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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채원연구소공감]대표 :: 세종이야기꾼 :: 실록연구자 :: 소통 디자이너 :: 010-8014-7726 :: chewonoh@gmail.com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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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사는 오마이뉴스에 연재하고 있는 '실록 읽어주는 여자' 연재 시리즈 중 일부입니다. omn.kr/1nmuf)

 

임금은 본디 유학儒學을 좋아하여, 늘 맑은 첫새벽에 신하들과 함께 나라의 정사를 돌보고, 자주 경연經筵에 나아가서 경전의 해석 및 토론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퇴근 후) 일상 공간에서는 밤중이 되어도 독서를 그치지 않는다. 태상왕(태종)이 임금의 정신 피로를 염려해 금지시키며 말하였다. "과거 응시자는 이와 같이 해야 되겠지만, (임금이 되어서) 고됨이 어찌 이와 같은가." (세종실록 3년 11월 7일)
 
유교 문화권에서 중시하는 지도자의 주요 덕목 중 하나는 배움을 즐기는 태도입니다. 유학의 교과서라 할 수 있는 <논어論語>의 첫 장 첫 글자가 '배울 학學'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학이시습지불역열호(學而時習之不亦說乎)', 즉 '배우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배운 것을 익히면 정말로 기쁘지 아니한가?'라는 구절이 바로 그 예입니다.
 
단지 머리로 지식을 흡수하는 일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체화하는 단계까지 이르러야 '배움'이라 할 수 있으며, 그 과정에서 기쁨이 느껴지는 경지에 도달해야 진정한 배움인 것입니다. 이는 '아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보다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보다 못하다(지지자불여호지자 호지자불여락지자, 知之者不如好之者,好之者不如樂之者)'라는 <논어>의 구절을 보아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배움을 즐긴 대표적 인물로 손꼽히는 세종은 건강이 걱정될 만큼 그 정도가 심했습니다. 세종실록에 의하면, 그는 매일 새벽 1~3시에 일어나 빈틈없이 하루를 보냈는데요. 책을 좌우 양옆에 펼쳐 놓고 식사를 하며, '퇴근 후에도 하는 일 없이 멍하니 앉아 있는 시간이 없다'고 고백할 만큼, 그는 쉴 틈 없이 학습에 몰두했습니다. 온갖 서적은 물론이고 심지어 조선의 역대 외교문서까지 살펴본 그는 '문자중독자'에 가까워 보입니다. 이처럼 고시생 이상으로 책을 파고드는 아들이 안쓰러운 아버지 태종은 공부를 금지시킵니다. 이러한 양상은 세종의 왕자 시절부터 시작됐습니다.
 
임금은 천성이 학문을 좋아하여 세자로 있을 때 항상 글을 읽되 반드시 백 번씩을 채우고, 『좌전左傳』과 『초사楚辭』같은 책은 또 백 번을 더 읽었다. 예전부터 몸이 불편할 때에도 글 읽기를 그만두지 않았는데, 병이 점차 심해지자 태종은 내시를 시켜 갑자기 책을 모두 거두어 가지고 오게 하였다. 그리하여 『구소수간歐蘇手簡』 한 권만이 병풍 사이에 남아 있었는데, 임금은 천백번을 읽었다. (『연려실기燃藜室記述』 「세종조世宗朝 고사본말故事本末」)
 
아들이 어찌나 독서에 열심인지 몸이 아파도 멈추지 않습니다. 보다 못한 아버지는 책을 모두 압수합니다. 그 과정에서 어쩌다 빠뜨린 책 한 권을 발견해 읽고 또 읽은 나머지 1100번에 달한다는, 많은 학부모님이 부러워할 만한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유교 문화권에는 '군사君師(임금이자 스승)'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한 나라의 임금은 동시에 스승이기도 해야 한다는 뜻인데요. 이는 권력의 중심축에 지식이 있으므로, 지식의 양과 질이 정치적 무기가 될 수 있음을 내포합니다. 결국 세종에게 지식은 처절한 생존의 도구인 셈입니다.
 
아울러 '군사' 개념은 임금의 주요 책무가 백성을 계몽시키는 일임 또한 드러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왜 문자의 이름을 훈민정음訓民正音, 곧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고 지었는지 짐작 가능합니다. 그렇기에 세종이 '겨레의 스승'으로 불리며, 그의 탄신일을 스승의 날로 삼은 것입니다. 이처럼 세종과 배움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세종이 왕자 시절에 1100번을 읽었다고 전해지는 "구소수간歐蘇手簡"은 중국 송나라의 구양수歐陽脩와 소식蘇軾이 주고받은 편지를 모은 책이다. 사진은 구양수와 소식의 편지를 모은 또 다른 책 "구소잡초歐蘇雜抄"이다. ⓒ서울역사박물관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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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이야기꾼 오채원이 가정의 달 5월을 맞아, '아버지 태종'의 이야기를 다룬 <아들아, 모든 업보는 내가 지고 저세상으로 가마>가 오마이뉴스 탑기사로 게재되었습니다. 2년 전에 돌아가신 아빠 생각이 나서 원고의 마무리가 참 힘들었는데요. 시간이 흐르며 조금씩 조금씩 그분의 부재를 실감하게 됩니다. 기사 바로 가기 : http://omn.kr/1nk49)

 

 

태조가 (조선 개국 전에) 일찍이 말하였다. “내 뜻을 성취할 사람은 반드시 너(이방원, 이후 태종)일 것이다.” (태조실록 총서)

 

고려의 무인 이성계에게 이방원은 가문의 영광을 실현해준 자랑스러운 아들이었습니다. 이성계의 본거지는 고려의 수도인 개경(현재의 개성)의 동북 방향에 위치한 동북면東北面, 즉 지금의 함경도였습니다. 이성계는 공민왕이 신임하는 상만호上萬戶라는 총지휘관이었지만, 그가 맹주였던 동북면은 물리적 뿐 아니라 정치적 지형에서도 변방이었습니다. 이에 이성계는 무예가 아닌 유학에 정통한 자손이 과거라는 등용문을 통과해 가문을 개경의 주류 세계에 진입시키길 고대했습니다.

 

그 소망에 부응하듯 다섯째 아들 이방원이 문과에 급제하며 중앙 무대에 데뷔합니다. 가문 최초의 과거 급제 소식을 듣자 어찌나 감격스러웠던지 이성계는 궁궐을 향해 절하고 눈물을 흘립니다. 이어서 이방원이 왕명작성 및 역사편찬 등을 관장하는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의 정삼품正三品 벼슬인 제학提學에 임명되자 이성계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사람을 시켜 두세 번이나 반복해서 관교官敎(임명장)를 읽게 했다고, 태조실록에서 그날의 장면을 증언합니다. 이후 이방원은 왕실과의 혼인 자격을 갖춘 가문인 ‘재상지종宰相之宗’ 중 여흥驪興 민씨閔氏 가문의 여성과 결혼하며, 이성계 집안의 격을 드높이는데 꾸준히 기여합니다.

 

국가지정문화재 보물인 최광지 홍패紅牌. 고려 창왕 1년인 1389년에 발급된 과거급제증서로, 국새가 찍힌 고려의 공문서로서 유일하게 현존한다. 출처 : 연합뉴스

 

이성계는 이후 홍건적·여진족·몽고족·왜구 등을 토벌하며 민중의 영웅으로 부상하고, 성리학의 세례를 받은 신진사대부의 신망을 얻으며 고려의 ‘전국구 정치인’이 됩니다. 차차 공훈과 이에 따른 정치적 지분을 확보해나가며 급기야 고려의 왕위에 오르고, 1392년에 조선을 개국하지요. 이 과정에서도 이방원의 기여는 절대적이었습니다. 앞장서서 이성계 일파의 정적을 제거하는 등 이방원은 이성계에게 아들을 넘어 혁명동지에 버금가는 존재였습니다.

 

아들을 죽이려 한 아버지, 태조

 

그러나 태조 이성계는 즉위 7년차인 1398년, 이방원이 주도한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실각하며, 자신이 후계자로 세웠던 막내아들 이방석을 잃고, 차남 이방과(제2대 임금 정종)에게 왕좌를 물려줍니다. 명목상 임금에 가까웠던 정종은 약 2년 후 양위하며 본격적으로 이방원, 즉 태종의 시대로 접어듭니다. 이렇게 하여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듯 보였던 태조는 4년 후인 1402년, 자신의 본거지인 함흥 지역에서 일어난 ‘조사의趙思義의 난’이라 불리는 쿠데타에 직간접 관여합니다. 자신의 아들을 저격하는 일을 주도 혹은 참여한 것이지요. 이십여 일만에 반란군이 궤멸하지만, 태조는 돌아올 줄 모릅니다. 여기에서 바로 그 유명한 함흥차사 이야기가 비롯됩니다.

 

태조는 처음에 덕원德源(현재의 함경도 문천군)으로 갔다가 또 함흥으로 갔는데, 문안 사절로 가서 죽은 사람이 속출하였다......태종이 찾아가서 간곡히 청하니, 무학대사가 어쩔 수 없이 함흥에 가서 태조를 뵈었다......“방원(태종)이 진실로 죄가 있으나, 전하께서 사랑한 아들은 이미 다 죽고 그 사람만 남았는데, 이 아들마저 끊어 버리면 전하가 평생 애써 이룬 대업을 장차 누구에게 맡기려 하십니까? 남에게 부탁하는 것보다 차라니 내 혈족에게 주는 것이 나으니, 신중히 생각해 보소서.” 태조가 그의 말이 꽤 그럴 듯하다고 생각하고 드디어 행차를 돌릴 마음이 생겼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태조조太祖朝 고사본말故事本末」)

 

조선 후기의 학자인 이긍익이 야사를 종합한 책 『연려실기술』에 의하면, 태조는 마중 나온 태종을 향해 화살을 쏘고 소매에 쇠방망이를 숨겨오는 등 환궁하는 순간까지도 아들의 목숨을 노립니다. 그 진위여부는 확인할 수 없으나, 태종에 대한 태조의 실망과 분노는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조聖祖(태조)께서 조사의의 진영에 머무르셨는데......조사의가......마침내 관군官軍(정부군)에 잡혔습니다. 이에 수신帥臣(도의 국방 책임자) 이천우·이빈·최운해 등이 성조를 호위해 평양을 경유해서 개성에 돌아오시므로, 태종께서 금교역金郊驛(현재의 황해도 금천군의 역)에 나가 맞이하셨습니다.” (숙종실록 13년 1월 7일)

 

마지못해 궁으로 복귀하였으나 여전히 아버지는 아들에게 냉랭합니다. 문안 인사마저 받지 않을 만큼 아들 보기를 꺼리더니 5년여 후에야 아버지는 아들에게 술 한 잔을 권합니다.

 

임금(태종)이 덕수궁(태조의 거처)에 나아가 문안을 드렸다. 이전에는 임금이 자주 덕수궁에 나아가도 접견하는 일이 적었는데, 이날은 태상왕太上王(태조)이 침전寢殿(침실)으로 불러들여 술을 권하니 취하기에 이르렀다. 임금이 매우 기뻐하여 가까운 신하에게 말하였다. “내가 돌아가는 길에 피리를 연주하라.” (태종실록 7년 9월 20일)

 

그 옛날처럼 거나하게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고 태종은 춤을 추고 싶을 정도로 신이 났습니다. 그리웠던 아버지의 정을 다시 느끼게 되었으니까요. 그러나 부자에게 시간은 그리 오래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임금이 말하였다. “이 같은 상사喪事를 당하니 슬픔이 미칠 데가 없구나. 내가 무인년(1398년) 가을에 국가의 장기적 발전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거사를 도모했는데[제1차 왕자의 난], 그 뒤 부왕(태조)께서 항상 못마땅하게 여기셨다. 내가 생전에 순종하지 못하여 마음을 상하시게 했다. 이제야 정신 차리고 보니 부왕께서 승하하셨는데, 어찌 차마 잊어버리고 서둘러 정무를 볼 수 있겠는가?” (태종실록 8년 6월 21일)

 

부자 관계가 회복된 지 8개월여 만에 태조가 승하합니다. 한 달이 지나도 업무에 복귀할 수 없을 만큼 태종의 충격은 큽니다. 부자가 천신만고 끝에 세운 나라는 안정을 찾아가건만, 한 꿈을 꾸었던 아버지는 이제 세상에 없습니다. 정치 논리에 휘말린 가족사를 돌아보며 회한이 일었겠지요. 그는 나이 마흔에도 아버지의 정이 고픈 한 사람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태종은 자신의 아이들에게 한없이 마음 약한 아버지였나 봅니다.

 

함흥에서 돌아오던 태조가 태종을 향해 화살을 쏘았으나 그늘막 기둥에 꽂혔다는 야사가 전해지는 살곶이 다리의 전경.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아들바보, 태종  

 

“내가 젊은 시절에 아들 셋을 연달아 여의고 갑술년(1394년)에 양녕을 낳았는데, 그도 죽을까 두려워서 처가에 두게 했다. 병자년(1396년)에 효령을 낳았는데 열흘이 채 안 돼 병을 얻어서 홍영리洪永理의 집에 두게 했고, 정축년(1397년)에 주상(세종)을 낳았다. 그때 내가 정도전 일파의 시기를 받아 형세가 좋지 않게 되니, 실로 남은 날이 얼마 없겠구나 생각되어 항상 가슴이 답답하고 아무런 낙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대비(부인 원경왕후)와 더불어 서로 양녕을 안아 주고 업어 주고 하여, 무릎 위를 떠난 적이 없었으며, 이로 말미암아 자애하는 마음이 가장 두터워 다른 자식과 달랐다.” (세종실록 1년 2월 3일)

 

실록을 보면, 자녀들에 대한 태종의 사랑은 극진했던 것 같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연달아 아들 셋을 병으로 잃고 난 후, 나이 서른에 가까워서야 양녕대군을 시작으로 효령과 충녕을 낳았기 때문에, 혹시나 이 아이들마저 죽을까봐 애지중지 기릅니다. 아이들이 꼬물꼬물 어릴 때 태종 부부는 1차, 2차 왕자의 난을 겪습니다. 자신부터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처지이니 아이들이 가엾고 또 애틋했을 것입니다. 태종 부부는 양녕을 무릎에서 내려놓은 적이 없을 만큼 그야말로 ‘금이야 옥이야’ 키웁니다.

 

이렇게 키운 맏아들이 세자에 걸맞지 않는 행동들을 하기 일쑤입니다.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거짓말하고 놀러 다니고, 여자친구를 몰래 궁으로 들이고, 반성문을 쓰고는 바로 아버지한테 대드니 억장이 무너졌을 것입니다. 양녕은 자신에게 아들이지만 국가에는 차세대 최고통수권자입니다. 그 자격이 의심되는 상황이 이어지니 태종은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셋째 아들 충녕으로 세자를 교체하는데, 그날 태종은 양녕을 붙들고 통곡합니다.

 

이제李禔를 세자에서 물러나게 하여 광주로 추방하고 충녕대군으로 왕세자를 삼았다......유정현 등이 “신들이 어진 사람을 고르자는 것도 충녕대군을 가리킨 것입니다.” 하여, 의논이 이미 정해지자, 임금이 통곡하며 흐느끼다 목이 메었다. (태종실록 18년 6월 3일)

 

15년간 세자의 자리에 있던 맏이 양녕에서, 정통성이 부족하며 검증되지 않은 셋째 충녕으로의 교체는 부담이 큰 정치적 판단이었을 것입니다. 다행히 두 번째 세자는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태종이 생시에 자리를 물려주고 상왕上王으로 물러나자, 세종은 착실하게 임금 노릇을 했고, 부모에게 효도했으며, 야인이 되어 목숨 부지가 불투명한 큰형 양녕을 감싸주었습니다. 이처럼 태종에게 세종은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어주었습니다.

 

임금(세종)의 정무 처리가 사리에 합당하더라는 말을 듣고 (태종이) “내 진실로 (세종이) 본디 현명한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노련할 줄은 몰랐구나.” 하고, 대신들에게 “주상은 참으로 문왕文王(중국 고대 주나라의 기초를 닦은 성군) 같은 임금이다.” 했다. 또 일전에 교외에 행차했을 때, 임금이 오는 것을 바라보고 눈물이 떨어지는 것을 깨닫지 못하며 절로 기뻐하면서 말했다......“내가 나라를 맡김에 사람을 잘 얻었으니, 자연을 벗 삼아 한가로이 노닐기에 걱정이 없는 자는 천하에 나 하나 뿐......예나 지금이나 역시 나 하나뿐일 것이다.” (세종실록 2년 5월 16일)

 

세종은 약 두 달의 짧은 세자 기간을 거쳤기에, 임금이 갖춰야 할 지식·태도·역량 등을 예비 학습할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그런데도 용상에 오른 지 이년 여 만에 벌써 안정적으로 업무를 처리합니다. 신하들이 태종 면전에서 세종의 직무능력을 칭찬하자, ‘세상에 나처럼 아들 잘 둔 사람은 또 없을 것’이라고 자랑합니다. 얼마나 아들이 기특했는지 바라만 보아도 눈물이 저절로 떨어집니다. 세자 교체를 통해 성공적으로 후세를 이은 자신의 결정에 뿌듯해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세종의 안착은 뛰어난 개인의 기량 덕분이기도 하지만, 아버지 태종의 치밀하며 희생적인 사전 준비가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태종이) 병조 판서兵曹判書(현 국방부 장관) 박신朴信을 불러 말했다......“(창덕궁) 인정전은 협소하므로 마땅히 새로 지어야 할 것이다. 토목공사는 백성을 수고롭게 하는 큰일이므로 백성들이 심히 괴롭게 여긴다. 그런데도 조속히 지으려는 까닭은 다름이 아니라, 백성을 부리는 책임을 내가 떠맡고, 세자(충녕)가 즉위한 뒤에는 한 줌의 흙이나 한 조각의 나무가 들어가는 토목공사라도 백성들에게 더하지 않게 해서, 두터운 민심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태종실록 18년 7월 5일)

 

당초에 병조 참판(현 국방부 차관) 이명덕이 그 일(한양도성 보수 공사)을 주관해 여러 도에서 총 43만 명의 장정을 징발했다. 대언(임금 비서) 등이 임금에게 아뢰었다. “가만히 살펴보건대, 태조께서 처음으로 한양에 도읍을 정해 성을 쌓는데, 장정이 20여만 명 들었습니다. 지금은 이를 수축할 뿐인데 어찌 이처럼 많습니까?” (세종실록 3년 12월 10일)

 

한양도성의 맨 밑은 태조 때 축조하고, 그 위는 세종 시대에 태종의 주도로 보수 및 신축 공사를 했다. 그 뒤 숙종·효종·현종·영조·순조 시대에도 보수했으나 한국전쟁으로 대부분 파괴된 것을 지속적으로 복원하고 있다. 출처 : 오채원

 

태종은 자신의 임기 말부터 상왕으로 물러나 있는 기간에 걸쳐, 백성들의 노역이 필요하고 세금이 들어가는 대공사를 감행합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지지율 하락 요인을 자신이 감당하여, 세종은 탄탄한 기반 위에서 자신의 시대를 열도록 배려한 것이지요. 그리고 저 세상으로 갈 때에는 가뭄으로 인해 세종과 백성이 고통 받지 않도록, 비를 내리겠다고 유언을 남깁니다.

 

세종 4년에 임금(태종)이 승하하시려 할 때 이와 같이 하교하였다. “지금 가뭄이 심하니, 내가 죽은 뒤에도 안다면 반드시 이날 비가 오도록 하겠다.” 그 뒤로 제삿날만 되면 반드시 비가 왔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태종비’라 불렀다. (『연려실기술』, 「태종조太宗朝 고사본말」)

 

그래서 역사는 태종의 기일인 음력 5월 10일 즈음에 내리는 단비를 ‘태종비’라고 부릅니다. 목숨이 다하는 그 순간까지 아들을 걱정하는 아버지의 사랑을 엿볼 수 있는 기록인데요. 자신은 아버지로부터 목숨을 위협받았던 애처로운 아들이지만, 그 파멸적 인연의 고리를 자신의 대에서 끊고 말겠다는, 그리고 ‘후세를 위해 모든 업보는 내가 다 지고 가겠다’는 태종의 부정父情을 대하자니, 문득 제 아버지가 그리워집니다.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카네이션이 담긴 화병Vase with Carnations, 1886년. 출처 : 디트로이트 미술관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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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정국이 장기화되며 많은 이들이 생계 곤란을 겪고, 정부에서는 긴급지원금 지급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에, 세종시대의 공무원들과 정치인들이 어떻게 재난에 대처했는지 정리한 기사가 오마이뉴스 메인에 게재되었습니다. 세종이야기꾼 오채원이 들려드리는 <실록 읽어주는 여자> 연재 기사 바로 가기 : http://omn.kr/1nhia)

 

“(내가 재위한 기간 중에) 천재지변이 없는 해가 없었다.” (세종실록 7년 6월 23일)

 

위와 같이 한탄한 것처럼, 세종은 거의 매년 자연재해 그리고 이로 인한 흉작으로 근심이 컸습니다. 세종실록에서는 크게 세 번의 대기근을 관찰할 수 있는데요. 피해 지역이 주로 경기·강원도 일대였던 세종 5~7년(1423-1425년), 곡창지대인 충청·전라·경상도 등 하삼도下三道 중심이었던 세종 19년, 경기·충청·강원·황해도 등 광범위했던 세종 26년을 들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세종 5~7년 무렵은 집권 초기로, 경험이 축적되기 전이었기에 대처하는데 고충이 컸을 것입니다.

( 보릿고개에 나물을 캐는 아이들을 담은  1930 년 사진 .  출처  :  서울역사박물관 아카이브 )

중앙집권체제를 지향한 조선은 국가 차원에서 선제적으로 재난에 대처합니다. 임금이 신뢰하거나 경륜이 있는 인물을 발탁해 현장에 급파한 후 피해 상황을 조사하고, 지방 수령(현재의 도지사·군수)이 백성들을 적극 구제하도록 감찰 및 지원합니다. ‘골든타임’을 놓치면, 주린 백성들은 전염병에 집단 감염되거나, 식량을 찾아 이산가족이 되어 지방으로 떠돌거나, 혹은 경제력 있는 자의 노비로 자진해 들어갑니다. 이는 세금원의 축소로 이어져, 국가의 운영마저 위태로워집니다. 그리고 위정자가 제대로 공부했다면, ‘임금은 어머니가 갓난아이를 돌보듯이 백성을 보호해야 한다[如保赤子]’는 유교 경전 『대학大學』의 가르침을 새기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세종은 궁에서 신하들의 보고만 받고 있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책망이 자신들에게 올까봐 부정적인 소식 전하기를 종종 피하니까요. 이에 세종은 민폐를 최소화하기 위해, 단출한 차림에 호위하는 신하들 없이 당직 경호원만 대동하고, 서대문 밖으로 나옵니다. 육안으로 살펴보니 역시나 현장은 보고와 달랐습니다.

 

“올해 벼농사는 모두들 ‘매우 잘 되었습니다’라고 했건만, 오늘 보니 눈물이 날 지경이다.” (세종실록 7년 7월 1일)

 

울고 싶은 심정으로 현장을 돌아보며 농부의 하소연이나 고충을 직접 듣습니다. 이렇게 시찰을 마치고는 점심 수라도 들지 않고 궁으로 돌아옵니다. 밥맛이 나겠습니까? 믿었던 신하들의 보고와 다른 현실에 맞닥뜨린 충격, 그리고 백성들에 대한 미안함과 측은함이 컸겠지요. 이 외에도 재난이 발생하면, 그는 ‘구언求言’이라 하여 자신에게서 고칠 점을 두루 경청하며 성찰하고, 열흘 가까이 앉은 채 밤을 샜으며, 처소를 초가 같은 허름한 곳으로 옮기거나 반찬 수를 줄이며, 백성들과 고통을 함께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관리들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위에서 본 것처럼, 실태를 축소 보고 혹은 은폐하기도 하고, 굶주리거나 병든 백성들에 대한 긴급 지원·구조 등을 성실히 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에 대처하기 위해, 세종은 감찰관을 파견해 현황을 파악한 후, 대민 지원에 불성실하거나 실패한 책임자에게 엄한 벌을 내립니다.

 

의금부義禁府(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에서 보고하였다. “금성金城(현재의 강원도 금성면) 현령縣令(군수와 유사) 이훈, 감고監考(지방의 곡식·세금 담당자) 김거상과 윤생사 등이 긴급지원을 잘하지 못해 백성을 굶어 죽게 만들었습니다. 이는 (법전 ≪대명률大明律≫의) 제서유위율制書有違律(임금의 명령을 어긴 자를 처벌하는 법규)에 해당되니 장 100대에 처하소서.” 이훈에게는 속贖(형벌 대신 벌금 납부) 받지 말고 장 90대에 처하며, 나머지 사람들은 법대로 처단하라고 명하였다. (세종실록 5년 6월 6일)

 

백성 구제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자는 왕족이라도 처벌을 피해갈 수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 세종 26년의 대기근 시, 경기도 관찰사(현재의 도지사)로 재임한 이는 태조의 외손, 즉 세종과 사촌지간인 이선李宣입니다. 세종이 경기도에 잠시 머물며, 농사 상황과 굶주리는 백성들의 수 등을 이선에게 묻자, 조금 가물기는 하나 별 문제가 없다고 답합니다. 그런데 감찰을 다녀온 신하의 보고는 딴판이었습니다. 파종을 못한 땅이 경기도의 1/3-2/3에 달하고, 영양실조로 인한 병자들도 속출하더라는 것입니다. 게다가 백성들이 이러한 사정을 임금에게 직접 호소할까봐 행차 시에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통제까지 했음이 밝혀집니다.

 

“내가 백성들의 일에 관해서는 나와 가까운 친족이라 하더라도 용서하지 않았으니, 만약 굶어 죽는 이가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경을 용서하지 않겠다.” (세종실록 26년 5월 5일)

 

임금부터 공적인 마음으로 백성 구제를 지휘하며, 이에 성실하게 응하지 않는 자에게는 엄한 처벌을 내리니, 책임자들은 자연 자신의 직무에 힘쓸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세종 19년의 대기근 대처가 이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입니다. 이상 기후로 전년부터 우물과 하천이 마르고, 경기·경상·전라도의 일부 지역을 제외한 전국이 농사에 실패합니다. 게다가 메뚜기 떼가 창궐하고, 전염병이 굶주린 이들을 덮쳐 사망자가 속출합니다. 나무껍질을 벗겨 먹는 것도 한계에 다다른 나머지, 자신의 아이를 나무에 묶어놓고 도망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물가급등과 곡식품귀 현상이 일어나고, 지방 정부의 창고가 바닥이 나서 급기야 중앙 정부에 비축해둔 곡식을 옮겨다 백성들을 먹일 수밖에 없습니다. 아비규환과 같은 전국적 재난 국면은 전심전력하는 수령들과 이들을 엄격히 감찰하는 감독관들이 있어서, 차차 진정세로 돌아섭니다.

 

“수령들이 감고(곡식·세금 담당자)들을 인솔해서 마음을 다해 조치하고 몸소 백성들을 먹였으므로, 이에 힘입어 살아난 백성들이 많았다.” (세종실록 19년 2월 9일)

 

세종 19년의 대기근에 대한 사관의 평가는 인간의 저력을 역사적으로 드러내줍니다. 국가지도자, 관계부처 및 최전선의 책임자가 “마음을 다해 조치”했기에, 잔혹한 천재지변 속에서도 많은 생명을 살려낼 수 있었습니다. 문제의 시작은 자연에 있더라도 종결은 인간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이처럼 15세기 당시 선진국이었던 조선의 위상은 백성들의 소소한 일상을 걱정하는 위정자들의 성심誠心에서 비롯되었습니다.

 

(2019년 OECD 주요국 중, 한국의 정부 부채 비율은 매우 낮으며 재정건전성이 우수한 편이다. 출처 : 프레스맨)

 

코로나19 정국이 장기화되며 무급휴직자·영세사업자·특수고용노동자·프리랜서 등을 포함한 국민 다수의 생계가 위태롭습니다. 이러한 ‘코로나 보릿고개’를 넘기 위한 정부의 추가경정예산 편성에 대해, 일부 정치인들은 ‘퍼주기 추경’ 혹은 ‘세금 폭탄’이라 공격하고, 또 특정 관료 집단은 ‘재정건전성 유지’라는 신념에 빠져, 추경의 규모를 축소하려는 듯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나라에서는 긴급재난지원금 혹은 재난기본소득의 지급 범위와 금액을 놓고 논란이 이어지는 가운데, OECD 주요 국가들은 신속하게 예산안 처리에 나섰습니다. 지난 4월 23일 한겨레의 보도에 의하면, 보수적으로 재정을 운용해온 독일 연방정부이지만 경기부양책을 이틀 만에 하원과 상원까지 통과시켰습니다. 이에 따라, 독일 국민은 1인당 최대 1만5천유로 곧 한화로 약 1천993만원인 지원금을 신청한지 사흘 만에 받을 수 있습니다. 심지어 일본은 OECD 국가 중 국가 채무 비율이 가장 높지만, 1인당 10만엔 즉 한화로 약 113만원을 5월 7일부터 지급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와 같이 많은 국가들이 선제적이며 신속하게 코로나19 경제 대책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다행히 4월 30일, 우리 국회에서도 추가경정예산안을 통과시켜, 5월 11일부터 전국민이 긴급재난지원금을 신청할 수 있을 전망입니다. 1인 가구는 40만원, 2인 가구는 60만원, 3인 가구는 80만원, 4인 이상 가구는 100만원이 지급된다고 합니다만, 수개월간 생계가 끊어진 그리고 앞으로가 더 막막한 이들에게 이것으로 충분할 수 없습니다. 책임자들은 선조들처럼 ‘어머니가 갓난아이를 돌보는’ 간절한 마음으로 국민의 삶을 살펴주길 바랍니다.

건전재정이라는 나중을 위한 씨앗 저축에 치중하면, 보릿고개는 영영 넘을 수 없는 고개가 되어 버립니다. 달리 말해, 국민의 현재를 걱정하지 않으면 국가에게 미래는 없습니다. 국가는 백성(국민)으로 근본을 삼고, 백성(국민)은 먹고 사는 문제로 하늘을 삼는 법이므로, 결국 정치의 존재 이유는 민생에 있는 것입니다(세종실록 26년 윤7월 25일).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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