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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채원연구소공감]대표 :: 세종이야기꾼 :: 실록연구자 :: 소통 디자이너 :: 010-8014-7726 :: chewonoh@gmail.com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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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관직 명칭 및 그 업무 내용 등 :

_역주 경국대전 번역편,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역사연구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06. (절판. 헌책방 혹은 도서관에는 구비되어 있음)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3587939


_위의 책보다 더 보기 편한 '관직 사전'류가 몇가지 있습니다. 살펴보시고
 마음에 드시는 것을 고르면 좋겠습니다.


2. 실록, 사관의 체계 등 :
_조선왕조실록 어떤 책인가, 이성무, 동방미디어, 1999. (절판. 헌책방 혹은 도서관에는 구비되어 있음)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83293


3. 한국학중앙연구원 조선왕조실록사전 :
http://encysillok.aks.ac.kr/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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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에는 세종실록 10년의 기사를 함께 읽었습니다.

이 해에도 명나라와의 외교, 특히 사신들로 인해 세종과 조선이 무척 힘들었습니다.

사신으로 정식 외교관이 아닌 환관이 파견되었는데, 그들은 대체로 어렸을 적에 고려나 조선에서 중국 황실에 바친 남자들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물품들을 요구하고, 비싼 값으로 상품을 매매해가며, 자신의 친인척에게 벼슬을 요구하고, 심지어는 조선의 관리에게 매질을 가하는 등 횡포가 막심했습니다.


현재도 '사대외교'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는데요.

그 유래가 『맹자孟子』에 나와 있습니다.


惟仁者能以大事小,是故湯事葛,文王事昆夷; 惟智者以小事大,故大王事,句踐事吳。 

오직 어진 자라야 큰 나라로써 작은 나라를 섬길 수 있습니다. -중략- 오직 지혜로운 자라야 작은 나라로써 큰 나라를 섬길 수 있습니다

(『맹자』 「양혜왕 하梁惠王下」)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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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록공감 09_조선시대 사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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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共享生生之樂, 세종실록 24년 1월 7일]

세종과 더불어, ‘나와 다른 당신’과 공감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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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편은 글쓴이의 사심에 의해 갑자기 편성되었습니다.)

유튜브로 지나간 라디오를 듣는데 <과학으로 보는 사약의 성분과 효과>가 방송되더군요.

조선시대에 임형수林亨秀는 열여덟 사발 그리고 송시열宋時烈은 세 사발의 사약을 마셨다는 주장이 귀에 들어왔습니다.

동시에 어렸을 적 역사 만화에서 본 장면이 가물가물 떠올랐고요.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또 어디까지가 ‘썰’일까요?

『조선왕조실록』 등의 역사 기록에는 어떻게 기술되어 있는지 ‘팩트 체크’를 시도해 보았습니다.


우선, 사약은 ‘죽을 사死’가 아닌 ‘줄 사賜’ 자를 씁니다(사약=賜藥≠死藥).

단어의 의미 상, ‘사람을 죽이는 약’이 아니라 ’은혜를 베푸는 약‘인 셈이지요.

부모님이 내려주신 목과 사지를 훼손시키지 않고 나름 존엄하게 죄인을 죽게 해주는 것이 임금의 은혜라면 은혜일 수 있겠습니다.

임금이 귀하게 여기는 신하에게 약을 선물하는 일도 ‘사약賜藥’입니다만, 여기에서는 논외로 하겠습니다.


실록에서는 사약과 관련된 몇 가지 용어가 발견됩니다.

_사사賜死 : 죄질이 중한 죄인에게 임금이 독약을 마시게 하여 자결하게 함. (‘죽음을 선물함’이라고 해석하니 조금 아찔합니다만)

_후명後命 : 귀양지에 있는 죄인에게 사약을 내림.

_수명受命 : 후명을 받음, 즉 사약을 받음.

_사명死命 : 자결하라는 명령.


그리고 실록에는 사약을 받을 수 있는 자격, 사약 받을 때의 의식 등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법전인) 《대전大典(경국대전經國大典)》에 당상관堂上官(정3품 이상의 고위 관료) 이상으로, 사형에 해당되는 죄를 범한 자는 사사(賜死)하게 되어 있습니다. (세조실록 9년 5월 20일)


뜰 아래로 내려가 북쪽(임금이 계신 곳)을 향하여 네 번 절하였다. 그 후 전지傳旨(임금의 말씀)를 들은 뒤 또 네 번 절하고 드디어 사명死命을 받았다. (경종실록 2년 4월 18일)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유엄柳渰이 사사賜死의 명을 가지고 이르니, 조광조趙光祖가 유엄에게 가서 ‘나는 참으로 죄인이오.’하고 땅에 앉아서 묻기를 ‘사사의 명령만 있고 글은 없소?’ 하매, 유엄이 글을 적은 쪽지를 보이니, 조광조가 ‘내가 전에 대부大夫(고위직) 줄에 있었는데, 어찌 겨우 쪽지만 도사에게 부쳐서 증빙으로 삼아 죽이게 하겠소? 당신의 말이 아니었다면 믿을 수 없을 뻔하였소.’ 하였다. -중략- 조광조는 임금이 모르는 일인데 조광조를 미워하는 자가 중간에서 마음대로 만든 일이 아닌가 의심한 것이다. 따라서 누가 정승이 되었고 심정沈貞이 지금 어느 벼슬에 있는가를 물으매 유엄이 사실대로 말하니, 조광조가 ‘그렇다면 내 죽음은 틀림없소.’ 하였다. 아마도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이 다 당로에 있으므로 틀림없이 죽일 것이라는 뜻이겠다. -중략- 조광조가 웃으며 ‘죽으라는 명이 계신데도 한참 동안 지체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 아니겠소? 그러나 오늘 안으로만 죽으면 되지 않겠소? 내가 글을 써서 집에 보내려 하며 분부해서 조처할 일도 있으니, 처치가 끝나고 나서 죽는 것이 어떻겠소?’ 하기에 유엄이 허락하였다. 조광조가 곧 들어가 조용히 뜻을 죄다 글에 썼는데 ‘임금을 어버이처럼 사랑하였고, 나라를 내 집처럼 근심하였네. 해가 아래 세상을 굽어보니, 충정을 밝게 비추리.’ 하였다. 또 거느린 사람들에게 ‘내가 죽거든 관을 얇게 만들고 두껍게 하지 말라. 먼 길을 가기 어렵다.’ 하였다. 자주 창문 틈으로 밖을 엿보았는데, 아마도 형편을 살폈을 것이다. 글을 쓰고 분부하는 일을 끝내고, (사약을 받고도 바로 죽지 못하여) 거듭 내려서 독하게 만든 술을 가져다가 많이 마시고 죽으니,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이 다 눈물을 흘렸다. (중종실록 14년 12월 16일)


위에서 본 것처럼, 조광조는 임금께 드리는 시까지 쓰고 사약을 받았으니 문학적인 죽음이라고 할까요?

이어서 임형수와 송시열이 과연 사약을 몇 사발 받았는지도 찾아보았습니다.

그러나 실록은 물론이고 승정원일기, 공사견문록, 고문진보, 통문관리, 사마방목 등 별별 사료를 찾아보았는데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아쉽지만 그들이 사약을 받던 모습만 아래에 붙입니다.


임형수는 그때 파직되어 집에 있었는데, 죽을 적에 양친에게 하직 인사하고 그 아들을 돌아보며 ‘내가 나쁜 짓을 한 일이 없는데 마침내 이 지경에 이르렀다. 너희들은 과거에 응시하지 말라.’ 하고, 다시 ‘무과일 경우는 응시할 만하면 응시하고 문과는 응시하지 말라.’ 하였는데 조금도 동요하는 표정이 없었다. 약을 들고 마시려 하다가 의금부 서리를 보고 웃으며 말하기를 ‘그대도 한 잔 마시겠는가?’ 하였다. 어떤 이가 집 안에 들어가서 죽는 것이 좋겠다고 하니, 임형수는 ‘나는 마땅히 천지의 신기神祗가 둘러서서 환히 보는 데서 죽을 것이다. 어찌 음침한 곳에 가서 죽겠는가.’ 하고, 드디어 약을 마시고 죽었는데, 듣는 이들이 슬퍼하였다. (명종실록 2년 9월 21일)


이때 송시열이 제주濟州에서 강제 구인되어 (서울로) 돌아오는데 바다를 건너와서 중궁中宮(인현왕후)을 이미 폐비한 것과 오두인吳斗寅·박태보朴泰輔가 간언하다가 죽은 것을 듣고는 식음을 전폐하였다. (서울로 압송되어 가던 중) 정읍井邑에 이르러 사사賜死의 명을 받자, 유소遺疏(죽을 때 임금께 올리던 상소) 두 본本을 써서 손자 송주석宋疇錫에게 주어 다른 날을 기다려 올리게 하였다. 또 훈계하는 말을 써서 여러 자손에게 남겼다. -중략- "내가 병이 심하여 잠시를 기다릴 수 없으니, 명을 받는 것을 늦출 수 없다." 하고는 드디어 조용히 죽음에 나아가니, 이때 나이가 83세이다. (숙종실록 15년 6월 3일)


2차 자료들을 보니, 『유분록幽憤錄(을사전문록乙巳傳聞錄)』에는 임형수가 사약을 열여섯 사발 마시고도 멀쩡하여 두 사발을 추가로 마셨는데도 죽지 않았다는 해프닝이 기록되어 있다는데,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혹시 신빙성 있는 기록을 발견한 분이 계시다면 신고 부탁드립니다.

(이로써 팩트 체크는 반 토막 내지 2/3 토막 정도 되겠습니다.)


* 참고문헌 :

1.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2. tbs교통방송, 2017-07-05, ≪김어준의 뉴스공장≫, <과학 같은 소리하네> 코너.

( https://www.youtube.com/watch?v=lL3zw4Qcvr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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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전래놀이 승경도陞卿圖 놀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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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27에는 세종 9년을 함께 읽었습니다.

이날 강의 내용에는 명나라 조공 및 사신의 횡포, 양녕대군으로 인한 논쟁, 황희의 사위인 서달徐達의 살인 및 그 조작 등 굵직한 사건들이 많았습니다

그 중에서도 저는 집현전응교集賢殿應敎 권채權採의 잔혹한 행적과 관련된 세종의 언급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권채는 "시문詩文을 다 잘하여 문형文衡을 받아 왔다"(세종 20년 5월 10일)고 평가를 받을 만큼 당대 최고의 문장가이며, 세종의 총애를 받았던 인물입니다.

그의 정부인은 심한 투기로 첩인 덕금을 동물 이하로 학대했고, 권채는 이를 알면서방관했지요. 

거의 시체에 가까운 덕금의 모습이 우연히 발각되었고, 그 처리 문제로 인해 논쟁이 일어납니다.

이에 대해 세종이 말씀하시지요.


"임금의 직책은 하늘을 대신해 만물을 다스리니, 만물이 그 처소를 얻지 못하여도 대단히 상심할 것인데 하물며 사람일 경우야 어떻겠는가[人君之職, 代天理物, 物不得其所, 尙且痛心, 況人乎]. 진실로 차별없이 만물을 다스려야 할 임금이 어찌 양민良民과 천인賤人을 구별해 다스릴 수 있겠는가.” (세종실록 9년 8월 29일)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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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록공감 08_조선시대의 개고기 로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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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共享生生之樂, 세종실록 24년 1월 7일]

세종과 더불어, ‘나와 다른 당신’과 공감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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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회(실록공감 07_광해군과 음식로비)에 이어, 특이한 뇌물에 대한 이야기를 하나 더 해볼까 합니다. 조선의 11대 임금인 중종中宗과 사돈지간으로 위세 등등했던 김안로金安老는 개고기를 무척 좋아했다고 전해집니다. 그 사실을 안 몇몇 사람들은 그에게 개고기를 뇌물로 바치고 요직에 올랐지요.


이팽수李彭壽를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임금 비서실의 문서관리자, 정7품)에 제수하였다.

사관은 논한다. 이팽수는 해당 부서인 승정원의 추천도 없었는데, 김안로가 마음대로 추천한 것이었다. 김안로는 개고기를 좋아했는데, 이팽수가 봉상시참봉奉常寺參奉(국가제사 관장하는 관청의 말단직, 종9품)으로 있을 적에 크고 살진 개를 골라 사다가 먹여 늘 그의 구미를 맞추었으므로 김안로가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어느 날 갑자기 청반淸班(지위는 낮으나 추후 고위직에 등용될 수 있는 관직)에 올랐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가장주서家獐注書’라 불렀다. (중종실록 29년 9월 3일)


가장주서의 가장家獐은 ‘삶은 개고기[烹炙犬肉]’를 가리킵니다. 결국 이팽수는 ‘개고기 공무원’이라는 우스꽝스러운 별명이 붙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팽수만 김안로에게 ‘개고기 로비’를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어서 이팽수의 동료였던 진복창이라는 인물에 대한 기록을 보겠습니다.


진복창陳復昌을 봉상시주부奉常寺注簿(국가제사 관장하는 관청의 실무책임자, 종6품)에 제수하였다.

사관은 논한다. 김안로가 권세를 휘두를 때 이팽수가 봉상시 참봉이었는데, 김안로가 개고기 구이[狗炙]를 좋아하는 줄을 알고 날마다 그것을 만들어 제공하였고, 마침내 김안로의 추천을 받아 요직[淸顯職]에 올랐다. 그 뒤 진복창이 봉상시 주부가 되어서도 개고기 구이로 김안로의 뜻을 맞추어 온갖 요사스러운 짓을 다 하는가 하면, 매번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김안로가 개고기를 좋아하는 사실까지 자랑삼아 설명하였다. (중종실록 31년 3월 21일)


진복창陳復昌이 감히 분수에 넘친 계획을 품고 밀어주는 세력을 얻을 것을 생각하여 처음에는 김안로를 섬겼는데, ‘개고기 구이[犬炙]’가 이팽수에 미치지 못한다’는 질책을 받기까지 하였다. 【진복창이 봉상시주부로 있을 때 이팽수와 동료였는데, 김안로를 섬겨서 그 세력으로 좋은 벼슬을 얻으려고 다투어 개고기 구이로 아첨하였다. 진복창은 자신의 개고기 구이의 맛이 최고라 생각하고 올렸지만, 김안로는 오히려 이팽수의 개고기 구이의 맛에 미치지 못한다고 평하였다.】 (명종실록 5년 5월 24일)


진복창 또한 이팽수처럼 개고기 요리를 김안로에게 바쳤습니다.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자랑까지 했지요. 하지만 어쩌나요. 김안로의 입에는 이팽수의 요리가 맞았던 모양입니다. 진복창은 김안로에게 ‘이팽수의 개고기보다 맛없다’는 질책까지 받지요.

밤낮없이 고관대작의 집들을 찾아다니며 인맥을 쌓았으나(명종실록 5년 5월 24일), “나중에 크게 쓰이지 못하였다”(중종실록 31년 3월 21일)는 진복창에 대한 사관의 평가에서 연민마저 느껴집니다.


로비lobby를 조선시대에는 ‘분경奔競’이라 칭했는데요. 이는 '분주히 쫓아다니며 이익을 추구함'을 가리키는 ‘분추경리奔趨競利’의 줄임말입니다. 다른 말로 ‘관직 사냥’을 가리키는 ‘엽관운동獵官運動’이라고도 불렀습니다.

뇌물과 청탁으로 권력을 획득하거나 이득을 취하려는 시도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나 봅니다. 조선 초 정종定宗이 분경을 금지하는 교서敎書(임금의 공식문서)를 내렸는데(정종실록 1년 8월 3일) 실효성이 별로 없었습니다. 이후 태종太宗 시대에 들어 ‘김영란법’, 즉 분경금지가 법제화됩니다(태종실록 1년 5월 20일). 하지만 분경은 그 특성상 비밀스럽게 이루어지는지라 조선시대 내내 존재했습니다. 인간에게 인정욕, 권력욕, 상승욕 등이 존재하는 한, 분경은 앞으로도 사라지지 않겠지요.


* 참고문헌 :

1.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2. 아시아경제, 2017-08-10, 「김영록 농림축산식품부 장관 “김영란법 상한액, 선물은 올리되 경조사는 낮추겠다”」.


(사진 : 아시아경제)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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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20에 강의했던 내용을 공유합니다.

세종 8년(1426년)에는 세종의 재위기간 33년을 통틀어서도 굵직하달 수 있는 사건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우선, 서울 시내에서 일어난 연쇄방화 사건을 들 수 있겠습니다. 

한양 도성 내 방화사건이 연이어 민가 2천여 채가 연소되고, 사망자는 32명에 이르렀습니다.

이 사건을 겪으며, 현재의 소방청에 해당하는 '방화도감'이 설치되는 등 재발을 방지하기 위한 방책들이 마련됩니다.


또 하나의 사건을 들자면 대규모 뇌물 스캔들이 있었습니다.

'김도련金道練 게이트'라고 제가 이름을 붙였는데요.

김도련이 정부 고위 관료들에게 광범위하게 노비를 뇌물로 바쳐, 재판 결과를 유리하게 끌어간 사건들이 발각됩니다.

조사를 하다 보니, 그 중에서도 조말생은 10여 년간 요직에 있으면서 노비 36명 등 어마어마한 뇌물수수를 기록하게 되지요.

본 사건은 '조말생趙末生 뇌물 사건'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거의 매해 가뭄과 흉년이 드는 가운데, 민심이 흉흉하여 방화 사건은 일어나고, 지근 거리의 신하들은 부패의 고리가 얽히고 설킨 상황.

아이고, 누구와 함께 이 나라를 꾸려 갈꼬.

세종의 한숨이 여기에까지 들리는 듯합니다.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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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13일에는 세종 7년에 대해 강의하였습니다.

이 해에는 화폐개혁으로 인한 기사가 눈에 띄었는데요.


앞서 아버지 태종 때에 저화楮貨, 즉 닥나무 껍질로 만든 종이 돈을 발행한 바 있지요.

'겨우 종이 쪼가리'가 현물을 대체하여 돈으로서 기능한다는 사실이 일반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위조도 용이한 탓에 저화는 원활하게 유통되지 않았습니다.


이에 세종은 종이보다 돈의 느낌이 나는 동으로 조선통보寶라는 동전을 주조하여 화폐개혁을 시도합니다.

그러나 현물 경제에 익숙한 백성들에게는 이 또한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많은 학자들이 세종대의 대표적인 실패 사례로 이 화폐개혁을 꼽으며, 돈이 원활하게 유통되는 경제 구조가 형성되지 않았던 것을 그 주요 원인으로 봅니다. 

결국, 당시는 돈이 유통되기에는 경제 체계가 미숙했던 때였던 것입니다.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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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록공감 07_광해군과 음식로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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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共享生生之樂, 세종실록 24년 1월 7일]

세종과 더불어, ‘나와 다른 당신’과 공감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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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孝宗의 사위인 정재륜鄭載崙이 궁궐을 드나들며 들은 이야기들을 정리한 책 『공사견문록公私見聞錄』에는 세종대부터 효종대까지의 다양한 생활사가 적혀 있습니다. 그 중 광해군光海君에 얽힌 이야기를 한 토막 소개하고자 합니다.


광해군이 폐위廢位되어 유배됐을 때 따라간 궁궐의 계집종 중에서 성질이 사납고 교활한 자가 있었다. 정성껏 봉양하지 않으므로 광해가 꾸짖었더니, 계집종이 거친 소리로 말했다. “왕위에 있을 때에 여러 관청과 전국에서 매달 공물供物을 바쳤는데 무엇이 부족하여 염치없는 것들에게까지 찬거리를 요구하였습니까? 심지어 ‘김치 판서[沉菜判書]’니 ‘잡채 참판[雜菜參判]’이니 하는 말까지 있었습니다. 무엇이 부족하여 벼슬을 구하거나 송사하는 자에게 뇌물을 요구해 민심을 크게 무너지게 했습니까? 그리고 당신이 잘못하여 국가를 이 지경으로 만들고, 나를 여기까지 오게 하여 고생시키고는 도리어 정성껏 받들지 않는다고 책망하니, 양심에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하니, 광해군이 머리를 숙이고 한마디 말도 못하고 다만 혀를 찰 뿐이었다.


계해반정癸亥反正(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축출하고 왕위에 오른 인조仁祖의 아들이 바로 효종이지요. 그 효종의 사위인 정재륜이 저자이므로 어쩌면 광해군에게 불리하게 기록했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실록에도 광해군 때의 ‘잡채 판서(장관)’ 그리고 ‘더덕 정승(총리)’이 기술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정재륜의 사견만은 아닌 듯합니다.


이충李沖은 광해군 말년에 온갖 수단을 다 부려 임금에게 아첨하고 못된 비위를 맞추었다. 겨울철에는 반드시 땅 속에 큰 집을 마련해 놓고 그 속에다 채소를 심었는데, 새로운 맛을 취한 것이었다. 반찬을 매우 맛있게 장만해 아침저녁으로 올렸는데, 그로 인해 총애를 얻어 높은 품계에 올랐다. 그가 길에 오가면 비록 삼척동자라도 반드시 ‘잡채 판서’라 손가락질하면서 너나없이 침 뱉고 비루하게 여겼다. (광해군일기[중초본] 즉위년 12월 10일)


이충은 진기한 음식을 만들어 사사로이 궁중에다 바치곤 했는데, 【사관 왈: 왕은 식사 때마다 반드시 이충의 집에서 만들어 오는 음식을 기다렸다가 수저를 들곤 했다.】 당시에 어떤 사람이 다음과 같이 시를 지어 조롱하였다.

사삼 각로의 권세가 처음에 중하더니

잡채 상서의 세력은 당할 자 없구나.

여기에서 각로는 한효순韓孝純을, 상서는 이충을 지칭하는 것이었다(한효순의 집에서는 사삼沙參(더덕)으로 밀병蜜餠(꿀떡)을 만들었고, 이충은 채소에다 다른 맛을 가미하였는데, 그 맛이 희한하였다). (광해군일기[중초본] 11년 3월 5일)


당대의 풍자시에 의하면, 광해 초년에는 한효순이 더덕 꿀떡으로 임금의 총애를 입어 정승이 되었는데, 말년에는 이충이 잡채 덕분에 판서 자리에 올라 그 위세가 대단했습니다. 그리고 이후 유배지에서는 모시는 노비마저 식욕에 충실한 광해군을 얕보았다는 기록까지 남은 것이지요. 실리외교를 추구했다는 평가와 동떨어진, ‘음식로비’에 약했다는 광해군의 이야기가 낯섭니다. 그런가 하면, 그 음식들이 얼마나 맛있었기에 지존의 자리에서 누릴 만큼 누렸을 사람이 반했을까 그 맛이 궁금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의할 점은 ‘잡채’가 현재의 형태와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현재 흔히 먹는 잡채는 당면이 주재료인데요. 이 당면은 약 100년 전에야 우리 음식에 등장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조리서이며 17세기에 저술된 『음식디미방飮食知味方』의 잡채에는 당연히 당면이 들어가 있지 않겠지요. 이 책에 따르면 잡채는 ‘나물 모음’에 가깝습니다.


앞으로 이틀 후인 8/11이 말복입니다. 올해의 마지막 복날이라 생각하니, 상투적인 삼계탕 말고 다른 음식이 먹고 싶어지는데요. 땀으로 배출된 무기질을 보충하고, 피로회복과 체온하강을 돕는 채소. 이 채소로 만든 잡채를 이번 복날 메뉴로 삼아볼까 합니다.


* 참고문헌 :

1. 『공사견문록公私見聞錄』

2.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3. 동아일보, 2017-04-05, 「[황광해의 우리가 몰랐던 한식]잡채에는 당면이 없었다」.


(사진 : 동아일보)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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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31에 강의한 내용을 공유합니다.

세종 6년, 한해를 정리하며, 저는 열쇠말로 '자신自新'을 제시하였습니다.

'자신'은 '스스로 새로워짐'을 가리키는 유가儒家의 주요 개념으로, 주희朱熹(주자)는 『대학장구大學章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습니다.


自新新民,皆欲止於至善也


스스로를 새롭게 하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은

모두 지극한 선에 머무르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 '자신'은 리더의 자리에 있는 사람에게는 더욱 중요한 덕목입니다.

스스로를 혁신시켜 나가야 할 뿐 아니라 조직원, 아랫사람들에게도 '어제와 다른 참된 나'로 살아가게끔 도와주어야 하기 때문이지요.


'오랑캐'로 불리며 우리보다 문화적으로 열등하다는 평가를 받아온 야인(여진족), 그리고 '트러블 메이커' 양녕대군이 스스로 새로워지기를 기대했던 세종.

이러한 그의 노력은 앞으로도 계속됩니다.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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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23에 강의한 내용입니다.

세종 5년은 매해 연잇는 가뭄과 흉작의 축적으로 인해, 흙을 파먹는 백성들이 있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던 시기입니다.

그래서 저는 열쇠말로 ‘경세제민經世濟民’을 제시하였습니다.

경세제민이 현재 우리가 많이 사용하는 '경제Economy'의 원어라는 사실을 아시는지요?

'세상을 잘 다스려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함'을 가리키던 말이 이제는 경기, 경제활동, 절약 등으로 의미가 한정된 점이 씁쓸합니다.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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