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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채원연구소공감]대표 :: 세종이야기꾼 :: 실록연구자 :: 소통 디자이너 :: 010-8014-7726 :: chewonoh@gmail.com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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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11에 강의한 세종실록 11년에 대한 내용입니다. 다음과 같이, 세종 10년에 이어 명나라 사신의 횡포가 극에 달했던 해였습니다.


(명나라 사신) 윤봉이 요구한 물건이 2백여 궤(櫃)나 되었다. 궤짝 1개를 메고 가는데 8인을 사용해야 하는데, 궤짝을 메고 가는 사람들이 태평관(太平館)에서부터 사현(沙峴)에 이르기까지 연달아 이어져 끊어지는 일이 없었다. 사신(使臣)의 물품 요구가 많은 것이 이보다 더 심한 때는 없었다.(세종 11/7/16)


다행히 명나라 황제는 '공식 도장을 찍은 문서에 의거해서만 사신에게 물건을 주라'는 칙서를 보냅니다. 그간 진심으로 외교에 임한 결과였습니다.


임금이 왕세자와 백관을 거느리고 모화관(慕華館)으로 나아가서 칙서를 맞이하였다. -중략- "이제부터 조정에서 보내는 내관(內官)·내사(內史)란 사람들이 왕의 나라에 이르거든, 왕은 다만 예(禮)로 대접할 것이요 물품을 주지는 말라. 조정에서 구하는 물건은 오직 어보(御寶)를 누른 칙서에 의거하여 응당 부쳐 보내고, 만약 짐(朕)의 말이라고 말로 전하면서 구하거나,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것은 다 들어주지 말라. 왕의 부자(父子)가 조정을 공경히 섬겨 오랜 세월을 지냈으되, 오래 갈수록 더욱 간독히 함을 짐이 길이 아는 바로서 좌우의 근친자들이 능히 이간할 바 아니니 왕은 염려하지 말라." (세종 11/12/13) 


이렇게 어려운 문제들을 하나하나 해결하면서 더불어 미래를 위한 준비도 놓치지 않습니다. 바로『농사직설農事直說』의 찬술입니다.


여러 도(道)의 감사(監司)에게 명하여 주현(州縣)의 늙은 농부들을 방문하게 하여, 농토의 이미 시험한 증험에 따라 갖추어 아뢰게 하시고 -중략- 중복된 것을 버리고 그 절실히 필요한 것만 뽑아서 찬집하여 한 편(編)을 만들고 제목을 《농사직설이라고 하였다. (세종 11/5/16)


급무急務와 선무先務를 파악하고 그에 맞추어 일을 진행해나가는 세종의 진면목이 드러나는 한 해. 바로 세종 재위 11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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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관직 명칭 및 그 업무 내용 등 :

_역주 경국대전 번역편,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역사연구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06. (절판. 헌책방 혹은 도서관에는 구비되어 있음)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3587939


_위의 책보다 더 보기 편한 '관직 사전'류가 몇가지 있습니다. 살펴보시고
 마음에 드시는 것을 고르면 좋겠습니다.


2. 실록, 사관의 체계 등 :
_조선왕조실록 어떤 책인가, 이성무, 동방미디어, 1999. (절판. 헌책방 혹은 도서관에는 구비되어 있음)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83293


3. 한국학중앙연구원 조선왕조실록사전 :
http://encysillok.aks.ac.kr/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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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에는 세종실록 10년의 기사를 함께 읽었습니다.

이 해에도 명나라와의 외교, 특히 사신들로 인해 세종과 조선이 무척 힘들었습니다.

사신으로 정식 외교관이 아닌 환관이 파견되었는데, 그들은 대체로 어렸을 적에 고려나 조선에서 중국 황실에 바친 남자들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물품들을 요구하고, 비싼 값으로 상품을 매매해가며, 자신의 친인척에게 벼슬을 요구하고, 심지어는 조선의 관리에게 매질을 가하는 등 횡포가 막심했습니다.


현재도 '사대외교'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는데요.

그 유래가 『맹자孟子』에 나와 있습니다.


惟仁者能以大事小,是故湯事葛,文王事昆夷; 惟智者以小事大,故大王事,句踐事吳。 

오직 어진 자라야 큰 나라로써 작은 나라를 섬길 수 있습니다. -중략- 오직 지혜로운 자라야 작은 나라로써 큰 나라를 섬길 수 있습니다

(『맹자』 「양혜왕 하梁惠王下」)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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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27에는 세종 9년을 함께 읽었습니다.

이날 강의 내용에는 명나라 조공 및 사신의 횡포, 양녕대군으로 인한 논쟁, 황희의 사위인 서달徐達의 살인 및 그 조작 등 굵직한 사건들이 많았습니다

그 중에서도 저는 집현전응교集賢殿應敎 권채權採의 잔혹한 행적과 관련된 세종의 언급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권채는 "시문詩文을 다 잘하여 문형文衡을 받아 왔다"(세종 20년 5월 10일)고 평가를 받을 만큼 당대 최고의 문장가이며, 세종의 총애를 받았던 인물입니다.

그의 정부인은 심한 투기로 첩인 덕금을 동물 이하로 학대했고, 권채는 이를 알면서방관했지요. 

거의 시체에 가까운 덕금의 모습이 우연히 발각되었고, 그 처리 문제로 인해 논쟁이 일어납니다.

이에 대해 세종이 말씀하시지요.


"임금의 직책은 하늘을 대신해 만물을 다스리니, 만물이 그 처소를 얻지 못하여도 대단히 상심할 것인데 하물며 사람일 경우야 어떻겠는가[人君之職, 代天理物, 物不得其所, 尙且痛心, 況人乎]. 진실로 차별없이 만물을 다스려야 할 임금이 어찌 양민良民과 천인賤人을 구별해 다스릴 수 있겠는가.” (세종실록 9년 8월 29일)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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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록공감 07_광해군과 음식로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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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共享生生之樂, 세종실록 24년 1월 7일]

세종과 더불어, ‘나와 다른 당신’과 공감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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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孝宗의 사위인 정재륜鄭載崙이 궁궐을 드나들며 들은 이야기들을 정리한 책 『공사견문록公私見聞錄』에는 세종대부터 효종대까지의 다양한 생활사가 적혀 있습니다. 그 중 광해군光海君에 얽힌 이야기를 한 토막 소개하고자 합니다.


광해군이 폐위廢位되어 유배됐을 때 따라간 궁궐의 계집종 중에서 성질이 사납고 교활한 자가 있었다. 정성껏 봉양하지 않으므로 광해가 꾸짖었더니, 계집종이 거친 소리로 말했다. “왕위에 있을 때에 여러 관청과 전국에서 매달 공물供物을 바쳤는데 무엇이 부족하여 염치없는 것들에게까지 찬거리를 요구하였습니까? 심지어 ‘김치 판서[沉菜判書]’니 ‘잡채 참판[雜菜參判]’이니 하는 말까지 있었습니다. 무엇이 부족하여 벼슬을 구하거나 송사하는 자에게 뇌물을 요구해 민심을 크게 무너지게 했습니까? 그리고 당신이 잘못하여 국가를 이 지경으로 만들고, 나를 여기까지 오게 하여 고생시키고는 도리어 정성껏 받들지 않는다고 책망하니, 양심에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하니, 광해군이 머리를 숙이고 한마디 말도 못하고 다만 혀를 찰 뿐이었다.


계해반정癸亥反正(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축출하고 왕위에 오른 인조仁祖의 아들이 바로 효종이지요. 그 효종의 사위인 정재륜이 저자이므로 어쩌면 광해군에게 불리하게 기록했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실록에도 광해군 때의 ‘잡채 판서(장관)’ 그리고 ‘더덕 정승(총리)’이 기술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정재륜의 사견만은 아닌 듯합니다.


이충李沖은 광해군 말년에 온갖 수단을 다 부려 임금에게 아첨하고 못된 비위를 맞추었다. 겨울철에는 반드시 땅 속에 큰 집을 마련해 놓고 그 속에다 채소를 심었는데, 새로운 맛을 취한 것이었다. 반찬을 매우 맛있게 장만해 아침저녁으로 올렸는데, 그로 인해 총애를 얻어 높은 품계에 올랐다. 그가 길에 오가면 비록 삼척동자라도 반드시 ‘잡채 판서’라 손가락질하면서 너나없이 침 뱉고 비루하게 여겼다. (광해군일기[중초본] 즉위년 12월 10일)


이충은 진기한 음식을 만들어 사사로이 궁중에다 바치곤 했는데, 【사관 왈: 왕은 식사 때마다 반드시 이충의 집에서 만들어 오는 음식을 기다렸다가 수저를 들곤 했다.】 당시에 어떤 사람이 다음과 같이 시를 지어 조롱하였다.

사삼 각로의 권세가 처음에 중하더니

잡채 상서의 세력은 당할 자 없구나.

여기에서 각로는 한효순韓孝純을, 상서는 이충을 지칭하는 것이었다(한효순의 집에서는 사삼沙參(더덕)으로 밀병蜜餠(꿀떡)을 만들었고, 이충은 채소에다 다른 맛을 가미하였는데, 그 맛이 희한하였다). (광해군일기[중초본] 11년 3월 5일)


당대의 풍자시에 의하면, 광해 초년에는 한효순이 더덕 꿀떡으로 임금의 총애를 입어 정승이 되었는데, 말년에는 이충이 잡채 덕분에 판서 자리에 올라 그 위세가 대단했습니다. 그리고 이후 유배지에서는 모시는 노비마저 식욕에 충실한 광해군을 얕보았다는 기록까지 남은 것이지요. 실리외교를 추구했다는 평가와 동떨어진, ‘음식로비’에 약했다는 광해군의 이야기가 낯섭니다. 그런가 하면, 그 음식들이 얼마나 맛있었기에 지존의 자리에서 누릴 만큼 누렸을 사람이 반했을까 그 맛이 궁금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의할 점은 ‘잡채’가 현재의 형태와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현재 흔히 먹는 잡채는 당면이 주재료인데요. 이 당면은 약 100년 전에야 우리 음식에 등장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조리서이며 17세기에 저술된 『음식디미방飮食知味方』의 잡채에는 당연히 당면이 들어가 있지 않겠지요. 이 책에 따르면 잡채는 ‘나물 모음’에 가깝습니다.


앞으로 이틀 후인 8/11이 말복입니다. 올해의 마지막 복날이라 생각하니, 상투적인 삼계탕 말고 다른 음식이 먹고 싶어지는데요. 땀으로 배출된 무기질을 보충하고, 피로회복과 체온하강을 돕는 채소. 이 채소로 만든 잡채를 이번 복날 메뉴로 삼아볼까 합니다.


* 참고문헌 :

1. 『공사견문록公私見聞錄』

2.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3. 동아일보, 2017-04-05, 「[황광해의 우리가 몰랐던 한식]잡채에는 당면이 없었다」.


(사진 : 동아일보)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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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23에 강의한 내용입니다.

세종 5년은 매해 연잇는 가뭄과 흉작의 축적으로 인해, 흙을 파먹는 백성들이 있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던 시기입니다.

그래서 저는 열쇠말로 ‘경세제민經世濟民’을 제시하였습니다.

경세제민이 현재 우리가 많이 사용하는 '경제Economy'의 원어라는 사실을 아시는지요?

'세상을 잘 다스려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함'을 가리키던 말이 이제는 경기, 경제활동, 절약 등으로 의미가 한정된 점이 씁쓸합니다.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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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2(토)에 신청서 마감 및 검토를 마친 후, '통通'을 받은 분들께 직접 알려드릴 예정입니다.

세종을 포함한 옛 왕들은 책문을 통해 국정 운영에 도움이 될만한 말을 청취하고자 하였습니다.

여러분께서 제출해주실 신청서가 [실록공감], 세종, 공부 등에 대해 경청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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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11 [실록공감-나와 세종을 실록하다] 시간에 강의했던 내용을 첨부합니다.

세종실록을 본격적으로 읽어나가기 전에 우선, 태종이 겪었던 일들을 간략하게 소개하였습니다.

'성군 세종'이 아닌, '인간 이도'로 바라보기 위해서는, 세종에게 영향을 준 인물인 아버지 태종을 소개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양녕에서 충녕으로 세자를 변경하고, 그 바로 두달 여 만에 왕이 교체되는 빠른 호흡의 사건과 인물 등을 다루었습니다.

1418년 스물 두 살의 젊은 왕 세종, 그리고 그를 왕으로 훈련시키는 태종의 입장에서, 그 한 해를 돌아보며 '열쇠말(키워드)'을 '통痛'으로 맺음하였습니다.

태종도 세종도 아픈 한해였겠다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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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적인 가뭄이라는 뉴스가 연이으며, 기우제를 지내야 하는 것 아니냐는 걱정까지들 했는데, 어제부터 반가운 비가 내려준다.

그야말로 희우喜雨가 아닐 수 없다.

이 반가운 비, 사람들을 기쁘게 해주는 비, 즉 희우라는 이름의 정자가 현재의 합정동에 있었으며, 심지어 그 이름을 세종께서 지으셨다는 기사가 <세종실록>에 남아 있다.


임금이 (농사 상황을 시찰하러 나가셨는데) 홍제원洪濟院·양철원良哲院에서 영서역迎曙驛 갈두 들에 이르기까지 고삐를 잡고 천천히 가는 길에 ·보리가 무성한 것을 보고, 임금이 흔연히 기쁜 빛을 띠고 정자 위에 올라 잔치를 벌이는데, 마침 비가 좍좍 내려서 잠깐 사이에 들에 물이 흡족하니, 임금이 매우 기뻐서 이에 정자의 이름을 희우정喜雨亭이라고 지었다. (세종실록 7년 5월 13일) 


희우정이라는 이름은 실록에 그 유래가 기록되어 있지는 않다. 

하지만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인 두보甫(712-770)의 시 <춘야희우春夜喜雨(봄밤에 내리는 반가운 비)>에서 따온 것으로 추정한다.

역시 당송팔대가로 평가되는 두 사람, 즉 구양수歐陽修(1007-1072)와 소식蘇軾(1037-1101)의 편지를 엮은 책인 <구소수간歐蘇手簡>을 세종께서 어린 시절에 독파하셨다는 실록의 기사(세종실록 5년 12월 23일단종실록 1년 6월 13일명종실록 1년 6월 9일)를 보면 개연성은 충분하다고 본다. 


節 좋은 비는 시절을 알아
生 봄이 되니 이내 내리네.
夜 바람 따라 몰래 밤에 들어와
聲 촉촉히 만물을 적시네, 소리도 없이.

黑 들길은 구름이 낮게 깔려 어두운데
明 강 위의 배만 홀로 불빛만 밝네.
處 새벽에 붉게 젖은 곳을 보니
城 꽃들이 겹겹이 금관성에 피었네.


<춘야희우>는 조선 후기의 문인 화가인 심사정(, 1707-1769)의 그림에 일부가 화제畫題로도 적혀 있다.

<강상야박도江上夜泊圖(강 위에서 밤에 정박한 (배의) 그림)>의 상단에서 黑 가 보인다(고 한다. 찾은 그림마다 상단이 잘려서 전체가 내 육안으로 확인되지는 않는다).

심사정의 불행했던 가정사를 생각하면 '희우'라는 단어가 어울릴까 싶다가도, 그렇게 예술은 승화되는 것인가 보다 하는 생각도 든다.

(1747년, 국립중앙박물관)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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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5일 오후 6시에 국립한글박물관 강당에서 진행되는 <세종, 풍류를 만나다>.
문화예술감성단체 여민이 준비하고, '세종이야기꾼' 오채원이 들려드리는 실록 속 이야기들, 그리고 그를 표현한 음악으로 1시간을 채울 예정입니다.

딱딱한 역사를 벗어나 '인간 세종'을 만날 수 있는 기회이지요.

세종이 세자로 간택되고 즉위식을 올리는 장면을 묘사한 창작곡, 훈민정음해례를 재해석한 랩 등 다른 곳에서 접하기 힘든 곡들을 들을 수 있습니다.
세종 탄신 620돌을 맞이하는 날이자 스승의 날인 5월 15일, '겨레의 스승' 세종을 만나러 오셔요.


* 관련 기사 :

https://goo.gl/ovuhVq

https://goo.gl/3F3HxH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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