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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채원연구소공감]대표 :: 세종이야기꾼 :: 실록연구자 :: 소통 디자이너 :: 010-8014-7726 :: chewonoh@gmail.com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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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22에 강의한 세종 13년에 대한 내용을 공유합니다.

이 해의 열쇠말(키워드)을 저는 ‘진정성’으로 제시하였습니다.


“(신하들이) 본국의 소들이 마침 병에 걸려 많이 줄어 들었기 때문에, 수량을 충당하기 어렵다고 하자는 것을, 내가 채택하지 않았다. 내가 명나라에 대하여 지성껏 섬겨왔는데, 이 한 가지 일에 이르러서 거짓말로 그(소) 수효의 감축을 청한다면 어찌 도리에 되겠는가. 이것이 곧 아홉 길의 산을 쌓아 만드는데 한 삼태기의 흙으로 말미암아 많은 공로가 이지러지는 그것이 아니겠는가[爲山九仞, 功虧一簣]. 나는 하지 않을 것이다." (세종 13/3/25)


“하늘의 뜻을 사람이 돌이킬 수는 없으나,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마음을 다해서[盡心] 하라.” (세종 13/5/2)


흔히 진정성은 '眞正性(authenticity)'으로 번역되는데요, 저는 '盡情性'으로 보았습니다.

진실성을 넘어서서 온 마음을 다하는 태도가 세종의 정치, 외교, 소통 등에 일관적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세종 13년은 나를 모두 태우는[盡] 세종을 만날 수 있는 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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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18에 강의한 세종 12년에 대한 내용을 공유합니다.

세종은 이 해에 세제개혁을 시도하여, 공법貢法이라는 새로운 전세田稅 제도를 도입하려 합니다.


기존에는 손실답험법(답험손실법)이라고 하여, 그해 농사의 정도를 답험관이 육안으로 조사하여 세금을 매기는 제도를 운용하였는데요.

답험관에 따라 세금이 들쑥날쑥한 폐단이 지적되어 왔습니다. 


이에 세종은 정액 세제인 공법으로 전환하려 하는데요.

즉시 공법을 도입하지 않고, 전국에 담당자를 보내 가가호호 방문 조사하도록 명합니다.

국내 최초의 여론조사로 기록된 사건이 이때 발생합니다.

 

"정부·육조와, 각 관사와 서울 안의 전직 각 품관과, 각도의 감사·수령 및 품관으로부터 여염의 가난한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두 가부可否를 물어서 아뢰게 하라." 

(세종실록 12년 3월 5일)


여기에서 가장 혁신적인 것은 대상의 설정입니다.

대상을 사대부나 관직을 가진 자만이 아니라 일반 백성에게까지 넓히는, 어찌보면 현대 민주주의의에 가까운 방식으로 조사를 진행했다는 점이 눈에 띕니다.


5개월 후에 각 지방에서 조사 결과가 취합되어 보고가 올라옵니다.

전국 약 17만 가구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찬성 95636, 반대 73451명 즉, 약 10:7의 비율로 공법 도입에 대한 찬성이 우세하였습니다


세종의 이 다음 행보가 또 흥미롭습니다.

공법 도입에 반대황희黃喜 등의 의논에 따르라고 명하였다는 점입니다(세종 12/8/10).

이에 따라, 공법을 도입하기보다 답험관의 선발, 평가, 관리의 방책을 보완하게 됩니다. (추후에 공법 도입을 재시도하기는 합니다.)


이처럼 세종은 의견수렴 과정에서 미리 발생할 수 있는 문제를 포착하며, 의사결정의 과정 속에서 배제된 의견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래서 제가 세종의 소통에 주목할 수밖에 없답니다.   


실록공감_공유_세종_12년_오채원연구소공감.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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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금요일 오후에 예감터여민의 개관 행사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예술과 감성의 놀이터'를 표방하는 만큼, 개관일부터 예술과 감성 그리고 재미를 전해드리고자 준비하고 있는데요.

조선시대 태조와 세종 때 축성한 한양도성 다산성곽길에서 우리의 옛놀이와 옛음악, 그리고 역사를 만날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가 되리라 기대합니다.
아, 저는 사회자로서 여러분을 맞이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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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17.9.1. pm 4:00-6:00
*주최 : 문화예술감성단체 여민
*후원 : 서울시 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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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11에 강의한 세종실록 11년에 대한 내용입니다. 다음과 같이, 세종 10년에 이어 명나라 사신의 횡포가 극에 달했던 해였습니다.


(명나라 사신) 윤봉이 요구한 물건이 2백여 궤(櫃)나 되었다. 궤짝 1개를 메고 가는데 8인을 사용해야 하는데, 궤짝을 메고 가는 사람들이 태평관(太平館)에서부터 사현(沙峴)에 이르기까지 연달아 이어져 끊어지는 일이 없었다. 사신(使臣)의 물품 요구가 많은 것이 이보다 더 심한 때는 없었다.(세종 11/7/16)


다행히 명나라 황제는 '공식 도장을 찍은 문서에 의거해서만 사신에게 물건을 주라'는 칙서를 보냅니다. 그간 진심으로 외교에 임한 결과였습니다.


임금이 왕세자와 백관을 거느리고 모화관(慕華館)으로 나아가서 칙서를 맞이하였다. -중략- "이제부터 조정에서 보내는 내관(內官)·내사(內史)란 사람들이 왕의 나라에 이르거든, 왕은 다만 예(禮)로 대접할 것이요 물품을 주지는 말라. 조정에서 구하는 물건은 오직 어보(御寶)를 누른 칙서에 의거하여 응당 부쳐 보내고, 만약 짐(朕)의 말이라고 말로 전하면서 구하거나,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것은 다 들어주지 말라. 왕의 부자(父子)가 조정을 공경히 섬겨 오랜 세월을 지냈으되, 오래 갈수록 더욱 간독히 함을 짐이 길이 아는 바로서 좌우의 근친자들이 능히 이간할 바 아니니 왕은 염려하지 말라." (세종 11/12/13) 


이렇게 어려운 문제들을 하나하나 해결하면서 더불어 미래를 위한 준비도 놓치지 않습니다. 바로『농사직설農事直說』의 찬술입니다.


여러 도(道)의 감사(監司)에게 명하여 주현(州縣)의 늙은 농부들을 방문하게 하여, 농토의 이미 시험한 증험에 따라 갖추어 아뢰게 하시고 -중략- 중복된 것을 버리고 그 절실히 필요한 것만 뽑아서 찬집하여 한 편(編)을 만들고 제목을 《농사직설이라고 하였다. (세종 11/5/16)


급무急務와 선무先務를 파악하고 그에 맞추어 일을 진행해나가는 세종의 진면목이 드러나는 한 해. 바로 세종 재위 11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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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관직 명칭 및 그 업무 내용 등 :

_역주 경국대전 번역편,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역사연구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06. (절판. 헌책방 혹은 도서관에는 구비되어 있음)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3587939


_위의 책보다 더 보기 편한 '관직 사전'류가 몇가지 있습니다. 살펴보시고
 마음에 드시는 것을 고르면 좋겠습니다.


2. 실록, 사관의 체계 등 :
_조선왕조실록 어떤 책인가, 이성무, 동방미디어, 1999. (절판. 헌책방 혹은 도서관에는 구비되어 있음)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83293


3. 한국학중앙연구원 조선왕조실록사전 :
http://encysillok.aks.ac.kr/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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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에는 세종실록 10년의 기사를 함께 읽었습니다.

이 해에도 명나라와의 외교, 특히 사신들로 인해 세종과 조선이 무척 힘들었습니다.

사신으로 정식 외교관이 아닌 환관이 파견되었는데, 그들은 대체로 어렸을 적에 고려나 조선에서 중국 황실에 바친 남자들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물품들을 요구하고, 비싼 값으로 상품을 매매해가며, 자신의 친인척에게 벼슬을 요구하고, 심지어는 조선의 관리에게 매질을 가하는 등 횡포가 막심했습니다.


현재도 '사대외교'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는데요.

그 유래가 『맹자孟子』에 나와 있습니다.


惟仁者能以大事小,是故湯事葛,文王事昆夷; 惟智者以小事大,故大王事,句踐事吳。 

오직 어진 자라야 큰 나라로써 작은 나라를 섬길 수 있습니다. -중략- 오직 지혜로운 자라야 작은 나라로써 큰 나라를 섬길 수 있습니다

(『맹자』 「양혜왕 하梁惠王下」)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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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록공감 09_조선시대 사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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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共享生生之樂, 세종실록 24년 1월 7일]

세종과 더불어, ‘나와 다른 당신’과 공감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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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편은 글쓴이의 사심에 의해 갑자기 편성되었습니다.)

유튜브로 지나간 라디오를 듣는데 <과학으로 보는 사약의 성분과 효과>가 방송되더군요.

조선시대에 임형수林亨秀는 열여덟 사발 그리고 송시열宋時烈은 세 사발의 사약을 마셨다는 주장이 귀에 들어왔습니다.

동시에 어렸을 적 역사 만화에서 본 장면이 가물가물 떠올랐고요.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또 어디까지가 ‘썰’일까요?

『조선왕조실록』 등의 역사 기록에는 어떻게 기술되어 있는지 ‘팩트 체크’를 시도해 보았습니다.


우선, 사약은 ‘죽을 사死’가 아닌 ‘줄 사賜’ 자를 씁니다(사약=賜藥≠死藥).

단어의 의미 상, ‘사람을 죽이는 약’이 아니라 ’은혜를 베푸는 약‘인 셈이지요.

부모님이 내려주신 목과 사지를 훼손시키지 않고 나름 존엄하게 죄인을 죽게 해주는 것이 임금의 은혜라면 은혜일 수 있겠습니다.

임금이 귀하게 여기는 신하에게 약을 선물하는 일도 ‘사약賜藥’입니다만, 여기에서는 논외로 하겠습니다.


실록에서는 사약과 관련된 몇 가지 용어가 발견됩니다.

_사사賜死 : 죄질이 중한 죄인에게 임금이 독약을 마시게 하여 자결하게 함. (‘죽음을 선물함’이라고 해석하니 조금 아찔합니다만)

_후명後命 : 귀양지에 있는 죄인에게 사약을 내림.

_수명受命 : 후명을 받음, 즉 사약을 받음.

_사명死命 : 자결하라는 명령.


그리고 실록에는 사약을 받을 수 있는 자격, 사약 받을 때의 의식 등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법전인) 《대전大典(경국대전經國大典)》에 당상관堂上官(정3품 이상의 고위 관료) 이상으로, 사형에 해당되는 죄를 범한 자는 사사(賜死)하게 되어 있습니다. (세조실록 9년 5월 20일)


뜰 아래로 내려가 북쪽(임금이 계신 곳)을 향하여 네 번 절하였다. 그 후 전지傳旨(임금의 말씀)를 들은 뒤 또 네 번 절하고 드디어 사명死命을 받았다. (경종실록 2년 4월 18일)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유엄柳渰이 사사賜死의 명을 가지고 이르니, 조광조趙光祖가 유엄에게 가서 ‘나는 참으로 죄인이오.’하고 땅에 앉아서 묻기를 ‘사사의 명령만 있고 글은 없소?’ 하매, 유엄이 글을 적은 쪽지를 보이니, 조광조가 ‘내가 전에 대부大夫(고위직) 줄에 있었는데, 어찌 겨우 쪽지만 도사에게 부쳐서 증빙으로 삼아 죽이게 하겠소? 당신의 말이 아니었다면 믿을 수 없을 뻔하였소.’ 하였다. -중략- 조광조는 임금이 모르는 일인데 조광조를 미워하는 자가 중간에서 마음대로 만든 일이 아닌가 의심한 것이다. 따라서 누가 정승이 되었고 심정沈貞이 지금 어느 벼슬에 있는가를 물으매 유엄이 사실대로 말하니, 조광조가 ‘그렇다면 내 죽음은 틀림없소.’ 하였다. 아마도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이 다 당로에 있으므로 틀림없이 죽일 것이라는 뜻이겠다. -중략- 조광조가 웃으며 ‘죽으라는 명이 계신데도 한참 동안 지체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 아니겠소? 그러나 오늘 안으로만 죽으면 되지 않겠소? 내가 글을 써서 집에 보내려 하며 분부해서 조처할 일도 있으니, 처치가 끝나고 나서 죽는 것이 어떻겠소?’ 하기에 유엄이 허락하였다. 조광조가 곧 들어가 조용히 뜻을 죄다 글에 썼는데 ‘임금을 어버이처럼 사랑하였고, 나라를 내 집처럼 근심하였네. 해가 아래 세상을 굽어보니, 충정을 밝게 비추리.’ 하였다. 또 거느린 사람들에게 ‘내가 죽거든 관을 얇게 만들고 두껍게 하지 말라. 먼 길을 가기 어렵다.’ 하였다. 자주 창문 틈으로 밖을 엿보았는데, 아마도 형편을 살폈을 것이다. 글을 쓰고 분부하는 일을 끝내고, (사약을 받고도 바로 죽지 못하여) 거듭 내려서 독하게 만든 술을 가져다가 많이 마시고 죽으니,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이 다 눈물을 흘렸다. (중종실록 14년 12월 16일)


위에서 본 것처럼, 조광조는 임금께 드리는 시까지 쓰고 사약을 받았으니 문학적인 죽음이라고 할까요?

이어서 임형수와 송시열이 과연 사약을 몇 사발 받았는지도 찾아보았습니다.

그러나 실록은 물론이고 승정원일기, 공사견문록, 고문진보, 통문관리, 사마방목 등 별별 사료를 찾아보았는데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아쉽지만 그들이 사약을 받던 모습만 아래에 붙입니다.


임형수는 그때 파직되어 집에 있었는데, 죽을 적에 양친에게 하직 인사하고 그 아들을 돌아보며 ‘내가 나쁜 짓을 한 일이 없는데 마침내 이 지경에 이르렀다. 너희들은 과거에 응시하지 말라.’ 하고, 다시 ‘무과일 경우는 응시할 만하면 응시하고 문과는 응시하지 말라.’ 하였는데 조금도 동요하는 표정이 없었다. 약을 들고 마시려 하다가 의금부 서리를 보고 웃으며 말하기를 ‘그대도 한 잔 마시겠는가?’ 하였다. 어떤 이가 집 안에 들어가서 죽는 것이 좋겠다고 하니, 임형수는 ‘나는 마땅히 천지의 신기神祗가 둘러서서 환히 보는 데서 죽을 것이다. 어찌 음침한 곳에 가서 죽겠는가.’ 하고, 드디어 약을 마시고 죽었는데, 듣는 이들이 슬퍼하였다. (명종실록 2년 9월 21일)


이때 송시열이 제주濟州에서 강제 구인되어 (서울로) 돌아오는데 바다를 건너와서 중궁中宮(인현왕후)을 이미 폐비한 것과 오두인吳斗寅·박태보朴泰輔가 간언하다가 죽은 것을 듣고는 식음을 전폐하였다. (서울로 압송되어 가던 중) 정읍井邑에 이르러 사사賜死의 명을 받자, 유소遺疏(죽을 때 임금께 올리던 상소) 두 본本을 써서 손자 송주석宋疇錫에게 주어 다른 날을 기다려 올리게 하였다. 또 훈계하는 말을 써서 여러 자손에게 남겼다. -중략- "내가 병이 심하여 잠시를 기다릴 수 없으니, 명을 받는 것을 늦출 수 없다." 하고는 드디어 조용히 죽음에 나아가니, 이때 나이가 83세이다. (숙종실록 15년 6월 3일)


2차 자료들을 보니, 『유분록幽憤錄(을사전문록乙巳傳聞錄)』에는 임형수가 사약을 열여섯 사발 마시고도 멀쩡하여 두 사발을 추가로 마셨는데도 죽지 않았다는 해프닝이 기록되어 있다는데,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혹시 신빙성 있는 기록을 발견한 분이 계시다면 신고 부탁드립니다.

(이로써 팩트 체크는 반 토막 내지 2/3 토막 정도 되겠습니다.)


* 참고문헌 :

1.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2. tbs교통방송, 2017-07-05, ≪김어준의 뉴스공장≫, <과학 같은 소리하네> 코너.

( https://www.youtube.com/watch?v=lL3zw4Qcvr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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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전래놀이 승경도陞卿圖 놀이판)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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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27에는 세종 9년을 함께 읽었습니다.

이날 강의 내용에는 명나라 조공 및 사신의 횡포, 양녕대군으로 인한 논쟁, 황희의 사위인 서달徐達의 살인 및 그 조작 등 굵직한 사건들이 많았습니다

그 중에서도 저는 집현전응교集賢殿應敎 권채權採의 잔혹한 행적과 관련된 세종의 언급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권채는 "시문詩文을 다 잘하여 문형文衡을 받아 왔다"(세종 20년 5월 10일)고 평가를 받을 만큼 당대 최고의 문장가이며, 세종의 총애를 받았던 인물입니다.

그의 정부인은 심한 투기로 첩인 덕금을 동물 이하로 학대했고, 권채는 이를 알면서방관했지요. 

거의 시체에 가까운 덕금의 모습이 우연히 발각되었고, 그 처리 문제로 인해 논쟁이 일어납니다.

이에 대해 세종이 말씀하시지요.


"임금의 직책은 하늘을 대신해 만물을 다스리니, 만물이 그 처소를 얻지 못하여도 대단히 상심할 것인데 하물며 사람일 경우야 어떻겠는가[人君之職, 代天理物, 物不得其所, 尙且痛心, 況人乎]. 진실로 차별없이 만물을 다스려야 할 임금이 어찌 양민良民과 천인賤人을 구별해 다스릴 수 있겠는가.” (세종실록 9년 8월 29일)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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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록공감 08_조선시대의 개고기 로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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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共享生生之樂, 세종실록 24년 1월 7일]

세종과 더불어, ‘나와 다른 당신’과 공감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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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회(실록공감 07_광해군과 음식로비)에 이어, 특이한 뇌물에 대한 이야기를 하나 더 해볼까 합니다. 조선의 11대 임금인 중종中宗과 사돈지간으로 위세 등등했던 김안로金安老는 개고기를 무척 좋아했다고 전해집니다. 그 사실을 안 몇몇 사람들은 그에게 개고기를 뇌물로 바치고 요직에 올랐지요.


이팽수李彭壽를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임금 비서실의 문서관리자, 정7품)에 제수하였다.

사관은 논한다. 이팽수는 해당 부서인 승정원의 추천도 없었는데, 김안로가 마음대로 추천한 것이었다. 김안로는 개고기를 좋아했는데, 이팽수가 봉상시참봉奉常寺參奉(국가제사 관장하는 관청의 말단직, 종9품)으로 있을 적에 크고 살진 개를 골라 사다가 먹여 늘 그의 구미를 맞추었으므로 김안로가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어느 날 갑자기 청반淸班(지위는 낮으나 추후 고위직에 등용될 수 있는 관직)에 올랐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가장주서家獐注書’라 불렀다. (중종실록 29년 9월 3일)


가장주서의 가장家獐은 ‘삶은 개고기[烹炙犬肉]’를 가리킵니다. 결국 이팽수는 ‘개고기 공무원’이라는 우스꽝스러운 별명이 붙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팽수만 김안로에게 ‘개고기 로비’를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어서 이팽수의 동료였던 진복창이라는 인물에 대한 기록을 보겠습니다.


진복창陳復昌을 봉상시주부奉常寺注簿(국가제사 관장하는 관청의 실무책임자, 종6품)에 제수하였다.

사관은 논한다. 김안로가 권세를 휘두를 때 이팽수가 봉상시 참봉이었는데, 김안로가 개고기 구이[狗炙]를 좋아하는 줄을 알고 날마다 그것을 만들어 제공하였고, 마침내 김안로의 추천을 받아 요직[淸顯職]에 올랐다. 그 뒤 진복창이 봉상시 주부가 되어서도 개고기 구이로 김안로의 뜻을 맞추어 온갖 요사스러운 짓을 다 하는가 하면, 매번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김안로가 개고기를 좋아하는 사실까지 자랑삼아 설명하였다. (중종실록 31년 3월 21일)


진복창陳復昌이 감히 분수에 넘친 계획을 품고 밀어주는 세력을 얻을 것을 생각하여 처음에는 김안로를 섬겼는데, ‘개고기 구이[犬炙]’가 이팽수에 미치지 못한다’는 질책을 받기까지 하였다. 【진복창이 봉상시주부로 있을 때 이팽수와 동료였는데, 김안로를 섬겨서 그 세력으로 좋은 벼슬을 얻으려고 다투어 개고기 구이로 아첨하였다. 진복창은 자신의 개고기 구이의 맛이 최고라 생각하고 올렸지만, 김안로는 오히려 이팽수의 개고기 구이의 맛에 미치지 못한다고 평하였다.】 (명종실록 5년 5월 24일)


진복창 또한 이팽수처럼 개고기 요리를 김안로에게 바쳤습니다.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자랑까지 했지요. 하지만 어쩌나요. 김안로의 입에는 이팽수의 요리가 맞았던 모양입니다. 진복창은 김안로에게 ‘이팽수의 개고기보다 맛없다’는 질책까지 받지요.

밤낮없이 고관대작의 집들을 찾아다니며 인맥을 쌓았으나(명종실록 5년 5월 24일), “나중에 크게 쓰이지 못하였다”(중종실록 31년 3월 21일)는 진복창에 대한 사관의 평가에서 연민마저 느껴집니다.


로비lobby를 조선시대에는 ‘분경奔競’이라 칭했는데요. 이는 '분주히 쫓아다니며 이익을 추구함'을 가리키는 ‘분추경리奔趨競利’의 줄임말입니다. 다른 말로 ‘관직 사냥’을 가리키는 ‘엽관운동獵官運動’이라고도 불렀습니다.

뇌물과 청탁으로 권력을 획득하거나 이득을 취하려는 시도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나 봅니다. 조선 초 정종定宗이 분경을 금지하는 교서敎書(임금의 공식문서)를 내렸는데(정종실록 1년 8월 3일) 실효성이 별로 없었습니다. 이후 태종太宗 시대에 들어 ‘김영란법’, 즉 분경금지가 법제화됩니다(태종실록 1년 5월 20일). 하지만 분경은 그 특성상 비밀스럽게 이루어지는지라 조선시대 내내 존재했습니다. 인간에게 인정욕, 권력욕, 상승욕 등이 존재하는 한, 분경은 앞으로도 사라지지 않겠지요.


* 참고문헌 :

1.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2. 아시아경제, 2017-08-10, 「김영록 농림축산식품부 장관 “김영란법 상한액, 선물은 올리되 경조사는 낮추겠다”」.


(사진 : 아시아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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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20에 강의했던 내용을 공유합니다.

세종 8년(1426년)에는 세종의 재위기간 33년을 통틀어서도 굵직하달 수 있는 사건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우선, 서울 시내에서 일어난 연쇄방화 사건을 들 수 있겠습니다. 

한양 도성 내 방화사건이 연이어 민가 2천여 채가 연소되고, 사망자는 32명에 이르렀습니다.

이 사건을 겪으며, 현재의 소방청에 해당하는 '방화도감'이 설치되는 등 재발을 방지하기 위한 방책들이 마련됩니다.


또 하나의 사건을 들자면 대규모 뇌물 스캔들이 있었습니다.

'김도련金道練 게이트'라고 제가 이름을 붙였는데요.

김도련이 정부 고위 관료들에게 광범위하게 노비를 뇌물로 바쳐, 재판 결과를 유리하게 끌어간 사건들이 발각됩니다.

조사를 하다 보니, 그 중에서도 조말생은 10여 년간 요직에 있으면서 노비 36명 등 어마어마한 뇌물수수를 기록하게 되지요.

본 사건은 '조말생趙末生 뇌물 사건'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거의 매해 가뭄과 흉년이 드는 가운데, 민심이 흉흉하여 방화 사건은 일어나고, 지근 거리의 신하들은 부패의 고리가 얽히고 설킨 상황.

아이고, 누구와 함께 이 나라를 꾸려 갈꼬.

세종의 한숨이 여기에까지 들리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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