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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채원연구소공감]대표 :: 세종이야기꾼 :: 실록연구자 :: 소통 디자이너 :: 010-8014-7726 :: chewonoh@gmail.com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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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을 있게 한 사람, 그러나 실록에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 사람, 바로 사관.

우리 역사에서 사관에 관한 구체적인 기록이 보이기 시작한 때는 고려. <고려사高麗史> 백관지百官志 춘추관조에 국초(광종光宗 연간으로 추정)에 국사를 관장하는 기관으로 사관(史館)을 설치했다는 기록.

사관은 젊은 엘리트로, 역사의 기록 및 정자료 보관실록 편찬 등 국사에 관련된 모든 일 담당.

사관에게 성역은 없었다. 이에 따라, 보려는 자(사관)와 보여주지 않으려는 자(권력자) 사이의 투쟁이 이어진다. 


편전에까지 사관이 입시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다

편전(便殿 임금의 집무실)에서 정사(政事)를 들었다사관(史官민인생(閔麟生)이 들어오려고 하므로, -중략- 임금이 말하기를, “편전에는 들어오지 말라.” 하니인생이 말하기를, “비록 편전이라 하더라도, 대신이 일을 아뢰는 것과 경연(經筵)에서 강론하는 것을 신 등이 만일 들어오지 못한다면 어떻게 갖추어 기록하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웃으며 말하기를, “이곳은 내가 편안히 쉬는 곳이니, 들어오지 않는 것이 가하다.” 하고,  인생에게 말하기를, “사필(史筆)은 곧게 써야 한다. 비록 대궐[殿] 밖에 있더라도 어찌 내 말을 듣지 못하겠는가?” 하니인생이 대답하였다. “신이 만일 곧게 쓰지 않는다면 위에 하늘이 있습니다[臣如不直, 上有皇天。].” (태종 1/4/29)


심지어 임금의 '기록하지 말라'는 말까지 기록했다.


임금이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졌으나 사관에게 알리지 못하게 하다

(태종이) 친히 활과 화살을 가지고 말을 달려 노루를 쏘다가 말이 거꾸러짐으로 인하여 말에서 떨어졌으나 상하지는 않았다. 좌우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사관(史官)이 알게 하지 말라.” (태종 4/2/8)


세종대부터 사관의 입시가 보다 자유로워짐.


매일 조계에 사관 두 사람이 입시하여 출납하는 모든 일을 기록하라고 명하다

금후로는 매일 조계(朝啓) 사관(史官) 두 사람이 종이와 붓을 가지고 입시하여 일을 기록하고 대언과 함께 물러가며, 조계한 뒤에는 한 사람이 전례에 의해서 일을 기록하라.” 하였다. 처음에 영춘추관사(領春秋館事) 이원(李原등이 글을 올리기를, “삼가 생각하건대 옛 적에 좌우사(左右史)를 두어 말과 일을 기록하였고, 또 지금 명나라에서는 어전(御殿)에서 정사를 볼 적에 태사(太史)로 하여금 붓을 잡고 좌우에 갈라서서 보고 듣는 대로 기록하는데, 우리 조정에서는 국초로부터 사관 한 사람을 입시하게 하였으나, 한 사람이 보고 들은 바를 곧 갖추 기록하지 못하여 물러 나와서 다시 기록하므로, 빠지고 잊음이 없지 않으니, 그 후세에 전할 일에 실로 적당하지 못합니다. 옛 법과 현시의 제도에 의하여 사관 두 사람으로 하여금 붓을 잡고 좌우에 입시하게 하고, 여섯 대언이 나가기를 기다려서 물러가게 하며, 승정원 곁에 가까운 집 한 간을 주어서 사관을 거처하게 하여, 무릇 장계나 하교한 일을 모름지기 사관의 기록을 거친 뒤에 육조와 대간에 내리는 것을 정식으로 삼기를 원합니다.” (세종 7/11/3)


이와 같이 점차 성역이 깨져, 사관은 임금이 머무는 전(殿) 안으로 들어가고, 윤대(국왕과 신하의 독대), 인사 문제를 논하는 자리, 고변자 문초 시, 국가 비밀사 국청할 때에도 배석하게 됨. 이에 따라 왕권 뿐 아니라 신권도 견제.


김종서를 대신할 사람으로 부승지 이세형이 천거되다

좌승지(左承旨) 성염조(成念祖)를 명하여 의정부와 영의정 황희(黃喜)의 집에 가서 의논하여함길도 도절제사 김종서를 대신할 만한 사람을 비밀히 의논하였는데 (세종 22/6/19)


황희·하연·김종서·황보인 등과 변경에서의 야인 수색을 의논하다

임금이 군사를 보내서 파저강(婆猪江) 야인(野人)이 우리 국경을 가만히 엿보는 자를 수색하려고 사인(舍人) 노숙동(盧叔仝)을 불러 비밀히 정부(政府)에 의논하니 (세종 28/5/16)

 

그러나 세종 때에도 사관과의 숨바꼭질은 계속된다.


황희·하연·김종서·정분과 함께 의논하면서 사관에게 피해가라고 하였다

영의정 황희·우의정 하연·우찬성 김종서·우참찬 정분을 불러 비밀리 일을 의논하는데, 중사(中使)가 말하기를, “사관(史官)은 피해 가시요.” 하였다. 사관(史官정신석(鄭臣碩)이 중사(中使)를 통하여 아뢰기를, “()은 직책이 사실 기록함을 맡았으니 듣지 않을 수 없사온데, 만약 다른 사람에게 준례(準例)하여 신을 듣지 못하게 하는 것은 옳지 못한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만약 피하라고 말한다면 피하는 것도 또한 마땅하다.” 고 하였다. (세종 28/8/30)


할머니(인수대비)를 살해하는 등 세상 거칠 것 없던 연산군도 역사에 남는 것은 두려워했다.


사관에게 시정만 기록하고 임금의 일은 기록하지 못하게 하다

“임금이 두려워 하는 것은 사서(史書) 뿐이다[人君所畏者 史而已]." (연산군 12/8/14)


이와 같이, 사관의 입시를 통해 공개정치를 보장했기에 조선왕조는 밀실정치로 인한 권력의 부패 방지가 어느 정도 가능했고, 500년 역사를 이어올 수 있었다.

이에 반해 현재의 위정자는 어떻게 하고 있는가?

오류 투성이에 편향적 시각의 역사 교과서, 자신들의 기록을 폐기하는 정권.

우리 역사 말살과 왜곡은 일본과 중국만 행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바른 역사를 후세에 전하기[傳信於後] 위해서는 우리가 사관이 되어야 한다.


* 참고자료 : <조선왕조실록 어떤 책인가 (이성무)>, <조선왕조실록>


(사진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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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상을 물리고 친척들이 다 돌아간 후, 부모님은 '극장 구경'을 가셨다.

많은 집들이 그러하겠지만 아빠와 엄마는 영화 취향이 다르다.

아니, 취향을 논하기 전에, 아빠는 영화에 별 관심이 없다.

종종 혼자서도 극장에 갈만큼 영화를 좋아하시는 엄마를 따라, 아빠는 대체로 1년에 한 두 번 명절 때나 의무방어전으로 떼우신다.

그렇게 끌려가신 아빠는 영화 상영 내내 상모를 돌리고, 엄마는 그런 아빠가 이제는 창피하지도 않은 것 같더라.


그나마 요즘에는 극장 동행이 뜸하시기에 지난주에 살살 군불을 지폈다.

"연휴도 긴데, 두 분이 영화 보러 안 가세요?"

"그러게. 오랜만에 영화 보러 갑시다~"

(아빠는 자체 음소거)

그래, 서프라이즈로 영화 예매를 해드리자!

어떤 영화가 좋으려나~?


엄마는 <쎄시봉>을 원하셨지만, 아빠는 <국제시장>에 그나마 관심을 보이시더라는 정보를 입수했다.

"<쎄시봉>은 나중에 나 혼자라도 보고 오지뭐~"

그렇게 두 분은 서로서로 절충하여 '극장 구경'을 다녀오셨다.

취향, 가치관, 소통법 등 많은 것이 전혀 다른 두 사람이 만나 오랜 세월을 함께 산다는 것.

포기와 인정, 배려와 희생 그 사이 어디엔가 두 사람이 서 있기에 가능한 것일까?

한때는 엄청나게 투쟁을 했을 그들일진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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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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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현이 등장하는 장면은 많지 않은데, 우리나라 포스터에는 떡하니 투톱으로 등장한다.)



중국 중화TV에서 2011년에 방영한 드라마 <공자孔子>.

공자의 일대기를 비교적 충실하고 차분하게 그렸고 <논어論語>의 구절들을 군데군데 인용한 터라, <논어>를 읽으며 더불어 이 드라마를 보면 공부에 도움이 된다.

주윤발이 공자로 등장하는 영화 <공자-춘추전국시대>는 사실성보다 극적인 재미를 더 추구하지만, 이 역시 함께 보면 공자를 입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좋은 듯하다.

드라마 <공자>에서는 환경에 순응적인 학자로서의 공자를 만난다면, 영화 <공자-춘추전국시대>에서는 전략적인 현실 정치가로서의 공자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총 35편에 달하는 드라마 <공자>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을 꼽는다면 협곡회맹[夾會盟]이다.

공자가 노나라에서 대사구大司寇(현재의 법무부장관)로 있던 기원전 500년(52세 때)에, 제나라가 노나라와의 국경에 위치한 협곡에서 동맹을 맺자고 제안을 해온다.

군사력이 우위에 있는 제나라의 제안이기에 노나라 왕은 끙끙대다 결국 협곡으로 가게 된다.

그 자리에서 제나라 왕은 노나라 왕을 무력으로 협박하나 공자가 덕으로 대응하여, 과거에 제나라가 빼앗아간 노나라 땅을 찾아오는 큰 외교적 성과를 거둔다.

회맹의 자리에서 공자가 <시경詩經>의 '모과[木瓜]'라는 노래를 백성들에게 부르게 하여, 제나라 왕을 부끄럽게 만든 것이 주효했다.

(이건 어디까지나 드라마의 내용이다.)



投我以木瓜, (그녀가) 나에게 모과를 던져 주기에,

報之以瓊琚. 나는 아름다운 옥 노리개를 드렸습니다.

匪報也, 그것은 보답이 아니라,

永以爲好也. 오랫동안 좋은 사이가 되고 싶어서이지요.


投我以木桃, 나에게 복숭아를 던져 주기에,

報之以瓊瑤. 나는 아름다운 옥을 드렸습니다.

匪報也, 그것은 보답이 아니라,

永以爲好也. 오랫동안 좋은 사이가 되고 싶어서이지요.


投我以木李, 나에게 오얏을 던져 주기에,

報之以瓊玖. 나는 아름다운 패옥*을 드렸습니다.

匪報也, 그것은 보답이 아니라,

永以爲好也. 오랫동안 좋은 사이가 되고 싶어서이지요.



옛날 중국에서는 여성이 마음에 드는 남성에게 과일을 던졌다고 하는데, 그 풍속이 녹아 있는 시이다.

마치 요즘의 발렌타인데이에 여성이 초콜릿을 선물하면, 남성이 명품백으로 응하는 것과 비슷하려나?

상대가 내게 하찮은 물건을 주어도 나는 더 큰 사랑으로 대하겠다는 대인배의 마음, 드라마에서 공자는 이것을 외교적 수사로 활용한 것이다.

'당신이 나를 공격하려 해도 나는 맞서지 않을 거예요. 우리 잘 지냅시다.'

지금 우리네 삶에서도 약자가 강자에게 이렇게 손을 내민다면, '호구'로 전락하지 않고 잘 지낼 수 있을까?

이성 관계에서 더 좋아하는 사람이 덜 좋아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손을 내민다면, '어장관리' 당하는 1인이 되지 않을 수 있을까?


(이 35편을 다 보고 나니, 이제 95편짜리 삼국지 드라마 <신삼국新三國>이 기다리고 있구나 ㅜ.ㅜ )



영친왕비 패옥

(출처 : 국립고궁박물관)


* 패옥佩玉 : 옛날 중국에서는 남자가 허리띠에 손수건, 칼, 부싯돌, 필통, 옥 등을 달고 다녔는데, 이 옥을 패옥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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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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