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오채원연구소공감]대표 :: 세종이야기꾼 :: 실록연구자 :: 소통 디자이너 :: 010-8014-7726 :: chewonoh@gmail.com 오채원

카테고리

분류 전체보기 (228)
오채원연구소공감 (60)
방송 (18)
실록공감 - 나와 세종을 실록實錄하다 (51)
세종 유통분流通分 (14)
소통 강의노트 (12)
전문강사 포럼 (7)
삶.사람.생각 (20)
실록 읽어주는 여자 (16)
문화 공감 (28)
Total
Today
Yesterday
세자(양녕대군)가 주상(主上, 태종)을 모시고 식사를 하는데 예(禮)에 맞지 않는 것이 많았다. 주상께서 이를 보고 말하기를,
“내가 젊었을 적에 편안히 놀기만 하고 배우지 아니하여, 거동(擧動)이 절도가 없었다. 지금 백성의 임금이 되어서도 백성들의 바람[民望]에 합하지 못하니, 마음속에 스스로 부끄럽다. 네가 비록 나이는 적으나, 그래도 원자(元子)이다. 언어(言語) 거동(擧動)이 어찌하여 절도가 없느냐? 서연관(書筵官)이 일찍이 가르치지 않더냐?”
하니, 세자가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하였다.
(태종 5/10/21, 양녕 만 11세 때)

서연관(書筵官)에게 명하여 세자에게 학문에 힘쓰기를 경계하도록 하였다. 문학(文學) 정안지(鄭安止)·사경(司經) 조말생(趙末生)에게 이르기를,
“이제부터 서연(書筵)에 입직(入直)하는 관원은 세자가 식사하거나 움직이거나 가만 있을 때에도 좌우를 떠나지 말고, 장난을 일체 금하여 오로지 학문에만 힘쓰도록 하라. 세자가 만약 듣지 아니하거든 곧 와서 계달(啓達)하라.”
하고, 또 시관(侍官)을 불러 꾸짖었다.
“요즘 듣건대, 세자가 공부하기를 매우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니, 사실은 너희들의 소치이다. 세자가 만약 다시 공부에 힘쓰지 아니하면, 마땅히 너희들을 죄줄 것이다.”
(태종 6/4/18)

태종은 젊은 시절에 바깥으로만 나돌고, 자신의 수양은 커녕 가정 교육에도 신경 쓰지 않았나보다.

이제 정신 차리고 좋은 아버지 노릇을 하려 하나, 아이는 엄격한 아버지를 무서워하기만 한다.

요즘 말로, 아이의 교육에 필요한 것은 엄마의 정보력, 아빠의 무관심, 할아버지의 재력이라고 한다.

아이를 부인, 학교, 과외 선생님에게 맡기고, 자기 스스로를 돈 버는 기계로 전락시킨다.

그러나 가정 교육에서 선행되어야 할 것은 아빠의 보듬어줌이 아닐까?

자신이 경외하는 사람에게서 사랑을 받을 때에 아이의 자존감은 자리잡고, 세상에 맞설 용기가 생긴다.

Posted by 오채원
, |

옛 사람이 말하기를, ‘부자(父子)의 사이에는 마땅히 날마다 서로 친근하여야 한다.’ 하였는데, 양녕(讓寧) 세자가 되었을 때 어전에 나아가 알현(謁見)하는데 절도가 있었으나, 그 후에 과실(過失)이 없지 아니하여서 들어가 알현하지 못하였으므로, 날로 부자 사이가 서로 멀어지고 막힌 것은 내가 친히 본 바이다. 

나는 날마다 세자(문종)와 더불어 세 차례씩 같이 식사하는데, 식사를 마친 뒤에는 대군 등에게 책상 앞에서 강론하게 하고, 나도 또한 진양대군(晉陽大君, 세조)에게 공부를 가르쳐 준다. 이것도 역시 도움되지 않는 바가 아닐 것이다. 혹 해가 기운 오후쯤에 대군 등과 더불어 후원(後園)에서 활도 쏘고 하는 것이니 -후략- 

(세종 20/11/23)


역시 정(情) 중의 정은 '밥정'이다.

밥상머리에서 마음도 나오고, 교육도 나온다.

가족이 함께 밥 먹을 시간도 없을 만큼 바쁜 현대인은 부자유친(父子有親)의 기회를 잃고 있는 셈이다.

Posted by 오채원
, |

태백산 사고지(史庫址)에 가고 싶다!

지난달에 부근까지 갔다가 눈물 흘리고 온 그곳.


작년부터 국내의 모든 사고지 답사를 목표로 오대산, 적상산, 전주, 정족산 사고지에 다녀왔다.

물론, 실록 원본을 이제는 그곳에 보관하지 않지만, 임진왜란 등으로 소실된 건물을 근현대에 들어 복원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역사가 깃든 곳이라 나의 여행 희망지 1순위는 늘 사고지였다.

현재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성주, 마니산, 충주 사고지 그리고 북한에 있어 갈 수 없는 묘향산 사고지를 제외하면, 이제 태백산 사고지 딱 한 곳만 남은 터였다.


국내 모든 사고지 답사라는 그림을 완성하는 역사적인 날, 2014년 9월 13일.

태백산 사고지의 수호 사찰인 각화사(覺華寺)에 도착했는데, 뭔가가 이상했다.

응당 있을 태백산 사고지까지 가는 길이 어디에도 표시되어 있지 않았다.

각화사 안팎에서 두리번 거리다가 마침 지나가시는 스님 한 분께 태백산 사고지 가는 길을 여쭈었다.

종무소에 가서 총무님께 물어보라신다.

거 참 이상하다, 손가락으로 방향만이라도 가리켜줄 수 있는데 왜 다른 사람한테 물어보라시는 게지?


종무소에 갔더니 50대 후반으로 짐작되는 인상 까칠한 아자씨 한 분이 앉아 계셨다.

태백산 사고지 가는 길을 여쭈었더니 버럭하신다.

"내가 이 말만 7년째 하는 건데. 길 없어요."

"네?"

"거기 가봤자 흔적만 남아 있고, 그나마 풀이랑 나무가 무성해서 찾지도 못해."

"그래도 갈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요?" 

"길 아는 동네 사람을 대동해서, 예초기로 풀 깎아 길을 만들며 가야 하는데, 뱀도 엄청 많고 위험해."

거의 울다시피 징징거리며 알아낸 정보에 의하면, 나는 갈 수가 없단다. 

근처라도 가볼까 싶어 사고지가 있는 방향을 쳐다보니, 나무가 우거져 컴컴한 게 무섭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곳을 왜 저렇게 방치해 두었는지 화가 났다.

기사를 검색해보니, 탐방객이 증가해서 정진수행이 힘들어지고, 상수원지가 오염될 염려가 있어 한동안은 각화사에서 사고지 복원을 반대했었나 보다.

몇년이 지나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는지, 각화사 총무님은 지자체 예산 부족을 탓하셨다.

어떤 사정이든, 우리의 뿌리를 아직도 바로 세우지 못 하고 있는 것이 아쉽고 또 아쉽다.

내년 초봄에 태백산 사고지 답사를 다시 도전하려 하는데, 뜻 있는 분들이 계시다면 함께 해요~!


(요 분은 태백산 사고지 터를 멀리서나마 보고 오셨나 보다.

http://blog.naver.com/kleejh999/20064667121 )

Posted by 오채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