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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채원연구소공감]대표 :: 세종이야기꾼 :: 실록연구자 :: 소통 디자이너 :: 010-8014-7726 :: chewonoh@gmail.com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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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31에 강의한 내용을 공유합니다.

세종 6년, 한해를 정리하며, 저는 열쇠말로 '자신自新'을 제시하였습니다.

'자신'은 '스스로 새로워짐'을 가리키는 유가儒家의 주요 개념으로, 주희朱熹(주자)는 『대학장구大學章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습니다.


自新新民,皆欲止於至善也


스스로를 새롭게 하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은

모두 지극한 선에 머무르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 '자신'은 리더의 자리에 있는 사람에게는 더욱 중요한 덕목입니다.

스스로를 혁신시켜 나가야 할 뿐 아니라 조직원, 아랫사람들에게도 '어제와 다른 참된 나'로 살아가게끔 도와주어야 하기 때문이지요.


'오랑캐'로 불리며 우리보다 문화적으로 열등하다는 평가를 받아온 야인(여진족), 그리고 '트러블 메이커' 양녕대군이 스스로 새로워지기를 기대했던 세종.

이러한 그의 노력은 앞으로도 계속됩니다.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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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23에 강의한 내용입니다.

세종 5년은 매해 연잇는 가뭄과 흉작의 축적으로 인해, 흙을 파먹는 백성들이 있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던 시기입니다.

그래서 저는 열쇠말로 ‘경세제민經世濟民’을 제시하였습니다.

경세제민이 현재 우리가 많이 사용하는 '경제Economy'의 원어라는 사실을 아시는지요?

'세상을 잘 다스려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함'을 가리키던 말이 이제는 경기, 경제활동, 절약 등으로 의미가 한정된 점이 씁쓸합니다.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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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록공감 06_세종과 소방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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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共享生生之樂, 세종실록 24년 1월 7일]

세종과 더불어, ‘나와 다른 당신’과 공감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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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수도방위사령부에 해당하는 한성부漢城府에서 보고가 올라옵니다. 근래에 서울 도성 안에서 하룻밤에도 두세 곳씩 방화로 인해 화재가 일어난다는 내용이었습니다(세종실록 8년 2월 12일).

그로부터 3일 후 한양에 큰 불이 납니다. 현재의 공정거래위원회와 유사하게 시장을 관리·감독하는 경시서京市署와 북쪽의 행랑, 중부·남부·동부의 인가 2천여 호가 연소되고, 사망자는 32명이나 되었습니다.


이렇게 위급한 때 하필 세종은 강원도로 군사훈련인 강무講武를 떠나 서울에 없습니다. 이에 중전인 소헌왕후는 세종을 따라 나서지 않은 신료들을 소집하여, 불끄기를 진두지휘합니다. 이날 점심 때 일어난 불은 저녁에 진화가 되었고, 다행히 나라의 뿌리를 상징하는 종묘를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세종실록 8215일).


강원도에서 강무하던 세종은 화재에 대한 보고를 받고, 서울로 돌아갈 차비를 합니다(세종실록 8년 2월 16일). 그런데 그 사이에 또 큰 불이 일어납니다. 현대의 구치소에 해당하는 전옥서典獄署와 행랑 8간, 종루鍾樓(현재 보신각) 동쪽의 인가 2백여 호가 연소되었습니다(세종실록 8년 2월 16일). 당시 한양 내 인가가 18,794호였는데(세종실록 지리지), 이틀간 약 13%가 연소되는 큰 사고였습니다.

피해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화재로 인해 도둑이 기승을 부리고, 불이 번지지 않은 집에서도 황급히 화재를 피하다가 재산을 전부 망실하였습니다(세종실록 8년 2월 16일).


서울은 극도로 혼란한 상황이었겠지요. 이에 세종은 화재를 입은 백성들에 대한 식량・치료・장례 등의 지원책(세종실록 8213일), 그리고 집을 지을 재목을 마련할 방도를 지시합니다(세종실록 8219일). 또한 주택 바깥에 방화벽을 쌓고, 성내의 도로를 넓게 만들어 진입을 용이하게 하는 등 화재 방비책을 수립합니다(세종실록 8220일). 불탄 가옥의 보수를 위해 별요別窰를 설치하여 싼 값으로 기와를 보급하게도 합니다(세종실록 8229일).


가장 획기적인 정책은 소방청의 효시라 할 수 있는 ‘금화도감禁火都監’을 설치하고, 24명으로 행정조직을 구성한 것입니다(세종실록 8226일). 아울러 금화도감에서 소방할 때에는 통금시간에도 출동할 수 있도록 신분증을 제공하는 등 상설기관으로서 소방의 기능을 수행하도록 합니다(세종실록 8년 3월 3일).


이어서 소방관에 해당하는 금화군禁火軍에 대한 정책을 보강합니다. 급수를 지원해줄 인원과 소방장비 지급에 대한 세부 사항, 그리고 소방에 공로가 있는 금화군의 포상책 등을 국가 차원에서 마련합니다(세종실록 13년 5월 13일).


대통령 공약사항 중 하나였던 소방청 독립이 정부조직법 개정안 시행일인 지난 7/26에 이루어졌습니다. 세월호 참사를 겪으며 박근혜 정부는 소방방재청을 해체하고, 신설한 국민안전처에 소방 사무를 흡수시킨 바 있는데요. 이번에 국민안전처를 폐지하며, 행정안전부 소속으로 소방청을 신설한 것입니다. 소방 조직이 독립 기구로 개편된 것은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이라고 합니다.


소방청 독립에만 박수칠 일이 아닙니다. 이젠 소방관의 처우 개선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최근까지 소방관이 대부분 지방공무원의 신분이기에, 지방자치단체의 부족한 예산으로 인한 고충이 컸습니다.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며, 목장갑을 끼고 화재현장에 나선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들리기도 했지요. 이제 소방청으로 격상한 만큼 국가가 소방관의 안전과 자존감을 지켜주기를 바랍니다. 소방관은 국민을 보호하는 국민입니다.


* 참고문헌 :

1.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2. 경향신문, 2017-07-20, 「중소기업청 ‘부’로 격상하고 소방청 신설」.

3. 소방방재신문, 2017-07-21, 「역사상 첫 단독 소방청 탄생… 세부 조직 초읽기」.

4. 인사이트, 2017-06-08, 「'소방청 부활'로 개선 기대되는 소방관들의 처우 5가지」.

5. 한국경제, 2017-05-10, 「지자체 예산 없어 목장갑 끼고 출동하는 소방관…'국가직 공무원' 숙원 이룰까」.


(사진 : 인사이트)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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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2(토)에 신청서 마감 및 검토를 마친 후, '통通'을 받은 분들께 직접 알려드릴 예정입니다.

세종을 포함한 옛 왕들은 책문을 통해 국정 운영에 도움이 될만한 말을 청취하고자 하였습니다.

여러분께서 제출해주실 신청서가 [실록공감], 세종, 공부 등에 대해 경청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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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에 강의했던 세종 4년에 대한 내용입니다.

이 해에는 아버지 태종이 훙서하는 큰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열쇠말로 ‘그칠 지止’를 선정했습니다.

그간 아버지 태종은 상왕으로서 국정 운영의 키를 쥐고 있었는데요.

그의 죽음으로 이제 태종의 시대는 그치고, 본격적으로 세종호가 출발합니다.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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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에 강의했던 세종 3년 차에 대한 내용입니다.

이 해의 열쇠말을 저는 ‘실정實情’으로 설정했습니다.

백성들이 실제 처한 상황, 그리고 거기에서 비롯된 정서를 파악하고자 노력하는 신입 군주의 노력이 돋보인 해였기 때문입니다.


뉴스에 자주 오르는 보직으로 민정수석이 있습니다.

이때의 민정은 '民政'이 아니라 '民情'입니다.

즉 민중의 뜻을 파악하고 공유하는 업무가 바로 민정수석임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정치뿐 아니라, 우리네 삶에서 원칙과 더불어 중요한 것은 그것이 ‘실제, 현실에 부합하는가?’일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상대에 대한 공감능력이 필요합니.

앞으로 세종이 신료들, 백성들과 어떻게 공감해나갈지 기대해주세요.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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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록공감 05_세종과 고기사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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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共享生生之樂, 세종실록 24년 1월 7일]

세종과 더불어, ‘나와 다른 당신’과 공감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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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이 고기를 좋아했다면서요?”

많은 분들이 제게 ‘세종 고기덕후설’의 진위에 대해 물어옵니다.

우선, 답은 ‘예’입니다.

실록을 보면, 세종의 ‘고기 사랑’은 아버지의 입을 통해 주변인들에게 널리 알려집니다.

“주상(세종)이 젊었을 때부터 고기가 아니면 밥을 먹지 못했다”고 태종이 증언한 이후(세종실록 2년 8월 29일), 주변인들은 열심히 고기를 챙기지요.


고기는 맛있기도 하지만, 여러 효용 가치를 내포합니다.

“먹는 것은 백성의 근본이 되고, 곡식은 소의 힘에서 나오므로” 농경사회에서 소는 무척 귀한 존재였습니다.(세종 7년 2월 4일)

국법으로 그 도살과 판매를 관리할 정도였지요.(세종 7년 2월 8일)

또한 닭・꿩・양의 고기는 의원醫員들이 갈증을 멎게 하는 약으로 세종에게 추천한 식품이었습니다.

그러나 닭은 이어댈 수 없고, 꿩은 사냥해야 하고, 양은 우리나라에서 나지 않는 등의 이유로, 너무 약이 호사스럽다며 받아들이지 않으셨지요.(세종실록 13년 3월 26일)


옛사람들은 불행한 일을 맞았을 때 삼가는 모습을 보이며, 이러한 고기와 같은 고급 음식을 드시지 않았습니다.

세종도 어머니인 원경왕후(세종실록 2년 8월 29일), 태조의 맏딸 즉 고모인 경신공주(세종실록 8년 3월 25일), 이복동생인 혜령군(세종 22년 6월 29일), 며느리인 세자빈 권씨(세종 23년 7월 29일) 등 가족 및 친인척의 상사를 당했을 때에 짧게는 며칠 길게는 한 달 이상 고기 없이 식사를 하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함께 일해 온 신료의 초상에도 반드시 3일 간은 소찬을 드셨습니다.(세종실록 8년 3월 25일)


세종은 초상 외에도 이상기후나 흉작을 맞으면, 고기 반찬을 정지시킵니다.

신하들은 태종의 유교를 언급하며 고기를 드시라 간청하지만, 세종은 이를 강력하게 뿌리칩니다.

이처럼 본인은 갖가지 이유를 대며 소찬素饌을 고집하지만, “나이 많은 늙은 대신은 하루라도 고기가 없어서는 안 된다”며 주변인의 섭생을 챙깁니다.(세종실록 28년 3월 27일)


사랑하는 부인 소헌왕후가 먼저 저 세상으로 떠났을 때의 일입니다.

본인이 소찬을 드시는 것은 물론, 자녀들에게 묽은 죽만 마시게 하고 5일만에야 비로소 밥을 먹게 하셨던 분이(세종실록 28년 3월 24일), 늙은 신하들에게는 “50세 된 사람은 고기가 아니면 배부르지 않다”며 고기를 권합니다.(세종실록 28년 3월 28일)


이는 맹자가 한 말과도 맥이 닿는데요.

“50세가 되면 비단 옷이 아니면 따뜻하지 않고, 70세가 되면 고기가 아니면 배부르지 않다. 따뜻하지 않고 배부르지 않은 것을 ‘헐벗고 굶주림[동뇌凍餒]’이라 한다.”(『맹자孟子』「진심 상盡心上」)

맹자는 노인을 잘 보살피는 것을 ‘왕도정치王道政治’라는 이상향의 근본으로 제시한 바 있는데요.

세종 또한 약자가 ‘배부르고 등 따신’ 사회를 추구했습니다.


오늘(7/12)이 초복初伏으로, 무더위의 개시를 알리는 절기입니다.

‘보양식을 먹는 날’을 넘어, 노약자의 사망률이 급증하는 시기가 이제 시작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진정한 ‘고기 덕후’라면, 고기 먹기 힘든 이들의 처지를 떠올려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세종이 고기를 좋아했다면서요?”

예, 앞서 본 것처럼, 세종에게 ‘고기는 사랑입니다’.


* 참고문헌 :

1.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2. 아시아경제, 2017-07-12,「어르신들 원기회복 위한 초복 삼계탕 봉사」.


(사진 : 아시아경제)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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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25에는 재위 2년째를 맞은 세종을 알아가는 시간이었습니다.

이때 어머니인 원경왕후가 돌아가시는 큰 일을 겪는데요.

맏이 양녕대군 편에 서서 세자 교체를 반대했던 어머니께 보이는 세종의 효성에 아버지 태종이 감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내가 대비와 주상의 간 곳을 몰랐는데, 오늘에야 알고보니 주상이 대비의 학질()을 근심하여 몸소 필부의 행동을 친히 하여, 단마(單馬)로써 환자 두 사람만을 데리고 대비를 모시고 나가 피하여 병 떼기를 꾀하니, 심히 그 효성()을 아름답게 여긴다." (세종2/6/7)



여기에 대해 중용中庸』의 '성誠' 개념을 연결하여 이날의 마무리를 지었습니다.

誠者,天之道也;誠之者,人之道也。(성이라는 것은 하늘의 도이고, 성을 행하는 것은 사람의 도이다.)

정말 정성 가득한 세종의 모습이 그려진 해였습니다.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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