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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채원연구소공감]대표 :: 세종이야기꾼 :: 실록연구자 :: 소통 디자이너 :: 010-8014-7726 :: chewonoh@gmail.com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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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안내 코너에 [안녕 아빠 - 울고 싶어도 울 틈이 없는 맏딸의 애도 일기]가 소개되었습니다.

어떤 기사를 보니, 우리나라에서는 한해에 7만종 이상의 신간이 쏟아진다고 하더군요.

그런 가운데 제 책이 이렇게 기사화되니 신기하기도 합니다 ^^;

 

(사진 : 도서출판 학고재)

▲안녕 아빠

 남편을 잃은 아내와 아버지를 잃은 자식들. 같은 자식이라도 맏딸의 입장과 아들의 태도는 또 다를 수밖에 없다. 한 사람의 부재로 세상에 남은 세 사람의 관계는 크게 달라진다.

‘안녕 아빠(학고재·1만5,000원)’는 대중 강연 전문가인 저자 오채원이 살아생전 살갑게 받들지 못한 아버지에게 뒤늦게나마 글로써 마음을 전하고 싶어서 쓴 책이다. 누구라도 초보일 수밖에 없는 부모의 장례에서 갑자기 상주가 된 젊은 자식으로서, 모쪼록 다른 이들은 당황스럽거나 멋쩍은 일을 덜 겪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저자는 임종으로 시작해 부고와 상조업체, 조문, 답례를 지나 유품 정리, 나아가 이후의 삶이라는 키워드로 글을 풀어나간다.

* 출처 : 전북도민일보

www.dom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310859

 

출간 1주일만에, 예스24의 감성/가족에세이 분야에서 베스트셀러 8위를 달리고 있습니다.

애써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

 

* 예스24 도서 구매 :

www.yes24.com/Product/Goods/92910332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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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이번에도 그럭저럭 퇴원하실 줄 알았다. 응급실에 실려 가신 게 벌써 여러 번. 몇 년 전에는 아예 병원 앞으로 이사를 했다. 젊은 날에 이미 목숨을 걸고 심장 수술을 했고 평생 동안 병치레가 잦으셨다. 그래서였을까? 언제부턴가 아빠가 입원을 하셨다는 말에도 무감각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갑자기 아빠가 떠나버리셨다. "누룽지가 먹고 싶다"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안녕 아빠 - 울고 싶어도 울 틈이 없는 맏딸의 애도 일기] 표지. 출처 : 도서출판 학고재

 

미혼의 프리랜서 맏딸, 상주가 되다

저자 오채원은 무대에서 역사 이야기를 펼쳐 보이는 공연 진행자이자, 강단에서 소통의 각양각색을 이야기하는 대중 강연 전문가다. 그럼에도 정작 아버지와는 끝까지 편안하게 교감하지 못한 채 영영 이별하고 말았다. 생각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 다. 그렇게 서글픈 마음을 달래며 아버지를 애도하는 와중에, 저자는 아이러니하게도 전혀 원치 않는 방식으로 '맏이, 딸, 비혼 여성, 지식노동자'라는 정체성을 자각했다. 관혼상제의 일처리가 으레 그러하듯, 부친상의 상주가 된 맏딸의 마음에는 상실감 말고도 또 다른 상채기가 남았다. '네 위치가 여기'임을 알려주는 민망하고 적나라한 현실에 발끈하는 마음이 일었다.
그래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가장 큰 이유는 살아생전 살갑게 받들지 못한 아버지에게 뒤늦게나마 글로써 마음을 전하고 싶어서였다. 그리고 두 번째는 세상이 확인 해준 '프리랜서 비혼 맏딸'이라는 위치에서 스스로를 단단하게 북돋워 '삶'을 야무지게 일구기 위해, 그래서 장차 맞이할 너와 나, 모두의 '죽음'을 차분하게 준비하기 위해서다.

장례에 프로가 어디 있나요 ─ 초짜 상주를 위한 장례 매뉴얼

『안녕 아빠』를 쓰기 시작한 이유가 한 가지 더 있다. 누구라도 '초보'일 수밖에 없는 부모의 장례. 갑자기 상주가 된 젊은 자식으로서, 모쪼록 다른 이들은 당황스럽거나 멋쩍은 일을 덜 겪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임종'으로 시작해 '부고'와 '상조업체’, '조문’, '답례'를 지나 '유품 정리', 나아가 '이후의 삶'이라는 키워드로 글을 풀어나간 이유다. 저자의 방식대로 가볍게 설명하자면 『안녕 아빠』는 유용한 '장례 매뉴얼'인 셈이다. 그런 만큼 상주의 입장에서도, 또 조문하고 위로하는 입장에서도
마음에 새길 만한 현실적인 이야기가 착실하게 담겨 있다.
무엇보다 두드러지는 이 책의 힘은, 솔직하고 섬세한 말로 감정을 잘 골라 가족의 죽음 이후의 일상과 변화를 기록했다는 데 있다. 남편을 잃은 아내와 아버지를 잃은 자식들. 같은 자식이라도 맏딸의 입장과 아들의 태도는 또 다를 수밖에 없다. 한 사람의 부재로 세상에 남은 세 사람의 관계는 크게 달라진다.

상갓집도 사람 사는 집 ─ '산 사람'이 할 일들

일상처럼 병을 안고 사신 아버지이기에 세상 떠난 뒤의 대비도 웬만큼은 해두셨을 줄 알았다. 그런데 웬걸, 유언은 없었고 사후 정리는커녕 당장 장례 준비도 된 게 없었다. 어느 죽음인들 황망하지 않겠느냐마는, '듬직하지 못해’ 미안한 맏딸은 온 정신 부여잡고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장례를 치른다.
마흔줄이 넘었어도 아버지를 보내드리고 뒷정리를 하는 일은 안 해본 일투성이다. 너나없이 쏟아놓는 훈수는 따갑거나 무겁기 일쑤고, 남의 경우와 내 경우가 다르니 고맙긴 해도 마땅치가 않다. 평생 주부로 살면서 완고한 아버지를 수발하다 혼자 남은 어머니, 그런 어머니와 단둘이 살면서 생활을 꾸리는 일도 조심스럽다.

건강하게 이별 하기 ─ 오늘도 여전히, 갈팡질팡 애도 중입니다

문제는 '애도’, 나의 마음이 제일 당혹스럽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고 해서 데면데면하던 마음이 갑자기 애틋해지지는 않는다. 뻣뻣하고 투박하던 관계, 정리되지 않는 원망과 미웠던 기억.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순간에 고작 "누룽지가 먹고 싶다"는 말을 남긴 것마저 생각할수록 기가 막히다. 사는 내내 아버지와 딸은 서로의 마음을 읽고 헤아리지 못했다. 미우면 밉다, 고우면 곱다 제대로 표현을 해본 기억도 별로 없다. 나쁜 아버지여서도 아니고, 못된 딸이어서도 아니다. 누군가는 잘해드리지 못한 걸 크게 후회 할 거라 했지만 아직은 잘 모르겠다. 아버지가 살아 오신다 한들 전에 없이 살가운 딸로 바뀔 리도 없지 않은가. 아버지 생전에 두 사람의 관계가 그러했듯, 그 부재를 실감하고 애도하는 데서도 딸의 마음은 갈팡질팡 엇박자다.

아버지 부재 1년, 애도 1년의 기록

가족의 모양새도 분위기도 달라졌다. 그럼에도 저자는 아버지 생전과 다를 바 없이 살고 있다. 무슨 일 있었냐는 듯 나가서 밥줄을 챙기고, 아무 일 없는 듯 일에 몰두한다. 그러나 속사정은 다르다. 아버지를 떠나보내며 겪은 문제들은 시간이 지나도 쉽사리 해결되지 않았다. 여전히 마음은 분노와 비탄 사이를 오갔다. 시원스럽게 소리 내 우는 건 아직도 어색하다. ‘다들 그렇다'기에 그런 줄로만 알고 입 꾹 다물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더는 그러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어째서 이렇게 애도가 자연스럽지 못한가. 다들 누군가를 떠나보낸 뒤에 어떻게 원통한 속을 풀어내는지, 과연 그때의 후회와 다짐을 다져 남은 이들과 잘 살아가는지 궁금해진 저자는 스스로 이렇게 묻고 답했다. "나에게도, 가족에게도 정직하지 못했다. 난 아빠에게 사랑을 갈구하는 동시에 미워했다. 나의 모든 불행이 아빠 탓이니까. 당신 자신이 가장 중요한 분이니까. (...) 이제야 알겠다. 나의 애도는 아직 시작조차 안 됐음을, 내 마음속 시계는 여전히 그날에 멈춰 있음을. 그래서 중요한 매듭을 짓지 못했음을, 아직도 아빠를 보내드리지 못했음을."
일기 쓰듯 속마음을 적어 내려 간 1년은 비로소 온전히 아버지 생각에 집중한 시간이었다. 소리 내 울 수 있었고, 세상을 떠난 아버지와 함께 할 수 있었다. 이 모든 과정이 애도임을 받아들인 지금, 이제야 아버지에게 "안녕"을 말한다.

저자 사진. 출처 : 차경

 

[저자 소개]

오채원
커뮤니케이션과 동양철학을 전공했다. ‘우리 옛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소통해왔는가’에 대한 답을 찾고자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역사 기록을 파고든 지 십 년이 훌쩍 넘었다. 그 속에서 의미 있는 메시지를 찾아 오늘의 언어와 방식으로 친절하게 풀어준다. ‘실록 읽어주는 여자’라는 별칭으로 강의를 하고 칼럼을 쓰며, 스토리텔링 콘서트 무대에서 ‘세종 이야기꾼’으로 활약하고 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로 부쩍 생각이 많아졌다. 긴 시간 대중 앞에서 ‘소통’을 주제로 이야기해왔음에도 정작 아버지와는 끝까지 편안하게 교감하지 못한 채 이별했기 때문이다. 죽음과 애도 앞에서 맏이, 딸, 비혼 여성, 지식노동자로서의 정체성을 새삼 다시 자각하며, 이제부터의 ‘삶’을 더욱 열심히 일구고 남아 있는 ‘죽음’을 준비하면서 살기로 결심했다.

 

(본 글은 도서출판 학고재의 보도자료입니다.)

 

 

[구입처]

 

http://www.yes24.com/Product/Goods/92910332?OzSrank=1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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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탑에 게재됐습니다.

('세종이야기꾼' 오채원이 오마이뉴스에 연재 중인 '실록 읽어주는 여자' 시리즈 기사입니다. 고 최숙현 선수를 애도하며 작성한 본 기사는 오마이뉴스 탑에 게재됐습니다. 기사 바로 가기: omn.kr/1oa4w )

 

경주시청 팀 관계자들이 고 최숙현 철인3종 선수에게 가한 상습적 가혹행위 사건이 연일 보도되며, 많은 이들의 공분을 사고 있습니다. 조직 차원 혹은 조직 내 권력자가 신체적·정신적 괴롭힘으로 개인의 인생을 망가뜨리는 행태는 그 뿌리가 깊은데요. 이에 조선시대에 기록된 직장 내 가혹 행위를 함께 들여다보겠습니다.

 

조선의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신속인을 괴롭히는 자는 모두 장 60대에 처한다. 
- <경국대전(經國大典)> '형전(刑典)'

 
조선의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에 의하면, '신속인(新屬人)'을 괴롭히는 자에게는 장 60대의 처벌이 내려집니다. 여기에서 신속인이란 무엇일까요? 조선시대에는 이 신속인 외에 신래(新來), 신참(新參), 신은(新恩), 신귀(新鬼) 등으로 불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표현은 다르지만 가리키는 바는 같습니다.
 

새로 과거에 합격하거나, 선비로서 처음으로 벼슬을 얻은 자를 신래라 한다. (명종실록 8년 윤3월 11일)

 
신속인·신래·신참·신은·신귀 등은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모두 '신입'에 해당합니다. 선진(先進) 곧 선배는 허참례(참여를 허락하는 의식), 면신례(신참을 면하는 의식), 면신벌례(신참을 면하려 한 턱 내는 의식) 등의 '신고식'을 거치지 않은 신입을 공동체의 일원으로 대우하지 않고, 심지어 한 자리에 함께 앉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집단 따돌림은 한 달이 지나도 해결되지 않았기에 신래는 굴복하고 신고식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신고식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참으로 고약했습니다.
 

사헌부(현재의 검찰·감사원)가 아뢰었다..."예문관(지금의 청와대 연설 비서관)의 신래가 된 자가 논밭과 주택 등 재산을 모두 팔아서 그 비용으로 쓰고 빚을 갚지 못하고 죽자, 과부가 된 그의 아내가 눈물로 일생을 보낸 경우도 있습니다." (중종실록 35년 3월 26일)
 
"시궁창의 오물을 (신래의) 얼굴에 칠하고는 당향분(현재의 명품 화장품)이라고 부르는가 하면 갓과 의복을 찢고는 더러운 물속에 밀어 넣어 뒹굴게 하여, 사람이 차마 못 볼 귀신같은 형상을 만들어 몸을 상하게 하거나 병들게 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하니, 체면을 손상함이 실로 크다." (선조수정실록 2년 9월 13일)
 
사헌부가 아뢰었다..."신래라 부르며 멋대로 학대하는데, 온몸에 진흙을 바르고 온 낯에 오물을 칠하며, 잔치를 벌이도록 독촉하여 먹고 마시기를 거리낌 없이 합니다.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의 몸을 괴롭히는 등 갖가지 추태를 부리고, 아랫사람들을 매질하는데 그 맷독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생명을 잃거나 고칠 수 없는 병에 걸리게 되는 사람이 있기도 하니 폐해가 또한 참혹합니다. 사대부들 사이에서 먼저 이런 풍습을 앞장섰기 때문에 변변치 않은 벼슬아치, 정1품에서 종9품 사이에 들어가지 않는 잡품, 군사, 노비와 같은 미천한 사람들까지도 모두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중종실록 36년 12월 10일)

 
신래가 치러야 하는 신고식은 상류층·엘리트층은 물론 하층민에게까지 일반화되어, 사회에 끼치는 폐해가 대단했습니다. 한 개인이 감당해내기 힘든 규모와 내용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여러 차례에 걸쳐 거하게 대접하라는 선배들의 요구에 응하느라, 가난한 사회 초년생과 그 가족은 빚을 끌어 쓰다 재산을 탕진하고 신세를 망치기도 합니다. 또한 오물을 뒤집어쓴 채 음담패설을 쏟아내거나 온종일 우스꽝스러운 춤을 추며 스스로의 명예를 실추시켜야 합니다.

소위 '기 꺾기'를 위해 가상적 죽음으로 몰고 가는 것입니다. 아울러 신체적 죽음도 발생했는데요. 체벌 등의 신체적 가혹 행위로 인해 병을 얻거나 폐인이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임금의 명을 전하였다. "일전 경연에서 이조판서(현재의 행정안전부 장관) 허굉이 신래를 괴롭히는 폐단을 말하기에, 금지하도록 이미 법사(사법업무 담당 관청)에 거듭 밝혔다. 오늘 경연관(임금의 독서토론 담당 관리) 강현이 또한 '신래 감찰(사헌부의 정6품 관리) 조한정이 괴롭힘을 당하다 기절하므로 떠메고 갔는데 죽었다'고 한다." (중종실록 21년 1월 24일)


위와 같이, 가혹 행위로 인해 목숨을 잃는 신래가 생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죽음의 신고식'은 '고풍(古風)', 즉 전통 혹은 관행이라는 명목으로 조선 후기까지 이어집니다.
 

우의정(현재의 총리와 유사) 이행이 아뢰었다..."신래를 괴롭히는 일을 잠시도 중지하지 않는데, 고풍이라고는 하나 폐단이 적지 않습니다. 사관(역사를 기록하는 관리)은 청현직(학식·청렴·문벌·지위를 갖춘 엘리트코스)이어서 학부형들이 모두 바라는 바이지만, 피하려는 것은 잔치 비용을 마련하기 어려워서입니다." (중종실록 24년 11월 5일)
 
사헌부가 아뢰었다..."신래를 닦달하는 일이 고풍이라고는 하지만, 예전에는 없던 일로 더욱 가중되고 있습니다." (중종실록 35년 3월 26일)

 
요직으로 가는 길목일수록 신고식의 강도가 더욱 높기 때문에 이를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은 임명되기를 피하기도 합니다. 신고식 때문에 뛰어난 인재도 사장되는 현상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정권마다 가혹한 신고식에 대해 엄한 단속을 천명하고 적발되면 처벌했지만 고풍이라는 이름으로 단절되기는커녕 점점 더 심해집니다. 심지어 임금의 의지에 반발하며 신고식을 옹호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대사간(언론기관의 수장) 최숙생..."새로 급제한 사람이 분관(인턴을 배치하여 실무를 익히게 함)되면 반드시 허참례와 면신례를 해야 하는데, 정응은 이 의식을 행하지 않고서 갑자기 홍문관 정자(임금 자문 기관의 정9품 관직)로 임명되었으니 곤란합니다." (중종실록 9년 11월 15일)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임금에게도 행실을 고치라 촉구하며 고위관리를 고발하는 등 시대의 걸림돌을 따지고 개혁을 이끌어야 할 언론기관의 수장이 신고식을 거치지 않은 자의 임명을 두고 부당하다며 문제제기합니다. 악습이 만연한 세태를 반영하는 한 사례이지요. 이들은 새로운 진입자를 상대로 기득권을 누리거나 방어하기 위해 신고식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일종의 진입장벽이었던 셈입니다.
 

사헌부가 아뢰었다..."훈련원 참군(사관학교의 정7품 군직) 이종은 모든 신래가 면신례를 할 때면 직접 그 집에 가서 '내가 최근에 임기 만료로 이직하게 되었는데, 그러면 감찰(사헌부의 정6품 관직)이 될 것이다. 내 면신에 쓸 물품을 미리 비축하여 두고자 한다. 그대는 반드시 면신에 쓸 물품을 많이 준비했을 테니, 나에게 나눠준다면 그대의 면신례도 쉽게 하도록 하겠다' 라고 하는데, 신래들이 거의 다 두려워하여 나눠줍니다." (중종실록 33년 8월 17일)
 
사헌부가 아뢰었다..."회자(밤에 허름한 차림으로 선배들을 찾아다님)할 때 목면(화폐로 쓰는 무명)을 가지고 가서 선배의 종에게 뇌물로 준 뒤에야 비로소 명함을 들일 수 있음은 물론, 회자하는 기간이 50일이나 되어 그 폐단이 적지 않습니다. 그리고 연회까지도 전부 신래에게 마련하여 베풀게 하는데 하루에 3∼4군데에 나누어 베풀기도 합니다. 선배들은 기생을 끼고 앉아 후한 뇌물을 요구하다가 조금이라도 마음에 차지 않으면 신래의 종을 때려서 간혹 죽이기까지도 합니다." (중종실록 35년 3월 26일)

 
선배가 '업무상 위계' 곧 상대적으로 우위인 지위를 무기로 신입을 협박하며 '삥 뜯기'를 합니다. 이처럼 신고식을 명분 삼아 후배에게 뇌물을 받거나 금품을 갈취합니다. 한 조직에 속해 매일 얼굴을 보는 이들에게 지속적으로 '왕따'를 당할 생각에 아득해진 신래는 선배의 요구에 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선배는 또 어딘가로 자리를 옮기며 새로운 부서의 신래가 되고, 따라서 호된 신고식을 치러야 할 것입니다. 곧 닥쳐올 자신의 신고식과 상납에 대비하기 위해 그는 후배에게 돈을 뜯어냅니다.

이 구조를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신래는 선배의 추천을 받아 승진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자신이 당한 것처럼 신래에게 뇌물을 받거나 금품을 갈취하겠지요. 이렇게 먹고 먹히는 관계는 끝없이 이어집니다.

여기에서 작동하는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사고방식은 나쁜 공생의 생태계를 만듭니다. 이것이야말로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현상일 테지요. 이를 거부하는 사람은 한 집단의 일원이 되지 못할 뿐더러,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도 동참하기 힘듭니다.
 

율곡이 처음 급제했을 때 승문원(외교문서를 담당하는 관청)에서 선배에게 공손하지 않다 하여 파직되었다. 퇴계가 이 소식을 듣고, "신래를 희롱함은 과연 무리한 일이다. 그러나 이미 그런 줄을 알고 그 길로 들어갔으니, 이군(율곡)인들 어찌 홀로 모면할 수가 있겠는가?"...퇴계가 손자 이안도에게 보낸 편지에서 "선배가 시키는 장난을 좇지 않을 수는 없으니 잠깐 하는 척하여 그 나무람만 모면할 뿐, 너무 난잡하고 부끄럼 모르는 행동을 하여 광대와 같이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 하였다...진실로 제거할 것은 제거함이 옳은 일인데, 지금까지 그렇지 못함은 힘이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호사설(星湖僿說)> 제15권 '인사문(人事門)')

 
조선 후기에 이익이 쓴 책 <성호사설>에 의하면, 이율곡은 신고식에서 선배에게 잘못 보인 탓에 직장에서 쫓겨났습니다. 장원만 아홉 번 차지했던 수재 중의 수재도 신고식의 문턱을 넘기 힘들었던 모양입니다.

이퇴계는 손자에게 선배들이 시키는 대로 적당히 따르는 척 하라고 당부합니다. 유력한 가문의 일원도 예외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개인의 힘으로는 이 부조리를 당해낼 수 없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기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신입에 대한 집단적 학대는 조선시대에만 통용된 행태가 아닙니다. 인류학에서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관찰된다고 보는데요. 우리 역사에서의 기록은 고려로 거슬러 갑니다.
 

 

신우(우왕) 13년 3월에 윤취가 시험을 주관하였는데, 시험에 임한 자는 모두 권문세가의 젖비린내 나는 아이들이었다. 그때 사람들이 이들을 추하게 여기며 분홍방이라 불렀다. 아이들이 분홍 옷 입기를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고려사(高麗史)> 권74)
 
이이가 아뢰었다..."고려 말에 과거 제도가 공정하지 못하여, 급제한 자들은 입에서 젖비린내가 나는 귀한 집 자제들이었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그를 지목하여 '분홍방(粉紅榜, 분홍색 저고리를 입은 어린애)'이라고 하였는데, 세상 사람들의 마음이 격분하여 모욕을 주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선조수정실록 2년 9월 1일)
 
옛날에 신래를 제압한 것은 호방한 선비의 기세를 꺾고, 엄격하게 위아래를 구분하여 그들로 하여금 규칙을 지키게 하기 위함이었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용재총화(慵齋叢話)')

 
면신례 등의 신고식은 고려 문벌귀족 사회의 '금수저' 내지 '낙하산 인사'에 대한 당대의 저항 의식이 반영된 것이었습니다. 인류학에서 이해하는 바와 같이, 개인의 사회화를 위한 학습의 일환이기도 했고요. 그러나 이러한 통과의례가 '정신 무장' 혹은 '기강 잡기'를 가장한 기득권자의 괴롭힘으로 변질되며 사회의 폐단이 되었습니다.

 

신입 관리 정양신(鄭暘臣)에 대한 면신례 문서. 오른쪽에 ‘신귀 신양정’, 즉 신입 정양신의 이름이 거꾸로 적혀 있고, 왼쪽에 다섯 개의 수결 곧 서명이 있다.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보도에 의하면, 고 최숙현 철인3종 선수는 경주시청팀의 감독·팀닥터(라 불린 운동처방사)·선배들로부터 약 2년간 거의 매일 폭언·폭행·갈취 등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가해자들이 동료 선수들과 차단시켜, 최 선수는 철저히 고립되었습니다.

그들의 가혹 행위는 제 나름의 핑계가 있었습니다. 최 선수는 프로답게 우수한 성적을 내야 하고, 체중을 관리해야 하며, 강한 정신력을 지녀야 하고, 훈련에 따르는 비용을 지불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생활인으로서 운동선수로서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이러한 부당함과 부조리를 홀로 감당해냈습니다.

그러던 끝에 최 선수 측은 지난 2월부터 6월까지, 국가인권위원회·경주시·대한체육회 스포츠인권센터·대한철인3종협회 등 외부에 최소 6회의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이들 중 어느 곳도 조치를 취하기는커녕 방관한 것으로 보입니다.

선수 생명을 담보로 한 민원·진정·고소 등이 무시되자, 최소한의 희망조차 잃은 최 선수는 물리적 생명을 스스로 내려놓았습니다.
 
해당 사건의 근본적 원인은 소수의 폭행자 개개인의 일탈을 넘어서, 조직원의 생존을 볼모로 잡은 '갑질 사회'에도 있습니다. 따라서 당국은 가해자들을 일벌백계하고, 피해자를 구조·예방하는 법적·사회적 장치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도록 점검해야 하며, 갑질 문화를 타파하기 위한 체계적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이에 대해 우리는 연대하여 분노하고 감시해야 하고요.

이번에는 최 선수였지만, 다음에는 또 누가 집단적 가혹 행위의 피해자가 될지 모릅니다. 최 선수가 겪은 사건은 단지 성적제일주의가 만연한 체육계만의 문제가 아니니까요.

우리는 이번에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고려·조선에서도 개인에 대한 '직장 내 갑질'이 얼마나 가혹했는지 똑똑히 보았습니다. 야만적 폭력은 일시적으로 움츠리는 듯 보이다가도 이렇게 대물림되는 법입니다.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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