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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채원연구소공감]대표 :: 세종이야기꾼 :: 실록연구자 :: 소통 디자이너 :: 010-8014-7726 :: chewonoh@gmail.com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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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사는 세종이야기꾼 오채원이 오마이뉴스에 연재하고 있는 '실록 읽어주는 여자' 시리즈 중 양녕대군의 실패한 교육에 대한 내용입니다. 기사 바로 가기 omn.kr/1nq84)

 

조선 중기의 어린이용 한자 학습서 『훈몽자회訓蒙字會』에서는 ‘師’를 ‘스스ᇰ ᄉᆞ’, 곧 ‘스승 사’라고 풀이합니다. 이 ‘스승’이라는 단어의 어원에 대한 여러 추정 중에는 불교의 사승師僧에서 왔다는 설이 있습니다. 수행자를 지도하거나 수행자가 존경하는 승려를 가리킨다는 것인데요. 이는 불교라는 종교색을 지우더라도, 현재 통용되는 ‘스승’의 의미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결국 스승이란 지식을 파는 노동자를 넘어, 상대의 정신적 성장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존재이니까요.

그런데 ‘미래 권력’인 양녕에게 스승이란 없었던 모양입니다. 책상머리 공부를 즐기지 않는 양녕의 마음에 들려니, 선생님이 심지어 공부를 방해하기도 합니다.

 

(조선 중기의 어린이용 한자 학습서 『훈몽자회』를 박아내는 책판. 출처 : 문화재청)

(세자시강원의) 세자좌필선世子左弼善인 김주金稠를 파면하였다......“김주는......강의할 때 아부하고 아첨해서 세자에게 잘 보이는 것을 기쁨으로 삼으며, 세자께서 작은 선행이라도 하면 꼭 칭찬하여 교만한 태도를 길러주고......세자께서 『맹자孟子』를 읽을 적에, 날마다 50여 편을 외우니, 김주가 ‘그 뜻을 알면 한 번만 읽더라도 괜찮습니다. 어찌 이처럼 부지런히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라며 말렸습니다.” (태종실록 7년 2월 3일)

 

세자빈객 이내李來와 변계량卞季良을 경연청經筵聽(임금을 위한 강습 기관)에 호출해, 주위의 사람들을 물리치고 명을 내렸다......“서연의 어리석은 선비들이 ‘(양녕이) 장차 임금이 될 것이다’ 라는 생각에 위축되어 쓴말을 하지 못하고, 대간臺諫(현 검찰·감사원·언론기관)도 그렇다. 그대들은 이미 재상이 되었는데, 무엇이 두려워 감히 바른 길로 (세자를) 인도하지 못하는가?” (태종실록 15년 1월 28일)

 

사헌부司憲府(현재의 검찰 및 감사원)에서 상소하였다......“세자빈객 조용趙庸, 변계량......등이 바른 마음씨와 밝은 학문으로써 강의하지 않고, 아부와 아첨만을 일삼아 무조건 ‘예 예’ 하고, 따라서 세자가 도리가 아닌 길에 빠지게 했습니다.” (태종실록 18년 6월 4일)

 

책 『삶을 바꾼 만남』에서는 황상黃裳이 정약용丁若鏞에게 가르침을 받게 된 일이 그야말로 ‘삶을 바꾼 만남’으로 그려집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몸소 가르침을 주는 스승이라는 존재의 무게와 감동을 느낄 수 있는데요. 정치적으로 배척당하며 떠나온 고달픈 유배 생활 가운데, 자신을 진심으로 따르는 제자를 만나게 된 일이 정약용에게도 ‘삶을 바꾼 만남’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양녕의 선생님들은 ‘팔자를 바꾼 만남’을 기대한 모양입니다. 15년간 공고했던 세자라는 양녕의 지위 앞에서 쩔쩔매는 것을 보면 말이지요. 강력한 왕권을 추구했던 태종의 후광을 받아, 그의 맏아들에게서도 공고한 권력을 인식했을 것입니다.

 

조선은 태조-정종-태종에 이를 때까지 왕위 계승의 원칙에서 벗어난 임금이 배출되었습니다. 그 가운데 정치 논리로 인해 여러 차례 혈육이 제거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태종은 피의 역사를 끊기 위해, 적장자를 세워 ‘엘리트 코스’를 밟은 후계자로 길러내겠다는 의지가 강했으리라 추측 가능합니다.

 

양녕의 방탕함 고치고 싶었던 태종의 초강수

 

하지만 태종의 바람과 달리, 선생님들에게 미래 권력을 훈육하는 일은 녹록치 않았습니다. 그 가운데 동생 충녕대군은 태종에게 존재감을 획득해가고, 이러한 양상이 양녕의 선생님들에게 위협적으로 보였던 모양입니다. 양녕 또한 충녕의 지적 우위를 의식하고 때때로 질투합니다.

 

(세자가 말하였다.) “충녕은 보통 사람이 아니다.” (태종실록 14년 10월 26일)

 

(충녕과 시 짓기를 주고받으며) 임금이 기뻐서 “세자가 도달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하였다. 세자가 예전에 임금 앞에서, 사람들의 학문과 무예에 대해 토론하다가 “충녕은 용맹하지 못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설령 용맹하지 못하더라도, 큰일에 직면했을 때 큰 의문점을 분별해내는 데에는 당대에 견줄 사람이 없다.” (태종실록 16년 2월 9일)

 

이때에 충녕대군이 배우기를 좋아하니, 세자빈객 이내와 변계량 등이 시기하여 여러 번 서연에서 충녕대군을 칭찬함으로써 세자를 분발시키고자 하였다. 변계량이 매번 충녕대군의 시관侍官에게 읽는 것이 무슨 글인가 하고 물어서, 무슨 글을 읽는다고 대답하면 반드시 칭찬하고 감탄하였다. (태종실록 16년 9월 7일)

 

선생님들은 충녕의 학습 수준과 태도를 칭찬하며 양녕의 경쟁심을 부추겨 봅니다. 그러나 이 충격요법도 그다지 효과가 없었던 모양입니다. 대체로 경쟁자를 이기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각고의 노력으로 나의 실력을 키우거나, 상대를 깎아내려서 위안을 얻는 일명 ‘정신승리’를 들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양녕은 후자를 택한 것으로 보입니다. 자신이 충녕보다 낫다고 생각되는 점을 부친 앞에서 불쑥 말하는 것을 보면 말이지요.

시간이 지나도 개선의 여지는 보이지 않고, 심지어 선생님이 양녕의 반성문까지 대신 써줍니다. 자기소개서 대필, 수행평가 대행 등을 해주는 요즘의 일부 학원·과외 선생님이 떠오르는 대목입니다.

 

세자가 종묘에 아뢰니, 그 글은 이러하였다......“아뢴 뒤 (개과천선하겠다는) 이 말에 변함이 있으면, 조상의 영혼께서는 반드시 벌을 내려 (저를) 용서하지 마소서.” 또 주상께 글을 올렸는데......“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저를) 가엾게 여겨 주소서.” 종묘에 올린 맹세와 주상께 올린 글은 모두 빈객 변계량이 지은 것이었다. (태종실록 17년 2월 22일)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고치겠다고 이미 하늘에 맹세까지 한 바 있건만, 양녕의 비행은 반복됩니다. 여성 스캔들이 잦았던 양녕이 이번에는 남의 첩인 어리於里라는 여성을 궁궐로 몰래 데려옵니다. 이 사건은 후일 폐세자가 되는 도화선이 되는데요.

태종은 이번 기회에 양녕의 방탕함을 고치고 싶어 합니다. 양녕을 장인 김한로의 집으로 보내고, 궁중에서 지급하던 양식을 끊도록 명령을 내리는 등 초강수를 둡니다. 요즘으로 보자면, 집에서 쫓아내고 신용카드를 정지시키는 것과 비슷할까요?

 

임금은 사적 개인에 그칠 수 없는 공적 존재

 

태종의 의중을 파악한 세자시강원의 선생님들은 양녕에게, 종묘에 모신 조상들께 반성문을 올림으로써 아버지에게 강한 개선의 의지를 보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반성문의 작성을 양녕은 선생님에게 떠넘깁니다. 양녕도 선생님도 ‘이번만 무사히 넘기자’라는 안일한 생각을 했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1년 정도 지내던 양녕은 또 다시 여성 스캔들을 일으키고, 이를 지적하는 아버지에게 대듭니다.

 

세자가 환관 박지생을 보내 직접 쓴 손 편지를 (태종께) 올렸는데, 사연은 이러하였다. “전하의 시녀는 다 궁중에 들이는데, 어찌 다 귀중하게 여겨 받아들이십니까?” (태종실록 18년 5월 30일)

 

“내가 세자의 글을 보니, 놀라서 몸이 움츠러들고 가르치기가 어렵겠다 싶구나.”......“이 아이는 마음을 고치기 어렵다. 그 말의 기세를 본다면 양녕이 정치를 하는 것이 사람들에게 재앙이 될 지 복이 될 지 예측하기가 어려우니......서연관으로 하여금 잘못된 일을 고치도록 말하고, 서연에 나오게 하여 잘 성장시켜야 마땅하겠다. 이와 같이 해도 마음을 고치지 않는다면, 선례에 따라 처리하겠다.” (태종실록 18년 6월 1일)

 

의정부議政府(조선 최고 행정기관), 조선 건국에 공을 세운 공신들, 육조六曹(행정 실무를 담당하는 여섯 부서), 삼군 도총제부三軍都摠制府(모든 군사를 관할하는 기관), 한양 모든 관청의 관리들이 글을 올려, 세자를 파면하도록 청하였다. (태종실록 18년 6월 2일)

 

양녕은 ‘아버지도 여성 편력이 있으면서 어째서 자신만 탓하느냐’고 정면으로 맞섭니다. 이는 단순히 한 사안에 대한 이의제기나 불평을 넘어, 현재 권력에 대한 미래 권력의 도전으로 비쳐질 수 있습니다.

아울러 임금은 어쩔 수 없이, 사적 개인에 그칠 수 없는 공적 존재입니다. 설령 개인적 판단에 따라 결정을 내린다고 해도 그 파급은 국가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태종이 사사롭게는 양녕에게 아버지이지만, 동시에 국가의 명운을 책임져야 하는 정치인입니다.

이는 국가의 공식적 2인자로 정치적 존재가 되어버린 세자에게도 해당되는 사안입니다. 따라서 권력을 남용해 국가의 공적 조직이나 조직원을 사익 추구에 사용하거나, 국정에 개입하려는 사사로운 무리를 방조하여 ‘비선 실세’의 여지를 두어서는 안 되는 법입니다.

 

양녕대군, 태양에 가장 가까이 다가갔던 사람

 

여기에까지 생각이 미친다면 태종은 후계자에 대해 면밀하게 재고再考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미 1·2차 왕자의 난, 처가인 여흥 민씨 일가의 처단 등과 같은 사건을 통해, 한때 동지였던 혈족 및 친인척을 정치적 혹은 생물적 사망에 이르게 한 바 있습니다. 눈물을 머금고 자신의 아들도 정치적 맥락에서 재단해야 하는 시점에 도달한 것입니다.

태종 입장에서 임계점에 다다른 것은 물론, 나라의 여론도 양녕의 편이 아닙니다. 국정 운영에 관여하는 상급·하급 공무원들이 세자의 파면을 요구합니다.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양녕의 선생님들도 더 이상은 막아주지 못합니다. 이제는 그들도 세자 교체를 요청하는 여론에 합류합니다. 스승과 제자 사이의 인정과 도리는 비정한 정치 논리와 공적 시스템 속에 매몰되어 버린 것입니다.

 

양녕의 세자빈객 곧 선생님이었던 변계량은 두 달 후, 세종의 지경연사知經筵事로 자리를 옮깁니다. 지경연사는 임금이 고전과 동시에 국정을 토론하는 자리인 경연經筵을 담당하는 정2품 관직입니다. 세자의 선생님에서 임금의 선생님이 되었으니, 영전榮轉을 한 셈입니다. 그 후 변계량은 약 20년간 국가의 학문을 상징하는 ‘문형文衡’으로서, 세종의 주요 국정운영 동반자가 됩니다.

 

양녕대군은 이카로스Īkaros처럼 태양에 가장 가까이 다가갔던 사람입니다. 그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면, 생명을 담보할 수 없습니다. 단종 복위 운동에서 볼 수 있듯이, 과거 권력을 재추대하고자 하는 무리가 있을 수 있으므로, 당사자를 사전에 제거해버리기 마련입니다. 실제로 세종 6년에, 양녕이 왕이 됐으면 세상이 더 좋아졌을 것이라는 불충한 말을 한 향리들, 양녕이 군사력을 장악하려 한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린 군인을 처벌하기도 합니다. 세종이 보호해주어 양녕은 세종보다 장수하지만, 통상적으로 ‘폐세자=사망’이라 충분히 유추할 수 있었습니다.

 

(제자) 안연이 죽자, 공자가 말하였다. “슬프다! 하늘이 나를 버리는구나! 하늘이 나를 버리는구나!” 안연이 죽자, 공자가 애통하게 곡을 하였다. 따르던 제자가 말하였다. “선생님은 지나치게 슬퍼하십니다.” 공자가 말하였다. “내가 지나치게 슬퍼한다고? 안연을 위해 슬퍼하지 않으면, 내가 누구를 위해 슬퍼하겠느냐?” (『논어論語』 「선진先進」)

 

동양 고전의 교과서 격인 『논어』에서, 공자는 제자 안연이 사망하자 통곡합니다. 어찌나 비통해 하는지 다른 제자들이 서운해 할 정도입니다. 이에 비해, 양녕의 선생님들이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제자를 위해 진정 통곡했는지 의문입니다. 정치 논리 앞에서는 마음으로 울어주는 사제 관계는 없는 것인가 봅니다.

 

(양녕대군의 교육 실패는 학부모 태종의 학습 방침이 확고하지 못한 이유도 있어 보입니다. 이번 시리즈의 마지막 편인 양녕에 대한 태종의 교육법에 대해서는 다음으로 이어집니다.)

 

(양녕대군의 선생님 중 한 사람인 변계량의 문집 『춘정집春亭集』. 출처 : 국립전주박물관)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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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 읽어주는 여자'는 세종이야기꾼 오채원이 매주 오마이뉴스에 연재하고 있는 시리즈입니다. 기사 바로 가기 omn.kr/1nooz)

 

임금(태종)이 일찍이 충녕대군(이후 세종)에게 말하였다. “너는 할 일이 없으니, 평안하게 즐기기나 하여라.” 그리하여 서화書畫(글과 그림), 화석花石(무늬 돌), 금슬琴瑟(서로 짝을 이루는 현악기) 등 모든 놀이의 내용을 갖추지 않음이 없었기에, 충녕대군은 예술에 정통하였다. (태종실록 13년 12월 30일)

 

태종은 왕자시절의 세종에게 ‘방목형 교육’을 제공합니다.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라는 태종의 자상해 보이는 말은, 왕이 될 가능성을 ‘꿈도 꾸지 마라’는 셋째 아들에 대한 경고였던 셈입니다. 덕분에 세종은 예술을 기반으로 한 ‘자기주도적 학습’으로 청소년기를 보낼 수 있었습니다.

이에 비하여, 양녕대군은 11세의 나이에 세자로 책봉된 이후, 가업 승계 교육을 받아야 했습니다. 태종에 이어 임금이 되어야 한다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맏아들의 숙명이었지요.

 

태종은 34세의 나이에 세자로 책봉된 바 있습니다. 제2대 임금인 정종이 자신에게 적자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며 동생인 정안공靖安公(이후 태종)을 후계자로 지목한 것인데요. 정종실록을 보면, 정안공이 세자의 자리에 있었던 기간이 9개월 남짓인데, 그나마 교육받은 횟수는 3회밖에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태종이 고려시대에 문과 급제한 엘리트라 해도, 그가 접한 학습은 공무원의 직무에 한정된 내용이었습니다. 따라서 왕위에 오른 후에는 세자 교육의 부족을 체험하고, 자신의 후계자는 체계적으로 양성하리라 다짐했을 것입니다.

 

조선시대에는 세자를 위한 교육제도이자 교육장인 서연書筵, 세자 교육을 맡은 관청인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여기에서 교육을 수행할 세자사世子師(정일품正一品, 의정부 영의정 겸직) 및 세자부世子傅(정1품, 좌·우의정 중 1인 겸직), 세자이사世子貳師(종1품, 찬성이 겸임), 세자빈객世子賓客(정·종2품), 보덕輔德(종3품), 필선弼善(정4품), 문학文學(정5품), 사서司書(정6품), 설서設書(정7품) 등을 두었는데요. 현재 1인자의 맏아들이자 미래의 1인자를 길러내는 일이므로, 변계량 등 당대 최고의 학자들을 선생님으로 모셨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양녕대군에 대한 세자 교육은 실패로 끝납니다.

현대 교육학에서는 교육의 주체를 대체로 학습자·학부모·교사로 봅니다. 양녕의 교육이 실패로 끝난 이유를 이 세 측면에서 살펴보겠습니다.

 

‘가문의 영광’ 위해 ‘입시 지옥’에 빠지다  

양녕대군은 임금이 갖추어야 할 지식·태도·역량의 함양이라는 단일한 목표를 향한, 그리고 본인의 선택과 무관한 공부를 해야 했습니다. 요즘 식으로 보자면 ‘가문의 영광’을 위해 ‘입시 지옥’에 빠진 수험생과 같다고 할까요? 차이가 있다면, 경쟁자도 동료도 없으며, 합격은 ‘떼어 놓은 당상’인 점일 것입니다. 그러니 학습에 대한 동기부여가 부족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게다가 양녕은 대체로 책상 앞에 앉는 공부에 별 취미가 없어 보입니다.

 

임금이 글을 외우도록 명했는데 세자가 외지 못하였다. 임금이 (양녕의 시중을 드는) 환관의 종아리를 때리고 명을 내렸다. “나중에도 이와 같으면 반드시 서연관을 벌하겠다.” (세자시강원의) 문학 허조許稠를 시켜 이 말로써 세자에게 경고했다. (태종실록 5년 9월 14일)

 

사간원司諫院(왕권을 견제하는 언론기관)에서 상소하였다......“신들이 일전에 서연 일기를 보니, 닷새 동안에 잇달아 경전 해석한 날이 적습니다.” (태종실록 12년 5월 19일)

 

세자가 팔뚝에 매를 받치고 궁궐 문 밖으로 나가고, 또 아프다며 핑계대고 강의를 듣지 않았다......세자가......“내가 병이 있으니 회복되면 저녁에 당직하는 서연관과 함께 복습을 하겠다.” 라고 말하였으나, 저녁이 되어도 그대로 하지 않았다. (태종실록 16년 10월 21일)

 

(매 사냥꾼을 찍은 1930년 사진. 출처 :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역사아카이브)

양녕대군의 장래는 태종을 이어서 보위에 오르는 오로지 한 길밖에 없었습니다. 이는 양녕에게 한 편으로 큰 혜택이지만, 또 달리 본다면 자신이 조절할 수 없는 상황이기도 합니다. 이를 해석하는 것은 자신의 선택입니다. 건강한 현실 감각을 가졌다면, 양녕은 한정적 환경 내에서도 스스로 목표를 설정하고 학습에 몰입할 수 있었습니다. 의욕이 있으면 인내심을 갖고 끈질기게 도전하게 되는 법입니다.

그러나 양녕은 복습을 한다거나 몸이 아프다거나 하는 등의 이유를 들어 종종 강의에 결석합니다. 이러한 사실이 태종에게 알려져서, 자신을 보좌하는 환관이 대신 매를 맞거나, 스승들이 파면되기도 합니다. 그때마다 양녕은 잠시 조심하는 것 같다가도, 다시 사냥 등의 유희에 탐닉하며 공부를 게을리 하기 일쑤입니다. 신하들이 말려도 몰래 사냥을 나갔던 태종의 기질을 양녕은 일부 물려받은 모양입니다.

 

임금이 말하였다......“세자의 천성을 보아하니, 틀림없이 사냥을 좋아한다.” (태종실록 15년 10월 17일)

 

세자가 보덕 조서로에게 “내가 활을 쏘고자 하는데 어떠한가?” 하니, 조서로가 “대군의 상제가 이미 삼칠일을 지났으니 쏠 수 있습니다.” 하여, 세자가 내사복문內司僕門 밖으로 나가서 230여 보步를 쏘았다. (태종실록 18년 2월 28일)

 

우빈객 계성군 이내李來 등이 나아가 말하였다. “음악과 여색, 매와 개는 마땅히 멀리하고 끊어야 합니다. 요즘 듣자하니, 저택 안에 연주자를 끌어들여 거문고를 타고 피리를 불고, 또 매 2련連을 두셨다 합니다. 이 말이 밖에 들리면 저하가 공부한 보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태종실록 11년 10월 17일)

 

양녕은 어찌나 사냥을 좋아하는지 그와 유사한 놀이도 즐겼는데, 심지어 친동생인 성녕대군이 사망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도 애도하기보다 활을 쏘러 나갑니다. 사냥에 쓰이는 매와 개 기르기, 그리고 그 외의 온갖 유희에 탐닉합니다. 여성편력으로 인해 부모님의 걱정을 사기도 하지요.

 

사헌부에서 아뢰었다. “동궁東宮(세자의 궁) 북쪽 담 밑에 작은 지름길이 있으니, 반드시 몰래 숨어서 드나드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임금이 동궁의 어린 환관을 불러들여 국문하게 하니, 과연 예빈시禮賓寺(왕실 잔치 등에 음식 공급을 맡은 관청)의 종 조덕중......등이 몰래 평양 기생인 소앵을 동궁에 바친 지 여러 날이 되었다.......세자가 밥을 먹지 아니하니, 정비(모친 원경왕후)가 환관을 시켜 세자에게 말하였다. “너는 어리지도 않은데 지금 어째서 부왕께 이와 같이 노여움을 끼치느냐?” (태종실록 13년 3월 27일)

 

양녕대군에게 부족했던 이것  

‘개구멍’까지 파고 궁 안으로 기생을 들여온 사건이 발각됩니다. 이 지경이 되자, 아들 셋을 잃고 난 뒤에 얻은 아들이라 양녕을 애지중지해온 모친이라도 두고만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양녕은 반성의 기미도 없이 ‘단식투쟁’을 벌입니다. 이러한 양녕의 절제·사유·성찰 없음은 추후 세자에서 폐위되는 빌미가 됩니다.

 

옛 사람들에게 성찰은 공부의 시작점이자 종착지였습니다. 보는 이가 없는 곳에서도 몸과 마음을 바로 잡도록 스스로에게 촉구했습니다. 단순한 지식 충족에 그치지 않고, 부끄러움을 아는 윤리적 자아를 갖추는 것이 공부에서 필수적이었습니다. 그래서 국가의 최고통수권자인 임금에게도 전문적으로 비판을 가하는 사간원이라는 언론기관을 두었고, 관직에 오르지 않은 학생, 더 나아가 유식하지 않은 ‘풀 베는 촌부와 나무꾼’, 즉 백성의 의견도 들어야 했던 것입니다. 이는 자신의 오류를 인식하고, 현실 세계에 대한 감각을 개발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현대적 교육학의 관점에서도, 공부의 목적은 보다 나은 자신으로의 변화 혹은 성장에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자신을 돌아보고 점검하는 태도, 또 주변의 조언을 경청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양녕에게서 부족해 보입니다.

 

임금이 말하였다. “세자가 식사를 하지 않는 것은 (혼난 후) 분함을 이기지 못해서이다......세자의 불손한 마음은 세자라는 자신의 자리를 지나치게 믿기 때문임이 분명하다. 만약 뉘우치지 않는다면, 왕족 중에 (세자로) 적당한 사람이 어찌 없겠는가?” (태종실록 13년 8월 15일)

 

세자가 말하였다. “요즘 내가 아무 일도 한 것이 없는데, 주상께서 진노하신 이유를 아직 자세히 모르겠다.” 세자빈객 이내李來가 말하였다. “바로 그것이 저하가 가진 나쁜 병의 원인입니다. 저하의 뱃속에 가득 찬 것은 모두 사사로운 욕심뿐입니다......전하의 아들이 저하뿐인 줄 아십니까?” (태종실록 15년 1월 28일)

 

세자가 말하였다. “(태종의 신뢰를 받지 못하는 것은) 나에게 과실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일러바치는 사람이 있어서이다.” (태종실록 17년 3월 23일)

 

양녕은 부끄러움을 알아야 한다는 질책·비판·우려에 귀 기울이지 않고, 오히려 남을 탓합니다. 밖에서는 양녕의 외줄타기가 위태로워 보이나 이를 자신만 모르는 듯합니다. 태종과 선생님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양녕은 세자라는 자신의 지위가 언제까지나 확고하리라 믿었기에 마음공부를 게을리 한 것 같습니다. 세자로서 누릴 수 있는 권리, 그리고 이에 따른 의무의 균형을 모르는 양녕의 패착은 다음과 같이, 선생님들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한 탓도 있어 보입니다.

 

(양녕대군의 교육 실패에 있어서 교사의 역할에 대해서는 다음 편에서 이어집니다.)

 

(글씨에 능했다고 전해지는 양녕대군의 친필을 새긴 ‘숭례문’ 목판. 출처 : 문화재청)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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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27에는 세종 9년을 함께 읽었습니다.

이날 강의 내용에는 명나라 조공 및 사신의 횡포, 양녕대군으로 인한 논쟁, 황희의 사위인 서달徐達의 살인 및 그 조작 등 굵직한 사건들이 많았습니다

그 중에서도 저는 집현전응교集賢殿應敎 권채權採의 잔혹한 행적과 관련된 세종의 언급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권채는 "시문詩文을 다 잘하여 문형文衡을 받아 왔다"(세종 20년 5월 10일)고 평가를 받을 만큼 당대 최고의 문장가이며, 세종의 총애를 받았던 인물입니다.

그의 정부인은 심한 투기로 첩인 덕금을 동물 이하로 학대했고, 권채는 이를 알면서방관했지요. 

거의 시체에 가까운 덕금의 모습이 우연히 발각되었고, 그 처리 문제로 인해 논쟁이 일어납니다.

이에 대해 세종이 말씀하시지요.


"임금의 직책은 하늘을 대신해 만물을 다스리니, 만물이 그 처소를 얻지 못하여도 대단히 상심할 것인데 하물며 사람일 경우야 어떻겠는가[人君之職, 代天理物, 物不得其所, 尙且痛心, 況人乎]. 진실로 차별없이 만물을 다스려야 할 임금이 어찌 양민良民과 천인賤人을 구별해 다스릴 수 있겠는가.” (세종실록 9년 8월 29일)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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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31에 강의한 내용을 공유합니다.

세종 6년, 한해를 정리하며, 저는 열쇠말로 '자신自新'을 제시하였습니다.

'자신'은 '스스로 새로워짐'을 가리키는 유가儒家의 주요 개념으로, 주희朱熹(주자)는 『대학장구大學章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습니다.


自新新民,皆欲止於至善也


스스로를 새롭게 하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은

모두 지극한 선에 머무르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 '자신'은 리더의 자리에 있는 사람에게는 더욱 중요한 덕목입니다.

스스로를 혁신시켜 나가야 할 뿐 아니라 조직원, 아랫사람들에게도 '어제와 다른 참된 나'로 살아가게끔 도와주어야 하기 때문이지요.


'오랑캐'로 불리며 우리보다 문화적으로 열등하다는 평가를 받아온 야인(여진족), 그리고 '트러블 메이커' 양녕대군이 스스로 새로워지기를 기대했던 세종.

이러한 그의 노력은 앞으로도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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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양녕대군)가 주상(主上, 태종)을 모시고 식사를 하는데 예(禮)에 맞지 않는 것이 많았다. 주상께서 이를 보고 말하기를,
“내가 젊었을 적에 편안히 놀기만 하고 배우지 아니하여, 거동(擧動)이 절도가 없었다. 지금 백성의 임금이 되어서도 백성들의 바람[民望]에 합하지 못하니, 마음속에 스스로 부끄럽다. 네가 비록 나이는 적으나, 그래도 원자(元子)이다. 언어(言語) 거동(擧動)이 어찌하여 절도가 없느냐? 서연관(書筵官)이 일찍이 가르치지 않더냐?”
하니, 세자가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하였다.
(태종 5/10/21, 양녕 만 11세 때)

서연관(書筵官)에게 명하여 세자에게 학문에 힘쓰기를 경계하도록 하였다. 문학(文學) 정안지(鄭安止)·사경(司經) 조말생(趙末生)에게 이르기를,
“이제부터 서연(書筵)에 입직(入直)하는 관원은 세자가 식사하거나 움직이거나 가만 있을 때에도 좌우를 떠나지 말고, 장난을 일체 금하여 오로지 학문에만 힘쓰도록 하라. 세자가 만약 듣지 아니하거든 곧 와서 계달(啓達)하라.”
하고, 또 시관(侍官)을 불러 꾸짖었다.
“요즘 듣건대, 세자가 공부하기를 매우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니, 사실은 너희들의 소치이다. 세자가 만약 다시 공부에 힘쓰지 아니하면, 마땅히 너희들을 죄줄 것이다.”
(태종 6/4/18)

태종은 젊은 시절에 바깥으로만 나돌고, 자신의 수양은 커녕 가정 교육에도 신경 쓰지 않았나보다.

이제 정신 차리고 좋은 아버지 노릇을 하려 하나, 아이는 엄격한 아버지를 무서워하기만 한다.

요즘 말로, 아이의 교육에 필요한 것은 엄마의 정보력, 아빠의 무관심, 할아버지의 재력이라고 한다.

아이를 부인, 학교, 과외 선생님에게 맡기고, 자기 스스로를 돈 버는 기계로 전락시킨다.

그러나 가정 교육에서 선행되어야 할 것은 아빠의 보듬어줌이 아닐까?

자신이 경외하는 사람에게서 사랑을 받을 때에 아이의 자존감은 자리잡고, 세상에 맞설 용기가 생긴다.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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