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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채원연구소공감]대표 :: 세종이야기꾼 :: 실록연구자 :: 소통 디자이너 :: 010-8014-7726 :: chewonoh@gmail.com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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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사가 메인에 게재된 2020.06.09. 오마이뉴스 대문)

(본 기사는 '세종이야기꾼' 오채원이 매주 오마이뉴스에 연재하는 '실록 읽어주는 여자' 시리즈 중 일부입니다. 기사 바로 가기 : omn.kr/1nv6c)

 

(양녕대군의 부모인 태종과 원경왕후의 능인 헌릉의 전경. 출처 : 문화재청)  

임금이 항상 세자를 올바른 도리로 가르쳤으나, 세자는 주색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임금의 가르침과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갑사甲士(군인)를 시켜서 문을 지켜, 허용되지 않은 사람들의 출입을 막았다. (태종실록 16년 9월 24일)

 

태종은 평화로운 정권 교체를 꿈꿨습니다. 피의 역사는 자신의 세대에서 끝내고, 가문과 나라가 그 누구의 손에도 흔들리지 않도록, 정통성 있는 인물을 세워 반듯하게 키워내자 마음먹었을 테지요. 장자 계승의 원칙에 부합하는 양녕대군을 정성들여 훈육합니다. 그러나 이 아이는 공부를 멀리하고, ‘나쁜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왕세자에게 걸맞지 않는 행동을 하기 일쑤입니다. 양녕의 주변인들은 이를 방관하거나 협조합니다. 그저 두고만 볼 수 없는 학부모 태종은 아들의 인간관계마저 관리하게 됩니다. 15년간 세자의 자리에 있으며 태종의 후계자로서 위치를 공고히 다져가는 듯 보였던 양녕이지만, 결국 그는 왕이 되지 못합니다. 이처럼 양녕이 점점 퇴락해가는 과정을 학부모의 관점에서 살펴보겠습니다.

 

태종이 처음부터 양녕에게 기대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기본기가 갖춰져 있으니 교육을 잘 시키면, 자신의 뒤를 이어 한 나라의 최고지도자가 될 자질이 충분하다고 보았습니다.

 

“세자가 어려서부터 체구가 당당하여 장차 학문이 무르익으면 국가를 맡길 만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항상 가르치고 인도하는 법에 힘썼다.” (태종실록 18년 3월 6일)

 

앞서 「아들아, 모든 업보는 내가 지고 저세상으로 가마」 기사(본지 2020-05-12)에서 살펴보았듯이, 양녕은 태종이 무릎에서 내려놓을 사이 없이 애지중지 키운 맏아들이었습니다. 하지만 태종은 조선 건국에 이어 1·2차 왕자의 난, 조사의의 난 등 굵직한 역사적 사건들을 10년 안에 겪습니다. 자녀의 유년기에 태종은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정치적 도박을 해야 했던 것입니다. 격동의 시간을 보내며, 자연히 가정에 소홀해지기 쉬웠을 것입니다. 바깥일 한답시고 정작 가까운 이들을 챙기지 못한 미안함과 아쉬움이 컸을 것으로 보입니다.

 

아들이 자신보다 더 뛰어난 군주가 되기를 바란 태종

 

“예전에 이름나기 전에는 집안의 재물이 넉넉한지 여부도 모르고, 오직 말에 올라 세상을 변혁하는 일에만 열중하였다.” (태종실록 9년 1월 6일)

 

태종이 젊어서 세상을 구하려는 뜻이 있어서, 유교 경전과 역사책에 마음을 두고 재산 불리기에 힘쓰지 않았다. (태종실록 18년 11월 8일)

 

세자가 주상을 모시고 식사를 하는데 예법에 맞지 않는 것이 많았다. 주상께서 이를 보고 말했다. “내가 젊었을 적에 여러 곳을 떠돌아다니다보니 배우지 못하여, 행동거지에 절도가 없다. 이제 임금이 되어서도 백성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니, 자괴감이 든다.” (태종실록 5년 10월 21일)

 

자식은 자신보다 낫길 바라는 부모의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겠지요. 태종은 자신에게 주어졌던 것보다 나은 교육 환경을 아들에게 제공하여, 자신보다 더 뛰어난 군주가 되기를 바란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양녕의 학습 태도는 그다지 좋지 않습니다.

 

“내가 세자에게 이와 같이 (엄격하게) 하는 것은 국가의 오랜 번영[萬世]을 위한 계획에 의한 것이다......내가 세자에게 마치 새끼를 키우는 호랑이와 같이 엄하게 하고자 하였다.” (태종실록 18년 5월 10일)

 

임금이 세자에게 글을 외도록 명하니, 세자가 외지 못하였다. 임금이 (세자를 보필하는) 환관에게 종아리를 때리고 명을 내렸다. “나중에도 이와 같으면 마땅히 서연관書筵官(세자의 선생님들)에게 벌을 주겠다.” 문학文學(세자시강원의 정5품 관직) 허조를 시켜 이 말로써 세자에게 경고했다. 세자가 밤에 참군參軍(정7품의 군인) 심보와 더불어 글을 읽고자 하였다. (태종실록 5년 9월 14일)

 

임금이 세자로 하여금 읽은 글을 외게 한다고 하니, 세자가 이를 듣고 밤을 새워 글을 읽었다. (태종실록 5년 10월 21일)

 

“이제부터 서연書筵(세자를 교육하는 자리)에 당직을 서는 관원은 세자가 식사하거나 움직이거나 가만히 있을 때에도 옆을 떠나지 말고, 장난을 일체 금하며 오로지 학문에만 힘쓰도록 하라. 세자가 말을 듣지 아니하거든 바로 와서 보고하라.” (태종실록 6년 4월 18일)

 

임금이 지신사知申事(비서실장) 조말생에게 일렀다. “예전에 세자의 일로 사람들이 많이 감옥에 갇히고 어떤 이는 사형 당한 것을 내가 마음으로 지금까지 편치 못하게 여기고 있다.” (태종실록 17년 4월 16일)

 

훈육의 파장이 집안을 넘어 국가로

 

성리학을 확립시킨 주희朱熹가 『맹자집주孟子集注』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부모와 자식이 이어가는 것이 ‘일세一世(한 세대)’이며 통상 30년입니다. 그렇다면 ‘만세萬世’는 30만 년이 됩니다. 만세 곧 30만년 이어지는 국가를 꿈꾼 태종이기에 후계자를 엄격하게 훈육합니다. 시험을 보겠다고 하거나, 학습 결과가 좋지 않으면 선생님을 벌주겠다고 경고하는 초강수를 두니, 양녕은 그제야 공부를 합니다. 그러나 효과는 그때뿐입니다. 세자의 태만과 비행으로 인해 주변인들이 곤욕을 치르다, 감옥에 가거나 목숨을 잃는 이가 발생하기에 이릅니다. 아이 훈육의 파장이 한 집안을 넘어 국가의 범위로 확대됩니다.

 

자녀의 교육을 위해서는 조부모의 재력, 엄마의 정보력, 아빠의 무관심이 필수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습니다. 자녀 교육에서 아버지의 역할은 배제된 한국적 현실에 대한 풍자일 테지요. 이와 달리 태종은 적극적으로 관여합니다. 특히 임기 후반기로 가며 양녕을 국정에 참여시킵니다. 지금 식으로 보자면 OJT(On the Job Training, 입사 후 직무를 수행하며 교육을 받음) 혹은 인턴십에 해당할 것입니다.

 

임금에게 공무를 보고하는 자리에 세자가 참여하도록 명하였다. (태종실록 16년 5월 20일)

 

“군권과 인사권만 내가 행사하고, 모든 지휘·명령하여 시행하는 일은 세자와 함께 의논하라.” (태종실록 16년 5월 24일)

 

학습에 대한 동기부여에서 중요한 것은 시야 확보입니다. 학습자·교수자·학부모가 동의하여 구체적 목표를 설정한 후, 그에 도달하면 학습자가 어떠한 이득을 얻게 될지 그려주어야 합니다. ‘깜깜이 공부’ 혹은 ‘닥치고 공부’가 아니라, 학습자에게 효능감이나 성취감을 맛보게 해야 합니다. 살아 있는 정치를 직·간접으로 만나게 하고 그에 따른 책임을 부여하면, 양녕의 학습 의욕이 고취되리라 태종은 기대한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국정 운영의 장에 앉히고 의사결정권을 일부 공유합니다.

또한 태종은 양녕을 명나라에 보내, ‘국가대표’로서의 무게를 체감하게 하고, 견문을 넓히도록 합니다. 양녕의 나이 15세 때의 일입니다.

 

세자 이제李禔를 보내 명나라의 서울에 갔으니, 새해맞이를 축하하기 위함이었다......임금이 예복을 갖추고 표전表箋(황제에게 전하는 서한)에 절하고 나서, 장의문(현재의 창의문)으로 나가 세자를 영서역(지금의 서울 은평구) 동쪽에서 전송하고, 세자에게 말하였다. “길이 험하고 머니, 마땅히 스스로를 돌보아야 하느니라. 왕세자이기에 너의 책임이 무겁다. 오늘의 일은 나라와 백성을 위한 계책이니라.” 세자가 울면서 작별 인사를 하니, 임금도 눈물을 뚝뚝 흘리고, 주위에서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태종실록 7년 9월 25일)

 

태종은 왕자 시절인 태조 3년에 사신의 자격으로 명나라에 다녀옵니다. 이때 황제에게 극진한 대접을 받고, 명나라 지식인들로부터 세자 이방석을 젖히고 ‘조선의 세자’로 불리는 등 정치적 동력을 확보합니다. 이러한 자신의 성공 경험을 태종은 아들에게 전해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역시나 양녕은 명 황제의 환대를 받고 옵니다. 그 후부터 명 사신이 오면 ‘전담 마크’하게 하며, 양녕이 임금이 된다면 맞닥뜨릴 외교적 공간을 선제적으로 열어줍니다.

 

자유인의 피가 흐르는 아들이 궁궐에 갇혀 지내 안쓰러워

 

(선조 31년에 편찬한 군사훈련에 관한 책 『무예제보武藝諸譜』.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조선시대에는 대체로 봄과 가을에 임금이 직접 참여하는 군사훈련인 강무講武를 실시했습니다. 『입시 교육의 실패자, 양녕대군』 편(본지, 2020-05-22)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양녕은 사냥 및 유사 놀이에 관심이 많았기에, 보다 규모가 크고 역동적인 강무에 따라가기를 고집합니다. 그때마다 세자는 궁궐에 남아 공부에 힘써야 한다는 신하들의 반발을 사기일쑤입니다.

 

“예로부터 임금이 굳세고 과감하면 아랫사람을 통솔할 수 있고, 성격이 부드럽고 나약하면 실패하는 경우가 많았다. 대체로 활쏘기와 말달리기는 굳세고 과감한 기상을 키우는 것이다. 지금 세자로 하여금 무예를 익히게 하는 것이 도리 상 어떠하겠는가?” (태종실록 9년 3월 16일)

 

태종은 임금에 걸맞은 진취적이며 강력한 리더십을 키울 수 있다고 주장하며, 양녕이 무예를 익히도록 하고 강무에도 동행하도록 합니다. 군사력 통제를 바탕으로 하여 강력한 왕권을 발휘한 자신의 경험이 반영된 생각일 것입니다. 또한 자신을 닮아 자유인의 피가 흐르는 아들이 궁궐에 갇혀 지내는 모양이 안쓰러웠겠지요.

 

(임금이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동교東郊(동대문 밖)에서 매사냥하는 것을 구경하였다. 이날 새벽에 임금이 밖으로 나가려고 하니, 사간원(언론기관)의 좌사간 대부左司諫大夫 송우가 아뢰었다. “지난번에 신들이 아뢴 바를 따르시어 가벼이 외출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는데, 오늘 자못 신용을 잃었습니다.” 임금이 말하였다. “내가 멋대로 놀려는 것이 아니다. 궁궐 안에만 오래 있으니, 기력이 좋지 않아서 잠깐 성 밖에 나가고자 하는 것이다.” (태종실록 6년 3월 13일)

 

궁궐 안에만 있으려니 컨디션이 좋지 않다며, 여러 차례 몰래 밖으로 나간 전적이 있는 태종입니다. 이런 자신을 닮은 아들의 마음을 그는 알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강무를 비롯한 바깥나들이에 자신을 데려가라고 떼쓰는 아들 앞에서 번번이 마음이 약해집니다.

 

서연관(세자의 선생님)을 불러 “세자는 나라의 근본이므로 사냥하는 데에 따라갈 수 없으니, 서울에 남아 내 직무를 대행하라.” 라고 하였으나, 결국은 따라갔다. (태종실록 12년 2월 19일)

 

임금이 (황해도) 해주로 행차하고자 평주 온천에서 목욕한다고 핑계 삼았다. 세자와 여러 왕자들, (의정부) 우정승 조영무 등이 따라나섰다. (태종실록 13년 2월 4일)

 

통제원通濟院 남쪽 교외에서 머물렀다. 이날 아침에 세자에게 조정으로 돌아가도록 명하니, 세자가 따라가겠다고 무리하게 청했다. 그러자 임금이 여러 대신에게 말했다......“당초는 세자로 하여금 하룻밤만 지내고 돌아가게 하고자 하였으나, 지금 세자가 나를 좇아갈 수 없다고 섭섭해 하며 앙앙대고 밥을 먹지 않는다. 그는 나의 자식일 뿐 아니라 나라의 왕세자인데, 그 행동이 이와 같으니, 어찌하면 좋겠는가?” 이천우와 이숙번 등이 “이번에는 목욕을 위한 행차이니, 마땅히 전하의 수레를 따르게 하소서.” 라고 말씀을 올렸다. 임금이 “잠시 동안만 따르는 것이다.” 라고 하니, 세자의 얼굴에 기쁜 빛이 돌았다. (태종실록 13년 2월 5일)

 

예외의 남발은 교육 망치는 지름길

 

아이가 좋아하는 것을 뻔히 알기에 매번 막을 수만은 없는 부모의 마음, 그리고 궁궐에 갇혀 지내는 동지로서의 동병상련이 발동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외의 남발은 교육을 망치는 지름길이기도 합니다. 부모가 아이에게 엄격해야 할 때와 너그러워야 할 때를 구분하지 못하면 교육의 원칙과 효과성은 점차 무너집니다. 이러한 일이 반복되면, 학부모의 권위와 서로에 대한 신뢰는 추락하고, 결국 감정적 대응만 남게 됩니다.

 

세자 이사世子貳師(세자시강원의 종1품) 유창, 빈객賓客(세자시강원의 정·종2품) 한상경·조용·변계량 등이 서연의 하급 관리를 거느리고 궁궐에 와서 아뢰었다. “신들이 재주가 없어서 잘 지도하지 못하여 전하의 노여움을 일으키고, 세자가 눈물을 흘리며 며칠간 식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지금 전하가 편찮아서 모든 신하들이 분주히 안부를 여쭙는데, 세자만이 문안을 드리지 않으니, 나라 사람들이 어떻다고 생각할지 살짝 두렵습니다.” (태종실록 13년 8월 15일)

 

(세자의 비행이 밝혀지자) 임금이 사람을 시켜 세자에게 뜻을 전했다. “이제부터는 내게 오지 말라.” (태종실록 17년 3월 20일)

 

(양녕의 선생님인) 빈객賓客 등이 말했다. “(세자께서) 몸이 편치 않아서 강의는 쉬신다 해도, 내일은 전하께서 광주로 행차하시니, 병을 무릅쓰고라도 뵈러 가셔야 합니다.” 세자가 사약司鑰(궁궐 문의 열쇠 관리인)으로 하여금 임금을 뵈러 가는 길의 문을 열도록 요청했으나 열지 않았다......빈객 탁신이 정색하고 “이는 (주상께서 세자를) 개과천선시키고자 함입니다.”......세자가......끝내 뵙지 않았다. 임금의 수레가 밖으로 나가는 날이 되어, 서연관이 세자에게 청하였다. “바라건대 수레가 아직 대궐 밖에 나가기 전이니, 성상을 뵈러 가소서.” 세자가 내구문까지 갔으나 뵙지 못하고 물러나왔다. 몸이 편치 않다면서 강의를 쉬고 해질 무렵에는 과녁을 쏘았다. (태종실록 17년 3월 23일)

 

세자가 어리於里를 도로 받아들이고 또 아이를 가지게 했다는 소식에 임금이 노하여, 세자로 하여금 옛 처소에 머무르게 하고, 나와서 알현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태종실록 18년 5월 10일)

 

(세종이 말하였다.) “옛 사람이 ‘부자 사이는 매일 서로 가까이해야 한다.’ 고 했다. 양녕이 세자가 되었을 때에는 (부왕을) 뵈올 때 행동에 절도가 있었다. 그 후에 (양녕이) 잘못을 저질러서 뵈러 가지 못하니, 날로 부자 사이가 서먹해졌다. 이를 내가 직접 보았다.” (세종실록 20년 11월 23일)

 

학습에 태만하고 비행을 일삼는 양녕에 대한 태종의 실망이 점차 쌓여갑니다. 불호령을 내리는 아버지에 대한 양녕의 불만도 누적됩니다. 결국 부자는 서로 얼굴도 보지 않는 사이가 되어 버립니다. 그러는 사이에 셋째 아들 충녕대군이 태종의 눈에 들어옵니다.

 

(태종이) 경복궁에 행차해 상왕上王(정종)을 맞이하여 경회루에서 술자리를 베풀었는데......재상을 비롯한 여러 신하에게 잔치를 베푸니, 다투어 사람마다 한 구씩 시를 지어서 한 편의 시를 만들며 매우 좋아했다. ‘노련한 사람을 버릴 수 없다’는 말에 미치자, 충녕대군이 “『서경書經』에서 ‘노련하고 뛰어난 사람이 그 직책에 있다[耆壽俊在厥服].’고 하였습니다.” 라고 말하였다. 임금이 충녕의 학문이 두루 통한 것에 감탄하고, 세자를 돌아보며 말했다. “너는 어째서 학문이 이만 못하냐?” (태종실록 16년 7월 18일)

 

양녕은 왕세자 교육에 적합한 인물 아니었다

 

남과의 비교는 도전 의지를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간혹 일시적 효과가 있을 수는 있으나 근원적 개선책이 될 수 없습니다. 잘 해낼 수 있다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손상시켜 긍정적이지 못한 자아상을 형성시키고, 관계 맺기에 어려움을 초래합니다. 동생 충녕과 비교당하며 양녕은 초조해지고 경쟁의식을 갖게 됩니다. 그렇다고 하여 개과천선에 이르진 않습니다. 결국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태종은 양녕에 대한 교육 실패를 인정하고, 후계자를 교체합니다.

 

“제禔(양녕대군)가 세자였을 때, 담장을 넘거나 개구멍으로 나가서 몰래 외출하고, 강을 건너가서 몰래 소인배와 옳지 못한 짓을 멋대로 했다. 내가 계도할 수가 없어서, 진무소鎭撫所로 하여금 문을 지키고 통제하게 하였다. 지금 세자(충녕대군)는 그렇지 않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에게 우애 있게 대하며, 성품이 온화하고 예의 바르며, 배우기를 좋아하고 게을리 하지 않는다......앞으로는 세자를 만나보고자 하는 자가 있거든 민간의 미천한 사람이라도 출입을 금지하지 말고 모두 들어가 만날 수 있게 하라. 마땅히 세자로 하여금 깊이 인심을 얻게 하는 것, 이것이 나의 뜻이다. 나는 세자 양육을 제에게 한 것과 같이 하지는 않을 것이다.” (태종실록 18년 6월 21일)

 

어떤 문제를 억제하면 또 다른 부분에서 문제가 발생하는 현상을 풍선효과라고 합니다. 임시방편적 규제로 일관하면 결국 어디에선가 문제는 크게 터져버립니다. 태종은 양녕을 교육한 끝에 자각합니다. 교육의 내용과 방법도 중요하지만, 우선 아이에게 걸맞은 목표와 기대치를 얹어주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그렇다면 양녕은 왕세자 교육에 적합한 인물이 아니었다는 것을요. 현재 우리의 입시지옥에서도 볼 수 있듯이, 적성에 맞지 않는 진로설계와 교육은 학부모도 학습자도 교수자도 괴로운 일입니다.

 

태종은 원점에서 새로 시작합니다. 장자 계승의 원칙도 15년간 양녕에게 쏟은 시간도 과감하게 내려놓으니, 다른 아들도 눈에 들어옵니다. 유교에서 중시하는 지도자의 덕목을 두루 갖춘 충녕은 셋째 아들이지만 왕세자로서의 자질이 보입니다. 태종은 세자를 교체하자마자 훈육 방침을 달리하겠다고 표명합니다. 충녕에 대한 신뢰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양녕에게 적용한 교육이 실패한 원인을 곱씹은 탓이겠지요. ‘자식 농사는 내 뜻대로 안 된다’지만, 씨앗에 적합한 땅에 심었는지, 물은 적절히 주었는지도 돌아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양녕대군의 사당 지덕사至德祠.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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