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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채원연구소공감]대표 :: 세종이야기꾼 :: 실록연구자 :: 소통 디자이너 :: 010-8014-7726 :: chewonoh@gmail.com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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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사는 세종이야기꾼 오채원이 오마이뉴스에 연재하고 있는 '실록 읽어주는 여자' 시리즈 중 양녕대군의 실패한 교육에 대한 내용입니다. 기사 바로 가기 omn.kr/1nq84)

 

조선 중기의 어린이용 한자 학습서 『훈몽자회訓蒙字會』에서는 ‘師’를 ‘스스ᇰ ᄉᆞ’, 곧 ‘스승 사’라고 풀이합니다. 이 ‘스승’이라는 단어의 어원에 대한 여러 추정 중에는 불교의 사승師僧에서 왔다는 설이 있습니다. 수행자를 지도하거나 수행자가 존경하는 승려를 가리킨다는 것인데요. 이는 불교라는 종교색을 지우더라도, 현재 통용되는 ‘스승’의 의미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결국 스승이란 지식을 파는 노동자를 넘어, 상대의 정신적 성장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존재이니까요.

그런데 ‘미래 권력’인 양녕에게 스승이란 없었던 모양입니다. 책상머리 공부를 즐기지 않는 양녕의 마음에 들려니, 선생님이 심지어 공부를 방해하기도 합니다.

 

(조선 중기의 어린이용 한자 학습서 『훈몽자회』를 박아내는 책판. 출처 : 문화재청)

(세자시강원의) 세자좌필선世子左弼善인 김주金稠를 파면하였다......“김주는......강의할 때 아부하고 아첨해서 세자에게 잘 보이는 것을 기쁨으로 삼으며, 세자께서 작은 선행이라도 하면 꼭 칭찬하여 교만한 태도를 길러주고......세자께서 『맹자孟子』를 읽을 적에, 날마다 50여 편을 외우니, 김주가 ‘그 뜻을 알면 한 번만 읽더라도 괜찮습니다. 어찌 이처럼 부지런히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라며 말렸습니다.” (태종실록 7년 2월 3일)

 

세자빈객 이내李來와 변계량卞季良을 경연청經筵聽(임금을 위한 강습 기관)에 호출해, 주위의 사람들을 물리치고 명을 내렸다......“서연의 어리석은 선비들이 ‘(양녕이) 장차 임금이 될 것이다’ 라는 생각에 위축되어 쓴말을 하지 못하고, 대간臺諫(현 검찰·감사원·언론기관)도 그렇다. 그대들은 이미 재상이 되었는데, 무엇이 두려워 감히 바른 길로 (세자를) 인도하지 못하는가?” (태종실록 15년 1월 28일)

 

사헌부司憲府(현재의 검찰 및 감사원)에서 상소하였다......“세자빈객 조용趙庸, 변계량......등이 바른 마음씨와 밝은 학문으로써 강의하지 않고, 아부와 아첨만을 일삼아 무조건 ‘예 예’ 하고, 따라서 세자가 도리가 아닌 길에 빠지게 했습니다.” (태종실록 18년 6월 4일)

 

책 『삶을 바꾼 만남』에서는 황상黃裳이 정약용丁若鏞에게 가르침을 받게 된 일이 그야말로 ‘삶을 바꾼 만남’으로 그려집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몸소 가르침을 주는 스승이라는 존재의 무게와 감동을 느낄 수 있는데요. 정치적으로 배척당하며 떠나온 고달픈 유배 생활 가운데, 자신을 진심으로 따르는 제자를 만나게 된 일이 정약용에게도 ‘삶을 바꾼 만남’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양녕의 선생님들은 ‘팔자를 바꾼 만남’을 기대한 모양입니다. 15년간 공고했던 세자라는 양녕의 지위 앞에서 쩔쩔매는 것을 보면 말이지요. 강력한 왕권을 추구했던 태종의 후광을 받아, 그의 맏아들에게서도 공고한 권력을 인식했을 것입니다.

 

조선은 태조-정종-태종에 이를 때까지 왕위 계승의 원칙에서 벗어난 임금이 배출되었습니다. 그 가운데 정치 논리로 인해 여러 차례 혈육이 제거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태종은 피의 역사를 끊기 위해, 적장자를 세워 ‘엘리트 코스’를 밟은 후계자로 길러내겠다는 의지가 강했으리라 추측 가능합니다.

 

양녕의 방탕함 고치고 싶었던 태종의 초강수

 

하지만 태종의 바람과 달리, 선생님들에게 미래 권력을 훈육하는 일은 녹록치 않았습니다. 그 가운데 동생 충녕대군은 태종에게 존재감을 획득해가고, 이러한 양상이 양녕의 선생님들에게 위협적으로 보였던 모양입니다. 양녕 또한 충녕의 지적 우위를 의식하고 때때로 질투합니다.

 

(세자가 말하였다.) “충녕은 보통 사람이 아니다.” (태종실록 14년 10월 26일)

 

(충녕과 시 짓기를 주고받으며) 임금이 기뻐서 “세자가 도달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하였다. 세자가 예전에 임금 앞에서, 사람들의 학문과 무예에 대해 토론하다가 “충녕은 용맹하지 못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설령 용맹하지 못하더라도, 큰일에 직면했을 때 큰 의문점을 분별해내는 데에는 당대에 견줄 사람이 없다.” (태종실록 16년 2월 9일)

 

이때에 충녕대군이 배우기를 좋아하니, 세자빈객 이내와 변계량 등이 시기하여 여러 번 서연에서 충녕대군을 칭찬함으로써 세자를 분발시키고자 하였다. 변계량이 매번 충녕대군의 시관侍官에게 읽는 것이 무슨 글인가 하고 물어서, 무슨 글을 읽는다고 대답하면 반드시 칭찬하고 감탄하였다. (태종실록 16년 9월 7일)

 

선생님들은 충녕의 학습 수준과 태도를 칭찬하며 양녕의 경쟁심을 부추겨 봅니다. 그러나 이 충격요법도 그다지 효과가 없었던 모양입니다. 대체로 경쟁자를 이기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각고의 노력으로 나의 실력을 키우거나, 상대를 깎아내려서 위안을 얻는 일명 ‘정신승리’를 들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양녕은 후자를 택한 것으로 보입니다. 자신이 충녕보다 낫다고 생각되는 점을 부친 앞에서 불쑥 말하는 것을 보면 말이지요.

시간이 지나도 개선의 여지는 보이지 않고, 심지어 선생님이 양녕의 반성문까지 대신 써줍니다. 자기소개서 대필, 수행평가 대행 등을 해주는 요즘의 일부 학원·과외 선생님이 떠오르는 대목입니다.

 

세자가 종묘에 아뢰니, 그 글은 이러하였다......“아뢴 뒤 (개과천선하겠다는) 이 말에 변함이 있으면, 조상의 영혼께서는 반드시 벌을 내려 (저를) 용서하지 마소서.” 또 주상께 글을 올렸는데......“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저를) 가엾게 여겨 주소서.” 종묘에 올린 맹세와 주상께 올린 글은 모두 빈객 변계량이 지은 것이었다. (태종실록 17년 2월 22일)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고치겠다고 이미 하늘에 맹세까지 한 바 있건만, 양녕의 비행은 반복됩니다. 여성 스캔들이 잦았던 양녕이 이번에는 남의 첩인 어리於里라는 여성을 궁궐로 몰래 데려옵니다. 이 사건은 후일 폐세자가 되는 도화선이 되는데요.

태종은 이번 기회에 양녕의 방탕함을 고치고 싶어 합니다. 양녕을 장인 김한로의 집으로 보내고, 궁중에서 지급하던 양식을 끊도록 명령을 내리는 등 초강수를 둡니다. 요즘으로 보자면, 집에서 쫓아내고 신용카드를 정지시키는 것과 비슷할까요?

 

임금은 사적 개인에 그칠 수 없는 공적 존재

 

태종의 의중을 파악한 세자시강원의 선생님들은 양녕에게, 종묘에 모신 조상들께 반성문을 올림으로써 아버지에게 강한 개선의 의지를 보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반성문의 작성을 양녕은 선생님에게 떠넘깁니다. 양녕도 선생님도 ‘이번만 무사히 넘기자’라는 안일한 생각을 했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1년 정도 지내던 양녕은 또 다시 여성 스캔들을 일으키고, 이를 지적하는 아버지에게 대듭니다.

 

세자가 환관 박지생을 보내 직접 쓴 손 편지를 (태종께) 올렸는데, 사연은 이러하였다. “전하의 시녀는 다 궁중에 들이는데, 어찌 다 귀중하게 여겨 받아들이십니까?” (태종실록 18년 5월 30일)

 

“내가 세자의 글을 보니, 놀라서 몸이 움츠러들고 가르치기가 어렵겠다 싶구나.”......“이 아이는 마음을 고치기 어렵다. 그 말의 기세를 본다면 양녕이 정치를 하는 것이 사람들에게 재앙이 될 지 복이 될 지 예측하기가 어려우니......서연관으로 하여금 잘못된 일을 고치도록 말하고, 서연에 나오게 하여 잘 성장시켜야 마땅하겠다. 이와 같이 해도 마음을 고치지 않는다면, 선례에 따라 처리하겠다.” (태종실록 18년 6월 1일)

 

의정부議政府(조선 최고 행정기관), 조선 건국에 공을 세운 공신들, 육조六曹(행정 실무를 담당하는 여섯 부서), 삼군 도총제부三軍都摠制府(모든 군사를 관할하는 기관), 한양 모든 관청의 관리들이 글을 올려, 세자를 파면하도록 청하였다. (태종실록 18년 6월 2일)

 

양녕은 ‘아버지도 여성 편력이 있으면서 어째서 자신만 탓하느냐’고 정면으로 맞섭니다. 이는 단순히 한 사안에 대한 이의제기나 불평을 넘어, 현재 권력에 대한 미래 권력의 도전으로 비쳐질 수 있습니다.

아울러 임금은 어쩔 수 없이, 사적 개인에 그칠 수 없는 공적 존재입니다. 설령 개인적 판단에 따라 결정을 내린다고 해도 그 파급은 국가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태종이 사사롭게는 양녕에게 아버지이지만, 동시에 국가의 명운을 책임져야 하는 정치인입니다.

이는 국가의 공식적 2인자로 정치적 존재가 되어버린 세자에게도 해당되는 사안입니다. 따라서 권력을 남용해 국가의 공적 조직이나 조직원을 사익 추구에 사용하거나, 국정에 개입하려는 사사로운 무리를 방조하여 ‘비선 실세’의 여지를 두어서는 안 되는 법입니다.

 

양녕대군, 태양에 가장 가까이 다가갔던 사람

 

여기에까지 생각이 미친다면 태종은 후계자에 대해 면밀하게 재고再考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미 1·2차 왕자의 난, 처가인 여흥 민씨 일가의 처단 등과 같은 사건을 통해, 한때 동지였던 혈족 및 친인척을 정치적 혹은 생물적 사망에 이르게 한 바 있습니다. 눈물을 머금고 자신의 아들도 정치적 맥락에서 재단해야 하는 시점에 도달한 것입니다.

태종 입장에서 임계점에 다다른 것은 물론, 나라의 여론도 양녕의 편이 아닙니다. 국정 운영에 관여하는 상급·하급 공무원들이 세자의 파면을 요구합니다.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양녕의 선생님들도 더 이상은 막아주지 못합니다. 이제는 그들도 세자 교체를 요청하는 여론에 합류합니다. 스승과 제자 사이의 인정과 도리는 비정한 정치 논리와 공적 시스템 속에 매몰되어 버린 것입니다.

 

양녕의 세자빈객 곧 선생님이었던 변계량은 두 달 후, 세종의 지경연사知經筵事로 자리를 옮깁니다. 지경연사는 임금이 고전과 동시에 국정을 토론하는 자리인 경연經筵을 담당하는 정2품 관직입니다. 세자의 선생님에서 임금의 선생님이 되었으니, 영전榮轉을 한 셈입니다. 그 후 변계량은 약 20년간 국가의 학문을 상징하는 ‘문형文衡’으로서, 세종의 주요 국정운영 동반자가 됩니다.

 

양녕대군은 이카로스Īkaros처럼 태양에 가장 가까이 다가갔던 사람입니다. 그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면, 생명을 담보할 수 없습니다. 단종 복위 운동에서 볼 수 있듯이, 과거 권력을 재추대하고자 하는 무리가 있을 수 있으므로, 당사자를 사전에 제거해버리기 마련입니다. 실제로 세종 6년에, 양녕이 왕이 됐으면 세상이 더 좋아졌을 것이라는 불충한 말을 한 향리들, 양녕이 군사력을 장악하려 한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린 군인을 처벌하기도 합니다. 세종이 보호해주어 양녕은 세종보다 장수하지만, 통상적으로 ‘폐세자=사망’이라 충분히 유추할 수 있었습니다.

 

(제자) 안연이 죽자, 공자가 말하였다. “슬프다! 하늘이 나를 버리는구나! 하늘이 나를 버리는구나!” 안연이 죽자, 공자가 애통하게 곡을 하였다. 따르던 제자가 말하였다. “선생님은 지나치게 슬퍼하십니다.” 공자가 말하였다. “내가 지나치게 슬퍼한다고? 안연을 위해 슬퍼하지 않으면, 내가 누구를 위해 슬퍼하겠느냐?” (『논어論語』 「선진先進」)

 

동양 고전의 교과서 격인 『논어』에서, 공자는 제자 안연이 사망하자 통곡합니다. 어찌나 비통해 하는지 다른 제자들이 서운해 할 정도입니다. 이에 비해, 양녕의 선생님들이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제자를 위해 진정 통곡했는지 의문입니다. 정치 논리 앞에서는 마음으로 울어주는 사제 관계는 없는 것인가 봅니다.

 

(양녕대군의 교육 실패는 학부모 태종의 학습 방침이 확고하지 못한 이유도 있어 보입니다. 이번 시리즈의 마지막 편인 양녕에 대한 태종의 교육법에 대해서는 다음으로 이어집니다.)

 

(양녕대군의 선생님 중 한 사람인 변계량의 문집 『춘정집春亭集』. 출처 : 국립전주박물관)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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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 읽어주는 여자'는 세종이야기꾼 오채원이 매주 오마이뉴스에 연재하고 있는 시리즈입니다. 기사 바로 가기 omn.kr/1nooz)

 

임금(태종)이 일찍이 충녕대군(이후 세종)에게 말하였다. “너는 할 일이 없으니, 평안하게 즐기기나 하여라.” 그리하여 서화書畫(글과 그림), 화석花石(무늬 돌), 금슬琴瑟(서로 짝을 이루는 현악기) 등 모든 놀이의 내용을 갖추지 않음이 없었기에, 충녕대군은 예술에 정통하였다. (태종실록 13년 12월 30일)

 

태종은 왕자시절의 세종에게 ‘방목형 교육’을 제공합니다.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라는 태종의 자상해 보이는 말은, 왕이 될 가능성을 ‘꿈도 꾸지 마라’는 셋째 아들에 대한 경고였던 셈입니다. 덕분에 세종은 예술을 기반으로 한 ‘자기주도적 학습’으로 청소년기를 보낼 수 있었습니다.

이에 비하여, 양녕대군은 11세의 나이에 세자로 책봉된 이후, 가업 승계 교육을 받아야 했습니다. 태종에 이어 임금이 되어야 한다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맏아들의 숙명이었지요.

 

태종은 34세의 나이에 세자로 책봉된 바 있습니다. 제2대 임금인 정종이 자신에게 적자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며 동생인 정안공靖安公(이후 태종)을 후계자로 지목한 것인데요. 정종실록을 보면, 정안공이 세자의 자리에 있었던 기간이 9개월 남짓인데, 그나마 교육받은 횟수는 3회밖에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태종이 고려시대에 문과 급제한 엘리트라 해도, 그가 접한 학습은 공무원의 직무에 한정된 내용이었습니다. 따라서 왕위에 오른 후에는 세자 교육의 부족을 체험하고, 자신의 후계자는 체계적으로 양성하리라 다짐했을 것입니다.

 

조선시대에는 세자를 위한 교육제도이자 교육장인 서연書筵, 세자 교육을 맡은 관청인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여기에서 교육을 수행할 세자사世子師(정일품正一品, 의정부 영의정 겸직) 및 세자부世子傅(정1품, 좌·우의정 중 1인 겸직), 세자이사世子貳師(종1품, 찬성이 겸임), 세자빈객世子賓客(정·종2품), 보덕輔德(종3품), 필선弼善(정4품), 문학文學(정5품), 사서司書(정6품), 설서設書(정7품) 등을 두었는데요. 현재 1인자의 맏아들이자 미래의 1인자를 길러내는 일이므로, 변계량 등 당대 최고의 학자들을 선생님으로 모셨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양녕대군에 대한 세자 교육은 실패로 끝납니다.

현대 교육학에서는 교육의 주체를 대체로 학습자·학부모·교사로 봅니다. 양녕의 교육이 실패로 끝난 이유를 이 세 측면에서 살펴보겠습니다.

 

‘가문의 영광’ 위해 ‘입시 지옥’에 빠지다  

양녕대군은 임금이 갖추어야 할 지식·태도·역량의 함양이라는 단일한 목표를 향한, 그리고 본인의 선택과 무관한 공부를 해야 했습니다. 요즘 식으로 보자면 ‘가문의 영광’을 위해 ‘입시 지옥’에 빠진 수험생과 같다고 할까요? 차이가 있다면, 경쟁자도 동료도 없으며, 합격은 ‘떼어 놓은 당상’인 점일 것입니다. 그러니 학습에 대한 동기부여가 부족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게다가 양녕은 대체로 책상 앞에 앉는 공부에 별 취미가 없어 보입니다.

 

임금이 글을 외우도록 명했는데 세자가 외지 못하였다. 임금이 (양녕의 시중을 드는) 환관의 종아리를 때리고 명을 내렸다. “나중에도 이와 같으면 반드시 서연관을 벌하겠다.” (세자시강원의) 문학 허조許稠를 시켜 이 말로써 세자에게 경고했다. (태종실록 5년 9월 14일)

 

사간원司諫院(왕권을 견제하는 언론기관)에서 상소하였다......“신들이 일전에 서연 일기를 보니, 닷새 동안에 잇달아 경전 해석한 날이 적습니다.” (태종실록 12년 5월 19일)

 

세자가 팔뚝에 매를 받치고 궁궐 문 밖으로 나가고, 또 아프다며 핑계대고 강의를 듣지 않았다......세자가......“내가 병이 있으니 회복되면 저녁에 당직하는 서연관과 함께 복습을 하겠다.” 라고 말하였으나, 저녁이 되어도 그대로 하지 않았다. (태종실록 16년 10월 21일)

 

(매 사냥꾼을 찍은 1930년 사진. 출처 :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역사아카이브)

양녕대군의 장래는 태종을 이어서 보위에 오르는 오로지 한 길밖에 없었습니다. 이는 양녕에게 한 편으로 큰 혜택이지만, 또 달리 본다면 자신이 조절할 수 없는 상황이기도 합니다. 이를 해석하는 것은 자신의 선택입니다. 건강한 현실 감각을 가졌다면, 양녕은 한정적 환경 내에서도 스스로 목표를 설정하고 학습에 몰입할 수 있었습니다. 의욕이 있으면 인내심을 갖고 끈질기게 도전하게 되는 법입니다.

그러나 양녕은 복습을 한다거나 몸이 아프다거나 하는 등의 이유를 들어 종종 강의에 결석합니다. 이러한 사실이 태종에게 알려져서, 자신을 보좌하는 환관이 대신 매를 맞거나, 스승들이 파면되기도 합니다. 그때마다 양녕은 잠시 조심하는 것 같다가도, 다시 사냥 등의 유희에 탐닉하며 공부를 게을리 하기 일쑤입니다. 신하들이 말려도 몰래 사냥을 나갔던 태종의 기질을 양녕은 일부 물려받은 모양입니다.

 

임금이 말하였다......“세자의 천성을 보아하니, 틀림없이 사냥을 좋아한다.” (태종실록 15년 10월 17일)

 

세자가 보덕 조서로에게 “내가 활을 쏘고자 하는데 어떠한가?” 하니, 조서로가 “대군의 상제가 이미 삼칠일을 지났으니 쏠 수 있습니다.” 하여, 세자가 내사복문內司僕門 밖으로 나가서 230여 보步를 쏘았다. (태종실록 18년 2월 28일)

 

우빈객 계성군 이내李來 등이 나아가 말하였다. “음악과 여색, 매와 개는 마땅히 멀리하고 끊어야 합니다. 요즘 듣자하니, 저택 안에 연주자를 끌어들여 거문고를 타고 피리를 불고, 또 매 2련連을 두셨다 합니다. 이 말이 밖에 들리면 저하가 공부한 보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태종실록 11년 10월 17일)

 

양녕은 어찌나 사냥을 좋아하는지 그와 유사한 놀이도 즐겼는데, 심지어 친동생인 성녕대군이 사망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도 애도하기보다 활을 쏘러 나갑니다. 사냥에 쓰이는 매와 개 기르기, 그리고 그 외의 온갖 유희에 탐닉합니다. 여성편력으로 인해 부모님의 걱정을 사기도 하지요.

 

사헌부에서 아뢰었다. “동궁東宮(세자의 궁) 북쪽 담 밑에 작은 지름길이 있으니, 반드시 몰래 숨어서 드나드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임금이 동궁의 어린 환관을 불러들여 국문하게 하니, 과연 예빈시禮賓寺(왕실 잔치 등에 음식 공급을 맡은 관청)의 종 조덕중......등이 몰래 평양 기생인 소앵을 동궁에 바친 지 여러 날이 되었다.......세자가 밥을 먹지 아니하니, 정비(모친 원경왕후)가 환관을 시켜 세자에게 말하였다. “너는 어리지도 않은데 지금 어째서 부왕께 이와 같이 노여움을 끼치느냐?” (태종실록 13년 3월 27일)

 

양녕대군에게 부족했던 이것  

‘개구멍’까지 파고 궁 안으로 기생을 들여온 사건이 발각됩니다. 이 지경이 되자, 아들 셋을 잃고 난 뒤에 얻은 아들이라 양녕을 애지중지해온 모친이라도 두고만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양녕은 반성의 기미도 없이 ‘단식투쟁’을 벌입니다. 이러한 양녕의 절제·사유·성찰 없음은 추후 세자에서 폐위되는 빌미가 됩니다.

 

옛 사람들에게 성찰은 공부의 시작점이자 종착지였습니다. 보는 이가 없는 곳에서도 몸과 마음을 바로 잡도록 스스로에게 촉구했습니다. 단순한 지식 충족에 그치지 않고, 부끄러움을 아는 윤리적 자아를 갖추는 것이 공부에서 필수적이었습니다. 그래서 국가의 최고통수권자인 임금에게도 전문적으로 비판을 가하는 사간원이라는 언론기관을 두었고, 관직에 오르지 않은 학생, 더 나아가 유식하지 않은 ‘풀 베는 촌부와 나무꾼’, 즉 백성의 의견도 들어야 했던 것입니다. 이는 자신의 오류를 인식하고, 현실 세계에 대한 감각을 개발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현대적 교육학의 관점에서도, 공부의 목적은 보다 나은 자신으로의 변화 혹은 성장에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자신을 돌아보고 점검하는 태도, 또 주변의 조언을 경청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양녕에게서 부족해 보입니다.

 

임금이 말하였다. “세자가 식사를 하지 않는 것은 (혼난 후) 분함을 이기지 못해서이다......세자의 불손한 마음은 세자라는 자신의 자리를 지나치게 믿기 때문임이 분명하다. 만약 뉘우치지 않는다면, 왕족 중에 (세자로) 적당한 사람이 어찌 없겠는가?” (태종실록 13년 8월 15일)

 

세자가 말하였다. “요즘 내가 아무 일도 한 것이 없는데, 주상께서 진노하신 이유를 아직 자세히 모르겠다.” 세자빈객 이내李來가 말하였다. “바로 그것이 저하가 가진 나쁜 병의 원인입니다. 저하의 뱃속에 가득 찬 것은 모두 사사로운 욕심뿐입니다......전하의 아들이 저하뿐인 줄 아십니까?” (태종실록 15년 1월 28일)

 

세자가 말하였다. “(태종의 신뢰를 받지 못하는 것은) 나에게 과실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일러바치는 사람이 있어서이다.” (태종실록 17년 3월 23일)

 

양녕은 부끄러움을 알아야 한다는 질책·비판·우려에 귀 기울이지 않고, 오히려 남을 탓합니다. 밖에서는 양녕의 외줄타기가 위태로워 보이나 이를 자신만 모르는 듯합니다. 태종과 선생님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양녕은 세자라는 자신의 지위가 언제까지나 확고하리라 믿었기에 마음공부를 게을리 한 것 같습니다. 세자로서 누릴 수 있는 권리, 그리고 이에 따른 의무의 균형을 모르는 양녕의 패착은 다음과 같이, 선생님들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한 탓도 있어 보입니다.

 

(양녕대군의 교육 실패에 있어서 교사의 역할에 대해서는 다음 편에서 이어집니다.)

 

(글씨에 능했다고 전해지는 양녕대군의 친필을 새긴 ‘숭례문’ 목판. 출처 : 문화재청)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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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갓!

오마이뉴스에서 상을 주셨습니다!
'2020년 5월 이달의 새뉴스게릴라 수상자'로 선정되었는데요(제가 해석하기론 '이달의 신인 기자상' 정도 될 것 같습니다).
제 글에 '좋아요' 꾸욱 해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 

-
오채원 시민기자는 <실록 읽어주는 여자>라는 연재를 통해 조선왕조실록에 담긴 다양한 사회상을 현대인의 눈높이에 맞게 풀어내고 있습니다. 자신을 "사람들이 저마다의 세종을 스스로 발견하도록 공감의 역동을 선사하는 세종이야기꾼"이라고 밝힌 오채원 시민기자를 2020년 5월 이달의 새뉴스게릴라로 선정합니다.

 

"굶어 죽는 이가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용서하지 않겠다" http://omn.kr/1nhia
아들아, 모든 업보는 내가 지고 저세상으로 가마 http://omn.kr/1nk49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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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사는 오마이뉴스에 연재하고 있는 '실록 읽어주는 여자' 연재 시리즈 중 일부입니다. omn.kr/1nmuf)

 

임금은 본디 유학儒學을 좋아하여, 늘 맑은 첫새벽에 신하들과 함께 나라의 정사를 돌보고, 자주 경연經筵에 나아가서 경전의 해석 및 토론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퇴근 후) 일상 공간에서는 밤중이 되어도 독서를 그치지 않는다. 태상왕(태종)이 임금의 정신 피로를 염려해 금지시키며 말하였다. "과거 응시자는 이와 같이 해야 되겠지만, (임금이 되어서) 고됨이 어찌 이와 같은가." (세종실록 3년 11월 7일)
 
유교 문화권에서 중시하는 지도자의 주요 덕목 중 하나는 배움을 즐기는 태도입니다. 유학의 교과서라 할 수 있는 <논어論語>의 첫 장 첫 글자가 '배울 학學'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학이시습지불역열호(學而時習之不亦說乎)', 즉 '배우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배운 것을 익히면 정말로 기쁘지 아니한가?'라는 구절이 바로 그 예입니다.
 
단지 머리로 지식을 흡수하는 일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체화하는 단계까지 이르러야 '배움'이라 할 수 있으며, 그 과정에서 기쁨이 느껴지는 경지에 도달해야 진정한 배움인 것입니다. 이는 '아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보다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보다 못하다(지지자불여호지자 호지자불여락지자, 知之者不如好之者,好之者不如樂之者)'라는 <논어>의 구절을 보아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배움을 즐긴 대표적 인물로 손꼽히는 세종은 건강이 걱정될 만큼 그 정도가 심했습니다. 세종실록에 의하면, 그는 매일 새벽 1~3시에 일어나 빈틈없이 하루를 보냈는데요. 책을 좌우 양옆에 펼쳐 놓고 식사를 하며, '퇴근 후에도 하는 일 없이 멍하니 앉아 있는 시간이 없다'고 고백할 만큼, 그는 쉴 틈 없이 학습에 몰두했습니다. 온갖 서적은 물론이고 심지어 조선의 역대 외교문서까지 살펴본 그는 '문자중독자'에 가까워 보입니다. 이처럼 고시생 이상으로 책을 파고드는 아들이 안쓰러운 아버지 태종은 공부를 금지시킵니다. 이러한 양상은 세종의 왕자 시절부터 시작됐습니다.
 
임금은 천성이 학문을 좋아하여 세자로 있을 때 항상 글을 읽되 반드시 백 번씩을 채우고, 『좌전左傳』과 『초사楚辭』같은 책은 또 백 번을 더 읽었다. 예전부터 몸이 불편할 때에도 글 읽기를 그만두지 않았는데, 병이 점차 심해지자 태종은 내시를 시켜 갑자기 책을 모두 거두어 가지고 오게 하였다. 그리하여 『구소수간歐蘇手簡』 한 권만이 병풍 사이에 남아 있었는데, 임금은 천백번을 읽었다. (『연려실기燃藜室記述』 「세종조世宗朝 고사본말故事本末」)
 
아들이 어찌나 독서에 열심인지 몸이 아파도 멈추지 않습니다. 보다 못한 아버지는 책을 모두 압수합니다. 그 과정에서 어쩌다 빠뜨린 책 한 권을 발견해 읽고 또 읽은 나머지 1100번에 달한다는, 많은 학부모님이 부러워할 만한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유교 문화권에는 '군사君師(임금이자 스승)'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한 나라의 임금은 동시에 스승이기도 해야 한다는 뜻인데요. 이는 권력의 중심축에 지식이 있으므로, 지식의 양과 질이 정치적 무기가 될 수 있음을 내포합니다. 결국 세종에게 지식은 처절한 생존의 도구인 셈입니다.
 
아울러 '군사' 개념은 임금의 주요 책무가 백성을 계몽시키는 일임 또한 드러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왜 문자의 이름을 훈민정음訓民正音, 곧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고 지었는지 짐작 가능합니다. 그렇기에 세종이 '겨레의 스승'으로 불리며, 그의 탄신일을 스승의 날로 삼은 것입니다. 이처럼 세종과 배움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세종이 왕자 시절에 1100번을 읽었다고 전해지는 "구소수간歐蘇手簡"은 중국 송나라의 구양수歐陽脩와 소식蘇軾이 주고받은 편지를 모은 책이다. 사진은 구양수와 소식의 편지를 모은 또 다른 책 "구소잡초歐蘇雜抄"이다. ⓒ서울역사박물관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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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이야기꾼 오채원이 가정의 달 5월을 맞아, '아버지 태종'의 이야기를 다룬 <아들아, 모든 업보는 내가 지고 저세상으로 가마>가 오마이뉴스 탑기사로 게재되었습니다. 2년 전에 돌아가신 아빠 생각이 나서 원고의 마무리가 참 힘들었는데요. 시간이 흐르며 조금씩 조금씩 그분의 부재를 실감하게 됩니다. 기사 바로 가기 : http://omn.kr/1nk49)

 

 

태조가 (조선 개국 전에) 일찍이 말하였다. “내 뜻을 성취할 사람은 반드시 너(이방원, 이후 태종)일 것이다.” (태조실록 총서)

 

고려의 무인 이성계에게 이방원은 가문의 영광을 실현해준 자랑스러운 아들이었습니다. 이성계의 본거지는 고려의 수도인 개경(현재의 개성)의 동북 방향에 위치한 동북면東北面, 즉 지금의 함경도였습니다. 이성계는 공민왕이 신임하는 상만호上萬戶라는 총지휘관이었지만, 그가 맹주였던 동북면은 물리적 뿐 아니라 정치적 지형에서도 변방이었습니다. 이에 이성계는 무예가 아닌 유학에 정통한 자손이 과거라는 등용문을 통과해 가문을 개경의 주류 세계에 진입시키길 고대했습니다.

 

그 소망에 부응하듯 다섯째 아들 이방원이 문과에 급제하며 중앙 무대에 데뷔합니다. 가문 최초의 과거 급제 소식을 듣자 어찌나 감격스러웠던지 이성계는 궁궐을 향해 절하고 눈물을 흘립니다. 이어서 이방원이 왕명작성 및 역사편찬 등을 관장하는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의 정삼품正三品 벼슬인 제학提學에 임명되자 이성계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사람을 시켜 두세 번이나 반복해서 관교官敎(임명장)를 읽게 했다고, 태조실록에서 그날의 장면을 증언합니다. 이후 이방원은 왕실과의 혼인 자격을 갖춘 가문인 ‘재상지종宰相之宗’ 중 여흥驪興 민씨閔氏 가문의 여성과 결혼하며, 이성계 집안의 격을 드높이는데 꾸준히 기여합니다.

 

국가지정문화재 보물인 최광지 홍패紅牌. 고려 창왕 1년인 1389년에 발급된 과거급제증서로, 국새가 찍힌 고려의 공문서로서 유일하게 현존한다. 출처 : 연합뉴스

 

이성계는 이후 홍건적·여진족·몽고족·왜구 등을 토벌하며 민중의 영웅으로 부상하고, 성리학의 세례를 받은 신진사대부의 신망을 얻으며 고려의 ‘전국구 정치인’이 됩니다. 차차 공훈과 이에 따른 정치적 지분을 확보해나가며 급기야 고려의 왕위에 오르고, 1392년에 조선을 개국하지요. 이 과정에서도 이방원의 기여는 절대적이었습니다. 앞장서서 이성계 일파의 정적을 제거하는 등 이방원은 이성계에게 아들을 넘어 혁명동지에 버금가는 존재였습니다.

 

아들을 죽이려 한 아버지, 태조

 

그러나 태조 이성계는 즉위 7년차인 1398년, 이방원이 주도한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실각하며, 자신이 후계자로 세웠던 막내아들 이방석을 잃고, 차남 이방과(제2대 임금 정종)에게 왕좌를 물려줍니다. 명목상 임금에 가까웠던 정종은 약 2년 후 양위하며 본격적으로 이방원, 즉 태종의 시대로 접어듭니다. 이렇게 하여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듯 보였던 태조는 4년 후인 1402년, 자신의 본거지인 함흥 지역에서 일어난 ‘조사의趙思義의 난’이라 불리는 쿠데타에 직간접 관여합니다. 자신의 아들을 저격하는 일을 주도 혹은 참여한 것이지요. 이십여 일만에 반란군이 궤멸하지만, 태조는 돌아올 줄 모릅니다. 여기에서 바로 그 유명한 함흥차사 이야기가 비롯됩니다.

 

태조는 처음에 덕원德源(현재의 함경도 문천군)으로 갔다가 또 함흥으로 갔는데, 문안 사절로 가서 죽은 사람이 속출하였다......태종이 찾아가서 간곡히 청하니, 무학대사가 어쩔 수 없이 함흥에 가서 태조를 뵈었다......“방원(태종)이 진실로 죄가 있으나, 전하께서 사랑한 아들은 이미 다 죽고 그 사람만 남았는데, 이 아들마저 끊어 버리면 전하가 평생 애써 이룬 대업을 장차 누구에게 맡기려 하십니까? 남에게 부탁하는 것보다 차라니 내 혈족에게 주는 것이 나으니, 신중히 생각해 보소서.” 태조가 그의 말이 꽤 그럴 듯하다고 생각하고 드디어 행차를 돌릴 마음이 생겼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태조조太祖朝 고사본말故事本末」)

 

조선 후기의 학자인 이긍익이 야사를 종합한 책 『연려실기술』에 의하면, 태조는 마중 나온 태종을 향해 화살을 쏘고 소매에 쇠방망이를 숨겨오는 등 환궁하는 순간까지도 아들의 목숨을 노립니다. 그 진위여부는 확인할 수 없으나, 태종에 대한 태조의 실망과 분노는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조聖祖(태조)께서 조사의의 진영에 머무르셨는데......조사의가......마침내 관군官軍(정부군)에 잡혔습니다. 이에 수신帥臣(도의 국방 책임자) 이천우·이빈·최운해 등이 성조를 호위해 평양을 경유해서 개성에 돌아오시므로, 태종께서 금교역金郊驛(현재의 황해도 금천군의 역)에 나가 맞이하셨습니다.” (숙종실록 13년 1월 7일)

 

마지못해 궁으로 복귀하였으나 여전히 아버지는 아들에게 냉랭합니다. 문안 인사마저 받지 않을 만큼 아들 보기를 꺼리더니 5년여 후에야 아버지는 아들에게 술 한 잔을 권합니다.

 

임금(태종)이 덕수궁(태조의 거처)에 나아가 문안을 드렸다. 이전에는 임금이 자주 덕수궁에 나아가도 접견하는 일이 적었는데, 이날은 태상왕太上王(태조)이 침전寢殿(침실)으로 불러들여 술을 권하니 취하기에 이르렀다. 임금이 매우 기뻐하여 가까운 신하에게 말하였다. “내가 돌아가는 길에 피리를 연주하라.” (태종실록 7년 9월 20일)

 

그 옛날처럼 거나하게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고 태종은 춤을 추고 싶을 정도로 신이 났습니다. 그리웠던 아버지의 정을 다시 느끼게 되었으니까요. 그러나 부자에게 시간은 그리 오래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임금이 말하였다. “이 같은 상사喪事를 당하니 슬픔이 미칠 데가 없구나. 내가 무인년(1398년) 가을에 국가의 장기적 발전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거사를 도모했는데[제1차 왕자의 난], 그 뒤 부왕(태조)께서 항상 못마땅하게 여기셨다. 내가 생전에 순종하지 못하여 마음을 상하시게 했다. 이제야 정신 차리고 보니 부왕께서 승하하셨는데, 어찌 차마 잊어버리고 서둘러 정무를 볼 수 있겠는가?” (태종실록 8년 6월 21일)

 

부자 관계가 회복된 지 8개월여 만에 태조가 승하합니다. 한 달이 지나도 업무에 복귀할 수 없을 만큼 태종의 충격은 큽니다. 부자가 천신만고 끝에 세운 나라는 안정을 찾아가건만, 한 꿈을 꾸었던 아버지는 이제 세상에 없습니다. 정치 논리에 휘말린 가족사를 돌아보며 회한이 일었겠지요. 그는 나이 마흔에도 아버지의 정이 고픈 한 사람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태종은 자신의 아이들에게 한없이 마음 약한 아버지였나 봅니다.

 

함흥에서 돌아오던 태조가 태종을 향해 화살을 쏘았으나 그늘막 기둥에 꽂혔다는 야사가 전해지는 살곶이 다리의 전경.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아들바보, 태종  

 

“내가 젊은 시절에 아들 셋을 연달아 여의고 갑술년(1394년)에 양녕을 낳았는데, 그도 죽을까 두려워서 처가에 두게 했다. 병자년(1396년)에 효령을 낳았는데 열흘이 채 안 돼 병을 얻어서 홍영리洪永理의 집에 두게 했고, 정축년(1397년)에 주상(세종)을 낳았다. 그때 내가 정도전 일파의 시기를 받아 형세가 좋지 않게 되니, 실로 남은 날이 얼마 없겠구나 생각되어 항상 가슴이 답답하고 아무런 낙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대비(부인 원경왕후)와 더불어 서로 양녕을 안아 주고 업어 주고 하여, 무릎 위를 떠난 적이 없었으며, 이로 말미암아 자애하는 마음이 가장 두터워 다른 자식과 달랐다.” (세종실록 1년 2월 3일)

 

실록을 보면, 자녀들에 대한 태종의 사랑은 극진했던 것 같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연달아 아들 셋을 병으로 잃고 난 후, 나이 서른에 가까워서야 양녕대군을 시작으로 효령과 충녕을 낳았기 때문에, 혹시나 이 아이들마저 죽을까봐 애지중지 기릅니다. 아이들이 꼬물꼬물 어릴 때 태종 부부는 1차, 2차 왕자의 난을 겪습니다. 자신부터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처지이니 아이들이 가엾고 또 애틋했을 것입니다. 태종 부부는 양녕을 무릎에서 내려놓은 적이 없을 만큼 그야말로 ‘금이야 옥이야’ 키웁니다.

 

이렇게 키운 맏아들이 세자에 걸맞지 않는 행동들을 하기 일쑤입니다.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거짓말하고 놀러 다니고, 여자친구를 몰래 궁으로 들이고, 반성문을 쓰고는 바로 아버지한테 대드니 억장이 무너졌을 것입니다. 양녕은 자신에게 아들이지만 국가에는 차세대 최고통수권자입니다. 그 자격이 의심되는 상황이 이어지니 태종은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셋째 아들 충녕으로 세자를 교체하는데, 그날 태종은 양녕을 붙들고 통곡합니다.

 

이제李禔를 세자에서 물러나게 하여 광주로 추방하고 충녕대군으로 왕세자를 삼았다......유정현 등이 “신들이 어진 사람을 고르자는 것도 충녕대군을 가리킨 것입니다.” 하여, 의논이 이미 정해지자, 임금이 통곡하며 흐느끼다 목이 메었다. (태종실록 18년 6월 3일)

 

15년간 세자의 자리에 있던 맏이 양녕에서, 정통성이 부족하며 검증되지 않은 셋째 충녕으로의 교체는 부담이 큰 정치적 판단이었을 것입니다. 다행히 두 번째 세자는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태종이 생시에 자리를 물려주고 상왕上王으로 물러나자, 세종은 착실하게 임금 노릇을 했고, 부모에게 효도했으며, 야인이 되어 목숨 부지가 불투명한 큰형 양녕을 감싸주었습니다. 이처럼 태종에게 세종은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어주었습니다.

 

임금(세종)의 정무 처리가 사리에 합당하더라는 말을 듣고 (태종이) “내 진실로 (세종이) 본디 현명한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노련할 줄은 몰랐구나.” 하고, 대신들에게 “주상은 참으로 문왕文王(중국 고대 주나라의 기초를 닦은 성군) 같은 임금이다.” 했다. 또 일전에 교외에 행차했을 때, 임금이 오는 것을 바라보고 눈물이 떨어지는 것을 깨닫지 못하며 절로 기뻐하면서 말했다......“내가 나라를 맡김에 사람을 잘 얻었으니, 자연을 벗 삼아 한가로이 노닐기에 걱정이 없는 자는 천하에 나 하나 뿐......예나 지금이나 역시 나 하나뿐일 것이다.” (세종실록 2년 5월 16일)

 

세종은 약 두 달의 짧은 세자 기간을 거쳤기에, 임금이 갖춰야 할 지식·태도·역량 등을 예비 학습할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그런데도 용상에 오른 지 이년 여 만에 벌써 안정적으로 업무를 처리합니다. 신하들이 태종 면전에서 세종의 직무능력을 칭찬하자, ‘세상에 나처럼 아들 잘 둔 사람은 또 없을 것’이라고 자랑합니다. 얼마나 아들이 기특했는지 바라만 보아도 눈물이 저절로 떨어집니다. 세자 교체를 통해 성공적으로 후세를 이은 자신의 결정에 뿌듯해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세종의 안착은 뛰어난 개인의 기량 덕분이기도 하지만, 아버지 태종의 치밀하며 희생적인 사전 준비가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태종이) 병조 판서兵曹判書(현 국방부 장관) 박신朴信을 불러 말했다......“(창덕궁) 인정전은 협소하므로 마땅히 새로 지어야 할 것이다. 토목공사는 백성을 수고롭게 하는 큰일이므로 백성들이 심히 괴롭게 여긴다. 그런데도 조속히 지으려는 까닭은 다름이 아니라, 백성을 부리는 책임을 내가 떠맡고, 세자(충녕)가 즉위한 뒤에는 한 줌의 흙이나 한 조각의 나무가 들어가는 토목공사라도 백성들에게 더하지 않게 해서, 두터운 민심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태종실록 18년 7월 5일)

 

당초에 병조 참판(현 국방부 차관) 이명덕이 그 일(한양도성 보수 공사)을 주관해 여러 도에서 총 43만 명의 장정을 징발했다. 대언(임금 비서) 등이 임금에게 아뢰었다. “가만히 살펴보건대, 태조께서 처음으로 한양에 도읍을 정해 성을 쌓는데, 장정이 20여만 명 들었습니다. 지금은 이를 수축할 뿐인데 어찌 이처럼 많습니까?” (세종실록 3년 12월 10일)

 

한양도성의 맨 밑은 태조 때 축조하고, 그 위는 세종 시대에 태종의 주도로 보수 및 신축 공사를 했다. 그 뒤 숙종·효종·현종·영조·순조 시대에도 보수했으나 한국전쟁으로 대부분 파괴된 것을 지속적으로 복원하고 있다. 출처 : 오채원

 

태종은 자신의 임기 말부터 상왕으로 물러나 있는 기간에 걸쳐, 백성들의 노역이 필요하고 세금이 들어가는 대공사를 감행합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지지율 하락 요인을 자신이 감당하여, 세종은 탄탄한 기반 위에서 자신의 시대를 열도록 배려한 것이지요. 그리고 저 세상으로 갈 때에는 가뭄으로 인해 세종과 백성이 고통 받지 않도록, 비를 내리겠다고 유언을 남깁니다.

 

세종 4년에 임금(태종)이 승하하시려 할 때 이와 같이 하교하였다. “지금 가뭄이 심하니, 내가 죽은 뒤에도 안다면 반드시 이날 비가 오도록 하겠다.” 그 뒤로 제삿날만 되면 반드시 비가 왔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태종비’라 불렀다. (『연려실기술』, 「태종조太宗朝 고사본말」)

 

그래서 역사는 태종의 기일인 음력 5월 10일 즈음에 내리는 단비를 ‘태종비’라고 부릅니다. 목숨이 다하는 그 순간까지 아들을 걱정하는 아버지의 사랑을 엿볼 수 있는 기록인데요. 자신은 아버지로부터 목숨을 위협받았던 애처로운 아들이지만, 그 파멸적 인연의 고리를 자신의 대에서 끊고 말겠다는, 그리고 ‘후세를 위해 모든 업보는 내가 다 지고 가겠다’는 태종의 부정父情을 대하자니, 문득 제 아버지가 그리워집니다.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카네이션이 담긴 화병Vase with Carnations, 1886년. 출처 : 디트로이트 미술관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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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정국이 장기화되며 많은 이들이 생계 곤란을 겪고, 정부에서는 긴급지원금 지급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에, 세종시대의 공무원들과 정치인들이 어떻게 재난에 대처했는지 정리한 기사가 오마이뉴스 메인에 게재되었습니다. 세종이야기꾼 오채원이 들려드리는 <실록 읽어주는 여자> 연재 기사 바로 가기 : http://omn.kr/1nhia)

 

“(내가 재위한 기간 중에) 천재지변이 없는 해가 없었다.” (세종실록 7년 6월 23일)

 

위와 같이 한탄한 것처럼, 세종은 거의 매년 자연재해 그리고 이로 인한 흉작으로 근심이 컸습니다. 세종실록에서는 크게 세 번의 대기근을 관찰할 수 있는데요. 피해 지역이 주로 경기·강원도 일대였던 세종 5~7년(1423-1425년), 곡창지대인 충청·전라·경상도 등 하삼도下三道 중심이었던 세종 19년, 경기·충청·강원·황해도 등 광범위했던 세종 26년을 들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세종 5~7년 무렵은 집권 초기로, 경험이 축적되기 전이었기에 대처하는데 고충이 컸을 것입니다.

( 보릿고개에 나물을 캐는 아이들을 담은  1930 년 사진 .  출처  :  서울역사박물관 아카이브 )

중앙집권체제를 지향한 조선은 국가 차원에서 선제적으로 재난에 대처합니다. 임금이 신뢰하거나 경륜이 있는 인물을 발탁해 현장에 급파한 후 피해 상황을 조사하고, 지방 수령(현재의 도지사·군수)이 백성들을 적극 구제하도록 감찰 및 지원합니다. ‘골든타임’을 놓치면, 주린 백성들은 전염병에 집단 감염되거나, 식량을 찾아 이산가족이 되어 지방으로 떠돌거나, 혹은 경제력 있는 자의 노비로 자진해 들어갑니다. 이는 세금원의 축소로 이어져, 국가의 운영마저 위태로워집니다. 그리고 위정자가 제대로 공부했다면, ‘임금은 어머니가 갓난아이를 돌보듯이 백성을 보호해야 한다[如保赤子]’는 유교 경전 『대학大學』의 가르침을 새기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세종은 궁에서 신하들의 보고만 받고 있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책망이 자신들에게 올까봐 부정적인 소식 전하기를 종종 피하니까요. 이에 세종은 민폐를 최소화하기 위해, 단출한 차림에 호위하는 신하들 없이 당직 경호원만 대동하고, 서대문 밖으로 나옵니다. 육안으로 살펴보니 역시나 현장은 보고와 달랐습니다.

 

“올해 벼농사는 모두들 ‘매우 잘 되었습니다’라고 했건만, 오늘 보니 눈물이 날 지경이다.” (세종실록 7년 7월 1일)

 

울고 싶은 심정으로 현장을 돌아보며 농부의 하소연이나 고충을 직접 듣습니다. 이렇게 시찰을 마치고는 점심 수라도 들지 않고 궁으로 돌아옵니다. 밥맛이 나겠습니까? 믿었던 신하들의 보고와 다른 현실에 맞닥뜨린 충격, 그리고 백성들에 대한 미안함과 측은함이 컸겠지요. 이 외에도 재난이 발생하면, 그는 ‘구언求言’이라 하여 자신에게서 고칠 점을 두루 경청하며 성찰하고, 열흘 가까이 앉은 채 밤을 샜으며, 처소를 초가 같은 허름한 곳으로 옮기거나 반찬 수를 줄이며, 백성들과 고통을 함께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관리들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위에서 본 것처럼, 실태를 축소 보고 혹은 은폐하기도 하고, 굶주리거나 병든 백성들에 대한 긴급 지원·구조 등을 성실히 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에 대처하기 위해, 세종은 감찰관을 파견해 현황을 파악한 후, 대민 지원에 불성실하거나 실패한 책임자에게 엄한 벌을 내립니다.

 

의금부義禁府(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에서 보고하였다. “금성金城(현재의 강원도 금성면) 현령縣令(군수와 유사) 이훈, 감고監考(지방의 곡식·세금 담당자) 김거상과 윤생사 등이 긴급지원을 잘하지 못해 백성을 굶어 죽게 만들었습니다. 이는 (법전 ≪대명률大明律≫의) 제서유위율制書有違律(임금의 명령을 어긴 자를 처벌하는 법규)에 해당되니 장 100대에 처하소서.” 이훈에게는 속贖(형벌 대신 벌금 납부) 받지 말고 장 90대에 처하며, 나머지 사람들은 법대로 처단하라고 명하였다. (세종실록 5년 6월 6일)

 

백성 구제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자는 왕족이라도 처벌을 피해갈 수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 세종 26년의 대기근 시, 경기도 관찰사(현재의 도지사)로 재임한 이는 태조의 외손, 즉 세종과 사촌지간인 이선李宣입니다. 세종이 경기도에 잠시 머물며, 농사 상황과 굶주리는 백성들의 수 등을 이선에게 묻자, 조금 가물기는 하나 별 문제가 없다고 답합니다. 그런데 감찰을 다녀온 신하의 보고는 딴판이었습니다. 파종을 못한 땅이 경기도의 1/3-2/3에 달하고, 영양실조로 인한 병자들도 속출하더라는 것입니다. 게다가 백성들이 이러한 사정을 임금에게 직접 호소할까봐 행차 시에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통제까지 했음이 밝혀집니다.

 

“내가 백성들의 일에 관해서는 나와 가까운 친족이라 하더라도 용서하지 않았으니, 만약 굶어 죽는 이가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경을 용서하지 않겠다.” (세종실록 26년 5월 5일)

 

임금부터 공적인 마음으로 백성 구제를 지휘하며, 이에 성실하게 응하지 않는 자에게는 엄한 처벌을 내리니, 책임자들은 자연 자신의 직무에 힘쓸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세종 19년의 대기근 대처가 이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입니다. 이상 기후로 전년부터 우물과 하천이 마르고, 경기·경상·전라도의 일부 지역을 제외한 전국이 농사에 실패합니다. 게다가 메뚜기 떼가 창궐하고, 전염병이 굶주린 이들을 덮쳐 사망자가 속출합니다. 나무껍질을 벗겨 먹는 것도 한계에 다다른 나머지, 자신의 아이를 나무에 묶어놓고 도망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물가급등과 곡식품귀 현상이 일어나고, 지방 정부의 창고가 바닥이 나서 급기야 중앙 정부에 비축해둔 곡식을 옮겨다 백성들을 먹일 수밖에 없습니다. 아비규환과 같은 전국적 재난 국면은 전심전력하는 수령들과 이들을 엄격히 감찰하는 감독관들이 있어서, 차차 진정세로 돌아섭니다.

 

“수령들이 감고(곡식·세금 담당자)들을 인솔해서 마음을 다해 조치하고 몸소 백성들을 먹였으므로, 이에 힘입어 살아난 백성들이 많았다.” (세종실록 19년 2월 9일)

 

세종 19년의 대기근에 대한 사관의 평가는 인간의 저력을 역사적으로 드러내줍니다. 국가지도자, 관계부처 및 최전선의 책임자가 “마음을 다해 조치”했기에, 잔혹한 천재지변 속에서도 많은 생명을 살려낼 수 있었습니다. 문제의 시작은 자연에 있더라도 종결은 인간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이처럼 15세기 당시 선진국이었던 조선의 위상은 백성들의 소소한 일상을 걱정하는 위정자들의 성심誠心에서 비롯되었습니다.

 

(2019년 OECD 주요국 중, 한국의 정부 부채 비율은 매우 낮으며 재정건전성이 우수한 편이다. 출처 : 프레스맨)

 

코로나19 정국이 장기화되며 무급휴직자·영세사업자·특수고용노동자·프리랜서 등을 포함한 국민 다수의 생계가 위태롭습니다. 이러한 ‘코로나 보릿고개’를 넘기 위한 정부의 추가경정예산 편성에 대해, 일부 정치인들은 ‘퍼주기 추경’ 혹은 ‘세금 폭탄’이라 공격하고, 또 특정 관료 집단은 ‘재정건전성 유지’라는 신념에 빠져, 추경의 규모를 축소하려는 듯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나라에서는 긴급재난지원금 혹은 재난기본소득의 지급 범위와 금액을 놓고 논란이 이어지는 가운데, OECD 주요 국가들은 신속하게 예산안 처리에 나섰습니다. 지난 4월 23일 한겨레의 보도에 의하면, 보수적으로 재정을 운용해온 독일 연방정부이지만 경기부양책을 이틀 만에 하원과 상원까지 통과시켰습니다. 이에 따라, 독일 국민은 1인당 최대 1만5천유로 곧 한화로 약 1천993만원인 지원금을 신청한지 사흘 만에 받을 수 있습니다. 심지어 일본은 OECD 국가 중 국가 채무 비율이 가장 높지만, 1인당 10만엔 즉 한화로 약 113만원을 5월 7일부터 지급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와 같이 많은 국가들이 선제적이며 신속하게 코로나19 경제 대책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다행히 4월 30일, 우리 국회에서도 추가경정예산안을 통과시켜, 5월 11일부터 전국민이 긴급재난지원금을 신청할 수 있을 전망입니다. 1인 가구는 40만원, 2인 가구는 60만원, 3인 가구는 80만원, 4인 이상 가구는 100만원이 지급된다고 합니다만, 수개월간 생계가 끊어진 그리고 앞으로가 더 막막한 이들에게 이것으로 충분할 수 없습니다. 책임자들은 선조들처럼 ‘어머니가 갓난아이를 돌보는’ 간절한 마음으로 국민의 삶을 살펴주길 바랍니다.

건전재정이라는 나중을 위한 씨앗 저축에 치중하면, 보릿고개는 영영 넘을 수 없는 고개가 되어 버립니다. 달리 말해, 국민의 현재를 걱정하지 않으면 국가에게 미래는 없습니다. 국가는 백성(국민)으로 근본을 삼고, 백성(국민)은 먹고 사는 문제로 하늘을 삼는 법이므로, 결국 정치의 존재 이유는 민생에 있는 것입니다(세종실록 26년 윤7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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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회 장애인의 날을 맞아, 세종이야기꾼 오채원이 작성한 '세종도 장애인이었다'는 오마이뉴스 탑 기사로 채택되었으며, 세종시대의 장애인에 대한 인식을 살펴보고자 하였습니다. 기사 바로 가기 : http://omn.kr/1nf5d)

 

 

“반걸음 거리에서도 사람이 있는 것만 알겠고 누가 누구인지는 분간하지 못한다.” (세종실록 21년 6월 21일)

 

“봄부터 어두침침한 곳에서는 지팡이가 아니고는 걷기 어려웠다.” (세종실록 23년 4월 4일)

 

“내가 눈병을 얻은 지 이제 4, 5년이나 되었다. 올해 1, 2월에는 왼쪽 눈이 거의 실명하다시피 하였다.” (세종실록 23년 4월 9일)

 

“눈동자가 뿌옇게 흐려지고 막으로 덮였는데......지금에 이르러서는 더욱 눈이 보이지 않으니, 이것은 내가 죽을 때까지 고칠 수 없는 병이다.” (세종실록 25년 8월 29일)

 

바로 앞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하고, 한쪽 눈은 실명에 가깝다고 말하는 그는 누구일까요? 바로 조선의 제4대 임금인 세종입니다. 나이 마흔 무렵부터 겪은 저시력 증상이 점점 심각해진 중도 시각장애인인데요.

세종은 이러한 가운데에도 세계사·과학사·문명사적으로 인정받는 선진 문물의 발명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해시계 겸 별시계인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제작(세종 19년), 하천 수위의 측정기인 수표水標 제작(세종 23년), 달력 및 해설서인 『칠정산七政算』 편찬(세종 24년), 훈민정음 창제(세종 25년), 천문학서 『제가역상집諸家曆象集』 편찬(세종 27년), 의학사전 『의방유취醫方類聚』 편찬(세종 27년), 무기 제조·사용 설명서인 『총통등록銃筒謄錄』 편찬(세종 30년) 등의 업무를 지휘합니다.

 

“눈병이 더욱 심해지고, 이로 인해 여러 병세가 번갈아 괴롭히므로 정치에 부지런할 수가 없다.” (세종실록 24년 6월 16일)

 

치료 효과가 있다는 초수리(현재의 청주 초정리)의 약수를 마시고 온천욕도 하지만 증상은 조금 호전되는 것 같다가도 그때뿐이었습니다. 병증은 그를 신체적으로 또 정신적으로 괴롭힙니다. 아무리 성군聖君이라 평가받는 세종이지만, 안질환과 그 합병증으로 인한 능률의 저하는 어쩔 수 없다고 토로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능이나 무가치를 의미하는 바는 아닙니다.

 

관습도감사慣習都監使(음악을 다루는 관청의 관리) 박연이 글을 올렸다. “옛날의 제왕은 모두 맹인으로 악사樂師를 삼아서, 거문고를 타며 시를 읊는 직무를 맡겼습니다. 그들은 보지 못해도 소리를 잘 들으며, 또한 세상에 버릴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세종실록 13년 12월 25일)

 

위와 같이, 장애가 있건 없건 모든 인간은 각자의 존재이유를 지닌다는 인식이 전통시대에도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에서도 장애인에 대한 복지 정책이 있었습니다. 독질인篤疾人·잔질인殘疾人·폐질인廢疾人 등과 같은 중증 장애인은 조세와 병역을 면제하고, 국가에서 식량을 지급해주기도 했습니다. 시정侍丁이라 하여, 장애·불치병으로 경제력을 상실한 부모의 부양을 위해 아들에게 군역을 면제시켜주는 제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장애인을 시혜의 대상으로 여긴 것은 아닙니다. 조선이 지금보다 직업군의 수가 적은 시대였으므로 제약적이기는 하나 장애인 고용 정책은 실시되었습니다. 우선, 국가 차원의 기우제나 민간인의 질병치료 등을 위해 시각장애인이 경전을 읽어주는 맹인독경盲人讀經이라는 직업군이 있었습니다. 정부에서는 이들이 모이는 명통사明通寺를 관리하였고요. 음악을 다루는 관청인 관습도감慣習都監에 소속되어 궁중에서 음악을 연주하는 관현맹管絃盲, 천문을 관장하는 관청인 서운관書雲觀의 소속으로 점술을 다루는 과명맹課命盲 등은 시각장애인을 위해 국가에서 마련한 관직입니다. 세종시대에 시각장애인 점술사 지화池和와 이신李信 등은 궁중의 음식을 담당하는 관청인 사옹원司饔院에서 일을 하였고요. 허조許稠는 태종 및 세종을 보좌한 인물로, 좌의정이라는 고위직 관리까지 역임했는데, 어깨와 등이 굽어 ‘송골매 재상[瘦鷹宰相]’으로 불린 척추장애인입니다.

(1930 년 ,  독경하는 맹인 ,  출처  :  서울역사박물관 아카이브 )

2019년에 발표된 한국장애인고용공단 고용개발원의 2018년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장애인구는 2,585,876명으로 전체 인구의 5.0%를 차지하는데, 장애인구는 점차 증가세를 보입니다. 장애인구의 연령대를 보면, 15-64세 이상은 51.3%, 65세 이상이 46.7%로, 장애인의 대부분이 중도장애를 입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경향신문의 보도(2020.04.19)에 따르면, 중앙부처의 장애인 고용률은 2018년 현재 3.43%밖에 되지 않습니다. 연합뉴스의 보도(2020.04.19)를 보더라도, 2019년 기준으로 대기업의 장애인 고용률이 2.5%로, 중소기업보다 오히려 낮습니다.

 

장애인이 안정적으로 근무할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하는 것이 정부와 기업의 역할 아닐까요? 그리고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서로를 가까이에서 직접 볼 수 있어야 공감력 높은 사회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취지로, 장애 학생과 비장애 학생이 한데 어우러져 공부하는 통합 학급을 일부 운영하고 있지만, 이제 걸음마 단계입니다. 게다가 코로나19 정국에 장애인은 채용과 교육에서 비장애인보다 더욱 소외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2018년 기준 장애인의 연령대 비율. 출처 : 한국장애인고용공단 고용개발원)

올해 4월 20일은 마흔 번째 장애인의 날이었습니다. 우리 사회가 ‘포용국가’로 나아가려면, 장애인을 돌봄이나 시혜의 대상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갈 존재로 바라보아야 함을 종종 주장합니다만, 실제 인식이 어느 수준까지 와 있는지 저 스스로부터 돌아보게 됩니다. 앞서 한국장애인고용공단 고용개발원의 통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장애인구의 대다수가 중도장애인입니다. 이는 바로 나도 장애인이 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장애인과 함께하는 일은 곧 나를 위한 길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담화를 통해 ‘장애인이 걷기 편한 길은 비장애인도 편하게 걸을 수 있다’고, 그래서 장애인과 비장애인은 ‘서로에게 소중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훈민정음 창제에 몰두했던 세종은 시각 장애를 겪으며, 한자 ‘까막눈’ 백성들의 처지에 깊이 공감했으리라 추측해봅니다. 글을 앞에 두고도 읽지 못하는 괴로움을 함께 겪은 백성들과 세종은 ‘서로에게 소중한 사람’이 되었고, 이로 인해 600년 후의 우리도 한글의 시혜를 입고 있습니다. 선조들처럼 우리도 장애와 비장애의 공감을 통해 미래 가치를 만들어갈 수 있길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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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대 국회의원선거를 맞아, 세종이야기꾼 오채원이 작성한 '600년 전 실시된 국민투표를 아시나요?'는 세종시대의 국민투표를 다루었으며, 오마이뉴스에 4.15총선 특집기사로 게재됐습니다. http://omn.kr/1nbf8)

 

미국의 제16대 대통령인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이 말했다지요? ‘투표는 총알보다 강하다The ballot is stronger than the bullet’고. ‘한 표’에 담긴 민의가 세상을 역동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투표는 국가의 주인으로서 권리를 행사하는 수단이기에, 정책·법률의 입안 과정 및 결과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투표는 현대 민주주의에서의 주요 의사결정 방법입니다. 그런데 이 투표가 왕정 국가인 조선에서도 실시됐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600년 전인 1430년(세종 12년) 3월 5일, 현재의 기획재정부에 해당하는 호조戶曹에서 보고가 올라옵니다. ‘손실답험법損失踏驗法’을 폐기하고, ‘공법貢法’이라는 새로운 세법을 도입하자는 내용입니다. 기존의 손실답험법은 파견된 답험관이 그해의 농사 작황을 현지에서 육안으로 보고 등급을 매기는 ‘답험법’, 그리고 그 등급에 따라 세금을 감면해주는 ‘손실법’이 결합된 세법입니다. 답험관의 도덕성이나 능력에 따라 세금이 들쑥날쑥 책정되고, 또 답험관의 체류 비용을 지자체에서 부담하는 등 폐단이 지적되어 왔습니다. 따라서 앞으로는 공법에 의거해 일괄적으로 “전답田畓 1결結(비옥 정도에 따른 토지 면적 단위, 1결≒1㏊)마다 조세로 10말(1말≒18ℓ)을 거두게 하되, (척박한) 평안도와 함경도는 1결에 7말을 거두게 하여” 피폐한 백성들의 삶에 숨구멍을 내주자는 제안입니다. 이에 대해 세종은 다음과 같이 명을 내립니다.

 

“의정부(최고 행정기관) 및 육조六曹(행정 실무를 담당하는 여섯 관청), 서울에 있는 모든 관아, 서울 안의 모든 퇴직 관리, 전국의 감사·수령·관리로부터 시골에 사는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두 (공법 도입에 대한) 찬반을 물어서 보고하라.” (세종실록 12년 3월 5일)

 

위와 같이, 담당자가 직접 집집마다 방문하여 공법 도입에 대해 찬성인지 반대인지 의견을 수렴해오도록 명합니다. 전국민을 대상으로 한 이 찬반 투표에서 주목할 점은 투표의 주체 및 방식입니다. 지배계급·식자층인 전·현직 관리뿐 아니라, 지방에 사는 백성들에게까지 넓힌, 그리고 어찌 보면 직접·참여·숙의 민주주의에 가까운 방식이라는 점이 눈에 띕니다. 전국민을 대상으로 한 우리나라 최초의 투표는 이렇게 실시됩니다.

 

5개월 후인 8월 10일, 전국에서 투표 결과가 보고됩니다. 약 17만 가구를 대상으로 찬반을 취합한 결과, 찬성 95636명에 반대 73451명, 즉 약 10:7의 비율로 공법 도입에 대한 찬성이 우세했습니다. 다수결의 원칙에 의해 법제 개혁의 정당성을 확보한 것입니다.

 

그런데 세종의 다음 행보가 또 흥미롭습니다. 반대표를 행사한 좌의정(의정부의 두 번째 고위직) 황희 등의 의견에 따르라는 결정을 내린 것입니다. 이에 따라, 공법을 도입하기보다 기존 손실답험법의 보완, 곧 답험관의 선발·평가·관리하는 방침을 손봅니다(손실답험법의 폐단이 지속적으로 지적되어, 추후에 공법 도입을 재시도합니다). 이처럼 세종은 법제의 개혁에 임하여, 대단위 의견수렴 과정을 거치며, 추후 발생할 수 있는 문제를 미리 포착하고자 합니다. 또한 그 과정을 숙의의 기회로 삼아, 배제된 의견에도 주목해 법제의 완결성을 높입니다.

 

4개월 후인 12월, 보완된 손실답험법에 의거한 과세표준이 국가보다 백성에게 유리하다며, 예조禮曹(현재의 외교부·교육부·문화체육관광부·보건복지부) 판서(지금의 장관)인 신상申商이 이의를 제기합니다. 이에 대해 세종은 다음과 같이 답합니다.

 

“답험이 백성에게 유리하게 된 것은 잘못이 아니다. 백성이 만족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세종실록 12년 12월 18일)

 

투표의 결과가 나오기 전에, 세종은 “백성들이 불가하다고 한다면 그것(공법)을 실행할 수 없다.”(세종실록 12년 7월 5일) 고 말한 바 있습니다. 법제 도입 및 실행의 제1 원칙은 ‘국가가 아닌 백성들에게 이로울 것’이므로, 백성들에게 의견을 물은 것이지요. 결국 왕정국가의 최고통수권자이지만 세종은 백성을 통치의 대상으로 한정짓지 않고, 국정 운영의 참여자로 여긴 셈입니다.

 

제21대 총선의 투표 독려 이미지. 출처 : 중앙선거관리위원회 홈페이지 www.nec.go.kr

전세계가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인해 행정이 마비되다시피 하고, 일부 국가들은 선거가 연기된 가운데, 우리나라만 예정대로 총선을 치르게 됐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나라가 민주주의의 변방이 아닌, 새로운 모범 혹은 표준으로 각광받고 있습니다. 그 원동력은 세계보건기구(WHO) 등으로부터 ‘방역의 교과서를 쓰고 있다’고 평가받는 국가의 행정력에도 있지만, 또한 국가의 방침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시민들의 주체성에도 있습니다.

 

이 점을 유념하여, 투표로 선출될 21대 국회의원들은 국민을 통치의 대상이 아니라, 국정 운영의 파트너로 받아들여주시길 바랍니다. ‘국가가 아닌 백성에게 이로울 것’이라는 방향을 설정했던 600년 전 세종의 정치철학을 새겨주시길 바랍니다. 국민은 단지 ‘한 표’에 그치는 존재가 아니니까요.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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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방관의 국가공무원 전환을 맞아, 세종이야기꾼 오채원이 작성한 '조선시대에도 소방관이 있었을까?'는 세종시대의 소방청 및 소방관의 이야기를 다루었으며, 오마이뉴스 메인 기사로 채택되었습니다. https://bit.ly/3aYCw7C)

 

지금으로부터 약 600년 전인 세종 8년 2월 12일, 한성부漢城府(지금의 육군수도방위사령부)에서 보고가 올라옵니다. 한양에서 방화 사건이 하룻밤에도 두세 건 일어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로부터 3일 후 한양에서 큰 불이 납니다. 현재의 공정거래위원회와 유사한 경시서京市署(지금의 탑골공원 부근)와 북쪽의 행랑(상가와 유사)들, 중부·남부·동부의 민가들을 합해 총 이천 채 이상의 건물이 연소되고, 사망자는 서른 두 명이나 됩니다. 여기에 신상을 확인할 수 없는 이는 포함되지 않았다고 하니, 인명 피해 또한 컸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위급한 때 국가의 최고통수권자인 세종은 하필 강원도로 군사훈련인 강무講武를 떠나 한양에 없습니다. 이에 중전인 소헌왕후는 세종을 따라 나서지 않은 신하들을 소집하여 불끄기를 진두지휘합니다. 이날 점심 때 일어난 불은 저녁에 진화가 되었고, 다행히 나라의 뿌리를 상징하는 종묘가 연소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18세기 말에 제작된 한양 지도 《도성도都城圖》에 방화 지역 표기.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www.heritage.go.kr

다음 날 세종은 화재에 대한 보고를 받고, 강원도에서 서울로 돌아갈 채비를 합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또 큰 불이 일어납니다. 지금의 구치소에 해당하는 전옥서典獄署와 행랑 여덟 간, 종루鍾樓(현재의 보신각) 동쪽의 민가 이백여 호가 연소됩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당시 한양 내 민가가 17,015호였는데, 이를 기준으로 본다면 이틀간 민가의 약 14%가 연소된 셈입니다. 피해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화재로 인한 도둑이 기승을 부렸는데, 불이 번지지 않은 집에서도 황급히 피난하다가 재산을 전부 망실했습니다.

 

서울은 극도로 혼란한 상황이었겠지요. 이에 세종은 화재를 입은 백성들에 대한 식량・치료・장례 등의 지원, 그리고 집 복구를 위한 재목을 마련할 방도를 지시합니다. 이처럼 긴급 구제책을 실시하는 한편, 다음과 같이 나중을 위한 체계와 기반시설을 구축합니다.

 

임금이 다음과 같이 명령을 내렸다. “서울의 행랑에 방화벽을 쌓고, 도성 안의 도로를 넓혀 사방으로 통하게 만들라. 궁궐 담장이나 돈·곡식이 있는 관청들과 가까이 붙어 있는 가옥을 잘 헤아려 알맞게 철거하라. 행랑은 10간(1간≒1.8m) 마다 개인 집은 5간 마다 우물을 하나씩 파고, 관청들 안에는 우물을 두 개씩 파서, 물을 저장해 두라. 종묘 및 대궐의 안과 종루의 문에는 소방 기구를 만들어 비치해서, 화재가 발생하면 바로 달려 나가 끄게 하라. 군인과 노비가 있는 관청들에도 불을 끄는 여러 장비를 갖추었다가, 화재 소식을 들으면 각각의 소속인들을 동원해 가서 끄게 하라.” (세종실록 8년 2월 20일)

 

위와 같이, 불이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건물에 방화벽을 쌓고, 우물을 파서 소방용수를 확보하며, 소방 기구를 비치합니다. 또한 도로를 확장해 소방도로를 확보합니다. “병오년(세종 8년) 화재가 난 뒤로......민가에 도로를 개통한 까닭으로 이 실화失火에 사망한 자가 없다”는 세종 13년의 자체 평가에서 드러나듯이, 이 방침은 효용성이 드러납니다.

또한 불탄 가옥의 보수를 위해, 특별히 가마를 설치해 싼 값에 기와를 보급합니다. 당시 기와가 고가였기 때문에 서민들은 대개 띠·짚·억새 등으로 지붕을 얹었고, 이는 도시 미화뿐 아니라 화재 방비에 취약한 터였습니다. 이처럼 앞으로 또 발생할지 모를 화재에 대비하기 위한 종합대책을 마련했습니다.

 

가장 획기적인 정책은 지금의 소방청과 같은 소방 전담 기구 ‘금화도감禁火都監’을 신설하고, 24명으로 조직을 구성한 일입니다. 아울러 금화군禁火軍(현재의 소방관)이 통금시간에도 출동할 수 있도록 신분증을 제공하는 등 상설기관으로서 소방의 기능을 수행하도록 합니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그 5년 뒤인 세종 13년, 금화군에 대한 정책을 보강합니다. 급수를 지원해줄 인원과 소방장비 지급에 대한 세부 사항, 그리고 소방에 공로가 있는 자의 포상책 등을 국가 차원에서 마련합니다. 그러나 인력이 타 부처의 일을 겸직하는 한계가 있었지요. 조직원 중 8명을 금화도감의 일을 전담시키는 등 인사직제를 개편합니다. 제도도 중요하지만 결국 일은 사람에게 달렸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화재의 원인인) 음양이 조화를 잃은 것은 내가 부덕不德한 탓이로다. 내가 비록 변변치 못하나, 대신들이 도와준다면 천재지변도 없어질 수 있다.” (세종실록 8년 2월 28일)

 

전통시대에는 위정자가 마음을 다하지 않으면, 하늘이 천재지변을 통해 성찰의 기회를 준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세종은 당시에 통용되던 이러한 사고도 부정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사람이 온 마음을 다해 사태를 해결하려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진실로 사람이 제 할 일을 다한다면[人事旣盡], 천운이 따르지 않더라도 재해를 막을 수 있다.” (세종실록 26년 윤7월 25일)

 

2019년 강원도에서 일어난 대형 화재의 진압을 위해 전국에서 출동한 소방차의 행렬. 출처 : 연합뉴스 https://bit.ly/3bPlGIA

대통령 공약사항 중 하나였던 소방청 독립이 지난 2017년에 이루어졌습니다. 세월호 참사를 겪으며, 지난 박근혜 정부는 소방방재청을 해체하고, 신설한 국민안전처에 소방 사무를 흡수시킨 바 있는데요. 문재인 정부에서 국민안전처를 폐지하며, 행정안전부 소속으로 소방청을 신설한 것입니다. 소방 조직이 독립 기구로 개편된 것은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이라고 합니다.

 

이어서 올해 4월 1일, 국가직과 지방직으로 나뉘었던 소방 공무원을 국가직으로 일원화했습니다. 최근까지 대부분의 소방관이 지방공무원의 신분이었기에, 지방자치단체의 부족한 예산으로 인한 고충이 컸습니다.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며, 목장갑을 끼고 화재현장에 나선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들리기도 했지요. 그런 가운데에도 소방 공무원들은 인명을 구하기 위해 애써왔습니다. ‘사람이 제 할 일을 다하기人事旣盡’ 위한 환경을 국가는 조성해주어야 합니다. 기구가 소방청으로 격상된 데 이어, 소방 공무원이 국가직으로 전환된 만큼, 국가가 소방관의 안전과 자존감을 지켜주기를 기대합니다. 소방관은 국민을 보호하는 국민이니까요.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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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기념일이 아니지만 많은 이들이 기다리는 날이 있습니다. 발렌타인데이와 화이트데이가 여기에 속할 텐데요. 로마의 ‘발렌티노 성인St. Vanentine 축일’을 일본의 한 제과회사가 왜곡시켰다는 지적이 있지만, 그래도 우리들은 초콜릿이나 사탕 등을 이성에게 선물하며, 이 두 날을 사랑 표현의 기회로 삼습니다.

옛 사람들은 어떻게 이성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했을까요? 약 삼천년 전의 사람들이 남긴, 동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시집 『시경詩經』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投我以木瓜, (그녀가) 나에게 모과를 던져 주기에,

報之以瓊琚. 나는 아름다운 옥 노리개를 드렸습니다.

匪報也, 그것은 보답이 아니라,

永以爲好也. 오랫동안 좋은 사이가 되고 싶어서이지요.

 

投我以木桃, 나에게 복숭아를 던져 주기에,

報之以瓊瑤. 나는 아름다운 옥을 드렸습니다.

匪報也, 그것은 보답이 아니라,

永以爲好也. 오랫동안 좋은 사이가 되고 싶어서이지요.

 

投我以木李, 나에게 오얏(자두)을 던져 주기에,

報之以瓊玖. 나는 아름다운 패옥을 드렸습니다.

匪報也, 그것은 보답이 아니라,

永以爲好也. 오랫동안 좋은 사이가 되고 싶어서이지요.

 

(『시경詩經』 「모과木瓜」)

 

(영친왕비 패옥. 출처 : 국립고궁박물관 홈페이지 www.gogung.go.kr)

옛날 중국에서는 여성이 마음에 드는 남성에게 과일을 던지는 풍습이 있었다고 합니다. 서진西晉 시대의 문인이자 중국 ‘초절정 미남’의 대명사로 꼽히는 반악潘嶽이 나타나면, 온 동네 처녀들이 몰려와서 어찌나 많은 과일을 던졌던지 수레(지금의 자가용)가 가득 찼다고 하는데요. 이 이야기는 ‘반랑(반악)에게 과일을 던지다’라는 ‘척과반랑擲果潘郎’, ‘과일을 던져서 수레가 가득하다’는 ‘척과영거擲果盈車’ 등의 고사성어를 남겼습니다.

 

선물을 받으면 이에 대한 응답이 있어야 되겠지요? 위의 『시경』 구절을 보면, 과일을 받은 남성이 허리에 차고 있던 옥을 여성에게 선사합니다. 옛 사람들은 허리띠에 옥을 달고 다녔는데, 이를 패옥佩玉이라 합니다. 과일을 준 상대에게 옥을 선물하는 행위, 마치 여성이 발렌타인데이에 초콜릿을 선물하면, 남성이 화이트데이에 명품백으로 응하는 것과 비슷할까요?

 

『시경』 속 남성은 자신의 행위가 기계적 ‘기브 앤 테이크’가 아니라, 오랫동안 인연을 다져가기 위한 정표情表라고 말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대하겠다는 대인배의 마음이 엿보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 과일을 던졌을까요? 고대로부터 여성을 꽃에, 남성을 벌 혹은 나비에 비유하는데, 그들의 조합으로 열매가 열리지요. 결국 ‘배필이 되어 당신과 사랑의 결실을 맺고 싶어요’ 라는 고백으로 보입니다. 혹시나 이 글을 읽고 마음에 드는 이성에게 과일을 던지실 분이 계시다면, 맞아도 안 아픈 과일로 잘 고르셔야겠습니다.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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