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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채원연구소공감]대표 :: 세종이야기꾼 :: 실록연구자 :: 소통 디자이너 :: 010-8014-7726 :: chewonoh@gmail.com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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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실록공감-나와 세종을 실록實錄하다]의 출정식 겸 공개강연이 있었습니다.

제가 옛날옛적 실록을 처음 접하며 겪었던 어려움을 고백하고, 앞으로 우리가 더불어 나아가길 기대하는 목표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함께 자리한 분들께 짐을 마구마구 지워드렸더랬지요.


'나, 이대 나온 여자야'가 회자되었던 이유는 아마도, 과거 소외되었던 여성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했던 이화여자대학교의 문제의식과 배치되는 태도가 그 말에 담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는 이번 기회를 통해, 단순히 실록과 세종을 학습하는 지적 만족 혹은 도구적 이용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삶에 의미 있는 점 하나를 찍고 싶습니다. 
 지식의 소비자에 그치지 않고, 내 생각을 만들어나가는 시간이 되길 기대합니다.


'논문도 써야 하고 여력이 없는데...' 라는 저를 채찍질해서 마당을 펼쳐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이산화탄소 농도 짙은 공간 안에서 벌건 얼굴로 늦은 시간까지 임해주신 모든 분들께도 감사합니다.
다음주부터는 본격적으로 세종을 만나러 갑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어제보다 조금은 '친절한 채원씨'가 될 지 모릅니다ㅎ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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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개강의 이후, 본격적인 첫 시간이었던 지난주는 태종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였다.
'聖君성군 세종' 신화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태종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일그러진 진주(Baroque)' 태종, 그리고 '극복인(Übermensch)' 세종은 아픔[痛]을 공유한 父子부자이자 동지였다.
장석주 시인의 <대추 한 알>처럼, 그들 안에는 "태풍 몇 개", "천둥 몇 개", "벼락 몇 개"가 들어 있었다.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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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을 함께 읽고 쓰고 말하고 실천하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실록에서 세종이 제안한 교육 방법과 왕세자 교육인 서연을 현대적으로 해석하여 진행합니다.
세종 재위 기간 33년+프리퀄=전체 34주의 오디세이아Odysseia입니다.
그 긴 여정에서 선발대(?) 1기 14주(이후 2기 10주, 3기 10주) 과정이 내일 4/4(화)에 시작됩니다.

당초 공간의 정원이 15명이니, 학우 분들과 여유 있게 지내고자 10-12명만 지원해주시길 바랬습니다.
그런데 몇시간만에 열다섯 분 이상이 지원해주셔서 당황했더랬지요.
덕분에 저를 포함한 스탭은 강의실 밖에 서 있거나, 혹은 '스탠딩 파티'가 될 지도 모른답니다.
이러한 사정이니, 학우 분들은 마음의 각오를 단디하고 오시길 부탁드립니다^^;;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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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다름'을 더불어 공감하고 [共 with]

세종과 더불어 행복을 누립니다 [享 co-happiness]



올해로 강의한지 만 15년 차에 들어갑니다.

일주일에 칠일을 강의장에서 보내던 때도 있었고, 학업 혹은 개인 사정으로 인해 야인처럼 지내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지나고 보니 모두 힘들기도 행복하기도 한 시간이었습니다. 



사회생활 속에서 남과의 소통이 어려워 절실히 스피치를 배웠고, 우연히 강의와 방송에 입문하였고, 제 분야의 전문가가 되고자 커뮤니케이션을 전공하였고, 한국형 소통법을 찾다가 세종을 만났고, 세종과 한국인의 언행 속에 자리잡은 사상을 알고 싶어 동양철학 박사 과정을 수료하였습니다.

이처럼 일과 공부는 제 삶 속에서 만난 질문을 해결해나가는 과정이었습니다.

그 체험에 근거하여, 교육생과 보다 공감하는 만남을 이어가고 싶습니다.


* 자세한 프로필은 아래에 첨부합니다.


프로필_오채원_2017.pdf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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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우리나라에는 두 가지의 극단적인 세종이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초인적으로 자신을 절제하고 오직 백성만을 위해 존재한 '성군聖君 세종대왕님' 혹은, 고기 편식쟁이에 신하들을 과로사시키는 '욕심쟁이 세종'.
저는 이 둘 외에 '인간 이도'의 이야기를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세종의 인간으로서의 고뇌, 말과 행동 속에 담겨 있는 생각을 잘 드러내주는 실록 속 이야기를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세종이야기꾼'이라고 저를 소개한답니다.


공연 시작 시간은 9/10(토) 낮 2시.
현장에 1시간 정도 전에 도착하여, 부지런히 관객들 모실 준비를 합니다.

 

와! 존경하는 정윤재 교수님께서 가족분들과 함께 풍류방에 놀러 오셨습니다.
세종을 비롯한 우리의 정신 문화를 어떻게 연구하고 전해야 할 지에 대해 이런저런 말씀을 나누었지요.
정교수님을 뵐 때마다, 저도 교수님처럼 깨어있는 눈빛과 생각, 그리고 따뜻한 마음을 붙잡겠다는 다짐을 합니다.


어느덧 시작 시간은 다 되어 가고, 저는 무대 뒤에서 마지막 연습을 합니다.
시작이 매끄러워야 그 흐름을 타고 마지막까지 이야기가 잘 풀리거든요. 


2시가 되자, 가야금에 정초롱, 대금에 이주언, 두 아리따운 연주자들이 공연의 문을 엽니다.

저는 저 병풍 뒤에서 여전히 입을 풀고 있고요ㅎㅎ


연주를 마친 후 병풍 뒤로 두 연주자가 들어가면, 이제는 제가 관객들 앞에 나섭니다.
올해는 '세종의 가족 이야기', 즉 아버지 태종, 어머니 원경왕후, 부인 소헌왕후, 그리고 자녀들에 대한 이야기를 준비했습니다.
'일 중독자'로 알려져 있는 세종은 과연 환영 받는 가족 구성원이었을까 질문을 던져봅니다. 


아직은 낮 더위가 맹렬하지만, 한옥 안에 있으려니 땀이 스르륵 들어갑니다.
게다가 마이크와 스피커를 거치지 않은 살아 있는 연주를 즐기자니 그야말로 신선놀음.

일을 핑계삼아 저도 관객들과 더불어 이 시간을 즐깁니다. 


제가 이야기를 한 토막 들려드리고, 이어서 연주자들이 국악을 한 자락 들려주고, 이것을 반복합니다.

공연은 당초 1시간으로 계획되어 있었는데요, 관객분들의 호응에 저희도 신이 나서 시간이 쪼꼼 길어졌습니다^^;;


앵콜곡까지 신나게 마치고, 한숨 돌립니다.

작년 봄부터 세종이 누워 계신 영릉에서 이 [세종이야기 풍류방]을 이어오고 있는데요.

다음 시즌에는 또 어떤 이야기를 전해드리면 좋을까 벌써부터 고민이 시작됐습니다.

열심히 실록 공부하여 내년에 더 풍성한 이야기로 찾아뵙겠습니다!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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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하는 최초의 '한글 의궤'로 평가 받는 정리의궤(整理儀軌)에 대한 기사를 접했다(http://goo.gl/ceinxJ). 실록에는 정리의궤와 관련하여 어떠한 기사가 있을까 궁금하여 찾아보았다.

(경인일보 2016-07-15) 


영의정·예조 판서·장용위 제조·정리소(整理所) 의궤 당상(儀軌堂上)을 소견(召見)하였다. 상[정조]이 이르기를, "자궁[모친 혜경궁 홍씨]께서 회갑을 맞는 탄신일이 머지 않으니 아랫사람의 심정으로서는 마냥 기뻐 축하드리고 싶을 뿐이다. 그런데 연회나 진하하는 의식에 대해서는 자궁께서 옛날 일을 슬퍼하시어 한결같이 굳게 거절하고 계시니 규례처럼 하기에 어려운 점이 있다. 따라서 아랫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매우 섭섭하기는 하지만, 만약 진하나 연회와 같은 이름은 붙이지 않고 실제로 축하드리고 잔치를 베푸는 일을 행한다면, 내가 어버이의 뜻을 따르는 도리에 있어서나 경사를 축하하는 방도에 있어 어찌 양쪽 다 온당하게 되지 않겠는가.마땅히 18일에 치사(致辭)를 직접 올릴 것이며 표리(表裏)와 전문(箋文)도 직접 올리겠다. 그리고 음식 차리는 일도 그날 행할텐데, 찬품(饌品)에 대해서는 일찍이 현륭원(顯隆園)에 행차했을 때 정리소(整理所)에서 차려 올렸던 예가 있으니, 이번에도 본영(本營)에서 거행하되 제조(提調)가 잘 살피도록 하라. 자궁의 내·외 친족으로서 이번에 반열에 참여시킬 대상자는 동성(同姓) 10촌(寸)과 이성(異姓) 6촌으로 제한하라. 그러나 홍희영(洪喜榮) 부자는 모당(慕堂)을 받들어 제사올리는 사람인만큼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점이 있으니 그들도 자리에 참여토록 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정조 19년 6월 7일)



정리주자(整理鑄字)가 완성되었다. 전교하기를, "우리 나라에서 활자로 책을 인쇄하는 법은 국초(國初)부터 시작하여 태종조(太宗朝) 계미년에 경연에 소장하고 있던 고주본(古註本) 《시(詩)》·《서(書)》·《좌전(左傳)》의 글자를 대본으로 하여 이직(李稷) 등에게 명해서 10만 자를 주조하게 하였으니, 이것을 계미자(癸未字)라고 한다. 세종조(世宗朝) 경자년에는 이천(李蕆) 등에게 명하여 이를 고쳐 주조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경자자(庚子字)이고, 갑인년에는 경자자가 섬밀(纖密)하다는 이유로 경연에 소장하고 있던 《효순사실(孝順事實)》·《위선음즐(爲善陰隲)》 등의 책을 내다가 이를 자본(字本)으로 삼아김돈(金墩) 등에게 명하여 20여 만 자를 주조하였으니, 이것이 갑인자(甲寅字)인데 이를 사용한 지 3백 년이 되었다. 내가 임진년에 동궁에 있으면서 대조(大朝)에 앙청하여 대내에 있던 갑인자로 인쇄한 《심경(心經)》 《만병회춘(萬病回春)》 두 책을 내다가 이를 자본으로 삼아 5만 자를 주조하여 보관하였으니, 이것이 임진자이다. 내가 즉위한 원년인 정유년에는 관서백(關西伯)에게 명하여 본조 사람 한구(韓構)의 글씨를 자본으로 삼아 8만여 자를 주조하게 하여 역시 내각(內閣)에 보관하였다. 대체로 전후로 주조한 활자의 동체(銅體)가 일정하지 않아서 인쇄하려면 젖은 종이를 써서 고르게 붙이고 한 판을 찍을 때마다 별도로 몇 사람을 세워서 주묵(朱墨)으로 활판의 형세에 따라 교정을 하게 하는데도 오히려 비뚤어지는 염려가 있었으며 걸핏하면 시일이 걸리곤 하였다. 그래서 인쇄를 감독하는 여러 신하들이 누차 이를 말하였었다. 임자년에 명하여 중국의 사고전서(四庫全書) 취진판식(聚珍板式)을 모방하여 자전(字典)의 자본을 취해서 황양목(黃楊木)을 사용하여 크고 작은 글자 32만여 자를 새기어 ‘생생자(生生字)’라고 이름하였다. 을묘년에는 《정리의궤(整理儀軌)》  《원행정례(園幸定例)》 등의 책을 장차 편찬·인행하려는 계획 아래 명하여 생생자를 자본을 삼아서 구리로 활자를 주조하게 하여 크고 작은 것이 모두 30여 만 자였는데 이를 ‘정리자(整理字)’라 이름하여 규영(奎瀛) 신부(新府)에 보관하였다." 하였다. (정조 20년 3월 17일)

(경인일보 2016-07-15) 


전교하기를, "우리 나라의 경적(經籍) 인쇄는, 국초에 고려의 옛 제도를 따라서 교서관(校書館)을 두어 관장하게 하였었는데, 고려에서는 이를 비서성(秘書省)이라고 하였고, 궁예(弓裔) 때에는 금서성(禁書省)이라고 하였으니, 최초에는 궁중에 설치하였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태종(太宗)3년에 별도로 주자소(鑄字所)를 궁중에다 설치하고 고주본(古註本) 《시경》·《서경》·《좌전》을 본으로 구리로 활자를 만들어 전적(典籍)을 널리 인쇄하였으니, 이것이 또한 처음으로 글자를 주조한 유래이다. 세종조(世宗朝)에는 경자자(庚子字)·갑인자(甲寅字)가 있었고, 문종조(文宗朝)에는 임신자(壬申字)가 있었고, 세조조(世祖朝)에는 을해자(乙亥字)·을유자(乙酉字)가 있었고, 성종조(成宗朝)에는 신묘자(辛卯字)·계유자(癸酉字)가 있었다.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치평요람(治平要覽)》·《주자대전(朱子大全)》 등 책은 다 궁중에서 인쇄한 것이니, 비부본(秘府本)이라고 불리워지는 본국 초기의 판본들이 다 정밀하고 보기에 편리한 것은 까닭이 있다. 내가 동궁으로 있던 때에 교서관에 명하여 세종조 갑인자를 본으로 하여 15만 자를 주조하게 하였으니, 바로 《경서정문(經書正文)》의 인본이다. 즉위하던 해인 정유년에 관서 관찰사에게 명하여 다시 갑인자를 본으로 삼아 15만 자를 더 주조하게 하여 내각에 보관하게 하였으니, 바로 《팔자백선(八子百選)》 및 새로 인쇄한 《경서대전(經書大全)》의 인본이다. 갑인년에 직접주자(朱子)의 편지 백 편을 골라 내각에 소장되어 있는 주자(鑄字)를 가지고 인쇄하여 배포하고자 하여 창경궁에 있는 옛 홍문관을 수리하여 주자를 옮겨놓으라고 명하였었다. 을묘년 봄에 자전을 모시고 수연(壽筵)에서 돌아온 후 《정리의궤(整理儀軌)를 편찬하려고 인역(印役)을 설치하여 동으로 30만 자를 주조하였는데, 이것을 정리자(整理字)라고 한다. 먼저 《지희갱재축(志喜賡載軸)》과 전후의 갱재시(賡載詩)를 인쇄하고, 또 《어정규장전운(御定奎章全韻)》을 내려보내어 인쇄한 후 그 판각을 보관하게 하였다. 올해는 또 정유자로 《어정사기영선(御定史記英選)》을 인쇄하여 배포하였다. 어정서(御定書)의 간인(刊印)이나 활인(活印)이 있을 때마다 반드시 여기에서 했던 것은 국초부터 정해져 내려오던 법을 내가 계승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그 명칭은 내가 일찍이 지어 주지 않았기 때문에 각신들이 우선 감인소(監印所)라고 불러 왔다." 하고, 이때에 와서 국초에 설치하던 때의 옛날 호칭을 그대로 써서 주자소(鑄字所)라고 부를 것을 명하였다. (정조 20년 12월 15일)



우의정 이시수를 정리의궤청 총리 대신으로 삼았다. (정조 23년 6월 20일)


《정리의궤(整理儀軌)를 교정(校正)한 당상(堂上) 이하에게 시상하였다. (순조 28년 5월 16일)


전교하기를, "《진찬의궤(進饌儀軌)》의 수정은 《을묘 정리 의궤(乙卯整理儀軌)에 의거대로 하라." 하였다. (고종 15년 3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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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공공정책 2016년 7월호에 게재된 글을 소개합니다.)


심통밥통(心通-通) - 측은지심, 소통 그리고 공공성


배고픈 누구라도 살을 퍼가는 뒤주

2014년 여름, 나는 쌀통을 보러 전남 구례로 떠났다. 오로지 두어 달 전에 신문에서 본 그 쌀통 하나 때문에 떠났다.

도착한 곳은 ‘구름 속의 새처럼 숨어사는 집’이라는 뜻을 가진 ‘운조루(雲鳥樓)’로, 조선 영조 때에 낙안(樂安, 현재의 전남 순천) 군수를 지낸 류이주(柳爾胄, 1726-1797) 선생이 직접 지은 자택이다. 올해로 240년 된 이 고택은 본래 아흔아홉 칸에서 현재 육십 여 칸으로 축소되었다고는 하나, 나에게는 궁궐로 느껴질 만큼 넓었다. 집 앞에는 커다란 연못이 있고, 큰사랑채의 누마루에 오르면 지리산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하지만 이런 풍광은 당장 내 관심사가 아니었다. 내가 온 목적은 쌀통을 보는 것이었으니. 나는 집 안에 들어서자마자 눈 레이더를 가동하여 목표물을 탐색했다.

드디어 발견한 ‘타인능해(他人能解)’ 뒤주. ‘(집안 사람 외의) 다른 사람도 열 수 있다’는 뜻을 담은 한자 넉 자가 마개에 쓰인 덩치 큰 통나무 뒤주이다. 배고픈 이는 누구나 쌀을 퍼갈 수 있도록, 이 댁의 주인장은 큰 집, 그리고 큰 뒤주에 어울리는 큰 마음을 베풀었던 것이다. 덕분에 대대로 며느리들은 쌀 두 가마니 반이 들어가는 이 뒤주가 비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 숙제였다고 한다. 그리고 현재는 관람객들이 보기 쉽도록, 뒤주를 행랑채에서 안채로 통하는 길목에 놓아두었지만, 예전에는 사랑채의 헛간 안에 두어, 쌀을 퍼가는 이가 집 안 사람들과 마주치지 않도록 했다고 한다.


(뒤주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도록 옆에 선 필자. 뒤주의 정면 하단에 위치한 마개에는 세로로 ‘他人能解’라고 쓰여 있다.)


낮은 굴뚝의 의미

타인능해 뒤주 곁에서 한참 시간을 보내고 있으려니, 5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한 남성이 다가왔다. “뭐하는 분이요?” 뒤주의 나뭇결을 손으로 쓰다듬고, 뚜껑을 열어 속을 들여다보고, 이리저리 사진을 찍고, 내력이 적힌 표지를 찬찬히 읽는 내가 유난스러워 보였나보다. 설명을 붙이기 귀찮아서 학생이라고 답했다. “내가 하나 더 보여드리리다. 따라오쇼.” 잠시 당황하다가 이내, 처음 본 아저씨를 따라 집의 더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여기에서 굴뚝을 찾아보쇼” 아니, 사람을 대청 앞에 세워두고는 굴뚝을 찾으라니. 황당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니 섬돌 밑에 뚫린 벽돌 반만한 구멍을 가리킨다. “내가 문화재 수리하러 전국을 다니는 사람이라 이런 집을 잘 알지. 아가씨가 하도 열심이길래 내가 특별히 알려주는 거요.” 알고 보니, 그는 이 고택을 수리하던 중에, 학습 모드인 나를 보고는 보충 학습까지 시켜준 것이었다.


(굴뚝의 높이를 가늠하기 위해 앉은 필자)


예전부터 궁궐의 굴뚝이 낮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땔거리, 먹을거리가 없는 백성들에게 보일세라, 밥 짓는 연기가 높이 올라오지 않도록 한 것이라지. 그런데 이렇게 꽁꽁 숨어 있는 굴뚝은 처음 보았다. 불을 땔 때마다 매운 연기가 방 안으로 들어오거나 마당에 자욱해서, 집 안 사람들이 불편했겠구나 싶었다. 그나마 장점이라면 모기 등의 날벌레가 자동 퇴치된다는 정도일까?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기록을 보면, “채찍으로 호랑이를 쫓아낼”만큼 용맹했다는 운조루의 주인장 류이주 선생의 이야기가 나온다. 


총융사 홍봉한이, 영남의 무인인 류이주가 용기와 힘이 뛰어나서, 일찍이 조령[현재의 문경새재]에서 채찍으로 호랑이를 쫓아냈다고 장하게 여기며 말하였다. 그러자 임금[영조]이 류이주를 대궐로 불러, 조령에서 호랑이를 쫓아낸 상황을 말하도록 하였다. 또한 그에게 병법서를 읽도록 시키고, 등용을 명하였다. [摠戎使洪鳳漢盛言嶺南武人柳爾冑, 勇力絶人, 嘗於鳥嶺以鞭逐虎, 上命爾冑入侍, 使陳鳥嶺逐虎狀, 又使讀兵書, 仍命調用。] (영조실록 31년 2월 2일)


배곯는 이에게는 호랑이보다 더 무서웠을 배고픔을, 류이주 선생과 그 자손들은 채찍대신 따뜻한 밥으로 쫓아내려 한 것이 아닐까? 타인능해 뒤주와 낮은 굴뚝으로 대변되는, 처지가 어려운 이와 함께하는 마음 덕분에, 동학혁명·여순사건·한국전쟁 등 한국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겪으면서도 이 집은 온전했다고 한다. 남을 살리면서 나도 사는 상생의 선순환인 셈이다.


하늘과 땅, 그리고 소통

이왕 여행담을 꺼낸 김에, 하나 더 소개하고자 한다. 필자는 최근에 강원도 고성(高城) 죽왕면 오봉리에 위치한 왕곡(旺谷)마을에 다녀왔다. 대체로 200여 년 전에 지어진 기와집·초가집 60여 채에 주민들이 조상대대로 거주해오고 있는 이곳에는 한옥교회인 ‘오봉교회’가 있다. 이곳의 입구에 들어서면 나무 음각 십자가를 만날 수 있는데, 땅을 디디고 있어 사람들 가까이 낮은 곳으로 임한 예수를 형상화한 것으로 보인다. 30여 년간 이곳에서 목회를 해 오신 장석근 목사님께 이 음각 십자가의 의미에 대해 여쭈었다. “음각이라 내가 십자가가 될 수 있죠.” 우리 일행은 뚫린 십자가 모양에 자신의 몸을 대보았다. “위가 터진 것도 의미가 있어요. 하늘과 통하잖아요.”


(교회 입구에 서 있는 나무 음각 십자가)


주역(周易)의 태(泰)괘를 닮았다. 태괘는 괘상(卦象)이 건하곤상(乾下坤上), 즉 하괘(下卦)가 하늘을 의미하는 건(乾 ☰), 상괘(上卦)가 땅을 의미하는 곤(坤 ☷)으로 구성되어 있다. 땅이 위에, 하늘이 아래에 있으니 제 자리를 잃어 잘못된 것처럼 보이지만, 옛사람들은 달리 생각했던 모양이다. 본래 하늘의 기인 양기(陽氣)는 위로 올라가는, 그리고 땅의 기인 음기(陰氣)는 아래로 내려가는 성질이 있다. 하늘을 아래로 두니 위로 올라가려 하고, 땅을 위로 두니 아래로 내려가려 한다. 옛사람들은 이렇게 두 기운이 움직이며 교감하고 소통하여 조화를 이룬다고 보았다.

흔히 음과 양을 대립적인 관계로 간주한다. 그러나 이들은 서로 의존적인 상의(相依) 관계이기도 하다. 음이 없으면 양이 있을 수 없고, 또 양이 없으면 음이 있을 수 없다. 음 또는 양의 독립 개체로는 생명의 생성이 불가능하고, 반드시 양자의 감응과 변화의 과정 속에서만 가능하다. 마치 남성과 여성이 만나야 생명을 잉태할 수 있으며, 자석이 N극과 S극의 다른 극끼리 만나면 붙는 것처럼 말이다. 결국 태괘는 소통·조화·만사형통을 의미하기에 이른다.

또 하나, 괘의 모양을 보아서도 윗부분이 뚫려서, 하늘과 통한다는 의미 또한 갖는다. 이처럼 땅에 뿌리를 박은 오봉교회의 십자가는, 자신과 이질적인 하늘에게 마음을 열고 소통하는 모습을 형상화 한 것으로 보인다.

목사님과 자연, 철학, 소통 등등에 대한 담소를 나누다가 어느덧 30분 정도 시간이 흘렀고, 뒷일정을 위해 우리는 교회를 나서야 했다. “줄 건 없고......” 목사님은 교회소식지를 두 장 쥐어주셨다. 얇은 A4용지를 반 접은 소식지는 군데군데 비뚤한 손 글씨가 보이고, 옛날 야학의 ‘가리방 등사기’로 찍은 듯 볼품없었다. 집에 와서 펼쳐보니, 그 흔한 광고는 찾아볼 수 없고, 주로 생명에 대한 글만 띄엄띄엄 실려 있다. 그 중, 기독교 신자가 아닌 내게도 울림이 있는, 내 배를 채울 때마다 배곯는 이웃을 생각할 것을 요청하는 <오봉교회 밥기도>를 적어본다.


한 방울의 물에도

하늘과 땅이 어울려 있고,

한 톨의 낟알에도

온갖 숨결이 담겨 있으니

이 밥을 고마움으로 받습니다.


가난한 이웃을 그리며

많은 가운데에서도 알맞게 떠서,

천천히 꼭꼭 씹어서

공손히 먹겠습니다.


이 밥이 우리를 살리듯

우리도 세상의 밥이 되겠습니다.

우리의 밥이신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 아멘


밥에 담긴 마음

끼니 걱정하는 이가 줄었다는 요즘도 우리는 여전히 이렇게 인사한다. “아침 먹었어?”, “밥은 먹고 다니니?”,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적당히 해”. 이처럼 우리네 ‘밥’에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이 담겨 있다.

맹자(孟子)는 성선(性善)의 근거로서 “사람에게는 차마 타인의 불행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마음이 있다” 면서, 다음과 같은 예를 들었다. “지금 사람들이 갑자기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져 들어가려는 것을 본다면, 모두 깜짝 놀라며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길 것이다. 이는 그 아이의 부모와 친해 보려고 해서 그런 것도 아니고, 마을 사람이나 친구들에게 칭찬을 받기 위해서 그런 것도 아니고, 또 구해 주지 않는 데 대한 비난의 소리를 듣기 싫어서 그런 것도 아니다[今人乍見孺子將入於井,皆有怵惕惻隱之心。非所以內交於孺子之父母也,非所以要譽於鄉黨朋友也,非惡其聲而然也。]"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 

이 상황에서 어린아이가 아니라, 큰 돌이 우물을 향해 굴러가는 것을 본다고 가정해보자. 그래도 사람들이 동일한 반응을 보였을까? 사람들이 자동적으로 불쌍한 마음을 가지는 까닭은 우물에 빠지려는 것이 생명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맹자는 “측은지심이 없다면 사람이 아니다[人皆有不忍人之心。…… 無惻隱之心,非人也。]" (『맹자』 「공손추 상」) 라며 우리 모두에게는 생명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고 보았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행동력이다. 단순히 측은지심을 갖는 것을 넘어, 실천하려는 의지・용기가 중요한 것이다. 맹자는 그것을 ‘확충(擴充)’이라는 개념에 기대어 설명한다. 내게 있는 측은지심을 확충시킬 수 있다면 “온 세상을 지키기에 충분하고, 만약 그것을 확충시키지 못한다면 자기 부모를 섬기기에도 부족하다[凡有四端於我者, 知皆擴而充之矣, 若火之始然, 泉之始達. 苟能充之, 足以保四海, 苟不充之, 不足以事父母。]" (『맹자』 「공손추 상」) 고 했다. 자신의 착한 마음을 발견하고, 가까운 사람들과 소통하며 그것을 실천하고, 또 더 넓게 확장하여 세상에 가득 채우면 내 가정, 이웃, 사회, 천하가 모두 행복해 질 수 있다는 것이 맹자의 주장이다.


측은지심의 군주 세종

조선의 4대 임금인 세종(世宗, 1397-1450)은 30여 년간 측은지심을 가지고 서민의 밥을 챙겼다.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 되고, 밥은 백성의 하늘[民惟邦本, 食爲民天。]" (세종실록 1년 2월 12일)이라던 그는 재위 기간 중에 “재해와 괴이한 일이 없는 해가 없었다[災異之變, 無歲無之。]" (세종실록 7년 6월 23일) 고 한탄할 만큼 거의 매년 농사로 걱정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재위 7년 되던 해(1425년)에는 기록적인 가뭄이 들었다. 궁에서 보고만 받고 있을 수 없었던 세종은 어느 날 직접 농사 현장으로 나갔다. “이날 행차에 (호위하는 신하들 없이) 단지 당번인 경호원만 거느리고, (임금의 행차에는 꼭 대동하는) 해 가리개[繖]와 부채[扇]를 받치지 않은” 단출한 차림이었다. 돌아보다가 “벼농사가 잘 되지 못한 곳을 보면, 반드시 말을 멈추고 농부에게 상황을 물었다.” 그리고는 “점심 수라를 들지 않고 돌아왔다[是日之行, 只率入番內禁衛司禁, 勿用繖扇。 見禾稼不盛之處, 必駐馬問於農夫, 不晝膳而還。] (세종실록 7년 7월 1일). 아마도 백성들에 대한 미안함과 측은함이 컸으리라. 이와 관련해 세종실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임금[세종]이 (경복궁의) 경회루 동쪽에, 쓸모없는 재목으로 별실 두 칸을 짓게 하였는데, 주춧돌도 쓰지 않고 띠로 덮게 하였으며, 직접 명령하여 장식을 모두 검소하게 하였다. 이때부터 근정전이 아니라 별실에 기거하였는데, 문 밖에 (왕의 불편함을 염려한 보좌진이 준비한) 거적자리가 있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내가 명한 바가 아닌데, 어찌 이것을 만들었느냐? 지금부터는 내가 명한 것이 아니면, 작은 물건이라도 안에 들이지 말라."[上命於慶會樓東, 以散材作別室二間, 不用柱礎, 覆以茅草粧(飭)〔飾〕 , 悉皆親命, 務令儉素。 至是, 不御正殿而御別室, 見戶外有藁席曰 "非予所命, 何以作此? 自今非予所命, 雖少物勿納于內。] (세종실록 3년 5월 7일)


"전하[세종]께서 가뭄으로 인하여 찬을 줄이신 지가 여태까지 여러 날이라, 신들은 전하의 건강 상태가 좋지 못하실까 걱정되옵니다[殿下因旱減膳, 于今累日, 臣等恐聖候不調。]" (세종실록 18년 4월 27일)


이처럼 그는 백성들이 배를 곯으면, 자신의 처소를 초가 같은 곳으로 옮기거나, 반찬 수를 줄이는 것으로, 측은지심을 자신의 삶에 들여왔다. 한편, 세종은 사회에서 배제된 계층인 죄수에게도 측은지심을 베풀었다. 


“내가 전에는 더위를 무서워하지 않았는데, 몇 년 전부터 더위가 들기 시작하여, 손을 물에 담그니 더운 기운이 저절로 풀렸다. 이로 말미암아 생각하건대, 죄수가 옥에 있으면, 더위가 들기 쉬워서 생명을 잃는 수가 있으니, 참으로 불쌍한 일이다. 더운 때가 되거든 동이에 물을 담아 감옥에 놓고 자주 물을 갈아서, 죄수로 하여금 때때로 손을 씻게 하여, 더위 먹지 않게 하는 것이 어떠한가? 전에 이 법이 있었는지 상고하여 아뢰라[予前此不畏暑, 自年前始中暑, 以手弄水, 暑氣自解。 因念罪囚在牢獄, 暑氣易著, 或致殞命, 誠可哀也。 當其暑時, 以盆盛水置獄中, 屢更其水, 使囚人或盥其手, 俾暑氣不得着如何? 前有此法歟? 其考以啓。]" (세종실록 30년 7월 2일)


한여름의 맹렬한 더위 속에서 나의 고통을 미루어 남을 측은히 여기고, 또 그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는 마음. 이것이 측은지심의 진정한 의미일 것이다. 측은지심을 영어로 번역하면 compassion이라고 할 수 있다. 글자를 해체해보면, ‘com(함께) + pass(고통을 겪다·견디다) + ion(명사형 어미)’으로, 다시 조합해서 해석하면 ‘고통을 함께함’의 의미이다. 다른 이의 고통을 함께 느낀다는 것은 결국 ‘공감(共感)’이며, 또한 측은지심이 소통의 출발점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상대의 아픔을 공감할 수 있어야 진정한 소통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내 배가 고프다고 느끼면 동시에 남의 배고픔을 생각할 줄 아는 마음으로 소통하는 것을 나는 ‘밥통(-通)’이라 부른다. 달리 말하면,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는 측은지심을 기반으로 한 소통 ‘심통(心通)’인 것이다. 이처럼 소통은 측은지심을 타고, 자기 한 몸을 넘어 타인에게까지 세계를 확장시키는 연결고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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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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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립이도생(本立而道生)' (『論語(논어)』 「學而(학이)」).
보통은 '근본이 수립되면 도가 생긴다'로 해석하지만, 나는 '근본을 수립하면 길이 열린다' 로 해석하고 싶다.
나의 됨됨이, 공부를 치열하게 닦아가면, 불안했던 인생길이 어느새 명확해지고, 그에 따라 삶의 행복도도 높아진다는 공자의 충고가 아닐까.
결국, 나의 마음과 학문을 닦는 것은 나를 위함[위기지학(爲己之學)]이다.
그저 모든 것이 감사한 오늘.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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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2일이 [세종이야기 풍류방] 2016년 상반기의 마지막 시간이었습니다. 이 [세종이야기 풍류방]은 문화재청과 여주시에서 후원하는 생생문화재 사업인 ‘세종과 함께 음악을 즐기다’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진행되는데요.

지난 6월 11일부터 6주간 세종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훈민정음과 판소리, 세종과 자격루, 세종 영릉 제례이야기, 우리가 모르는 훈민정음 이야기, 세종과 여민, 그리고 저는 ‘세종과 가족 이야기’를 들려드렸답니다.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안하게 하는 것이 비록 중요하지만, 집안을 화목하게 하는 것이 가장 어렵다[治國平天下雖大, 齊家最難].” (세종 2/10/11)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 즉 '나의 몸과 마음을 닦아, 가정을 화목하게 하면, 나라가 잘 다스려지고, 천하가 평안해진다'는 <대학(大學)>의 구절을 인용한 세종의 자전적인 이야기입니다. 과연 세종의 가정은 화목했을까요?



그날 들려드렸던 이야기들을 요약하면, 이혼 직전까지 갔던 부모님인 태종과 원경왕후 부부, 그리고 놀기 좋아하는 사고뭉치 큰형 양녕대군. 어찌 보면 세종은 위태로운 가정의 아이였습니다. 하지만 세종이 장성해서 일군 가족은 달랐습니다.


위기의 부부였던 부모님은 세종의 극진한 효도 덕에 화해를 했고요. 폐세자된 양녕은 세종의 보호 속에 천수를 누렸습니다. 세종과 부인 소헌왕후는 금슬이 좋았고요. 그들의 자녀들은 영특하게 성장하여 아버지의 일을 도왔습니다. 측우기 발명가로 문종이 활약했고요. 훈민정음 창제와 보급에 문종, 세조 그리고 정의공주와 같은 자녀들이 아버지의 일에 일조했습니다.

이렇게 세종이 경영했던 조선이라는 나라는,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일종의 ‘가족 기업’이었답니다.



약 한 시간 동안 세종의 가족이야기를 전해드리며, 저도 저희 가족을 돌아보는 시간이 됐습니다.

세종이야기와 더불어 듣는 국악도 좋았고요.

이번에 참석하지 못해 아쉬우신 분들은 9월과 10월에도 이곳에서 <세종이야기 풍류방>이 이어지니 또 놀러 오시기 바랍니다.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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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에 시작한 <세종이야기 풍류방> 2016년 상반기 프로그램의 마지막 시간은 제가 함께 합니다.
'세종과 가족이야기'를 준비했는데요.
아버지 태종, 어머니 원경왕후, 부인 소헌왕후 등 세종의 가족들이 어떠한 성격의 소유자인지, 또 이들과 세종이 어떻게 소통하였는지 전해드릴 예정입니다.

'풍류방'인만큼 음악도 빠질 수 없지요.
스피커를 거치지 않은 사람 그리고 악기의 소리를 한옥에서 듣는 맛이 또 좋답니다.
이번에 놓치신 분들은 9월에 시작하는 하반기 프로그램까지 기다리셔야 합니다.
많이들 놀러 오셔요~

* 2016.7.2.토. 오후 2:00-3:00
* 여주 영릉 內 재실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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