기존의 활자체를 보완하여 갑인자를 주조한다.

갑인자는 다음과 같은 획기적인 활자체였다.


"이전에는 겨우 두어 장만 박으면 글자가 옮겨 쏠리고 많이 비뚤어졌는데, 갑인자는 하루에 박은 바가 40여 장[紙]에 이르니, 자체(字體)가 깨끗하고 바르며, 일하기의 쉬움이 예전에 비하여 갑절이나 되었다." (세종 16/7/2)

 

세종은 드디어 갑인자 주조 4개월 후에 "《삼강행실(三綱行實)》을 종친(宗親)과 신하들에게 내려 주고, 또 여러 도(道)에 내려주었다." (세종 16/11/24)

 

세종은 왜 글자체를 디자인했을까? 

잘 디자인된 글자체는 글자에 담긴 생각이 책과 잘 소통할 수 있도록, 그리고 세상과 잘 소통할 수 있도록 돕는다. 

글을 읽는 행위는 개인과 사회를 성장시킨다. 

궁극적으로 글자 뿐 아니라, 글자체 또한 사람들을 더 나은 세상으로 이끈다. 

글자체는 사람들에게 날개를 달아준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디자이너'만이 디자이너일까? 

우리는 모두 삶을 디자인하고, 다른 이들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일을 하는 디자이너이다. 

각자 분야에서 세상을 이롭게 하는 디자인을 하자.


* 세종의 인쇄, 책을 통한 교화 노력 

(세종 5/8/2) 통감속편을 문신에게 나누어 주다

(세종 6/1/11) 대소 문신에게 주자소에서 인쇄한 《송파방》 한 부씩을 내려 주다

(세종 6/2/14) 주자소에서 인쇄한 《대학대전》 50여 벌을 문신에게 나누어 주다

(세종 7/1/17) 주자소에서 인쇄한 장자를 문신들에게 나누어 주다

(세종 9/3/23) 주자소에서 인쇄한 《당률소의》를 중외의 관원에게 나누어 주다

(세종 10/9/8)《집성소학》을 주자소에 내려 인쇄하게 하다

(세종 11/3/22)《효경》을 주자소로 하여금 인쇄하여 반포하게 하다

(세종 11/5/16)《농사직설》의 서문

(세종 13/5/11)《직지방》·《상한류서》 등의 의학서를 인쇄하여 보급하게 하다

(세종 15/1/4) 황희 등이 새로 편찬한 《경제속육전》을 올리니, 주자소에서 인쇄하기를 명하다

(세종 15/7/18) 병조에서 진법과 진도를 인쇄 반포하여 군사들로 하여금 연습하게 할 것을 아뢰다

(세종 15/10/28) 술에 대한 폐해와 훈계를 담은 내용의 글을 주자소에서 인쇄하여 반포하게 하다

(세종 16/3/5)《태산요록》을 편찬하고 인쇄하여 반포케 하다

(세종 16/6/21) 주자소에서 인행한 노걸대·박통사를 승문원·사역원에 나누어 주다

(세종 16/7/2) 지중추원사 이천에게 주자를 만들어 책을 박도록 하다

(세종 17/10/25) 중국의 서적을 각 고을에 보내다

(세종 18/1/29) 이백의 시집을 5품 이상의 관원에게 나누어 주다

(세종 18/4/4) 주자소로 하여금 역사서를 박아내게 하다

(세종 22/6/26) 주자소에 명하여 《국어》·《음의》를 펴내게 하다

(세종 26/7/1) 예조에서 병서를 베껴서 평안 함길도에 보낼 것을 아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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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심리학에 기반한 온라인 강점 검사가 있어서 소개한다.

반가운 소식, 무료다!!!

어떤 과목이던 나는 매학기 수업 중에 '자기 바라보기' 시간을 갖는데, 이때에 종종 활용하는 검사이다.

검사 방법은 아래와 같다.


1. 사이트에 들어간다. www.viacharacter.org/survey/Account/Register

2. 로그인에 사용될 몇 가지 정보를 등록한다. 때, 영어, 한국어, 중국어 등 원하는 언어를 선택할 수 있다.

3. 시키는대로 따라가 검사를 시작한다. 


4. 총 120개의 문항을 클릭하면(소요시간 7?), 자신의 24개의 강점 항목을 확인할 수 있다.

(내 강점의 제1 항목이 '감사'임에 살짝 놀랐다. 감사하기를 중요하게 여기고, 강의 시에도 무척 많이 강조하는 편이긴 하지만, 내가 이렇게도 감사에 쩔어있는 있는 사람인지는 몰랐다ㅎㅎ)

5. 검사 결과는 pdf 파일로 저장도 가능하다. 

오채원_강점_2014_StrengthsProfile-2427315.pdf


일정 금액을 지불하면 더 세부적인 검사를 할 수 있지만, 여기까지만 해도 괜찮다.

물론, 대부분의 성격유형검사들처럼 이via성격검사 또한 자신의 컨디션에 따라 검사 결과는 달라질 수 있다.

이 via성격검사는 자신의 강점 혹은 성격을 파악하기 위한 것이지만, 결과를 보면 단순한 자기 이해를 넘어, 자신의 가능성을 확인하고 자존감이 올라감을 느낄 것이다.

나는 그것에 방점을 찍고 싶다.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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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샤넬전: 장소의 정신> 전시 관람 후 떠오른 샤넬의 아이러니 :


1. 남장을 즐김으로써 여성을 주장했다.


2. 군복과 같은 남성성이 강한 아이템에서 착안하여 여성성을 표현했다.


3. 당시에 보기 드물었던 여성으로서의 성공은, 남성의 조력이 발판이 되었기에 가능했다(에티엔 발장, 보이 카펠, 드미트리 파블로비치 대공, 웨스트민스터 공작 등).


4. 여성성을 제한한 수녀복에서 착안하여 여성성을 표현했다.


5. 상복에나 사용되던 색인 블랙으로 야외복을 만들었다.


6. 비싸지 않은 장신구를 만들기 위해 인조 보석을 사용했으나, 왠만한 진품 보석보다 더 고가이다.


7. 과거에 샤넬 스타일은 당시 인식되던 여성스러움에 반한 것이었으나, 현재는 여성스러움을 대변한다.


8. 남성복의 소재로 여성성을 표현했다(남성 속옷의 소재인 저지, 사냥복의 소재인 트위드).


9. 보리이삭 등 농촌의 아이템을 도회적인 스타일로 탈바꿈시켰다.


10. 하층민 출신이 만들었으나, 상류층(그리고 상류층이 되고픈 이)의 패션이 되었다.


※ 샤넬의 교훈 :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역시 남자를 잘 만나야 팔자가 핀다ㅎㅎ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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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요즘, 세종이 어떻게 마음 챙김을 했고, 어떻게 소통을 했고, 어떻게 주변인들과 선한 영향력을 주고 받았는지에 대한 강의를 많이 합니다.

주로 실록 속에서 이야기들을 발굴하여, 교육생 분들과 소통하는 강의를 추구합니다. 

제 자신이 학창 시절에 역사, 세계사, 국사 과목을 즐기지 않았던 터라, 편안하게 스토리를 들려드리는 방식을 취하는 것이지요. 

강의 문의를 주시는 분들을 위해 안내서를 첨부합니다.


1. 세종의 셀프리더십

2. 세종의 가족 소통 이야기

3. 세종의 소통리더십


세종리더십_셀프_소통_가족_오채원연구소공감.pdf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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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양녕대군)가 주상(主上, 태종)을 모시고 식사를 하는데 예(禮)에 맞지 않는 것이 많았다. 주상께서 이를 보고 말하기를,
“내가 젊었을 적에 편안히 놀기만 하고 배우지 아니하여, 거동(擧動)이 절도가 없었다. 지금 백성의 임금이 되어서도 백성들의 바람[民望]에 합하지 못하니, 마음속에 스스로 부끄럽다. 네가 비록 나이는 적으나, 그래도 원자(元子)이다. 언어(言語) 거동(擧動)이 어찌하여 절도가 없느냐? 서연관(書筵官)이 일찍이 가르치지 않더냐?”
하니, 세자가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하였다.
(태종 5/10/21, 양녕 만 11세 때)

서연관(書筵官)에게 명하여 세자에게 학문에 힘쓰기를 경계하도록 하였다. 문학(文學) 정안지(鄭安止)·사경(司經) 조말생(趙末生)에게 이르기를,
“이제부터 서연(書筵)에 입직(入直)하는 관원은 세자가 식사하거나 움직이거나 가만 있을 때에도 좌우를 떠나지 말고, 장난을 일체 금하여 오로지 학문에만 힘쓰도록 하라. 세자가 만약 듣지 아니하거든 곧 와서 계달(啓達)하라.”
하고, 또 시관(侍官)을 불러 꾸짖었다.
“요즘 듣건대, 세자가 공부하기를 매우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니, 사실은 너희들의 소치이다. 세자가 만약 다시 공부에 힘쓰지 아니하면, 마땅히 너희들을 죄줄 것이다.”
(태종 6/4/18)

태종은 젊은 시절에 바깥으로만 나돌고, 자신의 수양은 커녕 가정 교육에도 신경 쓰지 않았나보다.

이제 정신 차리고 좋은 아버지 노릇을 하려 하나, 아이는 엄격한 아버지를 무서워하기만 한다.

요즘 말로, 아이의 교육에 필요한 것은 엄마의 정보력, 아빠의 무관심, 할아버지의 재력이라고 한다.

아이를 부인, 학교, 과외 선생님에게 맡기고, 자기 스스로를 돈 버는 기계로 전락시킨다.

그러나 가정 교육에서 선행되어야 할 것은 아빠의 보듬어줌이 아닐까?

자신이 경외하는 사람에게서 사랑을 받을 때에 아이의 자존감은 자리잡고, 세상에 맞설 용기가 생긴다.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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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사람이 말하기를, ‘부자(父子)의 사이에는 마땅히 날마다 서로 친근하여야 한다.’ 하였는데, 양녕(讓寧) 세자가 되었을 때 어전에 나아가 알현(謁見)하는데 절도가 있었으나, 그 후에 과실(過失)이 없지 아니하여서 들어가 알현하지 못하였으므로, 날로 부자 사이가 서로 멀어지고 막힌 것은 내가 친히 본 바이다. 

나는 날마다 세자(문종)와 더불어 세 차례씩 같이 식사하는데, 식사를 마친 뒤에는 대군 등에게 책상 앞에서 강론하게 하고, 나도 또한 진양대군(晉陽大君, 세조)에게 공부를 가르쳐 준다. 이것도 역시 도움되지 않는 바가 아닐 것이다. 혹 해가 기운 오후쯤에 대군 등과 더불어 후원(後園)에서 활도 쏘고 하는 것이니 -후략- 

(세종 20/11/23)


역시 정(情) 중의 정은 '밥정'이다.

밥상머리에서 마음도 나오고, 교육도 나온다.

가족이 함께 밥 먹을 시간도 없을 만큼 바쁜 현대인은 부자유친(父子有親)의 기회를 잃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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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 사고지(史庫址)에 가고 싶다!

지난달에 부근까지 갔다가 눈물 흘리고 온 그곳.


작년부터 국내의 모든 사고지 답사를 목표로 오대산, 적상산, 전주, 정족산 사고지에 다녀왔다.

물론, 실록 원본을 이제는 그곳에 보관하지 않지만, 임진왜란 등으로 소실된 건물을 근현대에 들어 복원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역사가 깃든 곳이라 나의 여행 희망지 1순위는 늘 사고지였다.

현재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성주, 마니산, 충주 사고지 그리고 북한에 있어 갈 수 없는 묘향산 사고지를 제외하면, 이제 태백산 사고지 딱 한 곳만 남은 터였다.


국내 모든 사고지 답사라는 그림을 완성하는 역사적인 날, 2014년 9월 13일.

태백산 사고지의 수호 사찰인 각화사(覺華寺)에 도착했는데, 뭔가가 이상했다.

응당 있을 태백산 사고지까지 가는 길이 어디에도 표시되어 있지 않았다.

각화사 안팎에서 두리번 거리다가 마침 지나가시는 스님 한 분께 태백산 사고지 가는 길을 여쭈었다.

종무소에 가서 총무님께 물어보라신다.

거 참 이상하다, 손가락으로 방향만이라도 가리켜줄 수 있는데 왜 다른 사람한테 물어보라시는 게지?


종무소에 갔더니 50대 후반으로 짐작되는 인상 까칠한 아자씨 한 분이 앉아 계셨다.

태백산 사고지 가는 길을 여쭈었더니 버럭하신다.

"내가 이 말만 7년째 하는 건데. 길 없어요."

"네?"

"거기 가봤자 흔적만 남아 있고, 그나마 풀이랑 나무가 무성해서 찾지도 못해."

"그래도 갈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요?" 

"길 아는 동네 사람을 대동해서, 예초기로 풀 깎아 길을 만들며 가야 하는데, 뱀도 엄청 많고 위험해."

거의 울다시피 징징거리며 알아낸 정보에 의하면, 나는 갈 수가 없단다. 

근처라도 가볼까 싶어 사고지가 있는 방향을 쳐다보니, 나무가 우거져 컴컴한 게 무섭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곳을 왜 저렇게 방치해 두었는지 화가 났다.

기사를 검색해보니, 탐방객이 증가해서 정진수행이 힘들어지고, 상수원지가 오염될 염려가 있어 한동안은 각화사에서 사고지 복원을 반대했었나 보다.

몇년이 지나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는지, 각화사 총무님은 지자체 예산 부족을 탓하셨다.

어떤 사정이든, 우리의 뿌리를 아직도 바로 세우지 못 하고 있는 것이 아쉽고 또 아쉽다.

내년 초봄에 태백산 사고지 답사를 다시 도전하려 하는데, 뜻 있는 분들이 계시다면 함께 해요~!


(요 분은 태백산 사고지 터를 멀리서나마 보고 오셨나 보다.

http://blog.naver.com/kleejh999/20064667121 )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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