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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채원연구소공감]대표 :: 세종이야기꾼 :: 실록연구자 :: 소통 디자이너 :: 010-8014-7726 :: chewonoh@gmail.com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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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탑에 게재됐습니다.

('세종이야기꾼' 오채원이 오마이뉴스에 연재 중인 '실록 읽어주는 여자' 시리즈 기사입니다. 고 최숙현 선수를 애도하며 작성한 본 기사는 오마이뉴스 탑에 게재됐습니다. 기사 바로 가기: omn.kr/1oa4w )

 

경주시청 팀 관계자들이 고 최숙현 철인3종 선수에게 가한 상습적 가혹행위 사건이 연일 보도되며, 많은 이들의 공분을 사고 있습니다. 조직 차원 혹은 조직 내 권력자가 신체적·정신적 괴롭힘으로 개인의 인생을 망가뜨리는 행태는 그 뿌리가 깊은데요. 이에 조선시대에 기록된 직장 내 가혹 행위를 함께 들여다보겠습니다.

 

조선의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신속인을 괴롭히는 자는 모두 장 60대에 처한다. 
- <경국대전(經國大典)> '형전(刑典)'

 
조선의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에 의하면, '신속인(新屬人)'을 괴롭히는 자에게는 장 60대의 처벌이 내려집니다. 여기에서 신속인이란 무엇일까요? 조선시대에는 이 신속인 외에 신래(新來), 신참(新參), 신은(新恩), 신귀(新鬼) 등으로 불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표현은 다르지만 가리키는 바는 같습니다.
 

새로 과거에 합격하거나, 선비로서 처음으로 벼슬을 얻은 자를 신래라 한다. (명종실록 8년 윤3월 11일)

 
신속인·신래·신참·신은·신귀 등은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모두 '신입'에 해당합니다. 선진(先進) 곧 선배는 허참례(참여를 허락하는 의식), 면신례(신참을 면하는 의식), 면신벌례(신참을 면하려 한 턱 내는 의식) 등의 '신고식'을 거치지 않은 신입을 공동체의 일원으로 대우하지 않고, 심지어 한 자리에 함께 앉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집단 따돌림은 한 달이 지나도 해결되지 않았기에 신래는 굴복하고 신고식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신고식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참으로 고약했습니다.
 

사헌부(현재의 검찰·감사원)가 아뢰었다..."예문관(지금의 청와대 연설 비서관)의 신래가 된 자가 논밭과 주택 등 재산을 모두 팔아서 그 비용으로 쓰고 빚을 갚지 못하고 죽자, 과부가 된 그의 아내가 눈물로 일생을 보낸 경우도 있습니다." (중종실록 35년 3월 26일)
 
"시궁창의 오물을 (신래의) 얼굴에 칠하고는 당향분(현재의 명품 화장품)이라고 부르는가 하면 갓과 의복을 찢고는 더러운 물속에 밀어 넣어 뒹굴게 하여, 사람이 차마 못 볼 귀신같은 형상을 만들어 몸을 상하게 하거나 병들게 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하니, 체면을 손상함이 실로 크다." (선조수정실록 2년 9월 13일)
 
사헌부가 아뢰었다..."신래라 부르며 멋대로 학대하는데, 온몸에 진흙을 바르고 온 낯에 오물을 칠하며, 잔치를 벌이도록 독촉하여 먹고 마시기를 거리낌 없이 합니다.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의 몸을 괴롭히는 등 갖가지 추태를 부리고, 아랫사람들을 매질하는데 그 맷독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생명을 잃거나 고칠 수 없는 병에 걸리게 되는 사람이 있기도 하니 폐해가 또한 참혹합니다. 사대부들 사이에서 먼저 이런 풍습을 앞장섰기 때문에 변변치 않은 벼슬아치, 정1품에서 종9품 사이에 들어가지 않는 잡품, 군사, 노비와 같은 미천한 사람들까지도 모두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중종실록 36년 12월 10일)

 
신래가 치러야 하는 신고식은 상류층·엘리트층은 물론 하층민에게까지 일반화되어, 사회에 끼치는 폐해가 대단했습니다. 한 개인이 감당해내기 힘든 규모와 내용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여러 차례에 걸쳐 거하게 대접하라는 선배들의 요구에 응하느라, 가난한 사회 초년생과 그 가족은 빚을 끌어 쓰다 재산을 탕진하고 신세를 망치기도 합니다. 또한 오물을 뒤집어쓴 채 음담패설을 쏟아내거나 온종일 우스꽝스러운 춤을 추며 스스로의 명예를 실추시켜야 합니다.

소위 '기 꺾기'를 위해 가상적 죽음으로 몰고 가는 것입니다. 아울러 신체적 죽음도 발생했는데요. 체벌 등의 신체적 가혹 행위로 인해 병을 얻거나 폐인이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임금의 명을 전하였다. "일전 경연에서 이조판서(현재의 행정안전부 장관) 허굉이 신래를 괴롭히는 폐단을 말하기에, 금지하도록 이미 법사(사법업무 담당 관청)에 거듭 밝혔다. 오늘 경연관(임금의 독서토론 담당 관리) 강현이 또한 '신래 감찰(사헌부의 정6품 관리) 조한정이 괴롭힘을 당하다 기절하므로 떠메고 갔는데 죽었다'고 한다." (중종실록 21년 1월 24일)


위와 같이, 가혹 행위로 인해 목숨을 잃는 신래가 생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죽음의 신고식'은 '고풍(古風)', 즉 전통 혹은 관행이라는 명목으로 조선 후기까지 이어집니다.
 

우의정(현재의 총리와 유사) 이행이 아뢰었다..."신래를 괴롭히는 일을 잠시도 중지하지 않는데, 고풍이라고는 하나 폐단이 적지 않습니다. 사관(역사를 기록하는 관리)은 청현직(학식·청렴·문벌·지위를 갖춘 엘리트코스)이어서 학부형들이 모두 바라는 바이지만, 피하려는 것은 잔치 비용을 마련하기 어려워서입니다." (중종실록 24년 11월 5일)
 
사헌부가 아뢰었다..."신래를 닦달하는 일이 고풍이라고는 하지만, 예전에는 없던 일로 더욱 가중되고 있습니다." (중종실록 35년 3월 26일)

 
요직으로 가는 길목일수록 신고식의 강도가 더욱 높기 때문에 이를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은 임명되기를 피하기도 합니다. 신고식 때문에 뛰어난 인재도 사장되는 현상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정권마다 가혹한 신고식에 대해 엄한 단속을 천명하고 적발되면 처벌했지만 고풍이라는 이름으로 단절되기는커녕 점점 더 심해집니다. 심지어 임금의 의지에 반발하며 신고식을 옹호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대사간(언론기관의 수장) 최숙생..."새로 급제한 사람이 분관(인턴을 배치하여 실무를 익히게 함)되면 반드시 허참례와 면신례를 해야 하는데, 정응은 이 의식을 행하지 않고서 갑자기 홍문관 정자(임금 자문 기관의 정9품 관직)로 임명되었으니 곤란합니다." (중종실록 9년 11월 15일)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임금에게도 행실을 고치라 촉구하며 고위관리를 고발하는 등 시대의 걸림돌을 따지고 개혁을 이끌어야 할 언론기관의 수장이 신고식을 거치지 않은 자의 임명을 두고 부당하다며 문제제기합니다. 악습이 만연한 세태를 반영하는 한 사례이지요. 이들은 새로운 진입자를 상대로 기득권을 누리거나 방어하기 위해 신고식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일종의 진입장벽이었던 셈입니다.
 

사헌부가 아뢰었다..."훈련원 참군(사관학교의 정7품 군직) 이종은 모든 신래가 면신례를 할 때면 직접 그 집에 가서 '내가 최근에 임기 만료로 이직하게 되었는데, 그러면 감찰(사헌부의 정6품 관직)이 될 것이다. 내 면신에 쓸 물품을 미리 비축하여 두고자 한다. 그대는 반드시 면신에 쓸 물품을 많이 준비했을 테니, 나에게 나눠준다면 그대의 면신례도 쉽게 하도록 하겠다' 라고 하는데, 신래들이 거의 다 두려워하여 나눠줍니다." (중종실록 33년 8월 17일)
 
사헌부가 아뢰었다..."회자(밤에 허름한 차림으로 선배들을 찾아다님)할 때 목면(화폐로 쓰는 무명)을 가지고 가서 선배의 종에게 뇌물로 준 뒤에야 비로소 명함을 들일 수 있음은 물론, 회자하는 기간이 50일이나 되어 그 폐단이 적지 않습니다. 그리고 연회까지도 전부 신래에게 마련하여 베풀게 하는데 하루에 3∼4군데에 나누어 베풀기도 합니다. 선배들은 기생을 끼고 앉아 후한 뇌물을 요구하다가 조금이라도 마음에 차지 않으면 신래의 종을 때려서 간혹 죽이기까지도 합니다." (중종실록 35년 3월 26일)

 
선배가 '업무상 위계' 곧 상대적으로 우위인 지위를 무기로 신입을 협박하며 '삥 뜯기'를 합니다. 이처럼 신고식을 명분 삼아 후배에게 뇌물을 받거나 금품을 갈취합니다. 한 조직에 속해 매일 얼굴을 보는 이들에게 지속적으로 '왕따'를 당할 생각에 아득해진 신래는 선배의 요구에 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선배는 또 어딘가로 자리를 옮기며 새로운 부서의 신래가 되고, 따라서 호된 신고식을 치러야 할 것입니다. 곧 닥쳐올 자신의 신고식과 상납에 대비하기 위해 그는 후배에게 돈을 뜯어냅니다.

이 구조를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신래는 선배의 추천을 받아 승진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자신이 당한 것처럼 신래에게 뇌물을 받거나 금품을 갈취하겠지요. 이렇게 먹고 먹히는 관계는 끝없이 이어집니다.

여기에서 작동하는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사고방식은 나쁜 공생의 생태계를 만듭니다. 이것이야말로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현상일 테지요. 이를 거부하는 사람은 한 집단의 일원이 되지 못할 뿐더러,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도 동참하기 힘듭니다.
 

율곡이 처음 급제했을 때 승문원(외교문서를 담당하는 관청)에서 선배에게 공손하지 않다 하여 파직되었다. 퇴계가 이 소식을 듣고, "신래를 희롱함은 과연 무리한 일이다. 그러나 이미 그런 줄을 알고 그 길로 들어갔으니, 이군(율곡)인들 어찌 홀로 모면할 수가 있겠는가?"...퇴계가 손자 이안도에게 보낸 편지에서 "선배가 시키는 장난을 좇지 않을 수는 없으니 잠깐 하는 척하여 그 나무람만 모면할 뿐, 너무 난잡하고 부끄럼 모르는 행동을 하여 광대와 같이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 하였다...진실로 제거할 것은 제거함이 옳은 일인데, 지금까지 그렇지 못함은 힘이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호사설(星湖僿說)> 제15권 '인사문(人事門)')

 
조선 후기에 이익이 쓴 책 <성호사설>에 의하면, 이율곡은 신고식에서 선배에게 잘못 보인 탓에 직장에서 쫓겨났습니다. 장원만 아홉 번 차지했던 수재 중의 수재도 신고식의 문턱을 넘기 힘들었던 모양입니다.

이퇴계는 손자에게 선배들이 시키는 대로 적당히 따르는 척 하라고 당부합니다. 유력한 가문의 일원도 예외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개인의 힘으로는 이 부조리를 당해낼 수 없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기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신입에 대한 집단적 학대는 조선시대에만 통용된 행태가 아닙니다. 인류학에서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관찰된다고 보는데요. 우리 역사에서의 기록은 고려로 거슬러 갑니다.
 

 

신우(우왕) 13년 3월에 윤취가 시험을 주관하였는데, 시험에 임한 자는 모두 권문세가의 젖비린내 나는 아이들이었다. 그때 사람들이 이들을 추하게 여기며 분홍방이라 불렀다. 아이들이 분홍 옷 입기를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고려사(高麗史)> 권74)
 
이이가 아뢰었다..."고려 말에 과거 제도가 공정하지 못하여, 급제한 자들은 입에서 젖비린내가 나는 귀한 집 자제들이었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그를 지목하여 '분홍방(粉紅榜, 분홍색 저고리를 입은 어린애)'이라고 하였는데, 세상 사람들의 마음이 격분하여 모욕을 주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선조수정실록 2년 9월 1일)
 
옛날에 신래를 제압한 것은 호방한 선비의 기세를 꺾고, 엄격하게 위아래를 구분하여 그들로 하여금 규칙을 지키게 하기 위함이었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용재총화(慵齋叢話)')

 
면신례 등의 신고식은 고려 문벌귀족 사회의 '금수저' 내지 '낙하산 인사'에 대한 당대의 저항 의식이 반영된 것이었습니다. 인류학에서 이해하는 바와 같이, 개인의 사회화를 위한 학습의 일환이기도 했고요. 그러나 이러한 통과의례가 '정신 무장' 혹은 '기강 잡기'를 가장한 기득권자의 괴롭힘으로 변질되며 사회의 폐단이 되었습니다.

 

신입 관리 정양신(鄭暘臣)에 대한 면신례 문서. 오른쪽에 ‘신귀 신양정’, 즉 신입 정양신의 이름이 거꾸로 적혀 있고, 왼쪽에 다섯 개의 수결 곧 서명이 있다.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보도에 의하면, 고 최숙현 철인3종 선수는 경주시청팀의 감독·팀닥터(라 불린 운동처방사)·선배들로부터 약 2년간 거의 매일 폭언·폭행·갈취 등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가해자들이 동료 선수들과 차단시켜, 최 선수는 철저히 고립되었습니다.

그들의 가혹 행위는 제 나름의 핑계가 있었습니다. 최 선수는 프로답게 우수한 성적을 내야 하고, 체중을 관리해야 하며, 강한 정신력을 지녀야 하고, 훈련에 따르는 비용을 지불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생활인으로서 운동선수로서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이러한 부당함과 부조리를 홀로 감당해냈습니다.

그러던 끝에 최 선수 측은 지난 2월부터 6월까지, 국가인권위원회·경주시·대한체육회 스포츠인권센터·대한철인3종협회 등 외부에 최소 6회의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이들 중 어느 곳도 조치를 취하기는커녕 방관한 것으로 보입니다.

선수 생명을 담보로 한 민원·진정·고소 등이 무시되자, 최소한의 희망조차 잃은 최 선수는 물리적 생명을 스스로 내려놓았습니다.
 
해당 사건의 근본적 원인은 소수의 폭행자 개개인의 일탈을 넘어서, 조직원의 생존을 볼모로 잡은 '갑질 사회'에도 있습니다. 따라서 당국은 가해자들을 일벌백계하고, 피해자를 구조·예방하는 법적·사회적 장치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도록 점검해야 하며, 갑질 문화를 타파하기 위한 체계적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이에 대해 우리는 연대하여 분노하고 감시해야 하고요.

이번에는 최 선수였지만, 다음에는 또 누가 집단적 가혹 행위의 피해자가 될지 모릅니다. 최 선수가 겪은 사건은 단지 성적제일주의가 만연한 체육계만의 문제가 아니니까요.

우리는 이번에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고려·조선에서도 개인에 대한 '직장 내 갑질'이 얼마나 가혹했는지 똑똑히 보았습니다. 야만적 폭력은 일시적으로 움츠리는 듯 보이다가도 이렇게 대물림되는 법입니다.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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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세종이야기꾼 오채원의 '실록 읽어주는 여자' 연재 기사로, 오마이뉴스 메인에 게재되었습니다. 기사 바로 가기 : omn.kr/1nwws)

 

 

“내가 전에는 더위를 무서워하지 않았으나, 몇 년 전부터는 더위를 타기 시작했다. 이때 물에 손을 넣으면 더위가 저절로 풀린다. 이로 미루어 생각하건대, 죄수가 감옥에 있으면, 더위 먹기 쉬워서 어떤 이는 사망에 이르기도 하니, 참으로 마음이 아프다. 더운 때가 되거든 동이에 물을 담아 감옥 안에 두고 자주 물을 갈고, 죄수로 하여금 손을 씻게 한다든지 하여, 더위 먹지 않게 하는 것이 어떠한가? 예전에 이러한 법이 있었는지 검토하여 아뢰라.”

(세종실록 30년 7월 2일)

 

때는 바야흐로 세종이 52세 되던 해입니다. 실록에는 날짜가 음력으로 기록되어 있으니, 양력으로 환산하면 8월 초 즈음이 되겠지요. 열대야로 밤잠을 설치기 일쑤에, 불쾌지수가 높은 시기입니다. 이 한 여름에 세종은 ‘더위 무서운 줄 모르고 살던 나도 나이를 먹으니 더위를 탄다’고 토로합니다. 아마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과 같은 건강 상태에서도 훈민정음 창제와 그 후속 작업들에 매진하며 체력이 고갈된 탓인 듯합니다. 게다가 코로나19 의료진의 레벨D 방호복만큼은 아니어도, 긴팔 옷을 여러 겹 껴입어 통기성이 떨어지는 복식도 한몫했을 것입니다.

 

참으로 소박하게도 그는 더위 탈출 비법으로 얼음 깨먹기도 뱃놀이도 냉수마찰도 아닌, 물에 손 담그기가 최고라고 추천합니다. 이마저도 혼자 즐기기 미안했는지, 열악한 환경에 있는 사람들을 떠올립니다. 수감자 그러니까 사회 취약 계층에 해당되며, 고통을 호소해도 들어줄 데가 없는 이들입니다.

 

세종은 입으로만 안타까워하지 않습니다. 교도소 안에 물동이를 두고 자주 물을 갈아주어, 손을 씻게 하자고 건의합니다. 죄수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만한 인권·복지 차원의 개선안 혹은 해결책을 제안한 후, 이것이 일시적 시혜가 아니라 정책으로서 상시 운영되도록 법제화하고자 합니다. 이를 위해, 참조할 과거 사례가 있는지 검토하도록 전문연구기관인 집현전에 명을 내립니다.

 

(형사 행정에 대한 풍속화를 엮은 《형정도첩刑政圖帖》 중에서 감옥 내부를 그린 그림.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약 한 달의 검토 기간을 갖고, 현재의 시·도지사에 해당하는 전국의 감사들에게 명을 내립니다. 다음과 같이, 그 내용이 무척 구체적입니다.

 

1. 매년 (음력) 4월부터 8월까지는 감옥 안에 새로 냉수를 길어다가 자주자주 바꿔 놓을 것.

2. 5월에서 7월까지는 희망자에 한해서 열흘에 한 번씩 목욕하게 할 것.

3. 매월 한 차례 희망자에게 머리를 감게 할 것.

4. 10월부터 1월까지는 감옥 안에 짚을 두텁게 깔아 보온에 신경 쓸 것.

5. 목욕할 때에는 관리와 옥졸(간수)이 직접 점검하고 살펴서 도주를 막을 것.

 

유교의 기본 경전인 『대학大學』에 ‘혈구지도絜矩之道’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絜’은 ‘재다’라는 뜻이며, ‘矩’는 ‘곱자’ 곧 ‘ㄱ자 모양의 자’를 가리킵니다. 혈구지도를 직역하자면, 곱자로 무엇인가의 길이를 재는 방법이겠지요. 내 마음 속의 자로 다른 이의 마음을 재는 것, 즉 내 처지를 미루어서 남의 처지를 가늠하는 행위를 뜻합니다. 세종은 품속의 자를 수시로 꺼내서, 어려운 환경에 있는 이들의 마음을 헤아렸던 것 같습니다. 한쪽 눈이 실명에 가까운 상태에, 만사가 귀찮은 더위 속에서도 말이지요.

 

(근무 교대 후 냉수로 더위를 식히는 선별진료소의 의료진. 출처 : 뉴시스, 2020-06-08.)

6월 초순인데도 낮에는 최고 체감 온도가 30도를 넘는 한 여름 날씨를 보입니다. 급기야 지난 9일에는 기상청에서 서울에 폭염주의보를 발효하고, 강릉·양양에는 열대야가 찾아왔습니다.

 

이날 인천의 한 워크스루Walk through 선별진료소에서 방호복을 입고 근무하던 간호사 세 명이 탈진해 병원으로 옮겨졌습니다. 방호복은 통기성이 낮은데다, 습기에 약해서 의료진은 더위에도 불구하고 얼음조끼조차 입을 수 없다고 합니다. 6월 11일자 YTN의 보도에 의하면, 레벨D 방호복의 내부 온도를 측정했더니, 평균 체온보다 높은 37.6도로, ‘1인용 사우나’ 안에 있는 것과 같은 지경입니다.

코로나19가 수도권을 중심으로 확산 일로에 있습니다. 5개월간 고강도 근무를 이어온 의료진이 더위로 고생하는 기간이 더 늘어나지 않도록, 우리 개인은 위생에 주의해야겠습니다. 물론 마스크 착용은 더위를 가중시키지만, ‘1인용 사우나’를 입고 근무하는 분들을 떠올려야겠지요.

 

더위로 고통 받는 이들이 또 있습니다. 취약계층 어르신들입니다. 예년에는 동주민센터·복지관·경로당 등을 활용해 무더위 쉼터를 운영했으나, 올해는 코로나19로 인해 대부분 휴관 내지 폐쇄된 상황입니다. 대부분 어쩔 수 없이 거리로 공원으로 지하철로 나서는 형편입니다.

이에 대해 국가와 지자체에서는 대안을 제시해주길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개개인도 곤궁한 처지에 있는 이웃들에게 ‘시원한 온정’을 보내면 어떨는지요? 품속의 큰 자를 꺼내서, 나의 고통을 미루어 남을 배려하는 세종의 마음을 떠올려주시면 좋겠습니다.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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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사가 메인에 게재된 2020.06.09. 오마이뉴스 대문)

(본 기사는 '세종이야기꾼' 오채원이 매주 오마이뉴스에 연재하는 '실록 읽어주는 여자' 시리즈 중 일부입니다. 기사 바로 가기 : omn.kr/1nv6c)

 

(양녕대군의 부모인 태종과 원경왕후의 능인 헌릉의 전경. 출처 : 문화재청)  

임금이 항상 세자를 올바른 도리로 가르쳤으나, 세자는 주색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임금의 가르침과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갑사甲士(군인)를 시켜서 문을 지켜, 허용되지 않은 사람들의 출입을 막았다. (태종실록 16년 9월 24일)

 

태종은 평화로운 정권 교체를 꿈꿨습니다. 피의 역사는 자신의 세대에서 끝내고, 가문과 나라가 그 누구의 손에도 흔들리지 않도록, 정통성 있는 인물을 세워 반듯하게 키워내자 마음먹었을 테지요. 장자 계승의 원칙에 부합하는 양녕대군을 정성들여 훈육합니다. 그러나 이 아이는 공부를 멀리하고, ‘나쁜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왕세자에게 걸맞지 않는 행동을 하기 일쑤입니다. 양녕의 주변인들은 이를 방관하거나 협조합니다. 그저 두고만 볼 수 없는 학부모 태종은 아들의 인간관계마저 관리하게 됩니다. 15년간 세자의 자리에 있으며 태종의 후계자로서 위치를 공고히 다져가는 듯 보였던 양녕이지만, 결국 그는 왕이 되지 못합니다. 이처럼 양녕이 점점 퇴락해가는 과정을 학부모의 관점에서 살펴보겠습니다.

 

태종이 처음부터 양녕에게 기대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기본기가 갖춰져 있으니 교육을 잘 시키면, 자신의 뒤를 이어 한 나라의 최고지도자가 될 자질이 충분하다고 보았습니다.

 

“세자가 어려서부터 체구가 당당하여 장차 학문이 무르익으면 국가를 맡길 만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항상 가르치고 인도하는 법에 힘썼다.” (태종실록 18년 3월 6일)

 

앞서 「아들아, 모든 업보는 내가 지고 저세상으로 가마」 기사(본지 2020-05-12)에서 살펴보았듯이, 양녕은 태종이 무릎에서 내려놓을 사이 없이 애지중지 키운 맏아들이었습니다. 하지만 태종은 조선 건국에 이어 1·2차 왕자의 난, 조사의의 난 등 굵직한 역사적 사건들을 10년 안에 겪습니다. 자녀의 유년기에 태종은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정치적 도박을 해야 했던 것입니다. 격동의 시간을 보내며, 자연히 가정에 소홀해지기 쉬웠을 것입니다. 바깥일 한답시고 정작 가까운 이들을 챙기지 못한 미안함과 아쉬움이 컸을 것으로 보입니다.

 

아들이 자신보다 더 뛰어난 군주가 되기를 바란 태종

 

“예전에 이름나기 전에는 집안의 재물이 넉넉한지 여부도 모르고, 오직 말에 올라 세상을 변혁하는 일에만 열중하였다.” (태종실록 9년 1월 6일)

 

태종이 젊어서 세상을 구하려는 뜻이 있어서, 유교 경전과 역사책에 마음을 두고 재산 불리기에 힘쓰지 않았다. (태종실록 18년 11월 8일)

 

세자가 주상을 모시고 식사를 하는데 예법에 맞지 않는 것이 많았다. 주상께서 이를 보고 말했다. “내가 젊었을 적에 여러 곳을 떠돌아다니다보니 배우지 못하여, 행동거지에 절도가 없다. 이제 임금이 되어서도 백성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니, 자괴감이 든다.” (태종실록 5년 10월 21일)

 

자식은 자신보다 낫길 바라는 부모의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겠지요. 태종은 자신에게 주어졌던 것보다 나은 교육 환경을 아들에게 제공하여, 자신보다 더 뛰어난 군주가 되기를 바란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양녕의 학습 태도는 그다지 좋지 않습니다.

 

“내가 세자에게 이와 같이 (엄격하게) 하는 것은 국가의 오랜 번영[萬世]을 위한 계획에 의한 것이다......내가 세자에게 마치 새끼를 키우는 호랑이와 같이 엄하게 하고자 하였다.” (태종실록 18년 5월 10일)

 

임금이 세자에게 글을 외도록 명하니, 세자가 외지 못하였다. 임금이 (세자를 보필하는) 환관에게 종아리를 때리고 명을 내렸다. “나중에도 이와 같으면 마땅히 서연관書筵官(세자의 선생님들)에게 벌을 주겠다.” 문학文學(세자시강원의 정5품 관직) 허조를 시켜 이 말로써 세자에게 경고했다. 세자가 밤에 참군參軍(정7품의 군인) 심보와 더불어 글을 읽고자 하였다. (태종실록 5년 9월 14일)

 

임금이 세자로 하여금 읽은 글을 외게 한다고 하니, 세자가 이를 듣고 밤을 새워 글을 읽었다. (태종실록 5년 10월 21일)

 

“이제부터 서연書筵(세자를 교육하는 자리)에 당직을 서는 관원은 세자가 식사하거나 움직이거나 가만히 있을 때에도 옆을 떠나지 말고, 장난을 일체 금하며 오로지 학문에만 힘쓰도록 하라. 세자가 말을 듣지 아니하거든 바로 와서 보고하라.” (태종실록 6년 4월 18일)

 

임금이 지신사知申事(비서실장) 조말생에게 일렀다. “예전에 세자의 일로 사람들이 많이 감옥에 갇히고 어떤 이는 사형 당한 것을 내가 마음으로 지금까지 편치 못하게 여기고 있다.” (태종실록 17년 4월 16일)

 

훈육의 파장이 집안을 넘어 국가로

 

성리학을 확립시킨 주희朱熹가 『맹자집주孟子集注』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부모와 자식이 이어가는 것이 ‘일세一世(한 세대)’이며 통상 30년입니다. 그렇다면 ‘만세萬世’는 30만 년이 됩니다. 만세 곧 30만년 이어지는 국가를 꿈꾼 태종이기에 후계자를 엄격하게 훈육합니다. 시험을 보겠다고 하거나, 학습 결과가 좋지 않으면 선생님을 벌주겠다고 경고하는 초강수를 두니, 양녕은 그제야 공부를 합니다. 그러나 효과는 그때뿐입니다. 세자의 태만과 비행으로 인해 주변인들이 곤욕을 치르다, 감옥에 가거나 목숨을 잃는 이가 발생하기에 이릅니다. 아이 훈육의 파장이 한 집안을 넘어 국가의 범위로 확대됩니다.

 

자녀의 교육을 위해서는 조부모의 재력, 엄마의 정보력, 아빠의 무관심이 필수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습니다. 자녀 교육에서 아버지의 역할은 배제된 한국적 현실에 대한 풍자일 테지요. 이와 달리 태종은 적극적으로 관여합니다. 특히 임기 후반기로 가며 양녕을 국정에 참여시킵니다. 지금 식으로 보자면 OJT(On the Job Training, 입사 후 직무를 수행하며 교육을 받음) 혹은 인턴십에 해당할 것입니다.

 

임금에게 공무를 보고하는 자리에 세자가 참여하도록 명하였다. (태종실록 16년 5월 20일)

 

“군권과 인사권만 내가 행사하고, 모든 지휘·명령하여 시행하는 일은 세자와 함께 의논하라.” (태종실록 16년 5월 24일)

 

학습에 대한 동기부여에서 중요한 것은 시야 확보입니다. 학습자·교수자·학부모가 동의하여 구체적 목표를 설정한 후, 그에 도달하면 학습자가 어떠한 이득을 얻게 될지 그려주어야 합니다. ‘깜깜이 공부’ 혹은 ‘닥치고 공부’가 아니라, 학습자에게 효능감이나 성취감을 맛보게 해야 합니다. 살아 있는 정치를 직·간접으로 만나게 하고 그에 따른 책임을 부여하면, 양녕의 학습 의욕이 고취되리라 태종은 기대한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국정 운영의 장에 앉히고 의사결정권을 일부 공유합니다.

또한 태종은 양녕을 명나라에 보내, ‘국가대표’로서의 무게를 체감하게 하고, 견문을 넓히도록 합니다. 양녕의 나이 15세 때의 일입니다.

 

세자 이제李禔를 보내 명나라의 서울에 갔으니, 새해맞이를 축하하기 위함이었다......임금이 예복을 갖추고 표전表箋(황제에게 전하는 서한)에 절하고 나서, 장의문(현재의 창의문)으로 나가 세자를 영서역(지금의 서울 은평구) 동쪽에서 전송하고, 세자에게 말하였다. “길이 험하고 머니, 마땅히 스스로를 돌보아야 하느니라. 왕세자이기에 너의 책임이 무겁다. 오늘의 일은 나라와 백성을 위한 계책이니라.” 세자가 울면서 작별 인사를 하니, 임금도 눈물을 뚝뚝 흘리고, 주위에서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태종실록 7년 9월 25일)

 

태종은 왕자 시절인 태조 3년에 사신의 자격으로 명나라에 다녀옵니다. 이때 황제에게 극진한 대접을 받고, 명나라 지식인들로부터 세자 이방석을 젖히고 ‘조선의 세자’로 불리는 등 정치적 동력을 확보합니다. 이러한 자신의 성공 경험을 태종은 아들에게 전해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역시나 양녕은 명 황제의 환대를 받고 옵니다. 그 후부터 명 사신이 오면 ‘전담 마크’하게 하며, 양녕이 임금이 된다면 맞닥뜨릴 외교적 공간을 선제적으로 열어줍니다.

 

자유인의 피가 흐르는 아들이 궁궐에 갇혀 지내 안쓰러워

 

(선조 31년에 편찬한 군사훈련에 관한 책 『무예제보武藝諸譜』.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조선시대에는 대체로 봄과 가을에 임금이 직접 참여하는 군사훈련인 강무講武를 실시했습니다. 『입시 교육의 실패자, 양녕대군』 편(본지, 2020-05-22)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양녕은 사냥 및 유사 놀이에 관심이 많았기에, 보다 규모가 크고 역동적인 강무에 따라가기를 고집합니다. 그때마다 세자는 궁궐에 남아 공부에 힘써야 한다는 신하들의 반발을 사기일쑤입니다.

 

“예로부터 임금이 굳세고 과감하면 아랫사람을 통솔할 수 있고, 성격이 부드럽고 나약하면 실패하는 경우가 많았다. 대체로 활쏘기와 말달리기는 굳세고 과감한 기상을 키우는 것이다. 지금 세자로 하여금 무예를 익히게 하는 것이 도리 상 어떠하겠는가?” (태종실록 9년 3월 16일)

 

태종은 임금에 걸맞은 진취적이며 강력한 리더십을 키울 수 있다고 주장하며, 양녕이 무예를 익히도록 하고 강무에도 동행하도록 합니다. 군사력 통제를 바탕으로 하여 강력한 왕권을 발휘한 자신의 경험이 반영된 생각일 것입니다. 또한 자신을 닮아 자유인의 피가 흐르는 아들이 궁궐에 갇혀 지내는 모양이 안쓰러웠겠지요.

 

(임금이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동교東郊(동대문 밖)에서 매사냥하는 것을 구경하였다. 이날 새벽에 임금이 밖으로 나가려고 하니, 사간원(언론기관)의 좌사간 대부左司諫大夫 송우가 아뢰었다. “지난번에 신들이 아뢴 바를 따르시어 가벼이 외출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는데, 오늘 자못 신용을 잃었습니다.” 임금이 말하였다. “내가 멋대로 놀려는 것이 아니다. 궁궐 안에만 오래 있으니, 기력이 좋지 않아서 잠깐 성 밖에 나가고자 하는 것이다.” (태종실록 6년 3월 13일)

 

궁궐 안에만 있으려니 컨디션이 좋지 않다며, 여러 차례 몰래 밖으로 나간 전적이 있는 태종입니다. 이런 자신을 닮은 아들의 마음을 그는 알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강무를 비롯한 바깥나들이에 자신을 데려가라고 떼쓰는 아들 앞에서 번번이 마음이 약해집니다.

 

서연관(세자의 선생님)을 불러 “세자는 나라의 근본이므로 사냥하는 데에 따라갈 수 없으니, 서울에 남아 내 직무를 대행하라.” 라고 하였으나, 결국은 따라갔다. (태종실록 12년 2월 19일)

 

임금이 (황해도) 해주로 행차하고자 평주 온천에서 목욕한다고 핑계 삼았다. 세자와 여러 왕자들, (의정부) 우정승 조영무 등이 따라나섰다. (태종실록 13년 2월 4일)

 

통제원通濟院 남쪽 교외에서 머물렀다. 이날 아침에 세자에게 조정으로 돌아가도록 명하니, 세자가 따라가겠다고 무리하게 청했다. 그러자 임금이 여러 대신에게 말했다......“당초는 세자로 하여금 하룻밤만 지내고 돌아가게 하고자 하였으나, 지금 세자가 나를 좇아갈 수 없다고 섭섭해 하며 앙앙대고 밥을 먹지 않는다. 그는 나의 자식일 뿐 아니라 나라의 왕세자인데, 그 행동이 이와 같으니, 어찌하면 좋겠는가?” 이천우와 이숙번 등이 “이번에는 목욕을 위한 행차이니, 마땅히 전하의 수레를 따르게 하소서.” 라고 말씀을 올렸다. 임금이 “잠시 동안만 따르는 것이다.” 라고 하니, 세자의 얼굴에 기쁜 빛이 돌았다. (태종실록 13년 2월 5일)

 

예외의 남발은 교육 망치는 지름길

 

아이가 좋아하는 것을 뻔히 알기에 매번 막을 수만은 없는 부모의 마음, 그리고 궁궐에 갇혀 지내는 동지로서의 동병상련이 발동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외의 남발은 교육을 망치는 지름길이기도 합니다. 부모가 아이에게 엄격해야 할 때와 너그러워야 할 때를 구분하지 못하면 교육의 원칙과 효과성은 점차 무너집니다. 이러한 일이 반복되면, 학부모의 권위와 서로에 대한 신뢰는 추락하고, 결국 감정적 대응만 남게 됩니다.

 

세자 이사世子貳師(세자시강원의 종1품) 유창, 빈객賓客(세자시강원의 정·종2품) 한상경·조용·변계량 등이 서연의 하급 관리를 거느리고 궁궐에 와서 아뢰었다. “신들이 재주가 없어서 잘 지도하지 못하여 전하의 노여움을 일으키고, 세자가 눈물을 흘리며 며칠간 식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지금 전하가 편찮아서 모든 신하들이 분주히 안부를 여쭙는데, 세자만이 문안을 드리지 않으니, 나라 사람들이 어떻다고 생각할지 살짝 두렵습니다.” (태종실록 13년 8월 15일)

 

(세자의 비행이 밝혀지자) 임금이 사람을 시켜 세자에게 뜻을 전했다. “이제부터는 내게 오지 말라.” (태종실록 17년 3월 20일)

 

(양녕의 선생님인) 빈객賓客 등이 말했다. “(세자께서) 몸이 편치 않아서 강의는 쉬신다 해도, 내일은 전하께서 광주로 행차하시니, 병을 무릅쓰고라도 뵈러 가셔야 합니다.” 세자가 사약司鑰(궁궐 문의 열쇠 관리인)으로 하여금 임금을 뵈러 가는 길의 문을 열도록 요청했으나 열지 않았다......빈객 탁신이 정색하고 “이는 (주상께서 세자를) 개과천선시키고자 함입니다.”......세자가......끝내 뵙지 않았다. 임금의 수레가 밖으로 나가는 날이 되어, 서연관이 세자에게 청하였다. “바라건대 수레가 아직 대궐 밖에 나가기 전이니, 성상을 뵈러 가소서.” 세자가 내구문까지 갔으나 뵙지 못하고 물러나왔다. 몸이 편치 않다면서 강의를 쉬고 해질 무렵에는 과녁을 쏘았다. (태종실록 17년 3월 23일)

 

세자가 어리於里를 도로 받아들이고 또 아이를 가지게 했다는 소식에 임금이 노하여, 세자로 하여금 옛 처소에 머무르게 하고, 나와서 알현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태종실록 18년 5월 10일)

 

(세종이 말하였다.) “옛 사람이 ‘부자 사이는 매일 서로 가까이해야 한다.’ 고 했다. 양녕이 세자가 되었을 때에는 (부왕을) 뵈올 때 행동에 절도가 있었다. 그 후에 (양녕이) 잘못을 저질러서 뵈러 가지 못하니, 날로 부자 사이가 서먹해졌다. 이를 내가 직접 보았다.” (세종실록 20년 11월 23일)

 

학습에 태만하고 비행을 일삼는 양녕에 대한 태종의 실망이 점차 쌓여갑니다. 불호령을 내리는 아버지에 대한 양녕의 불만도 누적됩니다. 결국 부자는 서로 얼굴도 보지 않는 사이가 되어 버립니다. 그러는 사이에 셋째 아들 충녕대군이 태종의 눈에 들어옵니다.

 

(태종이) 경복궁에 행차해 상왕上王(정종)을 맞이하여 경회루에서 술자리를 베풀었는데......재상을 비롯한 여러 신하에게 잔치를 베푸니, 다투어 사람마다 한 구씩 시를 지어서 한 편의 시를 만들며 매우 좋아했다. ‘노련한 사람을 버릴 수 없다’는 말에 미치자, 충녕대군이 “『서경書經』에서 ‘노련하고 뛰어난 사람이 그 직책에 있다[耆壽俊在厥服].’고 하였습니다.” 라고 말하였다. 임금이 충녕의 학문이 두루 통한 것에 감탄하고, 세자를 돌아보며 말했다. “너는 어째서 학문이 이만 못하냐?” (태종실록 16년 7월 18일)

 

양녕은 왕세자 교육에 적합한 인물 아니었다

 

남과의 비교는 도전 의지를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간혹 일시적 효과가 있을 수는 있으나 근원적 개선책이 될 수 없습니다. 잘 해낼 수 있다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손상시켜 긍정적이지 못한 자아상을 형성시키고, 관계 맺기에 어려움을 초래합니다. 동생 충녕과 비교당하며 양녕은 초조해지고 경쟁의식을 갖게 됩니다. 그렇다고 하여 개과천선에 이르진 않습니다. 결국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태종은 양녕에 대한 교육 실패를 인정하고, 후계자를 교체합니다.

 

“제禔(양녕대군)가 세자였을 때, 담장을 넘거나 개구멍으로 나가서 몰래 외출하고, 강을 건너가서 몰래 소인배와 옳지 못한 짓을 멋대로 했다. 내가 계도할 수가 없어서, 진무소鎭撫所로 하여금 문을 지키고 통제하게 하였다. 지금 세자(충녕대군)는 그렇지 않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에게 우애 있게 대하며, 성품이 온화하고 예의 바르며, 배우기를 좋아하고 게을리 하지 않는다......앞으로는 세자를 만나보고자 하는 자가 있거든 민간의 미천한 사람이라도 출입을 금지하지 말고 모두 들어가 만날 수 있게 하라. 마땅히 세자로 하여금 깊이 인심을 얻게 하는 것, 이것이 나의 뜻이다. 나는 세자 양육을 제에게 한 것과 같이 하지는 않을 것이다.” (태종실록 18년 6월 21일)

 

어떤 문제를 억제하면 또 다른 부분에서 문제가 발생하는 현상을 풍선효과라고 합니다. 임시방편적 규제로 일관하면 결국 어디에선가 문제는 크게 터져버립니다. 태종은 양녕을 교육한 끝에 자각합니다. 교육의 내용과 방법도 중요하지만, 우선 아이에게 걸맞은 목표와 기대치를 얹어주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그렇다면 양녕은 왕세자 교육에 적합한 인물이 아니었다는 것을요. 현재 우리의 입시지옥에서도 볼 수 있듯이, 적성에 맞지 않는 진로설계와 교육은 학부모도 학습자도 교수자도 괴로운 일입니다.

 

태종은 원점에서 새로 시작합니다. 장자 계승의 원칙도 15년간 양녕에게 쏟은 시간도 과감하게 내려놓으니, 다른 아들도 눈에 들어옵니다. 유교에서 중시하는 지도자의 덕목을 두루 갖춘 충녕은 셋째 아들이지만 왕세자로서의 자질이 보입니다. 태종은 세자를 교체하자마자 훈육 방침을 달리하겠다고 표명합니다. 충녕에 대한 신뢰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양녕에게 적용한 교육이 실패한 원인을 곱씹은 탓이겠지요. ‘자식 농사는 내 뜻대로 안 된다’지만, 씨앗에 적합한 땅에 심었는지, 물은 적절히 주었는지도 돌아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양녕대군의 사당 지덕사至德祠.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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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사는 세종이야기꾼 오채원이 오마이뉴스에 연재하고 있는 '실록 읽어주는 여자' 시리즈 중 양녕대군의 실패한 교육에 대한 내용입니다. 기사 바로 가기 omn.kr/1nq84)

 

조선 중기의 어린이용 한자 학습서 『훈몽자회訓蒙字會』에서는 ‘師’를 ‘스스ᇰ ᄉᆞ’, 곧 ‘스승 사’라고 풀이합니다. 이 ‘스승’이라는 단어의 어원에 대한 여러 추정 중에는 불교의 사승師僧에서 왔다는 설이 있습니다. 수행자를 지도하거나 수행자가 존경하는 승려를 가리킨다는 것인데요. 이는 불교라는 종교색을 지우더라도, 현재 통용되는 ‘스승’의 의미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결국 스승이란 지식을 파는 노동자를 넘어, 상대의 정신적 성장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존재이니까요.

그런데 ‘미래 권력’인 양녕에게 스승이란 없었던 모양입니다. 책상머리 공부를 즐기지 않는 양녕의 마음에 들려니, 선생님이 심지어 공부를 방해하기도 합니다.

 

(조선 중기의 어린이용 한자 학습서 『훈몽자회』를 박아내는 책판. 출처 : 문화재청)

(세자시강원의) 세자좌필선世子左弼善인 김주金稠를 파면하였다......“김주는......강의할 때 아부하고 아첨해서 세자에게 잘 보이는 것을 기쁨으로 삼으며, 세자께서 작은 선행이라도 하면 꼭 칭찬하여 교만한 태도를 길러주고......세자께서 『맹자孟子』를 읽을 적에, 날마다 50여 편을 외우니, 김주가 ‘그 뜻을 알면 한 번만 읽더라도 괜찮습니다. 어찌 이처럼 부지런히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라며 말렸습니다.” (태종실록 7년 2월 3일)

 

세자빈객 이내李來와 변계량卞季良을 경연청經筵聽(임금을 위한 강습 기관)에 호출해, 주위의 사람들을 물리치고 명을 내렸다......“서연의 어리석은 선비들이 ‘(양녕이) 장차 임금이 될 것이다’ 라는 생각에 위축되어 쓴말을 하지 못하고, 대간臺諫(현 검찰·감사원·언론기관)도 그렇다. 그대들은 이미 재상이 되었는데, 무엇이 두려워 감히 바른 길로 (세자를) 인도하지 못하는가?” (태종실록 15년 1월 28일)

 

사헌부司憲府(현재의 검찰 및 감사원)에서 상소하였다......“세자빈객 조용趙庸, 변계량......등이 바른 마음씨와 밝은 학문으로써 강의하지 않고, 아부와 아첨만을 일삼아 무조건 ‘예 예’ 하고, 따라서 세자가 도리가 아닌 길에 빠지게 했습니다.” (태종실록 18년 6월 4일)

 

책 『삶을 바꾼 만남』에서는 황상黃裳이 정약용丁若鏞에게 가르침을 받게 된 일이 그야말로 ‘삶을 바꾼 만남’으로 그려집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몸소 가르침을 주는 스승이라는 존재의 무게와 감동을 느낄 수 있는데요. 정치적으로 배척당하며 떠나온 고달픈 유배 생활 가운데, 자신을 진심으로 따르는 제자를 만나게 된 일이 정약용에게도 ‘삶을 바꾼 만남’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양녕의 선생님들은 ‘팔자를 바꾼 만남’을 기대한 모양입니다. 15년간 공고했던 세자라는 양녕의 지위 앞에서 쩔쩔매는 것을 보면 말이지요. 강력한 왕권을 추구했던 태종의 후광을 받아, 그의 맏아들에게서도 공고한 권력을 인식했을 것입니다.

 

조선은 태조-정종-태종에 이를 때까지 왕위 계승의 원칙에서 벗어난 임금이 배출되었습니다. 그 가운데 정치 논리로 인해 여러 차례 혈육이 제거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태종은 피의 역사를 끊기 위해, 적장자를 세워 ‘엘리트 코스’를 밟은 후계자로 길러내겠다는 의지가 강했으리라 추측 가능합니다.

 

양녕의 방탕함 고치고 싶었던 태종의 초강수

 

하지만 태종의 바람과 달리, 선생님들에게 미래 권력을 훈육하는 일은 녹록치 않았습니다. 그 가운데 동생 충녕대군은 태종에게 존재감을 획득해가고, 이러한 양상이 양녕의 선생님들에게 위협적으로 보였던 모양입니다. 양녕 또한 충녕의 지적 우위를 의식하고 때때로 질투합니다.

 

(세자가 말하였다.) “충녕은 보통 사람이 아니다.” (태종실록 14년 10월 26일)

 

(충녕과 시 짓기를 주고받으며) 임금이 기뻐서 “세자가 도달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하였다. 세자가 예전에 임금 앞에서, 사람들의 학문과 무예에 대해 토론하다가 “충녕은 용맹하지 못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설령 용맹하지 못하더라도, 큰일에 직면했을 때 큰 의문점을 분별해내는 데에는 당대에 견줄 사람이 없다.” (태종실록 16년 2월 9일)

 

이때에 충녕대군이 배우기를 좋아하니, 세자빈객 이내와 변계량 등이 시기하여 여러 번 서연에서 충녕대군을 칭찬함으로써 세자를 분발시키고자 하였다. 변계량이 매번 충녕대군의 시관侍官에게 읽는 것이 무슨 글인가 하고 물어서, 무슨 글을 읽는다고 대답하면 반드시 칭찬하고 감탄하였다. (태종실록 16년 9월 7일)

 

선생님들은 충녕의 학습 수준과 태도를 칭찬하며 양녕의 경쟁심을 부추겨 봅니다. 그러나 이 충격요법도 그다지 효과가 없었던 모양입니다. 대체로 경쟁자를 이기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각고의 노력으로 나의 실력을 키우거나, 상대를 깎아내려서 위안을 얻는 일명 ‘정신승리’를 들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양녕은 후자를 택한 것으로 보입니다. 자신이 충녕보다 낫다고 생각되는 점을 부친 앞에서 불쑥 말하는 것을 보면 말이지요.

시간이 지나도 개선의 여지는 보이지 않고, 심지어 선생님이 양녕의 반성문까지 대신 써줍니다. 자기소개서 대필, 수행평가 대행 등을 해주는 요즘의 일부 학원·과외 선생님이 떠오르는 대목입니다.

 

세자가 종묘에 아뢰니, 그 글은 이러하였다......“아뢴 뒤 (개과천선하겠다는) 이 말에 변함이 있으면, 조상의 영혼께서는 반드시 벌을 내려 (저를) 용서하지 마소서.” 또 주상께 글을 올렸는데......“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저를) 가엾게 여겨 주소서.” 종묘에 올린 맹세와 주상께 올린 글은 모두 빈객 변계량이 지은 것이었다. (태종실록 17년 2월 22일)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고치겠다고 이미 하늘에 맹세까지 한 바 있건만, 양녕의 비행은 반복됩니다. 여성 스캔들이 잦았던 양녕이 이번에는 남의 첩인 어리於里라는 여성을 궁궐로 몰래 데려옵니다. 이 사건은 후일 폐세자가 되는 도화선이 되는데요.

태종은 이번 기회에 양녕의 방탕함을 고치고 싶어 합니다. 양녕을 장인 김한로의 집으로 보내고, 궁중에서 지급하던 양식을 끊도록 명령을 내리는 등 초강수를 둡니다. 요즘으로 보자면, 집에서 쫓아내고 신용카드를 정지시키는 것과 비슷할까요?

 

임금은 사적 개인에 그칠 수 없는 공적 존재

 

태종의 의중을 파악한 세자시강원의 선생님들은 양녕에게, 종묘에 모신 조상들께 반성문을 올림으로써 아버지에게 강한 개선의 의지를 보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반성문의 작성을 양녕은 선생님에게 떠넘깁니다. 양녕도 선생님도 ‘이번만 무사히 넘기자’라는 안일한 생각을 했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1년 정도 지내던 양녕은 또 다시 여성 스캔들을 일으키고, 이를 지적하는 아버지에게 대듭니다.

 

세자가 환관 박지생을 보내 직접 쓴 손 편지를 (태종께) 올렸는데, 사연은 이러하였다. “전하의 시녀는 다 궁중에 들이는데, 어찌 다 귀중하게 여겨 받아들이십니까?” (태종실록 18년 5월 30일)

 

“내가 세자의 글을 보니, 놀라서 몸이 움츠러들고 가르치기가 어렵겠다 싶구나.”......“이 아이는 마음을 고치기 어렵다. 그 말의 기세를 본다면 양녕이 정치를 하는 것이 사람들에게 재앙이 될 지 복이 될 지 예측하기가 어려우니......서연관으로 하여금 잘못된 일을 고치도록 말하고, 서연에 나오게 하여 잘 성장시켜야 마땅하겠다. 이와 같이 해도 마음을 고치지 않는다면, 선례에 따라 처리하겠다.” (태종실록 18년 6월 1일)

 

의정부議政府(조선 최고 행정기관), 조선 건국에 공을 세운 공신들, 육조六曹(행정 실무를 담당하는 여섯 부서), 삼군 도총제부三軍都摠制府(모든 군사를 관할하는 기관), 한양 모든 관청의 관리들이 글을 올려, 세자를 파면하도록 청하였다. (태종실록 18년 6월 2일)

 

양녕은 ‘아버지도 여성 편력이 있으면서 어째서 자신만 탓하느냐’고 정면으로 맞섭니다. 이는 단순히 한 사안에 대한 이의제기나 불평을 넘어, 현재 권력에 대한 미래 권력의 도전으로 비쳐질 수 있습니다.

아울러 임금은 어쩔 수 없이, 사적 개인에 그칠 수 없는 공적 존재입니다. 설령 개인적 판단에 따라 결정을 내린다고 해도 그 파급은 국가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태종이 사사롭게는 양녕에게 아버지이지만, 동시에 국가의 명운을 책임져야 하는 정치인입니다.

이는 국가의 공식적 2인자로 정치적 존재가 되어버린 세자에게도 해당되는 사안입니다. 따라서 권력을 남용해 국가의 공적 조직이나 조직원을 사익 추구에 사용하거나, 국정에 개입하려는 사사로운 무리를 방조하여 ‘비선 실세’의 여지를 두어서는 안 되는 법입니다.

 

양녕대군, 태양에 가장 가까이 다가갔던 사람

 

여기에까지 생각이 미친다면 태종은 후계자에 대해 면밀하게 재고再考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미 1·2차 왕자의 난, 처가인 여흥 민씨 일가의 처단 등과 같은 사건을 통해, 한때 동지였던 혈족 및 친인척을 정치적 혹은 생물적 사망에 이르게 한 바 있습니다. 눈물을 머금고 자신의 아들도 정치적 맥락에서 재단해야 하는 시점에 도달한 것입니다.

태종 입장에서 임계점에 다다른 것은 물론, 나라의 여론도 양녕의 편이 아닙니다. 국정 운영에 관여하는 상급·하급 공무원들이 세자의 파면을 요구합니다.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양녕의 선생님들도 더 이상은 막아주지 못합니다. 이제는 그들도 세자 교체를 요청하는 여론에 합류합니다. 스승과 제자 사이의 인정과 도리는 비정한 정치 논리와 공적 시스템 속에 매몰되어 버린 것입니다.

 

양녕의 세자빈객 곧 선생님이었던 변계량은 두 달 후, 세종의 지경연사知經筵事로 자리를 옮깁니다. 지경연사는 임금이 고전과 동시에 국정을 토론하는 자리인 경연經筵을 담당하는 정2품 관직입니다. 세자의 선생님에서 임금의 선생님이 되었으니, 영전榮轉을 한 셈입니다. 그 후 변계량은 약 20년간 국가의 학문을 상징하는 ‘문형文衡’으로서, 세종의 주요 국정운영 동반자가 됩니다.

 

양녕대군은 이카로스Īkaros처럼 태양에 가장 가까이 다가갔던 사람입니다. 그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면, 생명을 담보할 수 없습니다. 단종 복위 운동에서 볼 수 있듯이, 과거 권력을 재추대하고자 하는 무리가 있을 수 있으므로, 당사자를 사전에 제거해버리기 마련입니다. 실제로 세종 6년에, 양녕이 왕이 됐으면 세상이 더 좋아졌을 것이라는 불충한 말을 한 향리들, 양녕이 군사력을 장악하려 한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린 군인을 처벌하기도 합니다. 세종이 보호해주어 양녕은 세종보다 장수하지만, 통상적으로 ‘폐세자=사망’이라 충분히 유추할 수 있었습니다.

 

(제자) 안연이 죽자, 공자가 말하였다. “슬프다! 하늘이 나를 버리는구나! 하늘이 나를 버리는구나!” 안연이 죽자, 공자가 애통하게 곡을 하였다. 따르던 제자가 말하였다. “선생님은 지나치게 슬퍼하십니다.” 공자가 말하였다. “내가 지나치게 슬퍼한다고? 안연을 위해 슬퍼하지 않으면, 내가 누구를 위해 슬퍼하겠느냐?” (『논어論語』 「선진先進」)

 

동양 고전의 교과서 격인 『논어』에서, 공자는 제자 안연이 사망하자 통곡합니다. 어찌나 비통해 하는지 다른 제자들이 서운해 할 정도입니다. 이에 비해, 양녕의 선생님들이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제자를 위해 진정 통곡했는지 의문입니다. 정치 논리 앞에서는 마음으로 울어주는 사제 관계는 없는 것인가 봅니다.

 

(양녕대군의 교육 실패는 학부모 태종의 학습 방침이 확고하지 못한 이유도 있어 보입니다. 이번 시리즈의 마지막 편인 양녕에 대한 태종의 교육법에 대해서는 다음으로 이어집니다.)

 

(양녕대군의 선생님 중 한 사람인 변계량의 문집 『춘정집春亭集』. 출처 : 국립전주박물관)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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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갓!

오마이뉴스에서 상을 주셨습니다!
'2020년 5월 이달의 새뉴스게릴라 수상자'로 선정되었는데요(제가 해석하기론 '이달의 신인 기자상' 정도 될 것 같습니다).
제 글에 '좋아요' 꾸욱 해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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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채원 시민기자는 <실록 읽어주는 여자>라는 연재를 통해 조선왕조실록에 담긴 다양한 사회상을 현대인의 눈높이에 맞게 풀어내고 있습니다. 자신을 "사람들이 저마다의 세종을 스스로 발견하도록 공감의 역동을 선사하는 세종이야기꾼"이라고 밝힌 오채원 시민기자를 2020년 5월 이달의 새뉴스게릴라로 선정합니다.

 

"굶어 죽는 이가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용서하지 않겠다" http://omn.kr/1nhia
아들아, 모든 업보는 내가 지고 저세상으로 가마 http://omn.kr/1nk49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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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이야기꾼 오채원이 가정의 달 5월을 맞아, '아버지 태종'의 이야기를 다룬 <아들아, 모든 업보는 내가 지고 저세상으로 가마>가 오마이뉴스 탑기사로 게재되었습니다. 2년 전에 돌아가신 아빠 생각이 나서 원고의 마무리가 참 힘들었는데요. 시간이 흐르며 조금씩 조금씩 그분의 부재를 실감하게 됩니다. 기사 바로 가기 : http://omn.kr/1nk49)

 

 

태조가 (조선 개국 전에) 일찍이 말하였다. “내 뜻을 성취할 사람은 반드시 너(이방원, 이후 태종)일 것이다.” (태조실록 총서)

 

고려의 무인 이성계에게 이방원은 가문의 영광을 실현해준 자랑스러운 아들이었습니다. 이성계의 본거지는 고려의 수도인 개경(현재의 개성)의 동북 방향에 위치한 동북면東北面, 즉 지금의 함경도였습니다. 이성계는 공민왕이 신임하는 상만호上萬戶라는 총지휘관이었지만, 그가 맹주였던 동북면은 물리적 뿐 아니라 정치적 지형에서도 변방이었습니다. 이에 이성계는 무예가 아닌 유학에 정통한 자손이 과거라는 등용문을 통과해 가문을 개경의 주류 세계에 진입시키길 고대했습니다.

 

그 소망에 부응하듯 다섯째 아들 이방원이 문과에 급제하며 중앙 무대에 데뷔합니다. 가문 최초의 과거 급제 소식을 듣자 어찌나 감격스러웠던지 이성계는 궁궐을 향해 절하고 눈물을 흘립니다. 이어서 이방원이 왕명작성 및 역사편찬 등을 관장하는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의 정삼품正三品 벼슬인 제학提學에 임명되자 이성계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사람을 시켜 두세 번이나 반복해서 관교官敎(임명장)를 읽게 했다고, 태조실록에서 그날의 장면을 증언합니다. 이후 이방원은 왕실과의 혼인 자격을 갖춘 가문인 ‘재상지종宰相之宗’ 중 여흥驪興 민씨閔氏 가문의 여성과 결혼하며, 이성계 집안의 격을 드높이는데 꾸준히 기여합니다.

 

국가지정문화재 보물인 최광지 홍패紅牌. 고려 창왕 1년인 1389년에 발급된 과거급제증서로, 국새가 찍힌 고려의 공문서로서 유일하게 현존한다. 출처 : 연합뉴스

 

이성계는 이후 홍건적·여진족·몽고족·왜구 등을 토벌하며 민중의 영웅으로 부상하고, 성리학의 세례를 받은 신진사대부의 신망을 얻으며 고려의 ‘전국구 정치인’이 됩니다. 차차 공훈과 이에 따른 정치적 지분을 확보해나가며 급기야 고려의 왕위에 오르고, 1392년에 조선을 개국하지요. 이 과정에서도 이방원의 기여는 절대적이었습니다. 앞장서서 이성계 일파의 정적을 제거하는 등 이방원은 이성계에게 아들을 넘어 혁명동지에 버금가는 존재였습니다.

 

아들을 죽이려 한 아버지, 태조

 

그러나 태조 이성계는 즉위 7년차인 1398년, 이방원이 주도한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실각하며, 자신이 후계자로 세웠던 막내아들 이방석을 잃고, 차남 이방과(제2대 임금 정종)에게 왕좌를 물려줍니다. 명목상 임금에 가까웠던 정종은 약 2년 후 양위하며 본격적으로 이방원, 즉 태종의 시대로 접어듭니다. 이렇게 하여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듯 보였던 태조는 4년 후인 1402년, 자신의 본거지인 함흥 지역에서 일어난 ‘조사의趙思義의 난’이라 불리는 쿠데타에 직간접 관여합니다. 자신의 아들을 저격하는 일을 주도 혹은 참여한 것이지요. 이십여 일만에 반란군이 궤멸하지만, 태조는 돌아올 줄 모릅니다. 여기에서 바로 그 유명한 함흥차사 이야기가 비롯됩니다.

 

태조는 처음에 덕원德源(현재의 함경도 문천군)으로 갔다가 또 함흥으로 갔는데, 문안 사절로 가서 죽은 사람이 속출하였다......태종이 찾아가서 간곡히 청하니, 무학대사가 어쩔 수 없이 함흥에 가서 태조를 뵈었다......“방원(태종)이 진실로 죄가 있으나, 전하께서 사랑한 아들은 이미 다 죽고 그 사람만 남았는데, 이 아들마저 끊어 버리면 전하가 평생 애써 이룬 대업을 장차 누구에게 맡기려 하십니까? 남에게 부탁하는 것보다 차라니 내 혈족에게 주는 것이 나으니, 신중히 생각해 보소서.” 태조가 그의 말이 꽤 그럴 듯하다고 생각하고 드디어 행차를 돌릴 마음이 생겼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태조조太祖朝 고사본말故事本末」)

 

조선 후기의 학자인 이긍익이 야사를 종합한 책 『연려실기술』에 의하면, 태조는 마중 나온 태종을 향해 화살을 쏘고 소매에 쇠방망이를 숨겨오는 등 환궁하는 순간까지도 아들의 목숨을 노립니다. 그 진위여부는 확인할 수 없으나, 태종에 대한 태조의 실망과 분노는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조聖祖(태조)께서 조사의의 진영에 머무르셨는데......조사의가......마침내 관군官軍(정부군)에 잡혔습니다. 이에 수신帥臣(도의 국방 책임자) 이천우·이빈·최운해 등이 성조를 호위해 평양을 경유해서 개성에 돌아오시므로, 태종께서 금교역金郊驛(현재의 황해도 금천군의 역)에 나가 맞이하셨습니다.” (숙종실록 13년 1월 7일)

 

마지못해 궁으로 복귀하였으나 여전히 아버지는 아들에게 냉랭합니다. 문안 인사마저 받지 않을 만큼 아들 보기를 꺼리더니 5년여 후에야 아버지는 아들에게 술 한 잔을 권합니다.

 

임금(태종)이 덕수궁(태조의 거처)에 나아가 문안을 드렸다. 이전에는 임금이 자주 덕수궁에 나아가도 접견하는 일이 적었는데, 이날은 태상왕太上王(태조)이 침전寢殿(침실)으로 불러들여 술을 권하니 취하기에 이르렀다. 임금이 매우 기뻐하여 가까운 신하에게 말하였다. “내가 돌아가는 길에 피리를 연주하라.” (태종실록 7년 9월 20일)

 

그 옛날처럼 거나하게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고 태종은 춤을 추고 싶을 정도로 신이 났습니다. 그리웠던 아버지의 정을 다시 느끼게 되었으니까요. 그러나 부자에게 시간은 그리 오래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임금이 말하였다. “이 같은 상사喪事를 당하니 슬픔이 미칠 데가 없구나. 내가 무인년(1398년) 가을에 국가의 장기적 발전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거사를 도모했는데[제1차 왕자의 난], 그 뒤 부왕(태조)께서 항상 못마땅하게 여기셨다. 내가 생전에 순종하지 못하여 마음을 상하시게 했다. 이제야 정신 차리고 보니 부왕께서 승하하셨는데, 어찌 차마 잊어버리고 서둘러 정무를 볼 수 있겠는가?” (태종실록 8년 6월 21일)

 

부자 관계가 회복된 지 8개월여 만에 태조가 승하합니다. 한 달이 지나도 업무에 복귀할 수 없을 만큼 태종의 충격은 큽니다. 부자가 천신만고 끝에 세운 나라는 안정을 찾아가건만, 한 꿈을 꾸었던 아버지는 이제 세상에 없습니다. 정치 논리에 휘말린 가족사를 돌아보며 회한이 일었겠지요. 그는 나이 마흔에도 아버지의 정이 고픈 한 사람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태종은 자신의 아이들에게 한없이 마음 약한 아버지였나 봅니다.

 

함흥에서 돌아오던 태조가 태종을 향해 화살을 쏘았으나 그늘막 기둥에 꽂혔다는 야사가 전해지는 살곶이 다리의 전경.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아들바보, 태종  

 

“내가 젊은 시절에 아들 셋을 연달아 여의고 갑술년(1394년)에 양녕을 낳았는데, 그도 죽을까 두려워서 처가에 두게 했다. 병자년(1396년)에 효령을 낳았는데 열흘이 채 안 돼 병을 얻어서 홍영리洪永理의 집에 두게 했고, 정축년(1397년)에 주상(세종)을 낳았다. 그때 내가 정도전 일파의 시기를 받아 형세가 좋지 않게 되니, 실로 남은 날이 얼마 없겠구나 생각되어 항상 가슴이 답답하고 아무런 낙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대비(부인 원경왕후)와 더불어 서로 양녕을 안아 주고 업어 주고 하여, 무릎 위를 떠난 적이 없었으며, 이로 말미암아 자애하는 마음이 가장 두터워 다른 자식과 달랐다.” (세종실록 1년 2월 3일)

 

실록을 보면, 자녀들에 대한 태종의 사랑은 극진했던 것 같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연달아 아들 셋을 병으로 잃고 난 후, 나이 서른에 가까워서야 양녕대군을 시작으로 효령과 충녕을 낳았기 때문에, 혹시나 이 아이들마저 죽을까봐 애지중지 기릅니다. 아이들이 꼬물꼬물 어릴 때 태종 부부는 1차, 2차 왕자의 난을 겪습니다. 자신부터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처지이니 아이들이 가엾고 또 애틋했을 것입니다. 태종 부부는 양녕을 무릎에서 내려놓은 적이 없을 만큼 그야말로 ‘금이야 옥이야’ 키웁니다.

 

이렇게 키운 맏아들이 세자에 걸맞지 않는 행동들을 하기 일쑤입니다.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거짓말하고 놀러 다니고, 여자친구를 몰래 궁으로 들이고, 반성문을 쓰고는 바로 아버지한테 대드니 억장이 무너졌을 것입니다. 양녕은 자신에게 아들이지만 국가에는 차세대 최고통수권자입니다. 그 자격이 의심되는 상황이 이어지니 태종은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셋째 아들 충녕으로 세자를 교체하는데, 그날 태종은 양녕을 붙들고 통곡합니다.

 

이제李禔를 세자에서 물러나게 하여 광주로 추방하고 충녕대군으로 왕세자를 삼았다......유정현 등이 “신들이 어진 사람을 고르자는 것도 충녕대군을 가리킨 것입니다.” 하여, 의논이 이미 정해지자, 임금이 통곡하며 흐느끼다 목이 메었다. (태종실록 18년 6월 3일)

 

15년간 세자의 자리에 있던 맏이 양녕에서, 정통성이 부족하며 검증되지 않은 셋째 충녕으로의 교체는 부담이 큰 정치적 판단이었을 것입니다. 다행히 두 번째 세자는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태종이 생시에 자리를 물려주고 상왕上王으로 물러나자, 세종은 착실하게 임금 노릇을 했고, 부모에게 효도했으며, 야인이 되어 목숨 부지가 불투명한 큰형 양녕을 감싸주었습니다. 이처럼 태종에게 세종은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어주었습니다.

 

임금(세종)의 정무 처리가 사리에 합당하더라는 말을 듣고 (태종이) “내 진실로 (세종이) 본디 현명한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노련할 줄은 몰랐구나.” 하고, 대신들에게 “주상은 참으로 문왕文王(중국 고대 주나라의 기초를 닦은 성군) 같은 임금이다.” 했다. 또 일전에 교외에 행차했을 때, 임금이 오는 것을 바라보고 눈물이 떨어지는 것을 깨닫지 못하며 절로 기뻐하면서 말했다......“내가 나라를 맡김에 사람을 잘 얻었으니, 자연을 벗 삼아 한가로이 노닐기에 걱정이 없는 자는 천하에 나 하나 뿐......예나 지금이나 역시 나 하나뿐일 것이다.” (세종실록 2년 5월 16일)

 

세종은 약 두 달의 짧은 세자 기간을 거쳤기에, 임금이 갖춰야 할 지식·태도·역량 등을 예비 학습할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그런데도 용상에 오른 지 이년 여 만에 벌써 안정적으로 업무를 처리합니다. 신하들이 태종 면전에서 세종의 직무능력을 칭찬하자, ‘세상에 나처럼 아들 잘 둔 사람은 또 없을 것’이라고 자랑합니다. 얼마나 아들이 기특했는지 바라만 보아도 눈물이 저절로 떨어집니다. 세자 교체를 통해 성공적으로 후세를 이은 자신의 결정에 뿌듯해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세종의 안착은 뛰어난 개인의 기량 덕분이기도 하지만, 아버지 태종의 치밀하며 희생적인 사전 준비가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태종이) 병조 판서兵曹判書(현 국방부 장관) 박신朴信을 불러 말했다......“(창덕궁) 인정전은 협소하므로 마땅히 새로 지어야 할 것이다. 토목공사는 백성을 수고롭게 하는 큰일이므로 백성들이 심히 괴롭게 여긴다. 그런데도 조속히 지으려는 까닭은 다름이 아니라, 백성을 부리는 책임을 내가 떠맡고, 세자(충녕)가 즉위한 뒤에는 한 줌의 흙이나 한 조각의 나무가 들어가는 토목공사라도 백성들에게 더하지 않게 해서, 두터운 민심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태종실록 18년 7월 5일)

 

당초에 병조 참판(현 국방부 차관) 이명덕이 그 일(한양도성 보수 공사)을 주관해 여러 도에서 총 43만 명의 장정을 징발했다. 대언(임금 비서) 등이 임금에게 아뢰었다. “가만히 살펴보건대, 태조께서 처음으로 한양에 도읍을 정해 성을 쌓는데, 장정이 20여만 명 들었습니다. 지금은 이를 수축할 뿐인데 어찌 이처럼 많습니까?” (세종실록 3년 12월 10일)

 

한양도성의 맨 밑은 태조 때 축조하고, 그 위는 세종 시대에 태종의 주도로 보수 및 신축 공사를 했다. 그 뒤 숙종·효종·현종·영조·순조 시대에도 보수했으나 한국전쟁으로 대부분 파괴된 것을 지속적으로 복원하고 있다. 출처 : 오채원

 

태종은 자신의 임기 말부터 상왕으로 물러나 있는 기간에 걸쳐, 백성들의 노역이 필요하고 세금이 들어가는 대공사를 감행합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지지율 하락 요인을 자신이 감당하여, 세종은 탄탄한 기반 위에서 자신의 시대를 열도록 배려한 것이지요. 그리고 저 세상으로 갈 때에는 가뭄으로 인해 세종과 백성이 고통 받지 않도록, 비를 내리겠다고 유언을 남깁니다.

 

세종 4년에 임금(태종)이 승하하시려 할 때 이와 같이 하교하였다. “지금 가뭄이 심하니, 내가 죽은 뒤에도 안다면 반드시 이날 비가 오도록 하겠다.” 그 뒤로 제삿날만 되면 반드시 비가 왔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태종비’라 불렀다. (『연려실기술』, 「태종조太宗朝 고사본말」)

 

그래서 역사는 태종의 기일인 음력 5월 10일 즈음에 내리는 단비를 ‘태종비’라고 부릅니다. 목숨이 다하는 그 순간까지 아들을 걱정하는 아버지의 사랑을 엿볼 수 있는 기록인데요. 자신은 아버지로부터 목숨을 위협받았던 애처로운 아들이지만, 그 파멸적 인연의 고리를 자신의 대에서 끊고 말겠다는, 그리고 ‘후세를 위해 모든 업보는 내가 다 지고 가겠다’는 태종의 부정父情을 대하자니, 문득 제 아버지가 그리워집니다.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카네이션이 담긴 화병Vase with Carnations, 1886년. 출처 : 디트로이트 미술관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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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정국이 장기화되며 많은 이들이 생계 곤란을 겪고, 정부에서는 긴급지원금 지급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에, 세종시대의 공무원들과 정치인들이 어떻게 재난에 대처했는지 정리한 기사가 오마이뉴스 메인에 게재되었습니다. 세종이야기꾼 오채원이 들려드리는 <실록 읽어주는 여자> 연재 기사 바로 가기 : http://omn.kr/1nhia)

 

“(내가 재위한 기간 중에) 천재지변이 없는 해가 없었다.” (세종실록 7년 6월 23일)

 

위와 같이 한탄한 것처럼, 세종은 거의 매년 자연재해 그리고 이로 인한 흉작으로 근심이 컸습니다. 세종실록에서는 크게 세 번의 대기근을 관찰할 수 있는데요. 피해 지역이 주로 경기·강원도 일대였던 세종 5~7년(1423-1425년), 곡창지대인 충청·전라·경상도 등 하삼도下三道 중심이었던 세종 19년, 경기·충청·강원·황해도 등 광범위했던 세종 26년을 들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세종 5~7년 무렵은 집권 초기로, 경험이 축적되기 전이었기에 대처하는데 고충이 컸을 것입니다.

( 보릿고개에 나물을 캐는 아이들을 담은  1930 년 사진 .  출처  :  서울역사박물관 아카이브 )

중앙집권체제를 지향한 조선은 국가 차원에서 선제적으로 재난에 대처합니다. 임금이 신뢰하거나 경륜이 있는 인물을 발탁해 현장에 급파한 후 피해 상황을 조사하고, 지방 수령(현재의 도지사·군수)이 백성들을 적극 구제하도록 감찰 및 지원합니다. ‘골든타임’을 놓치면, 주린 백성들은 전염병에 집단 감염되거나, 식량을 찾아 이산가족이 되어 지방으로 떠돌거나, 혹은 경제력 있는 자의 노비로 자진해 들어갑니다. 이는 세금원의 축소로 이어져, 국가의 운영마저 위태로워집니다. 그리고 위정자가 제대로 공부했다면, ‘임금은 어머니가 갓난아이를 돌보듯이 백성을 보호해야 한다[如保赤子]’는 유교 경전 『대학大學』의 가르침을 새기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세종은 궁에서 신하들의 보고만 받고 있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책망이 자신들에게 올까봐 부정적인 소식 전하기를 종종 피하니까요. 이에 세종은 민폐를 최소화하기 위해, 단출한 차림에 호위하는 신하들 없이 당직 경호원만 대동하고, 서대문 밖으로 나옵니다. 육안으로 살펴보니 역시나 현장은 보고와 달랐습니다.

 

“올해 벼농사는 모두들 ‘매우 잘 되었습니다’라고 했건만, 오늘 보니 눈물이 날 지경이다.” (세종실록 7년 7월 1일)

 

울고 싶은 심정으로 현장을 돌아보며 농부의 하소연이나 고충을 직접 듣습니다. 이렇게 시찰을 마치고는 점심 수라도 들지 않고 궁으로 돌아옵니다. 밥맛이 나겠습니까? 믿었던 신하들의 보고와 다른 현실에 맞닥뜨린 충격, 그리고 백성들에 대한 미안함과 측은함이 컸겠지요. 이 외에도 재난이 발생하면, 그는 ‘구언求言’이라 하여 자신에게서 고칠 점을 두루 경청하며 성찰하고, 열흘 가까이 앉은 채 밤을 샜으며, 처소를 초가 같은 허름한 곳으로 옮기거나 반찬 수를 줄이며, 백성들과 고통을 함께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관리들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위에서 본 것처럼, 실태를 축소 보고 혹은 은폐하기도 하고, 굶주리거나 병든 백성들에 대한 긴급 지원·구조 등을 성실히 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에 대처하기 위해, 세종은 감찰관을 파견해 현황을 파악한 후, 대민 지원에 불성실하거나 실패한 책임자에게 엄한 벌을 내립니다.

 

의금부義禁府(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에서 보고하였다. “금성金城(현재의 강원도 금성면) 현령縣令(군수와 유사) 이훈, 감고監考(지방의 곡식·세금 담당자) 김거상과 윤생사 등이 긴급지원을 잘하지 못해 백성을 굶어 죽게 만들었습니다. 이는 (법전 ≪대명률大明律≫의) 제서유위율制書有違律(임금의 명령을 어긴 자를 처벌하는 법규)에 해당되니 장 100대에 처하소서.” 이훈에게는 속贖(형벌 대신 벌금 납부) 받지 말고 장 90대에 처하며, 나머지 사람들은 법대로 처단하라고 명하였다. (세종실록 5년 6월 6일)

 

백성 구제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자는 왕족이라도 처벌을 피해갈 수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 세종 26년의 대기근 시, 경기도 관찰사(현재의 도지사)로 재임한 이는 태조의 외손, 즉 세종과 사촌지간인 이선李宣입니다. 세종이 경기도에 잠시 머물며, 농사 상황과 굶주리는 백성들의 수 등을 이선에게 묻자, 조금 가물기는 하나 별 문제가 없다고 답합니다. 그런데 감찰을 다녀온 신하의 보고는 딴판이었습니다. 파종을 못한 땅이 경기도의 1/3-2/3에 달하고, 영양실조로 인한 병자들도 속출하더라는 것입니다. 게다가 백성들이 이러한 사정을 임금에게 직접 호소할까봐 행차 시에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통제까지 했음이 밝혀집니다.

 

“내가 백성들의 일에 관해서는 나와 가까운 친족이라 하더라도 용서하지 않았으니, 만약 굶어 죽는 이가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경을 용서하지 않겠다.” (세종실록 26년 5월 5일)

 

임금부터 공적인 마음으로 백성 구제를 지휘하며, 이에 성실하게 응하지 않는 자에게는 엄한 처벌을 내리니, 책임자들은 자연 자신의 직무에 힘쓸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세종 19년의 대기근 대처가 이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입니다. 이상 기후로 전년부터 우물과 하천이 마르고, 경기·경상·전라도의 일부 지역을 제외한 전국이 농사에 실패합니다. 게다가 메뚜기 떼가 창궐하고, 전염병이 굶주린 이들을 덮쳐 사망자가 속출합니다. 나무껍질을 벗겨 먹는 것도 한계에 다다른 나머지, 자신의 아이를 나무에 묶어놓고 도망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물가급등과 곡식품귀 현상이 일어나고, 지방 정부의 창고가 바닥이 나서 급기야 중앙 정부에 비축해둔 곡식을 옮겨다 백성들을 먹일 수밖에 없습니다. 아비규환과 같은 전국적 재난 국면은 전심전력하는 수령들과 이들을 엄격히 감찰하는 감독관들이 있어서, 차차 진정세로 돌아섭니다.

 

“수령들이 감고(곡식·세금 담당자)들을 인솔해서 마음을 다해 조치하고 몸소 백성들을 먹였으므로, 이에 힘입어 살아난 백성들이 많았다.” (세종실록 19년 2월 9일)

 

세종 19년의 대기근에 대한 사관의 평가는 인간의 저력을 역사적으로 드러내줍니다. 국가지도자, 관계부처 및 최전선의 책임자가 “마음을 다해 조치”했기에, 잔혹한 천재지변 속에서도 많은 생명을 살려낼 수 있었습니다. 문제의 시작은 자연에 있더라도 종결은 인간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이처럼 15세기 당시 선진국이었던 조선의 위상은 백성들의 소소한 일상을 걱정하는 위정자들의 성심誠心에서 비롯되었습니다.

 

(2019년 OECD 주요국 중, 한국의 정부 부채 비율은 매우 낮으며 재정건전성이 우수한 편이다. 출처 : 프레스맨)

 

코로나19 정국이 장기화되며 무급휴직자·영세사업자·특수고용노동자·프리랜서 등을 포함한 국민 다수의 생계가 위태롭습니다. 이러한 ‘코로나 보릿고개’를 넘기 위한 정부의 추가경정예산 편성에 대해, 일부 정치인들은 ‘퍼주기 추경’ 혹은 ‘세금 폭탄’이라 공격하고, 또 특정 관료 집단은 ‘재정건전성 유지’라는 신념에 빠져, 추경의 규모를 축소하려는 듯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나라에서는 긴급재난지원금 혹은 재난기본소득의 지급 범위와 금액을 놓고 논란이 이어지는 가운데, OECD 주요 국가들은 신속하게 예산안 처리에 나섰습니다. 지난 4월 23일 한겨레의 보도에 의하면, 보수적으로 재정을 운용해온 독일 연방정부이지만 경기부양책을 이틀 만에 하원과 상원까지 통과시켰습니다. 이에 따라, 독일 국민은 1인당 최대 1만5천유로 곧 한화로 약 1천993만원인 지원금을 신청한지 사흘 만에 받을 수 있습니다. 심지어 일본은 OECD 국가 중 국가 채무 비율이 가장 높지만, 1인당 10만엔 즉 한화로 약 113만원을 5월 7일부터 지급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와 같이 많은 국가들이 선제적이며 신속하게 코로나19 경제 대책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다행히 4월 30일, 우리 국회에서도 추가경정예산안을 통과시켜, 5월 11일부터 전국민이 긴급재난지원금을 신청할 수 있을 전망입니다. 1인 가구는 40만원, 2인 가구는 60만원, 3인 가구는 80만원, 4인 이상 가구는 100만원이 지급된다고 합니다만, 수개월간 생계가 끊어진 그리고 앞으로가 더 막막한 이들에게 이것으로 충분할 수 없습니다. 책임자들은 선조들처럼 ‘어머니가 갓난아이를 돌보는’ 간절한 마음으로 국민의 삶을 살펴주길 바랍니다.

건전재정이라는 나중을 위한 씨앗 저축에 치중하면, 보릿고개는 영영 넘을 수 없는 고개가 되어 버립니다. 달리 말해, 국민의 현재를 걱정하지 않으면 국가에게 미래는 없습니다. 국가는 백성(국민)으로 근본을 삼고, 백성(국민)은 먹고 사는 문제로 하늘을 삼는 법이므로, 결국 정치의 존재 이유는 민생에 있는 것입니다(세종실록 26년 윤7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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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회 장애인의 날을 맞아, 세종이야기꾼 오채원이 작성한 '세종도 장애인이었다'는 오마이뉴스 탑 기사로 채택되었으며, 세종시대의 장애인에 대한 인식을 살펴보고자 하였습니다. 기사 바로 가기 : http://omn.kr/1nf5d)

 

 

“반걸음 거리에서도 사람이 있는 것만 알겠고 누가 누구인지는 분간하지 못한다.” (세종실록 21년 6월 21일)

 

“봄부터 어두침침한 곳에서는 지팡이가 아니고는 걷기 어려웠다.” (세종실록 23년 4월 4일)

 

“내가 눈병을 얻은 지 이제 4, 5년이나 되었다. 올해 1, 2월에는 왼쪽 눈이 거의 실명하다시피 하였다.” (세종실록 23년 4월 9일)

 

“눈동자가 뿌옇게 흐려지고 막으로 덮였는데......지금에 이르러서는 더욱 눈이 보이지 않으니, 이것은 내가 죽을 때까지 고칠 수 없는 병이다.” (세종실록 25년 8월 29일)

 

바로 앞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하고, 한쪽 눈은 실명에 가깝다고 말하는 그는 누구일까요? 바로 조선의 제4대 임금인 세종입니다. 나이 마흔 무렵부터 겪은 저시력 증상이 점점 심각해진 중도 시각장애인인데요.

세종은 이러한 가운데에도 세계사·과학사·문명사적으로 인정받는 선진 문물의 발명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해시계 겸 별시계인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제작(세종 19년), 하천 수위의 측정기인 수표水標 제작(세종 23년), 달력 및 해설서인 『칠정산七政算』 편찬(세종 24년), 훈민정음 창제(세종 25년), 천문학서 『제가역상집諸家曆象集』 편찬(세종 27년), 의학사전 『의방유취醫方類聚』 편찬(세종 27년), 무기 제조·사용 설명서인 『총통등록銃筒謄錄』 편찬(세종 30년) 등의 업무를 지휘합니다.

 

“눈병이 더욱 심해지고, 이로 인해 여러 병세가 번갈아 괴롭히므로 정치에 부지런할 수가 없다.” (세종실록 24년 6월 16일)

 

치료 효과가 있다는 초수리(현재의 청주 초정리)의 약수를 마시고 온천욕도 하지만 증상은 조금 호전되는 것 같다가도 그때뿐이었습니다. 병증은 그를 신체적으로 또 정신적으로 괴롭힙니다. 아무리 성군聖君이라 평가받는 세종이지만, 안질환과 그 합병증으로 인한 능률의 저하는 어쩔 수 없다고 토로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능이나 무가치를 의미하는 바는 아닙니다.

 

관습도감사慣習都監使(음악을 다루는 관청의 관리) 박연이 글을 올렸다. “옛날의 제왕은 모두 맹인으로 악사樂師를 삼아서, 거문고를 타며 시를 읊는 직무를 맡겼습니다. 그들은 보지 못해도 소리를 잘 들으며, 또한 세상에 버릴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세종실록 13년 12월 25일)

 

위와 같이, 장애가 있건 없건 모든 인간은 각자의 존재이유를 지닌다는 인식이 전통시대에도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에서도 장애인에 대한 복지 정책이 있었습니다. 독질인篤疾人·잔질인殘疾人·폐질인廢疾人 등과 같은 중증 장애인은 조세와 병역을 면제하고, 국가에서 식량을 지급해주기도 했습니다. 시정侍丁이라 하여, 장애·불치병으로 경제력을 상실한 부모의 부양을 위해 아들에게 군역을 면제시켜주는 제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장애인을 시혜의 대상으로 여긴 것은 아닙니다. 조선이 지금보다 직업군의 수가 적은 시대였으므로 제약적이기는 하나 장애인 고용 정책은 실시되었습니다. 우선, 국가 차원의 기우제나 민간인의 질병치료 등을 위해 시각장애인이 경전을 읽어주는 맹인독경盲人讀經이라는 직업군이 있었습니다. 정부에서는 이들이 모이는 명통사明通寺를 관리하였고요. 음악을 다루는 관청인 관습도감慣習都監에 소속되어 궁중에서 음악을 연주하는 관현맹管絃盲, 천문을 관장하는 관청인 서운관書雲觀의 소속으로 점술을 다루는 과명맹課命盲 등은 시각장애인을 위해 국가에서 마련한 관직입니다. 세종시대에 시각장애인 점술사 지화池和와 이신李信 등은 궁중의 음식을 담당하는 관청인 사옹원司饔院에서 일을 하였고요. 허조許稠는 태종 및 세종을 보좌한 인물로, 좌의정이라는 고위직 관리까지 역임했는데, 어깨와 등이 굽어 ‘송골매 재상[瘦鷹宰相]’으로 불린 척추장애인입니다.

(1930 년 ,  독경하는 맹인 ,  출처  :  서울역사박물관 아카이브 )

2019년에 발표된 한국장애인고용공단 고용개발원의 2018년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장애인구는 2,585,876명으로 전체 인구의 5.0%를 차지하는데, 장애인구는 점차 증가세를 보입니다. 장애인구의 연령대를 보면, 15-64세 이상은 51.3%, 65세 이상이 46.7%로, 장애인의 대부분이 중도장애를 입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경향신문의 보도(2020.04.19)에 따르면, 중앙부처의 장애인 고용률은 2018년 현재 3.43%밖에 되지 않습니다. 연합뉴스의 보도(2020.04.19)를 보더라도, 2019년 기준으로 대기업의 장애인 고용률이 2.5%로, 중소기업보다 오히려 낮습니다.

 

장애인이 안정적으로 근무할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하는 것이 정부와 기업의 역할 아닐까요? 그리고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서로를 가까이에서 직접 볼 수 있어야 공감력 높은 사회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취지로, 장애 학생과 비장애 학생이 한데 어우러져 공부하는 통합 학급을 일부 운영하고 있지만, 이제 걸음마 단계입니다. 게다가 코로나19 정국에 장애인은 채용과 교육에서 비장애인보다 더욱 소외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2018년 기준 장애인의 연령대 비율. 출처 : 한국장애인고용공단 고용개발원)

올해 4월 20일은 마흔 번째 장애인의 날이었습니다. 우리 사회가 ‘포용국가’로 나아가려면, 장애인을 돌봄이나 시혜의 대상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갈 존재로 바라보아야 함을 종종 주장합니다만, 실제 인식이 어느 수준까지 와 있는지 저 스스로부터 돌아보게 됩니다. 앞서 한국장애인고용공단 고용개발원의 통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장애인구의 대다수가 중도장애인입니다. 이는 바로 나도 장애인이 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장애인과 함께하는 일은 곧 나를 위한 길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담화를 통해 ‘장애인이 걷기 편한 길은 비장애인도 편하게 걸을 수 있다’고, 그래서 장애인과 비장애인은 ‘서로에게 소중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훈민정음 창제에 몰두했던 세종은 시각 장애를 겪으며, 한자 ‘까막눈’ 백성들의 처지에 깊이 공감했으리라 추측해봅니다. 글을 앞에 두고도 읽지 못하는 괴로움을 함께 겪은 백성들과 세종은 ‘서로에게 소중한 사람’이 되었고, 이로 인해 600년 후의 우리도 한글의 시혜를 입고 있습니다. 선조들처럼 우리도 장애와 비장애의 공감을 통해 미래 가치를 만들어갈 수 있길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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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대 국회의원선거를 맞아, 세종이야기꾼 오채원이 작성한 '600년 전 실시된 국민투표를 아시나요?'는 세종시대의 국민투표를 다루었으며, 오마이뉴스에 4.15총선 특집기사로 게재됐습니다. http://omn.kr/1nbf8)

 

미국의 제16대 대통령인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이 말했다지요? ‘투표는 총알보다 강하다The ballot is stronger than the bullet’고. ‘한 표’에 담긴 민의가 세상을 역동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투표는 국가의 주인으로서 권리를 행사하는 수단이기에, 정책·법률의 입안 과정 및 결과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투표는 현대 민주주의에서의 주요 의사결정 방법입니다. 그런데 이 투표가 왕정 국가인 조선에서도 실시됐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600년 전인 1430년(세종 12년) 3월 5일, 현재의 기획재정부에 해당하는 호조戶曹에서 보고가 올라옵니다. ‘손실답험법損失踏驗法’을 폐기하고, ‘공법貢法’이라는 새로운 세법을 도입하자는 내용입니다. 기존의 손실답험법은 파견된 답험관이 그해의 농사 작황을 현지에서 육안으로 보고 등급을 매기는 ‘답험법’, 그리고 그 등급에 따라 세금을 감면해주는 ‘손실법’이 결합된 세법입니다. 답험관의 도덕성이나 능력에 따라 세금이 들쑥날쑥 책정되고, 또 답험관의 체류 비용을 지자체에서 부담하는 등 폐단이 지적되어 왔습니다. 따라서 앞으로는 공법에 의거해 일괄적으로 “전답田畓 1결結(비옥 정도에 따른 토지 면적 단위, 1결≒1㏊)마다 조세로 10말(1말≒18ℓ)을 거두게 하되, (척박한) 평안도와 함경도는 1결에 7말을 거두게 하여” 피폐한 백성들의 삶에 숨구멍을 내주자는 제안입니다. 이에 대해 세종은 다음과 같이 명을 내립니다.

 

“의정부(최고 행정기관) 및 육조六曹(행정 실무를 담당하는 여섯 관청), 서울에 있는 모든 관아, 서울 안의 모든 퇴직 관리, 전국의 감사·수령·관리로부터 시골에 사는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두 (공법 도입에 대한) 찬반을 물어서 보고하라.” (세종실록 12년 3월 5일)

 

위와 같이, 담당자가 직접 집집마다 방문하여 공법 도입에 대해 찬성인지 반대인지 의견을 수렴해오도록 명합니다. 전국민을 대상으로 한 이 찬반 투표에서 주목할 점은 투표의 주체 및 방식입니다. 지배계급·식자층인 전·현직 관리뿐 아니라, 지방에 사는 백성들에게까지 넓힌, 그리고 어찌 보면 직접·참여·숙의 민주주의에 가까운 방식이라는 점이 눈에 띕니다. 전국민을 대상으로 한 우리나라 최초의 투표는 이렇게 실시됩니다.

 

5개월 후인 8월 10일, 전국에서 투표 결과가 보고됩니다. 약 17만 가구를 대상으로 찬반을 취합한 결과, 찬성 95636명에 반대 73451명, 즉 약 10:7의 비율로 공법 도입에 대한 찬성이 우세했습니다. 다수결의 원칙에 의해 법제 개혁의 정당성을 확보한 것입니다.

 

그런데 세종의 다음 행보가 또 흥미롭습니다. 반대표를 행사한 좌의정(의정부의 두 번째 고위직) 황희 등의 의견에 따르라는 결정을 내린 것입니다. 이에 따라, 공법을 도입하기보다 기존 손실답험법의 보완, 곧 답험관의 선발·평가·관리하는 방침을 손봅니다(손실답험법의 폐단이 지속적으로 지적되어, 추후에 공법 도입을 재시도합니다). 이처럼 세종은 법제의 개혁에 임하여, 대단위 의견수렴 과정을 거치며, 추후 발생할 수 있는 문제를 미리 포착하고자 합니다. 또한 그 과정을 숙의의 기회로 삼아, 배제된 의견에도 주목해 법제의 완결성을 높입니다.

 

4개월 후인 12월, 보완된 손실답험법에 의거한 과세표준이 국가보다 백성에게 유리하다며, 예조禮曹(현재의 외교부·교육부·문화체육관광부·보건복지부) 판서(지금의 장관)인 신상申商이 이의를 제기합니다. 이에 대해 세종은 다음과 같이 답합니다.

 

“답험이 백성에게 유리하게 된 것은 잘못이 아니다. 백성이 만족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세종실록 12년 12월 18일)

 

투표의 결과가 나오기 전에, 세종은 “백성들이 불가하다고 한다면 그것(공법)을 실행할 수 없다.”(세종실록 12년 7월 5일) 고 말한 바 있습니다. 법제 도입 및 실행의 제1 원칙은 ‘국가가 아닌 백성들에게 이로울 것’이므로, 백성들에게 의견을 물은 것이지요. 결국 왕정국가의 최고통수권자이지만 세종은 백성을 통치의 대상으로 한정짓지 않고, 국정 운영의 참여자로 여긴 셈입니다.

 

제21대 총선의 투표 독려 이미지. 출처 : 중앙선거관리위원회 홈페이지 www.nec.go.kr

전세계가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인해 행정이 마비되다시피 하고, 일부 국가들은 선거가 연기된 가운데, 우리나라만 예정대로 총선을 치르게 됐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나라가 민주주의의 변방이 아닌, 새로운 모범 혹은 표준으로 각광받고 있습니다. 그 원동력은 세계보건기구(WHO) 등으로부터 ‘방역의 교과서를 쓰고 있다’고 평가받는 국가의 행정력에도 있지만, 또한 국가의 방침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시민들의 주체성에도 있습니다.

 

이 점을 유념하여, 투표로 선출될 21대 국회의원들은 국민을 통치의 대상이 아니라, 국정 운영의 파트너로 받아들여주시길 바랍니다. ‘국가가 아닌 백성에게 이로울 것’이라는 방향을 설정했던 600년 전 세종의 정치철학을 새겨주시길 바랍니다. 국민은 단지 ‘한 표’에 그치는 존재가 아니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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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방관의 국가공무원 전환을 맞아, 세종이야기꾼 오채원이 작성한 '조선시대에도 소방관이 있었을까?'는 세종시대의 소방청 및 소방관의 이야기를 다루었으며, 오마이뉴스 메인 기사로 채택되었습니다. https://bit.ly/3aYCw7C)

 

지금으로부터 약 600년 전인 세종 8년 2월 12일, 한성부漢城府(지금의 육군수도방위사령부)에서 보고가 올라옵니다. 한양에서 방화 사건이 하룻밤에도 두세 건 일어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로부터 3일 후 한양에서 큰 불이 납니다. 현재의 공정거래위원회와 유사한 경시서京市署(지금의 탑골공원 부근)와 북쪽의 행랑(상가와 유사)들, 중부·남부·동부의 민가들을 합해 총 이천 채 이상의 건물이 연소되고, 사망자는 서른 두 명이나 됩니다. 여기에 신상을 확인할 수 없는 이는 포함되지 않았다고 하니, 인명 피해 또한 컸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위급한 때 국가의 최고통수권자인 세종은 하필 강원도로 군사훈련인 강무講武를 떠나 한양에 없습니다. 이에 중전인 소헌왕후는 세종을 따라 나서지 않은 신하들을 소집하여 불끄기를 진두지휘합니다. 이날 점심 때 일어난 불은 저녁에 진화가 되었고, 다행히 나라의 뿌리를 상징하는 종묘가 연소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18세기 말에 제작된 한양 지도 《도성도都城圖》에 방화 지역 표기.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www.heritage.go.kr

다음 날 세종은 화재에 대한 보고를 받고, 강원도에서 서울로 돌아갈 채비를 합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또 큰 불이 일어납니다. 지금의 구치소에 해당하는 전옥서典獄署와 행랑 여덟 간, 종루鍾樓(현재의 보신각) 동쪽의 민가 이백여 호가 연소됩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당시 한양 내 민가가 17,015호였는데, 이를 기준으로 본다면 이틀간 민가의 약 14%가 연소된 셈입니다. 피해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화재로 인한 도둑이 기승을 부렸는데, 불이 번지지 않은 집에서도 황급히 피난하다가 재산을 전부 망실했습니다.

 

서울은 극도로 혼란한 상황이었겠지요. 이에 세종은 화재를 입은 백성들에 대한 식량・치료・장례 등의 지원, 그리고 집 복구를 위한 재목을 마련할 방도를 지시합니다. 이처럼 긴급 구제책을 실시하는 한편, 다음과 같이 나중을 위한 체계와 기반시설을 구축합니다.

 

임금이 다음과 같이 명령을 내렸다. “서울의 행랑에 방화벽을 쌓고, 도성 안의 도로를 넓혀 사방으로 통하게 만들라. 궁궐 담장이나 돈·곡식이 있는 관청들과 가까이 붙어 있는 가옥을 잘 헤아려 알맞게 철거하라. 행랑은 10간(1간≒1.8m) 마다 개인 집은 5간 마다 우물을 하나씩 파고, 관청들 안에는 우물을 두 개씩 파서, 물을 저장해 두라. 종묘 및 대궐의 안과 종루의 문에는 소방 기구를 만들어 비치해서, 화재가 발생하면 바로 달려 나가 끄게 하라. 군인과 노비가 있는 관청들에도 불을 끄는 여러 장비를 갖추었다가, 화재 소식을 들으면 각각의 소속인들을 동원해 가서 끄게 하라.” (세종실록 8년 2월 20일)

 

위와 같이, 불이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건물에 방화벽을 쌓고, 우물을 파서 소방용수를 확보하며, 소방 기구를 비치합니다. 또한 도로를 확장해 소방도로를 확보합니다. “병오년(세종 8년) 화재가 난 뒤로......민가에 도로를 개통한 까닭으로 이 실화失火에 사망한 자가 없다”는 세종 13년의 자체 평가에서 드러나듯이, 이 방침은 효용성이 드러납니다.

또한 불탄 가옥의 보수를 위해, 특별히 가마를 설치해 싼 값에 기와를 보급합니다. 당시 기와가 고가였기 때문에 서민들은 대개 띠·짚·억새 등으로 지붕을 얹었고, 이는 도시 미화뿐 아니라 화재 방비에 취약한 터였습니다. 이처럼 앞으로 또 발생할지 모를 화재에 대비하기 위한 종합대책을 마련했습니다.

 

가장 획기적인 정책은 지금의 소방청과 같은 소방 전담 기구 ‘금화도감禁火都監’을 신설하고, 24명으로 조직을 구성한 일입니다. 아울러 금화군禁火軍(현재의 소방관)이 통금시간에도 출동할 수 있도록 신분증을 제공하는 등 상설기관으로서 소방의 기능을 수행하도록 합니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그 5년 뒤인 세종 13년, 금화군에 대한 정책을 보강합니다. 급수를 지원해줄 인원과 소방장비 지급에 대한 세부 사항, 그리고 소방에 공로가 있는 자의 포상책 등을 국가 차원에서 마련합니다. 그러나 인력이 타 부처의 일을 겸직하는 한계가 있었지요. 조직원 중 8명을 금화도감의 일을 전담시키는 등 인사직제를 개편합니다. 제도도 중요하지만 결국 일은 사람에게 달렸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화재의 원인인) 음양이 조화를 잃은 것은 내가 부덕不德한 탓이로다. 내가 비록 변변치 못하나, 대신들이 도와준다면 천재지변도 없어질 수 있다.” (세종실록 8년 2월 28일)

 

전통시대에는 위정자가 마음을 다하지 않으면, 하늘이 천재지변을 통해 성찰의 기회를 준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세종은 당시에 통용되던 이러한 사고도 부정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사람이 온 마음을 다해 사태를 해결하려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진실로 사람이 제 할 일을 다한다면[人事旣盡], 천운이 따르지 않더라도 재해를 막을 수 있다.” (세종실록 26년 윤7월 25일)

 

2019년 강원도에서 일어난 대형 화재의 진압을 위해 전국에서 출동한 소방차의 행렬. 출처 : 연합뉴스 https://bit.ly/3bPlGIA

대통령 공약사항 중 하나였던 소방청 독립이 지난 2017년에 이루어졌습니다. 세월호 참사를 겪으며, 지난 박근혜 정부는 소방방재청을 해체하고, 신설한 국민안전처에 소방 사무를 흡수시킨 바 있는데요. 문재인 정부에서 국민안전처를 폐지하며, 행정안전부 소속으로 소방청을 신설한 것입니다. 소방 조직이 독립 기구로 개편된 것은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이라고 합니다.

 

이어서 올해 4월 1일, 국가직과 지방직으로 나뉘었던 소방 공무원을 국가직으로 일원화했습니다. 최근까지 대부분의 소방관이 지방공무원의 신분이었기에, 지방자치단체의 부족한 예산으로 인한 고충이 컸습니다.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며, 목장갑을 끼고 화재현장에 나선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들리기도 했지요. 그런 가운데에도 소방 공무원들은 인명을 구하기 위해 애써왔습니다. ‘사람이 제 할 일을 다하기人事旣盡’ 위한 환경을 국가는 조성해주어야 합니다. 기구가 소방청으로 격상된 데 이어, 소방 공무원이 국가직으로 전환된 만큼, 국가가 소방관의 안전과 자존감을 지켜주기를 기대합니다. 소방관은 국민을 보호하는 국민이니까요.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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