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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채원연구소공감]대표 :: 세종이야기꾼 :: 실록연구자 :: 소통 디자이너 :: 010-8014-7726 :: chewonoh@gmail.com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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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 읽어주는 여자'는 세종이야기꾼 오채원이 매주 오마이뉴스에 연재하고 있는 시리즈입니다. 기사 바로 가기 omn.kr/1nooz)

 

임금(태종)이 일찍이 충녕대군(이후 세종)에게 말하였다. “너는 할 일이 없으니, 평안하게 즐기기나 하여라.” 그리하여 서화書畫(글과 그림), 화석花石(무늬 돌), 금슬琴瑟(서로 짝을 이루는 현악기) 등 모든 놀이의 내용을 갖추지 않음이 없었기에, 충녕대군은 예술에 정통하였다. (태종실록 13년 12월 30일)

 

태종은 왕자시절의 세종에게 ‘방목형 교육’을 제공합니다.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라는 태종의 자상해 보이는 말은, 왕이 될 가능성을 ‘꿈도 꾸지 마라’는 셋째 아들에 대한 경고였던 셈입니다. 덕분에 세종은 예술을 기반으로 한 ‘자기주도적 학습’으로 청소년기를 보낼 수 있었습니다.

이에 비하여, 양녕대군은 11세의 나이에 세자로 책봉된 이후, 가업 승계 교육을 받아야 했습니다. 태종에 이어 임금이 되어야 한다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맏아들의 숙명이었지요.

 

태종은 34세의 나이에 세자로 책봉된 바 있습니다. 제2대 임금인 정종이 자신에게 적자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며 동생인 정안공靖安公(이후 태종)을 후계자로 지목한 것인데요. 정종실록을 보면, 정안공이 세자의 자리에 있었던 기간이 9개월 남짓인데, 그나마 교육받은 횟수는 3회밖에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태종이 고려시대에 문과 급제한 엘리트라 해도, 그가 접한 학습은 공무원의 직무에 한정된 내용이었습니다. 따라서 왕위에 오른 후에는 세자 교육의 부족을 체험하고, 자신의 후계자는 체계적으로 양성하리라 다짐했을 것입니다.

 

조선시대에는 세자를 위한 교육제도이자 교육장인 서연書筵, 세자 교육을 맡은 관청인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여기에서 교육을 수행할 세자사世子師(정일품正一品, 의정부 영의정 겸직) 및 세자부世子傅(정1품, 좌·우의정 중 1인 겸직), 세자이사世子貳師(종1품, 찬성이 겸임), 세자빈객世子賓客(정·종2품), 보덕輔德(종3품), 필선弼善(정4품), 문학文學(정5품), 사서司書(정6품), 설서設書(정7품) 등을 두었는데요. 현재 1인자의 맏아들이자 미래의 1인자를 길러내는 일이므로, 변계량 등 당대 최고의 학자들을 선생님으로 모셨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양녕대군에 대한 세자 교육은 실패로 끝납니다.

현대 교육학에서는 교육의 주체를 대체로 학습자·학부모·교사로 봅니다. 양녕의 교육이 실패로 끝난 이유를 이 세 측면에서 살펴보겠습니다.

 

‘가문의 영광’ 위해 ‘입시 지옥’에 빠지다  

양녕대군은 임금이 갖추어야 할 지식·태도·역량의 함양이라는 단일한 목표를 향한, 그리고 본인의 선택과 무관한 공부를 해야 했습니다. 요즘 식으로 보자면 ‘가문의 영광’을 위해 ‘입시 지옥’에 빠진 수험생과 같다고 할까요? 차이가 있다면, 경쟁자도 동료도 없으며, 합격은 ‘떼어 놓은 당상’인 점일 것입니다. 그러니 학습에 대한 동기부여가 부족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게다가 양녕은 대체로 책상 앞에 앉는 공부에 별 취미가 없어 보입니다.

 

임금이 글을 외우도록 명했는데 세자가 외지 못하였다. 임금이 (양녕의 시중을 드는) 환관의 종아리를 때리고 명을 내렸다. “나중에도 이와 같으면 반드시 서연관을 벌하겠다.” (세자시강원의) 문학 허조許稠를 시켜 이 말로써 세자에게 경고했다. (태종실록 5년 9월 14일)

 

사간원司諫院(왕권을 견제하는 언론기관)에서 상소하였다......“신들이 일전에 서연 일기를 보니, 닷새 동안에 잇달아 경전 해석한 날이 적습니다.” (태종실록 12년 5월 19일)

 

세자가 팔뚝에 매를 받치고 궁궐 문 밖으로 나가고, 또 아프다며 핑계대고 강의를 듣지 않았다......세자가......“내가 병이 있으니 회복되면 저녁에 당직하는 서연관과 함께 복습을 하겠다.” 라고 말하였으나, 저녁이 되어도 그대로 하지 않았다. (태종실록 16년 10월 21일)

 

(매 사냥꾼을 찍은 1930년 사진. 출처 :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역사아카이브)

양녕대군의 장래는 태종을 이어서 보위에 오르는 오로지 한 길밖에 없었습니다. 이는 양녕에게 한 편으로 큰 혜택이지만, 또 달리 본다면 자신이 조절할 수 없는 상황이기도 합니다. 이를 해석하는 것은 자신의 선택입니다. 건강한 현실 감각을 가졌다면, 양녕은 한정적 환경 내에서도 스스로 목표를 설정하고 학습에 몰입할 수 있었습니다. 의욕이 있으면 인내심을 갖고 끈질기게 도전하게 되는 법입니다.

그러나 양녕은 복습을 한다거나 몸이 아프다거나 하는 등의 이유를 들어 종종 강의에 결석합니다. 이러한 사실이 태종에게 알려져서, 자신을 보좌하는 환관이 대신 매를 맞거나, 스승들이 파면되기도 합니다. 그때마다 양녕은 잠시 조심하는 것 같다가도, 다시 사냥 등의 유희에 탐닉하며 공부를 게을리 하기 일쑤입니다. 신하들이 말려도 몰래 사냥을 나갔던 태종의 기질을 양녕은 일부 물려받은 모양입니다.

 

임금이 말하였다......“세자의 천성을 보아하니, 틀림없이 사냥을 좋아한다.” (태종실록 15년 10월 17일)

 

세자가 보덕 조서로에게 “내가 활을 쏘고자 하는데 어떠한가?” 하니, 조서로가 “대군의 상제가 이미 삼칠일을 지났으니 쏠 수 있습니다.” 하여, 세자가 내사복문內司僕門 밖으로 나가서 230여 보步를 쏘았다. (태종실록 18년 2월 28일)

 

우빈객 계성군 이내李來 등이 나아가 말하였다. “음악과 여색, 매와 개는 마땅히 멀리하고 끊어야 합니다. 요즘 듣자하니, 저택 안에 연주자를 끌어들여 거문고를 타고 피리를 불고, 또 매 2련連을 두셨다 합니다. 이 말이 밖에 들리면 저하가 공부한 보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태종실록 11년 10월 17일)

 

양녕은 어찌나 사냥을 좋아하는지 그와 유사한 놀이도 즐겼는데, 심지어 친동생인 성녕대군이 사망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도 애도하기보다 활을 쏘러 나갑니다. 사냥에 쓰이는 매와 개 기르기, 그리고 그 외의 온갖 유희에 탐닉합니다. 여성편력으로 인해 부모님의 걱정을 사기도 하지요.

 

사헌부에서 아뢰었다. “동궁東宮(세자의 궁) 북쪽 담 밑에 작은 지름길이 있으니, 반드시 몰래 숨어서 드나드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임금이 동궁의 어린 환관을 불러들여 국문하게 하니, 과연 예빈시禮賓寺(왕실 잔치 등에 음식 공급을 맡은 관청)의 종 조덕중......등이 몰래 평양 기생인 소앵을 동궁에 바친 지 여러 날이 되었다.......세자가 밥을 먹지 아니하니, 정비(모친 원경왕후)가 환관을 시켜 세자에게 말하였다. “너는 어리지도 않은데 지금 어째서 부왕께 이와 같이 노여움을 끼치느냐?” (태종실록 13년 3월 27일)

 

양녕대군에게 부족했던 이것  

‘개구멍’까지 파고 궁 안으로 기생을 들여온 사건이 발각됩니다. 이 지경이 되자, 아들 셋을 잃고 난 뒤에 얻은 아들이라 양녕을 애지중지해온 모친이라도 두고만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양녕은 반성의 기미도 없이 ‘단식투쟁’을 벌입니다. 이러한 양녕의 절제·사유·성찰 없음은 추후 세자에서 폐위되는 빌미가 됩니다.

 

옛 사람들에게 성찰은 공부의 시작점이자 종착지였습니다. 보는 이가 없는 곳에서도 몸과 마음을 바로 잡도록 스스로에게 촉구했습니다. 단순한 지식 충족에 그치지 않고, 부끄러움을 아는 윤리적 자아를 갖추는 것이 공부에서 필수적이었습니다. 그래서 국가의 최고통수권자인 임금에게도 전문적으로 비판을 가하는 사간원이라는 언론기관을 두었고, 관직에 오르지 않은 학생, 더 나아가 유식하지 않은 ‘풀 베는 촌부와 나무꾼’, 즉 백성의 의견도 들어야 했던 것입니다. 이는 자신의 오류를 인식하고, 현실 세계에 대한 감각을 개발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현대적 교육학의 관점에서도, 공부의 목적은 보다 나은 자신으로의 변화 혹은 성장에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자신을 돌아보고 점검하는 태도, 또 주변의 조언을 경청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양녕에게서 부족해 보입니다.

 

임금이 말하였다. “세자가 식사를 하지 않는 것은 (혼난 후) 분함을 이기지 못해서이다......세자의 불손한 마음은 세자라는 자신의 자리를 지나치게 믿기 때문임이 분명하다. 만약 뉘우치지 않는다면, 왕족 중에 (세자로) 적당한 사람이 어찌 없겠는가?” (태종실록 13년 8월 15일)

 

세자가 말하였다. “요즘 내가 아무 일도 한 것이 없는데, 주상께서 진노하신 이유를 아직 자세히 모르겠다.” 세자빈객 이내李來가 말하였다. “바로 그것이 저하가 가진 나쁜 병의 원인입니다. 저하의 뱃속에 가득 찬 것은 모두 사사로운 욕심뿐입니다......전하의 아들이 저하뿐인 줄 아십니까?” (태종실록 15년 1월 28일)

 

세자가 말하였다. “(태종의 신뢰를 받지 못하는 것은) 나에게 과실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일러바치는 사람이 있어서이다.” (태종실록 17년 3월 23일)

 

양녕은 부끄러움을 알아야 한다는 질책·비판·우려에 귀 기울이지 않고, 오히려 남을 탓합니다. 밖에서는 양녕의 외줄타기가 위태로워 보이나 이를 자신만 모르는 듯합니다. 태종과 선생님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양녕은 세자라는 자신의 지위가 언제까지나 확고하리라 믿었기에 마음공부를 게을리 한 것 같습니다. 세자로서 누릴 수 있는 권리, 그리고 이에 따른 의무의 균형을 모르는 양녕의 패착은 다음과 같이, 선생님들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한 탓도 있어 보입니다.

 

(양녕대군의 교육 실패에 있어서 교사의 역할에 대해서는 다음 편에서 이어집니다.)

 

(글씨에 능했다고 전해지는 양녕대군의 친필을 새긴 ‘숭례문’ 목판. 출처 : 문화재청)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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