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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채원연구소공감]대표 :: 세종이야기꾼 :: 실록연구자 :: 소통 디자이너 :: 010-8014-7726 :: chewonoh@gmail.com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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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세종이야기꾼 오채원의 '실록 읽어주는 여자' 연재 기사로, 오마이뉴스 메인에 게재되었습니다. 기사 바로 가기 : omn.kr/1nwws)

 

 

“내가 전에는 더위를 무서워하지 않았으나, 몇 년 전부터는 더위를 타기 시작했다. 이때 물에 손을 넣으면 더위가 저절로 풀린다. 이로 미루어 생각하건대, 죄수가 감옥에 있으면, 더위 먹기 쉬워서 어떤 이는 사망에 이르기도 하니, 참으로 마음이 아프다. 더운 때가 되거든 동이에 물을 담아 감옥 안에 두고 자주 물을 갈고, 죄수로 하여금 손을 씻게 한다든지 하여, 더위 먹지 않게 하는 것이 어떠한가? 예전에 이러한 법이 있었는지 검토하여 아뢰라.”

(세종실록 30년 7월 2일)

 

때는 바야흐로 세종이 52세 되던 해입니다. 실록에는 날짜가 음력으로 기록되어 있으니, 양력으로 환산하면 8월 초 즈음이 되겠지요. 열대야로 밤잠을 설치기 일쑤에, 불쾌지수가 높은 시기입니다. 이 한 여름에 세종은 ‘더위 무서운 줄 모르고 살던 나도 나이를 먹으니 더위를 탄다’고 토로합니다. 아마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과 같은 건강 상태에서도 훈민정음 창제와 그 후속 작업들에 매진하며 체력이 고갈된 탓인 듯합니다. 게다가 코로나19 의료진의 레벨D 방호복만큼은 아니어도, 긴팔 옷을 여러 겹 껴입어 통기성이 떨어지는 복식도 한몫했을 것입니다.

 

참으로 소박하게도 그는 더위 탈출 비법으로 얼음 깨먹기도 뱃놀이도 냉수마찰도 아닌, 물에 손 담그기가 최고라고 추천합니다. 이마저도 혼자 즐기기 미안했는지, 열악한 환경에 있는 사람들을 떠올립니다. 수감자 그러니까 사회 취약 계층에 해당되며, 고통을 호소해도 들어줄 데가 없는 이들입니다.

 

세종은 입으로만 안타까워하지 않습니다. 교도소 안에 물동이를 두고 자주 물을 갈아주어, 손을 씻게 하자고 건의합니다. 죄수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만한 인권·복지 차원의 개선안 혹은 해결책을 제안한 후, 이것이 일시적 시혜가 아니라 정책으로서 상시 운영되도록 법제화하고자 합니다. 이를 위해, 참조할 과거 사례가 있는지 검토하도록 전문연구기관인 집현전에 명을 내립니다.

 

(형사 행정에 대한 풍속화를 엮은 《형정도첩刑政圖帖》 중에서 감옥 내부를 그린 그림.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약 한 달의 검토 기간을 갖고, 현재의 시·도지사에 해당하는 전국의 감사들에게 명을 내립니다. 다음과 같이, 그 내용이 무척 구체적입니다.

 

1. 매년 (음력) 4월부터 8월까지는 감옥 안에 새로 냉수를 길어다가 자주자주 바꿔 놓을 것.

2. 5월에서 7월까지는 희망자에 한해서 열흘에 한 번씩 목욕하게 할 것.

3. 매월 한 차례 희망자에게 머리를 감게 할 것.

4. 10월부터 1월까지는 감옥 안에 짚을 두텁게 깔아 보온에 신경 쓸 것.

5. 목욕할 때에는 관리와 옥졸(간수)이 직접 점검하고 살펴서 도주를 막을 것.

 

유교의 기본 경전인 『대학大學』에 ‘혈구지도絜矩之道’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絜’은 ‘재다’라는 뜻이며, ‘矩’는 ‘곱자’ 곧 ‘ㄱ자 모양의 자’를 가리킵니다. 혈구지도를 직역하자면, 곱자로 무엇인가의 길이를 재는 방법이겠지요. 내 마음 속의 자로 다른 이의 마음을 재는 것, 즉 내 처지를 미루어서 남의 처지를 가늠하는 행위를 뜻합니다. 세종은 품속의 자를 수시로 꺼내서, 어려운 환경에 있는 이들의 마음을 헤아렸던 것 같습니다. 한쪽 눈이 실명에 가까운 상태에, 만사가 귀찮은 더위 속에서도 말이지요.

 

(근무 교대 후 냉수로 더위를 식히는 선별진료소의 의료진. 출처 : 뉴시스, 2020-06-08.)

6월 초순인데도 낮에는 최고 체감 온도가 30도를 넘는 한 여름 날씨를 보입니다. 급기야 지난 9일에는 기상청에서 서울에 폭염주의보를 발효하고, 강릉·양양에는 열대야가 찾아왔습니다.

 

이날 인천의 한 워크스루Walk through 선별진료소에서 방호복을 입고 근무하던 간호사 세 명이 탈진해 병원으로 옮겨졌습니다. 방호복은 통기성이 낮은데다, 습기에 약해서 의료진은 더위에도 불구하고 얼음조끼조차 입을 수 없다고 합니다. 6월 11일자 YTN의 보도에 의하면, 레벨D 방호복의 내부 온도를 측정했더니, 평균 체온보다 높은 37.6도로, ‘1인용 사우나’ 안에 있는 것과 같은 지경입니다.

코로나19가 수도권을 중심으로 확산 일로에 있습니다. 5개월간 고강도 근무를 이어온 의료진이 더위로 고생하는 기간이 더 늘어나지 않도록, 우리 개인은 위생에 주의해야겠습니다. 물론 마스크 착용은 더위를 가중시키지만, ‘1인용 사우나’를 입고 근무하는 분들을 떠올려야겠지요.

 

더위로 고통 받는 이들이 또 있습니다. 취약계층 어르신들입니다. 예년에는 동주민센터·복지관·경로당 등을 활용해 무더위 쉼터를 운영했으나, 올해는 코로나19로 인해 대부분 휴관 내지 폐쇄된 상황입니다. 대부분 어쩔 수 없이 거리로 공원으로 지하철로 나서는 형편입니다.

이에 대해 국가와 지자체에서는 대안을 제시해주길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개개인도 곤궁한 처지에 있는 이웃들에게 ‘시원한 온정’을 보내면 어떨는지요? 품속의 큰 자를 꺼내서, 나의 고통을 미루어 남을 배려하는 세종의 마음을 떠올려주시면 좋겠습니다.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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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사가 메인에 게재된 2020.06.09. 오마이뉴스 대문)

(본 기사는 '세종이야기꾼' 오채원이 매주 오마이뉴스에 연재하는 '실록 읽어주는 여자' 시리즈 중 일부입니다. 기사 바로 가기 : omn.kr/1nv6c)

 

(양녕대군의 부모인 태종과 원경왕후의 능인 헌릉의 전경. 출처 : 문화재청)  

임금이 항상 세자를 올바른 도리로 가르쳤으나, 세자는 주색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임금의 가르침과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갑사甲士(군인)를 시켜서 문을 지켜, 허용되지 않은 사람들의 출입을 막았다. (태종실록 16년 9월 24일)

 

태종은 평화로운 정권 교체를 꿈꿨습니다. 피의 역사는 자신의 세대에서 끝내고, 가문과 나라가 그 누구의 손에도 흔들리지 않도록, 정통성 있는 인물을 세워 반듯하게 키워내자 마음먹었을 테지요. 장자 계승의 원칙에 부합하는 양녕대군을 정성들여 훈육합니다. 그러나 이 아이는 공부를 멀리하고, ‘나쁜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왕세자에게 걸맞지 않는 행동을 하기 일쑤입니다. 양녕의 주변인들은 이를 방관하거나 협조합니다. 그저 두고만 볼 수 없는 학부모 태종은 아들의 인간관계마저 관리하게 됩니다. 15년간 세자의 자리에 있으며 태종의 후계자로서 위치를 공고히 다져가는 듯 보였던 양녕이지만, 결국 그는 왕이 되지 못합니다. 이처럼 양녕이 점점 퇴락해가는 과정을 학부모의 관점에서 살펴보겠습니다.

 

태종이 처음부터 양녕에게 기대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기본기가 갖춰져 있으니 교육을 잘 시키면, 자신의 뒤를 이어 한 나라의 최고지도자가 될 자질이 충분하다고 보았습니다.

 

“세자가 어려서부터 체구가 당당하여 장차 학문이 무르익으면 국가를 맡길 만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항상 가르치고 인도하는 법에 힘썼다.” (태종실록 18년 3월 6일)

 

앞서 「아들아, 모든 업보는 내가 지고 저세상으로 가마」 기사(본지 2020-05-12)에서 살펴보았듯이, 양녕은 태종이 무릎에서 내려놓을 사이 없이 애지중지 키운 맏아들이었습니다. 하지만 태종은 조선 건국에 이어 1·2차 왕자의 난, 조사의의 난 등 굵직한 역사적 사건들을 10년 안에 겪습니다. 자녀의 유년기에 태종은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정치적 도박을 해야 했던 것입니다. 격동의 시간을 보내며, 자연히 가정에 소홀해지기 쉬웠을 것입니다. 바깥일 한답시고 정작 가까운 이들을 챙기지 못한 미안함과 아쉬움이 컸을 것으로 보입니다.

 

아들이 자신보다 더 뛰어난 군주가 되기를 바란 태종

 

“예전에 이름나기 전에는 집안의 재물이 넉넉한지 여부도 모르고, 오직 말에 올라 세상을 변혁하는 일에만 열중하였다.” (태종실록 9년 1월 6일)

 

태종이 젊어서 세상을 구하려는 뜻이 있어서, 유교 경전과 역사책에 마음을 두고 재산 불리기에 힘쓰지 않았다. (태종실록 18년 11월 8일)

 

세자가 주상을 모시고 식사를 하는데 예법에 맞지 않는 것이 많았다. 주상께서 이를 보고 말했다. “내가 젊었을 적에 여러 곳을 떠돌아다니다보니 배우지 못하여, 행동거지에 절도가 없다. 이제 임금이 되어서도 백성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니, 자괴감이 든다.” (태종실록 5년 10월 21일)

 

자식은 자신보다 낫길 바라는 부모의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겠지요. 태종은 자신에게 주어졌던 것보다 나은 교육 환경을 아들에게 제공하여, 자신보다 더 뛰어난 군주가 되기를 바란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양녕의 학습 태도는 그다지 좋지 않습니다.

 

“내가 세자에게 이와 같이 (엄격하게) 하는 것은 국가의 오랜 번영[萬世]을 위한 계획에 의한 것이다......내가 세자에게 마치 새끼를 키우는 호랑이와 같이 엄하게 하고자 하였다.” (태종실록 18년 5월 10일)

 

임금이 세자에게 글을 외도록 명하니, 세자가 외지 못하였다. 임금이 (세자를 보필하는) 환관에게 종아리를 때리고 명을 내렸다. “나중에도 이와 같으면 마땅히 서연관書筵官(세자의 선생님들)에게 벌을 주겠다.” 문학文學(세자시강원의 정5품 관직) 허조를 시켜 이 말로써 세자에게 경고했다. 세자가 밤에 참군參軍(정7품의 군인) 심보와 더불어 글을 읽고자 하였다. (태종실록 5년 9월 14일)

 

임금이 세자로 하여금 읽은 글을 외게 한다고 하니, 세자가 이를 듣고 밤을 새워 글을 읽었다. (태종실록 5년 10월 21일)

 

“이제부터 서연書筵(세자를 교육하는 자리)에 당직을 서는 관원은 세자가 식사하거나 움직이거나 가만히 있을 때에도 옆을 떠나지 말고, 장난을 일체 금하며 오로지 학문에만 힘쓰도록 하라. 세자가 말을 듣지 아니하거든 바로 와서 보고하라.” (태종실록 6년 4월 18일)

 

임금이 지신사知申事(비서실장) 조말생에게 일렀다. “예전에 세자의 일로 사람들이 많이 감옥에 갇히고 어떤 이는 사형 당한 것을 내가 마음으로 지금까지 편치 못하게 여기고 있다.” (태종실록 17년 4월 16일)

 

훈육의 파장이 집안을 넘어 국가로

 

성리학을 확립시킨 주희朱熹가 『맹자집주孟子集注』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부모와 자식이 이어가는 것이 ‘일세一世(한 세대)’이며 통상 30년입니다. 그렇다면 ‘만세萬世’는 30만 년이 됩니다. 만세 곧 30만년 이어지는 국가를 꿈꾼 태종이기에 후계자를 엄격하게 훈육합니다. 시험을 보겠다고 하거나, 학습 결과가 좋지 않으면 선생님을 벌주겠다고 경고하는 초강수를 두니, 양녕은 그제야 공부를 합니다. 그러나 효과는 그때뿐입니다. 세자의 태만과 비행으로 인해 주변인들이 곤욕을 치르다, 감옥에 가거나 목숨을 잃는 이가 발생하기에 이릅니다. 아이 훈육의 파장이 한 집안을 넘어 국가의 범위로 확대됩니다.

 

자녀의 교육을 위해서는 조부모의 재력, 엄마의 정보력, 아빠의 무관심이 필수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습니다. 자녀 교육에서 아버지의 역할은 배제된 한국적 현실에 대한 풍자일 테지요. 이와 달리 태종은 적극적으로 관여합니다. 특히 임기 후반기로 가며 양녕을 국정에 참여시킵니다. 지금 식으로 보자면 OJT(On the Job Training, 입사 후 직무를 수행하며 교육을 받음) 혹은 인턴십에 해당할 것입니다.

 

임금에게 공무를 보고하는 자리에 세자가 참여하도록 명하였다. (태종실록 16년 5월 20일)

 

“군권과 인사권만 내가 행사하고, 모든 지휘·명령하여 시행하는 일은 세자와 함께 의논하라.” (태종실록 16년 5월 24일)

 

학습에 대한 동기부여에서 중요한 것은 시야 확보입니다. 학습자·교수자·학부모가 동의하여 구체적 목표를 설정한 후, 그에 도달하면 학습자가 어떠한 이득을 얻게 될지 그려주어야 합니다. ‘깜깜이 공부’ 혹은 ‘닥치고 공부’가 아니라, 학습자에게 효능감이나 성취감을 맛보게 해야 합니다. 살아 있는 정치를 직·간접으로 만나게 하고 그에 따른 책임을 부여하면, 양녕의 학습 의욕이 고취되리라 태종은 기대한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국정 운영의 장에 앉히고 의사결정권을 일부 공유합니다.

또한 태종은 양녕을 명나라에 보내, ‘국가대표’로서의 무게를 체감하게 하고, 견문을 넓히도록 합니다. 양녕의 나이 15세 때의 일입니다.

 

세자 이제李禔를 보내 명나라의 서울에 갔으니, 새해맞이를 축하하기 위함이었다......임금이 예복을 갖추고 표전表箋(황제에게 전하는 서한)에 절하고 나서, 장의문(현재의 창의문)으로 나가 세자를 영서역(지금의 서울 은평구) 동쪽에서 전송하고, 세자에게 말하였다. “길이 험하고 머니, 마땅히 스스로를 돌보아야 하느니라. 왕세자이기에 너의 책임이 무겁다. 오늘의 일은 나라와 백성을 위한 계책이니라.” 세자가 울면서 작별 인사를 하니, 임금도 눈물을 뚝뚝 흘리고, 주위에서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태종실록 7년 9월 25일)

 

태종은 왕자 시절인 태조 3년에 사신의 자격으로 명나라에 다녀옵니다. 이때 황제에게 극진한 대접을 받고, 명나라 지식인들로부터 세자 이방석을 젖히고 ‘조선의 세자’로 불리는 등 정치적 동력을 확보합니다. 이러한 자신의 성공 경험을 태종은 아들에게 전해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역시나 양녕은 명 황제의 환대를 받고 옵니다. 그 후부터 명 사신이 오면 ‘전담 마크’하게 하며, 양녕이 임금이 된다면 맞닥뜨릴 외교적 공간을 선제적으로 열어줍니다.

 

자유인의 피가 흐르는 아들이 궁궐에 갇혀 지내 안쓰러워

 

(선조 31년에 편찬한 군사훈련에 관한 책 『무예제보武藝諸譜』.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조선시대에는 대체로 봄과 가을에 임금이 직접 참여하는 군사훈련인 강무講武를 실시했습니다. 『입시 교육의 실패자, 양녕대군』 편(본지, 2020-05-22)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양녕은 사냥 및 유사 놀이에 관심이 많았기에, 보다 규모가 크고 역동적인 강무에 따라가기를 고집합니다. 그때마다 세자는 궁궐에 남아 공부에 힘써야 한다는 신하들의 반발을 사기일쑤입니다.

 

“예로부터 임금이 굳세고 과감하면 아랫사람을 통솔할 수 있고, 성격이 부드럽고 나약하면 실패하는 경우가 많았다. 대체로 활쏘기와 말달리기는 굳세고 과감한 기상을 키우는 것이다. 지금 세자로 하여금 무예를 익히게 하는 것이 도리 상 어떠하겠는가?” (태종실록 9년 3월 16일)

 

태종은 임금에 걸맞은 진취적이며 강력한 리더십을 키울 수 있다고 주장하며, 양녕이 무예를 익히도록 하고 강무에도 동행하도록 합니다. 군사력 통제를 바탕으로 하여 강력한 왕권을 발휘한 자신의 경험이 반영된 생각일 것입니다. 또한 자신을 닮아 자유인의 피가 흐르는 아들이 궁궐에 갇혀 지내는 모양이 안쓰러웠겠지요.

 

(임금이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동교東郊(동대문 밖)에서 매사냥하는 것을 구경하였다. 이날 새벽에 임금이 밖으로 나가려고 하니, 사간원(언론기관)의 좌사간 대부左司諫大夫 송우가 아뢰었다. “지난번에 신들이 아뢴 바를 따르시어 가벼이 외출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는데, 오늘 자못 신용을 잃었습니다.” 임금이 말하였다. “내가 멋대로 놀려는 것이 아니다. 궁궐 안에만 오래 있으니, 기력이 좋지 않아서 잠깐 성 밖에 나가고자 하는 것이다.” (태종실록 6년 3월 13일)

 

궁궐 안에만 있으려니 컨디션이 좋지 않다며, 여러 차례 몰래 밖으로 나간 전적이 있는 태종입니다. 이런 자신을 닮은 아들의 마음을 그는 알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강무를 비롯한 바깥나들이에 자신을 데려가라고 떼쓰는 아들 앞에서 번번이 마음이 약해집니다.

 

서연관(세자의 선생님)을 불러 “세자는 나라의 근본이므로 사냥하는 데에 따라갈 수 없으니, 서울에 남아 내 직무를 대행하라.” 라고 하였으나, 결국은 따라갔다. (태종실록 12년 2월 19일)

 

임금이 (황해도) 해주로 행차하고자 평주 온천에서 목욕한다고 핑계 삼았다. 세자와 여러 왕자들, (의정부) 우정승 조영무 등이 따라나섰다. (태종실록 13년 2월 4일)

 

통제원通濟院 남쪽 교외에서 머물렀다. 이날 아침에 세자에게 조정으로 돌아가도록 명하니, 세자가 따라가겠다고 무리하게 청했다. 그러자 임금이 여러 대신에게 말했다......“당초는 세자로 하여금 하룻밤만 지내고 돌아가게 하고자 하였으나, 지금 세자가 나를 좇아갈 수 없다고 섭섭해 하며 앙앙대고 밥을 먹지 않는다. 그는 나의 자식일 뿐 아니라 나라의 왕세자인데, 그 행동이 이와 같으니, 어찌하면 좋겠는가?” 이천우와 이숙번 등이 “이번에는 목욕을 위한 행차이니, 마땅히 전하의 수레를 따르게 하소서.” 라고 말씀을 올렸다. 임금이 “잠시 동안만 따르는 것이다.” 라고 하니, 세자의 얼굴에 기쁜 빛이 돌았다. (태종실록 13년 2월 5일)

 

예외의 남발은 교육 망치는 지름길

 

아이가 좋아하는 것을 뻔히 알기에 매번 막을 수만은 없는 부모의 마음, 그리고 궁궐에 갇혀 지내는 동지로서의 동병상련이 발동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외의 남발은 교육을 망치는 지름길이기도 합니다. 부모가 아이에게 엄격해야 할 때와 너그러워야 할 때를 구분하지 못하면 교육의 원칙과 효과성은 점차 무너집니다. 이러한 일이 반복되면, 학부모의 권위와 서로에 대한 신뢰는 추락하고, 결국 감정적 대응만 남게 됩니다.

 

세자 이사世子貳師(세자시강원의 종1품) 유창, 빈객賓客(세자시강원의 정·종2품) 한상경·조용·변계량 등이 서연의 하급 관리를 거느리고 궁궐에 와서 아뢰었다. “신들이 재주가 없어서 잘 지도하지 못하여 전하의 노여움을 일으키고, 세자가 눈물을 흘리며 며칠간 식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지금 전하가 편찮아서 모든 신하들이 분주히 안부를 여쭙는데, 세자만이 문안을 드리지 않으니, 나라 사람들이 어떻다고 생각할지 살짝 두렵습니다.” (태종실록 13년 8월 15일)

 

(세자의 비행이 밝혀지자) 임금이 사람을 시켜 세자에게 뜻을 전했다. “이제부터는 내게 오지 말라.” (태종실록 17년 3월 20일)

 

(양녕의 선생님인) 빈객賓客 등이 말했다. “(세자께서) 몸이 편치 않아서 강의는 쉬신다 해도, 내일은 전하께서 광주로 행차하시니, 병을 무릅쓰고라도 뵈러 가셔야 합니다.” 세자가 사약司鑰(궁궐 문의 열쇠 관리인)으로 하여금 임금을 뵈러 가는 길의 문을 열도록 요청했으나 열지 않았다......빈객 탁신이 정색하고 “이는 (주상께서 세자를) 개과천선시키고자 함입니다.”......세자가......끝내 뵙지 않았다. 임금의 수레가 밖으로 나가는 날이 되어, 서연관이 세자에게 청하였다. “바라건대 수레가 아직 대궐 밖에 나가기 전이니, 성상을 뵈러 가소서.” 세자가 내구문까지 갔으나 뵙지 못하고 물러나왔다. 몸이 편치 않다면서 강의를 쉬고 해질 무렵에는 과녁을 쏘았다. (태종실록 17년 3월 23일)

 

세자가 어리於里를 도로 받아들이고 또 아이를 가지게 했다는 소식에 임금이 노하여, 세자로 하여금 옛 처소에 머무르게 하고, 나와서 알현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태종실록 18년 5월 10일)

 

(세종이 말하였다.) “옛 사람이 ‘부자 사이는 매일 서로 가까이해야 한다.’ 고 했다. 양녕이 세자가 되었을 때에는 (부왕을) 뵈올 때 행동에 절도가 있었다. 그 후에 (양녕이) 잘못을 저질러서 뵈러 가지 못하니, 날로 부자 사이가 서먹해졌다. 이를 내가 직접 보았다.” (세종실록 20년 11월 23일)

 

학습에 태만하고 비행을 일삼는 양녕에 대한 태종의 실망이 점차 쌓여갑니다. 불호령을 내리는 아버지에 대한 양녕의 불만도 누적됩니다. 결국 부자는 서로 얼굴도 보지 않는 사이가 되어 버립니다. 그러는 사이에 셋째 아들 충녕대군이 태종의 눈에 들어옵니다.

 

(태종이) 경복궁에 행차해 상왕上王(정종)을 맞이하여 경회루에서 술자리를 베풀었는데......재상을 비롯한 여러 신하에게 잔치를 베푸니, 다투어 사람마다 한 구씩 시를 지어서 한 편의 시를 만들며 매우 좋아했다. ‘노련한 사람을 버릴 수 없다’는 말에 미치자, 충녕대군이 “『서경書經』에서 ‘노련하고 뛰어난 사람이 그 직책에 있다[耆壽俊在厥服].’고 하였습니다.” 라고 말하였다. 임금이 충녕의 학문이 두루 통한 것에 감탄하고, 세자를 돌아보며 말했다. “너는 어째서 학문이 이만 못하냐?” (태종실록 16년 7월 18일)

 

양녕은 왕세자 교육에 적합한 인물 아니었다

 

남과의 비교는 도전 의지를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간혹 일시적 효과가 있을 수는 있으나 근원적 개선책이 될 수 없습니다. 잘 해낼 수 있다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손상시켜 긍정적이지 못한 자아상을 형성시키고, 관계 맺기에 어려움을 초래합니다. 동생 충녕과 비교당하며 양녕은 초조해지고 경쟁의식을 갖게 됩니다. 그렇다고 하여 개과천선에 이르진 않습니다. 결국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태종은 양녕에 대한 교육 실패를 인정하고, 후계자를 교체합니다.

 

“제禔(양녕대군)가 세자였을 때, 담장을 넘거나 개구멍으로 나가서 몰래 외출하고, 강을 건너가서 몰래 소인배와 옳지 못한 짓을 멋대로 했다. 내가 계도할 수가 없어서, 진무소鎭撫所로 하여금 문을 지키고 통제하게 하였다. 지금 세자(충녕대군)는 그렇지 않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에게 우애 있게 대하며, 성품이 온화하고 예의 바르며, 배우기를 좋아하고 게을리 하지 않는다......앞으로는 세자를 만나보고자 하는 자가 있거든 민간의 미천한 사람이라도 출입을 금지하지 말고 모두 들어가 만날 수 있게 하라. 마땅히 세자로 하여금 깊이 인심을 얻게 하는 것, 이것이 나의 뜻이다. 나는 세자 양육을 제에게 한 것과 같이 하지는 않을 것이다.” (태종실록 18년 6월 21일)

 

어떤 문제를 억제하면 또 다른 부분에서 문제가 발생하는 현상을 풍선효과라고 합니다. 임시방편적 규제로 일관하면 결국 어디에선가 문제는 크게 터져버립니다. 태종은 양녕을 교육한 끝에 자각합니다. 교육의 내용과 방법도 중요하지만, 우선 아이에게 걸맞은 목표와 기대치를 얹어주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그렇다면 양녕은 왕세자 교육에 적합한 인물이 아니었다는 것을요. 현재 우리의 입시지옥에서도 볼 수 있듯이, 적성에 맞지 않는 진로설계와 교육은 학부모도 학습자도 교수자도 괴로운 일입니다.

 

태종은 원점에서 새로 시작합니다. 장자 계승의 원칙도 15년간 양녕에게 쏟은 시간도 과감하게 내려놓으니, 다른 아들도 눈에 들어옵니다. 유교에서 중시하는 지도자의 덕목을 두루 갖춘 충녕은 셋째 아들이지만 왕세자로서의 자질이 보입니다. 태종은 세자를 교체하자마자 훈육 방침을 달리하겠다고 표명합니다. 충녕에 대한 신뢰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양녕에게 적용한 교육이 실패한 원인을 곱씹은 탓이겠지요. ‘자식 농사는 내 뜻대로 안 된다’지만, 씨앗에 적합한 땅에 심었는지, 물은 적절히 주었는지도 돌아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양녕대군의 사당 지덕사至德祠.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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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사는 세종이야기꾼 오채원이 오마이뉴스에 연재하고 있는 '실록 읽어주는 여자' 시리즈 중 양녕대군의 실패한 교육에 대한 내용입니다. 기사 바로 가기 omn.kr/1nq84)

 

조선 중기의 어린이용 한자 학습서 『훈몽자회訓蒙字會』에서는 ‘師’를 ‘스스ᇰ ᄉᆞ’, 곧 ‘스승 사’라고 풀이합니다. 이 ‘스승’이라는 단어의 어원에 대한 여러 추정 중에는 불교의 사승師僧에서 왔다는 설이 있습니다. 수행자를 지도하거나 수행자가 존경하는 승려를 가리킨다는 것인데요. 이는 불교라는 종교색을 지우더라도, 현재 통용되는 ‘스승’의 의미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결국 스승이란 지식을 파는 노동자를 넘어, 상대의 정신적 성장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존재이니까요.

그런데 ‘미래 권력’인 양녕에게 스승이란 없었던 모양입니다. 책상머리 공부를 즐기지 않는 양녕의 마음에 들려니, 선생님이 심지어 공부를 방해하기도 합니다.

 

(조선 중기의 어린이용 한자 학습서 『훈몽자회』를 박아내는 책판. 출처 : 문화재청)

(세자시강원의) 세자좌필선世子左弼善인 김주金稠를 파면하였다......“김주는......강의할 때 아부하고 아첨해서 세자에게 잘 보이는 것을 기쁨으로 삼으며, 세자께서 작은 선행이라도 하면 꼭 칭찬하여 교만한 태도를 길러주고......세자께서 『맹자孟子』를 읽을 적에, 날마다 50여 편을 외우니, 김주가 ‘그 뜻을 알면 한 번만 읽더라도 괜찮습니다. 어찌 이처럼 부지런히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라며 말렸습니다.” (태종실록 7년 2월 3일)

 

세자빈객 이내李來와 변계량卞季良을 경연청經筵聽(임금을 위한 강습 기관)에 호출해, 주위의 사람들을 물리치고 명을 내렸다......“서연의 어리석은 선비들이 ‘(양녕이) 장차 임금이 될 것이다’ 라는 생각에 위축되어 쓴말을 하지 못하고, 대간臺諫(현 검찰·감사원·언론기관)도 그렇다. 그대들은 이미 재상이 되었는데, 무엇이 두려워 감히 바른 길로 (세자를) 인도하지 못하는가?” (태종실록 15년 1월 28일)

 

사헌부司憲府(현재의 검찰 및 감사원)에서 상소하였다......“세자빈객 조용趙庸, 변계량......등이 바른 마음씨와 밝은 학문으로써 강의하지 않고, 아부와 아첨만을 일삼아 무조건 ‘예 예’ 하고, 따라서 세자가 도리가 아닌 길에 빠지게 했습니다.” (태종실록 18년 6월 4일)

 

책 『삶을 바꾼 만남』에서는 황상黃裳이 정약용丁若鏞에게 가르침을 받게 된 일이 그야말로 ‘삶을 바꾼 만남’으로 그려집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몸소 가르침을 주는 스승이라는 존재의 무게와 감동을 느낄 수 있는데요. 정치적으로 배척당하며 떠나온 고달픈 유배 생활 가운데, 자신을 진심으로 따르는 제자를 만나게 된 일이 정약용에게도 ‘삶을 바꾼 만남’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양녕의 선생님들은 ‘팔자를 바꾼 만남’을 기대한 모양입니다. 15년간 공고했던 세자라는 양녕의 지위 앞에서 쩔쩔매는 것을 보면 말이지요. 강력한 왕권을 추구했던 태종의 후광을 받아, 그의 맏아들에게서도 공고한 권력을 인식했을 것입니다.

 

조선은 태조-정종-태종에 이를 때까지 왕위 계승의 원칙에서 벗어난 임금이 배출되었습니다. 그 가운데 정치 논리로 인해 여러 차례 혈육이 제거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태종은 피의 역사를 끊기 위해, 적장자를 세워 ‘엘리트 코스’를 밟은 후계자로 길러내겠다는 의지가 강했으리라 추측 가능합니다.

 

양녕의 방탕함 고치고 싶었던 태종의 초강수

 

하지만 태종의 바람과 달리, 선생님들에게 미래 권력을 훈육하는 일은 녹록치 않았습니다. 그 가운데 동생 충녕대군은 태종에게 존재감을 획득해가고, 이러한 양상이 양녕의 선생님들에게 위협적으로 보였던 모양입니다. 양녕 또한 충녕의 지적 우위를 의식하고 때때로 질투합니다.

 

(세자가 말하였다.) “충녕은 보통 사람이 아니다.” (태종실록 14년 10월 26일)

 

(충녕과 시 짓기를 주고받으며) 임금이 기뻐서 “세자가 도달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하였다. 세자가 예전에 임금 앞에서, 사람들의 학문과 무예에 대해 토론하다가 “충녕은 용맹하지 못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설령 용맹하지 못하더라도, 큰일에 직면했을 때 큰 의문점을 분별해내는 데에는 당대에 견줄 사람이 없다.” (태종실록 16년 2월 9일)

 

이때에 충녕대군이 배우기를 좋아하니, 세자빈객 이내와 변계량 등이 시기하여 여러 번 서연에서 충녕대군을 칭찬함으로써 세자를 분발시키고자 하였다. 변계량이 매번 충녕대군의 시관侍官에게 읽는 것이 무슨 글인가 하고 물어서, 무슨 글을 읽는다고 대답하면 반드시 칭찬하고 감탄하였다. (태종실록 16년 9월 7일)

 

선생님들은 충녕의 학습 수준과 태도를 칭찬하며 양녕의 경쟁심을 부추겨 봅니다. 그러나 이 충격요법도 그다지 효과가 없었던 모양입니다. 대체로 경쟁자를 이기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각고의 노력으로 나의 실력을 키우거나, 상대를 깎아내려서 위안을 얻는 일명 ‘정신승리’를 들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양녕은 후자를 택한 것으로 보입니다. 자신이 충녕보다 낫다고 생각되는 점을 부친 앞에서 불쑥 말하는 것을 보면 말이지요.

시간이 지나도 개선의 여지는 보이지 않고, 심지어 선생님이 양녕의 반성문까지 대신 써줍니다. 자기소개서 대필, 수행평가 대행 등을 해주는 요즘의 일부 학원·과외 선생님이 떠오르는 대목입니다.

 

세자가 종묘에 아뢰니, 그 글은 이러하였다......“아뢴 뒤 (개과천선하겠다는) 이 말에 변함이 있으면, 조상의 영혼께서는 반드시 벌을 내려 (저를) 용서하지 마소서.” 또 주상께 글을 올렸는데......“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저를) 가엾게 여겨 주소서.” 종묘에 올린 맹세와 주상께 올린 글은 모두 빈객 변계량이 지은 것이었다. (태종실록 17년 2월 22일)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고치겠다고 이미 하늘에 맹세까지 한 바 있건만, 양녕의 비행은 반복됩니다. 여성 스캔들이 잦았던 양녕이 이번에는 남의 첩인 어리於里라는 여성을 궁궐로 몰래 데려옵니다. 이 사건은 후일 폐세자가 되는 도화선이 되는데요.

태종은 이번 기회에 양녕의 방탕함을 고치고 싶어 합니다. 양녕을 장인 김한로의 집으로 보내고, 궁중에서 지급하던 양식을 끊도록 명령을 내리는 등 초강수를 둡니다. 요즘으로 보자면, 집에서 쫓아내고 신용카드를 정지시키는 것과 비슷할까요?

 

임금은 사적 개인에 그칠 수 없는 공적 존재

 

태종의 의중을 파악한 세자시강원의 선생님들은 양녕에게, 종묘에 모신 조상들께 반성문을 올림으로써 아버지에게 강한 개선의 의지를 보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반성문의 작성을 양녕은 선생님에게 떠넘깁니다. 양녕도 선생님도 ‘이번만 무사히 넘기자’라는 안일한 생각을 했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1년 정도 지내던 양녕은 또 다시 여성 스캔들을 일으키고, 이를 지적하는 아버지에게 대듭니다.

 

세자가 환관 박지생을 보내 직접 쓴 손 편지를 (태종께) 올렸는데, 사연은 이러하였다. “전하의 시녀는 다 궁중에 들이는데, 어찌 다 귀중하게 여겨 받아들이십니까?” (태종실록 18년 5월 30일)

 

“내가 세자의 글을 보니, 놀라서 몸이 움츠러들고 가르치기가 어렵겠다 싶구나.”......“이 아이는 마음을 고치기 어렵다. 그 말의 기세를 본다면 양녕이 정치를 하는 것이 사람들에게 재앙이 될 지 복이 될 지 예측하기가 어려우니......서연관으로 하여금 잘못된 일을 고치도록 말하고, 서연에 나오게 하여 잘 성장시켜야 마땅하겠다. 이와 같이 해도 마음을 고치지 않는다면, 선례에 따라 처리하겠다.” (태종실록 18년 6월 1일)

 

의정부議政府(조선 최고 행정기관), 조선 건국에 공을 세운 공신들, 육조六曹(행정 실무를 담당하는 여섯 부서), 삼군 도총제부三軍都摠制府(모든 군사를 관할하는 기관), 한양 모든 관청의 관리들이 글을 올려, 세자를 파면하도록 청하였다. (태종실록 18년 6월 2일)

 

양녕은 ‘아버지도 여성 편력이 있으면서 어째서 자신만 탓하느냐’고 정면으로 맞섭니다. 이는 단순히 한 사안에 대한 이의제기나 불평을 넘어, 현재 권력에 대한 미래 권력의 도전으로 비쳐질 수 있습니다.

아울러 임금은 어쩔 수 없이, 사적 개인에 그칠 수 없는 공적 존재입니다. 설령 개인적 판단에 따라 결정을 내린다고 해도 그 파급은 국가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태종이 사사롭게는 양녕에게 아버지이지만, 동시에 국가의 명운을 책임져야 하는 정치인입니다.

이는 국가의 공식적 2인자로 정치적 존재가 되어버린 세자에게도 해당되는 사안입니다. 따라서 권력을 남용해 국가의 공적 조직이나 조직원을 사익 추구에 사용하거나, 국정에 개입하려는 사사로운 무리를 방조하여 ‘비선 실세’의 여지를 두어서는 안 되는 법입니다.

 

양녕대군, 태양에 가장 가까이 다가갔던 사람

 

여기에까지 생각이 미친다면 태종은 후계자에 대해 면밀하게 재고再考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미 1·2차 왕자의 난, 처가인 여흥 민씨 일가의 처단 등과 같은 사건을 통해, 한때 동지였던 혈족 및 친인척을 정치적 혹은 생물적 사망에 이르게 한 바 있습니다. 눈물을 머금고 자신의 아들도 정치적 맥락에서 재단해야 하는 시점에 도달한 것입니다.

태종 입장에서 임계점에 다다른 것은 물론, 나라의 여론도 양녕의 편이 아닙니다. 국정 운영에 관여하는 상급·하급 공무원들이 세자의 파면을 요구합니다.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양녕의 선생님들도 더 이상은 막아주지 못합니다. 이제는 그들도 세자 교체를 요청하는 여론에 합류합니다. 스승과 제자 사이의 인정과 도리는 비정한 정치 논리와 공적 시스템 속에 매몰되어 버린 것입니다.

 

양녕의 세자빈객 곧 선생님이었던 변계량은 두 달 후, 세종의 지경연사知經筵事로 자리를 옮깁니다. 지경연사는 임금이 고전과 동시에 국정을 토론하는 자리인 경연經筵을 담당하는 정2품 관직입니다. 세자의 선생님에서 임금의 선생님이 되었으니, 영전榮轉을 한 셈입니다. 그 후 변계량은 약 20년간 국가의 학문을 상징하는 ‘문형文衡’으로서, 세종의 주요 국정운영 동반자가 됩니다.

 

양녕대군은 이카로스Īkaros처럼 태양에 가장 가까이 다가갔던 사람입니다. 그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면, 생명을 담보할 수 없습니다. 단종 복위 운동에서 볼 수 있듯이, 과거 권력을 재추대하고자 하는 무리가 있을 수 있으므로, 당사자를 사전에 제거해버리기 마련입니다. 실제로 세종 6년에, 양녕이 왕이 됐으면 세상이 더 좋아졌을 것이라는 불충한 말을 한 향리들, 양녕이 군사력을 장악하려 한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린 군인을 처벌하기도 합니다. 세종이 보호해주어 양녕은 세종보다 장수하지만, 통상적으로 ‘폐세자=사망’이라 충분히 유추할 수 있었습니다.

 

(제자) 안연이 죽자, 공자가 말하였다. “슬프다! 하늘이 나를 버리는구나! 하늘이 나를 버리는구나!” 안연이 죽자, 공자가 애통하게 곡을 하였다. 따르던 제자가 말하였다. “선생님은 지나치게 슬퍼하십니다.” 공자가 말하였다. “내가 지나치게 슬퍼한다고? 안연을 위해 슬퍼하지 않으면, 내가 누구를 위해 슬퍼하겠느냐?” (『논어論語』 「선진先進」)

 

동양 고전의 교과서 격인 『논어』에서, 공자는 제자 안연이 사망하자 통곡합니다. 어찌나 비통해 하는지 다른 제자들이 서운해 할 정도입니다. 이에 비해, 양녕의 선생님들이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제자를 위해 진정 통곡했는지 의문입니다. 정치 논리 앞에서는 마음으로 울어주는 사제 관계는 없는 것인가 봅니다.

 

(양녕대군의 교육 실패는 학부모 태종의 학습 방침이 확고하지 못한 이유도 있어 보입니다. 이번 시리즈의 마지막 편인 양녕에 대한 태종의 교육법에 대해서는 다음으로 이어집니다.)

 

(양녕대군의 선생님 중 한 사람인 변계량의 문집 『춘정집春亭集』. 출처 : 국립전주박물관)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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