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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채원연구소공감]대표 :: 세종이야기꾼 :: 실록연구자 :: 소통 디자이너 :: 010-8014-7726 :: chewonoh@gmail.com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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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미국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영부인인 미셸 오바마가 한 연설이 화제이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가장 잘 한 일이 미셸과의 결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예전부터 해왔었는데, 역시나 이번에도 그녀는 적시에 홈런을 때려줬다. 

그녀의 연설을 뉴스에서 토막토막 접하다가 전문을 찾아보니, 정치인이 아닌 나도 새기고 싶은 구절들이 여럿 있다.


"누군가가 잔인하게 타인을 괴롭힐 때, 그와 같은 수준으로 비열해져서는 안된다는 것을, 우리의 모토는 그들이 낮은 곳을 향할 때 오히려 높은 곳을 향하는 것임을 (딸들에게)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는 결코 쉬운 길을 선택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힐러리 클린턴은 그의 삶에서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결코 도망치지 않았습니다."

"힐러리 클린턴과 같은 지도자들은, 담대하고도 영예롭게, 가장 높고 단단한 유리 천장에 계속 돌진하여 균열을 내 왔습니다. 비로소 유리천장을 깨고 우리 모두를 끌어올려 주었죠."


나를 깎아내리는 이에게 나의 존엄성을 어떻게 보일 것인가, 주어진 소명을 나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다시 생각해본다.

아래에 연설의 한국어 번역 전문을 덧붙인다.


(사진 출처 http://goo.gl/xJHEFd)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제 남편이 왜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를 말씀드리기 위해 이 전당대회 자리에 처음 섰던 게 벌써 팔 년 전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군요. 그의 성격과 신념에 대해, 그의 품격과 품위에 대해 제가 무어라 말씀드렸는지 기억해보세요. 그가 백악관에서 이 나라를 위해 봉사하는 동안 매일 보아왔던 것들이죠.

또 제 딸들에 대해서도 말씀드렸었죠. 그들이 얼마나 우리의 마음 깊숙히 존재하는지, 또 우리의 세계 중심에 존재하는지를요. 백악관에서의 시간 동안 그들이 명랑한 소녀에서 진중한 여성들로 자라나는 것을 보며 정말 행복했습니다. 워싱턴에 도착해 그 아이들이 새 학교에 처음 등교했던 그 날로부터 말이죠.

결코 잊지 못할 거에요. 어느 겨울날 아침, 전 일곱 살, 열 살 난 우리 딸들이, 총을 가진 커다란 남자들이 탄 검은 SUV로 달려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있었어요. 그 아이들은 작은 얼굴을 창문에 바짝 가져다 대고 있었죠. 그때 제가 생각할 수 있는 건 하나 뿐이었어요. “우리가 무슨 짓을 저지른 거지?” 그래요, 그 때, 나는 백악관에서의 시간들이 그 아이들이 어떤 사람이 될지 결정하는 토대가 될 것임을, 이 경험을 어떻게 잘 관리해나가느냐 하는 것이 이 아이들을 만들어갈수도, 부수어버릴 수도 있단 것을 깨달았던 거에요.

버락과 제가 우리 딸들을 스포트라이트 속의 비일상적인 생활 속에서도 이끌어주고 또 보호하려 노력하면서 매일같이 생각해왔던 것이에요. 어떻게 그들이 아버지의 시민권이나 종교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지나갈 수 있게끔 할 수 있을까? 어떻게 TV에서 공공연히 들리는 혐오 발언이 이 나라의 진정한 정신을 대변하지 않음을 말해줄 수 있을까? 어떻게 누군가가 잔인하게 타인을 괴롭힐 때, 그와 같은 수준으로 비열해져서는 안된다는 것을, 우리의 모토는 그들이 낮은 곳을 향할 때 오히려 높은 곳을 향하는 것임을 설명할 수 있을까?

우리는 우리 아이들이 우리가 발음하는 모든 말들과, 우리가 취하는 모든 행동들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요. 부모로서 우리는 그들의 가장 중요한 역할 모델이죠. 버락과 저는 대통령과 영부인으로서도 같은 접근을 하고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군요. 우리의 말과 행동들은 비단 우리 딸들 뿐 아니라, 이 나라의 모든 아이들에게 영향을 끼치니까요. “TV에서 당신을 봤어요. 학교에서 당신에 대한 리포트를 썼어요.” 라고 말하는 아이들 말이죠. 남편에게 “내 머리도 아저씨 머리랑 똑같나요?”라고 물어보던 바로 그 때 그 희망으로 눈이 초롱초롱했던 흑인 꼬마 소년처럼 말이죠.

실수해선 안 됩니다. 다가오는 11월에, 우리가 투표소에서 결정해야 할 건 민주당이나 공화당이냐, 좌파냐 우파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뇨, 이번 선거는, 또한 모든 선거는, 다가올 사 년, 혹 팔 년의 시간동안 누가 우리 아이들의 모습을 빚어갈 힘을 갖게 될지를 결정합니다. 그리고 이번 선거에서, 그런 책임에 있어 저는 단 한 사람만을 신뢰하기에, 단 한 사람만이 미국의 대통령으로서 증명되었다는 것을 믿기에 이 자리에 섰습니다. 우리의 친구, 힐러리 클린턴입니다.

저는 이 나라를 이끌어갈 사람으로서 힐러리를 신뢰합니다. 그는 평생을 이 나라의 아이들을 위해 헌신해왔습니다. 훌륭하게 양육해낸 그 자신의 딸 뿐 아니라, 대변자를 필요로 하는 모든 아이들을 위해서 말입니다. 갱단을 피해 긴 길을 돌아 학교에 가야 하는 아이들. 대학에 갈 형편이 될지를 걱정하는 아이들. 부모님이 영어는 쓸 줄 몰라도 더 나은 삶이란 꿈을 가진 아이들. 스스로 어떤 존재가 될 수 있는지를 결정하기 위해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아이들을 위해서 말입니다.

아시다시피, 힐러리는 수십 년간 그들의 삶에 진짜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 보상받기 힘든 일을 끈질기게 계속해 왔습니다. 젊은 변호사로서 장애 아동들을 변호해왔죠. 영부인으로서 아이들의 건강보험 문제를 위해, 상원의원으로서 더 나은 아동 보육 제도를 위해 싸웠습니다. 8년 전 그는 후보로 지명되지 못했지만, 화를 내거나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힐러리는 짐을 싸서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진정한 공인으로서, 힐러리는 그것이 자신의 개인적인 열망이나 실망보다 훨씬 큰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다시금 자랑스럽게 앞으로 나와 국무장관으로서 이 나라에 봉사했으며, 우리의 아이들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하여 세계를 돌아다녔습니다.

그리고 보십시오, 업무가 과중하다, 공직에 봉사하는 댓가가 너무 크다, 외모가 어떻고 말하는 게 어떻고, 심지어 웃는 게 어떻고 하며 조목조목 비판당하는 게 너무 피곤하다 할 순간들이 힐러리에게 얼마나 많았었는지를요. 제가 힐러리를 가장 존경하는 점은, 그가 결코 그런 압력에 굴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결코 쉬운 길을 선택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힐러리 클린턴은 그의 삶에서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결코 도망치지 않았습니다.

제가 제 딸들과 또 모든 아이들을 위해 필요한 대통령상에 대해 생각할 때, 바로 그것이 제가 원하는 것입니다. 전 굴하지 않을 검증된 힘을 가진 사람을 원합니다. 대통령의 일에 대해 잘 알고 또 엄숙히 수행할 사람. 대통령이 마주할 문제란 흑백 논리로 재단할 수 없으며, 140자로 압축할 수도 없다는 것을 이해하는 사람을요. 당신의 손가락 끝에 핵무기 코드가 있고 당신에게 군 지휘권이 있다면, 결코 섣불리 결정을 내려서는 안 되겠죠. 민감하거나 과격해서는 안 될 것이구요. 침착하고 심중하며 많은 정보를 꿰고 있어야 해요.

전 공공을 위해 봉사해온 대통령을 원합니다. 그가 해왔던 일들이 우리의 아이들에게, 우리가 자신의 명예와 부만을 추구하지 않음을, 모두가 함께 성공할 기회를 갖기 위해 싸우고 있음을 증명할 사람이요. 우리가 힘들  때조차도, 우리보다 힘든 사람이 있음을 알기에, 신의 은총이 없었다면 나 또한 그리 될 수 있었음을 알기에, 우리가 가진 것을 나눌 것임을 증명할 사람을요.

전 우리의 아이들에게, 이 나라의 모든 사람들이 중요하단 걸 가르쳐줄 수 있는 대통령을 원합니다. 우리의 건국자들이 추구해온 이상을 진실로 믿는 대통령을요. 우리는 모두 평등하게 창조되었고, 위대한 미국의 이야기의 중요한 구성원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위기가 닥쳤을 때도, 우리는 서로에게 등을 돌리지 않을 것이라는 걸 말입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귀기울일 겁니다. 서로에게 기댈 것입니다. 우린 늘 함께이기에 강해져왔으니까요.

그리고 저는 힐러리 클린턴이 바로 그런 대통령이 될 것임을 알고 있기에, 오늘밤 이 자리에 섰습니다. 그게 바로, 이번 선거에서, 제가 그를 지지하는 이유입니다.

아시다시피, 힐러리는 대통령이란 자리는 하나, 유일한 단 하나를 위한 자리임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아이들에게 더 나은 무언가를 물려주는 것입니다. 우린 늘 그렇게 이 나라를 진보시켜왔습니다. 우리 모두가 함께 우리 아이들을 키워왔습니다. 스포츠 팀을 지도하고, 일요일 학교반을 가르치기 위해 자원봉사에 나섰죠. 아이 하나를 키우기 위해선 마을 하나가 필요하단 걸 알고 있었으니까요.

인종과 종교를 불문하고, 자유라는 은총을 물려주기 위해 유니폼을 입고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는 영웅들이 있었습니다.  달라스의 경찰관들과 시위대들은 모두 우리 아이들의 안전을 필사적으로 지키려 했습니다. 올랜도에서 사람들은 그 클럽에 있던 것이 자신의 아들딸일 수도 있었음을 알았기에, 헌혈을 위해 줄을 늘어섰습니다.

팀 케인과 같은 지도자들은, 품위와 헌신이 무엇인지를 우리 아이들에게 보여주었습니다. 힐러리 클린턴과 같은 지도자들은, 담대하고도 영예롭게, 가장 높고 단단한 유리 천장에 계속 돌진하여 균열을 내 왔습니다. 비로소 유리천장을 깨고 우리 모두를 끌어올려주었죠.

이것이 바로 이 나라의 이야기입니다. 오늘밤 절 이곳으로 이끈 이야기입니다. 여러 세대에 걸쳐 사슬의 아픔, 예속의 치욕, 분리 차별의 고통을 겪었으나, 투쟁하고 소망하기를 멈추지 않았으며 필요한 일들을 해왔던 이야기입니다. 오늘날, 저는 매일 아침 노예들에 의해 세워진 집에서 일어납니다. 그리고 제 딸들, 두 명의 아름답고 지적인 흑인 여성들이, 백악관의 잔디밭에서 강아지들과 놀아주는 걸 바라봅니다. 그리고 힐러리 클린턴 덕분에, 제 딸들은, 우리의 모든 아들들과 딸들은, 여성이 미국의 대통령이 될 수 있음을 당연하게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누군가가 이 나라가 위대하지 않으며, 다시 위대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말하지 못하게 하세요. 왜냐하면 바로 지금, 이곳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나라이니까요. 제 딸들은 세상으로 나갈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전 바로 그런 진실에 합당한 지도자를 원합니다. 제 딸들과 우리의 모든 아이들을 위한 약속에 어울리는 지도자를 원합니다. 매일을 사랑과 소망과, 우리 모두의 자녀들을 위한 큰 꿈에 의해 인도받을 지도자를 원합니다.

그러니 이번 선거에서, 우리는 가만히 앉아 모든 것이 제대로 돌아가기를 바랄 수는 없습니다. 피곤해하고, 좌절하고, 냉소적으로 굴 여유가 없습니다. 지금부터 11월까지, 우리는 8년 전, 그리고 4년 전 했던 일을 다시금 해내야 합니다. 모든 문을 두드려야 합니다. 모든 표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열정과 힘, 이 나라를 향한 사랑의 마지막 한 푼까지 모두 쏟아내어 힐러리 클린턴을 미합중국의 대통령으로 뽑아야 합니다.

일을 시작합시다. 모두 고맙습니다. 신의 축복을. 


* 한국어 번역문의 출처 http://goo.gl/WzRiLC 


* 영어 전문 및 동영상 http://goo.gl/xJHEFd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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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하는 최초의 '한글 의궤'로 평가 받는 정리의궤(整理儀軌)에 대한 기사를 접했다(http://goo.gl/ceinxJ). 실록에는 정리의궤와 관련하여 어떠한 기사가 있을까 궁금하여 찾아보았다.

(경인일보 2016-07-15) 


영의정·예조 판서·장용위 제조·정리소(整理所) 의궤 당상(儀軌堂上)을 소견(召見)하였다. 상[정조]이 이르기를, "자궁[모친 혜경궁 홍씨]께서 회갑을 맞는 탄신일이 머지 않으니 아랫사람의 심정으로서는 마냥 기뻐 축하드리고 싶을 뿐이다. 그런데 연회나 진하하는 의식에 대해서는 자궁께서 옛날 일을 슬퍼하시어 한결같이 굳게 거절하고 계시니 규례처럼 하기에 어려운 점이 있다. 따라서 아랫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매우 섭섭하기는 하지만, 만약 진하나 연회와 같은 이름은 붙이지 않고 실제로 축하드리고 잔치를 베푸는 일을 행한다면, 내가 어버이의 뜻을 따르는 도리에 있어서나 경사를 축하하는 방도에 있어 어찌 양쪽 다 온당하게 되지 않겠는가.마땅히 18일에 치사(致辭)를 직접 올릴 것이며 표리(表裏)와 전문(箋文)도 직접 올리겠다. 그리고 음식 차리는 일도 그날 행할텐데, 찬품(饌品)에 대해서는 일찍이 현륭원(顯隆園)에 행차했을 때 정리소(整理所)에서 차려 올렸던 예가 있으니, 이번에도 본영(本營)에서 거행하되 제조(提調)가 잘 살피도록 하라. 자궁의 내·외 친족으로서 이번에 반열에 참여시킬 대상자는 동성(同姓) 10촌(寸)과 이성(異姓) 6촌으로 제한하라. 그러나 홍희영(洪喜榮) 부자는 모당(慕堂)을 받들어 제사올리는 사람인만큼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점이 있으니 그들도 자리에 참여토록 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정조 19년 6월 7일)



정리주자(整理鑄字)가 완성되었다. 전교하기를, "우리 나라에서 활자로 책을 인쇄하는 법은 국초(國初)부터 시작하여 태종조(太宗朝) 계미년에 경연에 소장하고 있던 고주본(古註本) 《시(詩)》·《서(書)》·《좌전(左傳)》의 글자를 대본으로 하여 이직(李稷) 등에게 명해서 10만 자를 주조하게 하였으니, 이것을 계미자(癸未字)라고 한다. 세종조(世宗朝) 경자년에는 이천(李蕆) 등에게 명하여 이를 고쳐 주조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경자자(庚子字)이고, 갑인년에는 경자자가 섬밀(纖密)하다는 이유로 경연에 소장하고 있던 《효순사실(孝順事實)》·《위선음즐(爲善陰隲)》 등의 책을 내다가 이를 자본(字本)으로 삼아김돈(金墩) 등에게 명하여 20여 만 자를 주조하였으니, 이것이 갑인자(甲寅字)인데 이를 사용한 지 3백 년이 되었다. 내가 임진년에 동궁에 있으면서 대조(大朝)에 앙청하여 대내에 있던 갑인자로 인쇄한 《심경(心經)》 《만병회춘(萬病回春)》 두 책을 내다가 이를 자본으로 삼아 5만 자를 주조하여 보관하였으니, 이것이 임진자이다. 내가 즉위한 원년인 정유년에는 관서백(關西伯)에게 명하여 본조 사람 한구(韓構)의 글씨를 자본으로 삼아 8만여 자를 주조하게 하여 역시 내각(內閣)에 보관하였다. 대체로 전후로 주조한 활자의 동체(銅體)가 일정하지 않아서 인쇄하려면 젖은 종이를 써서 고르게 붙이고 한 판을 찍을 때마다 별도로 몇 사람을 세워서 주묵(朱墨)으로 활판의 형세에 따라 교정을 하게 하는데도 오히려 비뚤어지는 염려가 있었으며 걸핏하면 시일이 걸리곤 하였다. 그래서 인쇄를 감독하는 여러 신하들이 누차 이를 말하였었다. 임자년에 명하여 중국의 사고전서(四庫全書) 취진판식(聚珍板式)을 모방하여 자전(字典)의 자본을 취해서 황양목(黃楊木)을 사용하여 크고 작은 글자 32만여 자를 새기어 ‘생생자(生生字)’라고 이름하였다. 을묘년에는 《정리의궤(整理儀軌)》  《원행정례(園幸定例)》 등의 책을 장차 편찬·인행하려는 계획 아래 명하여 생생자를 자본을 삼아서 구리로 활자를 주조하게 하여 크고 작은 것이 모두 30여 만 자였는데 이를 ‘정리자(整理字)’라 이름하여 규영(奎瀛) 신부(新府)에 보관하였다." 하였다. (정조 20년 3월 17일)

(경인일보 2016-07-15) 


전교하기를, "우리 나라의 경적(經籍) 인쇄는, 국초에 고려의 옛 제도를 따라서 교서관(校書館)을 두어 관장하게 하였었는데, 고려에서는 이를 비서성(秘書省)이라고 하였고, 궁예(弓裔) 때에는 금서성(禁書省)이라고 하였으니, 최초에는 궁중에 설치하였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태종(太宗)3년에 별도로 주자소(鑄字所)를 궁중에다 설치하고 고주본(古註本) 《시경》·《서경》·《좌전》을 본으로 구리로 활자를 만들어 전적(典籍)을 널리 인쇄하였으니, 이것이 또한 처음으로 글자를 주조한 유래이다. 세종조(世宗朝)에는 경자자(庚子字)·갑인자(甲寅字)가 있었고, 문종조(文宗朝)에는 임신자(壬申字)가 있었고, 세조조(世祖朝)에는 을해자(乙亥字)·을유자(乙酉字)가 있었고, 성종조(成宗朝)에는 신묘자(辛卯字)·계유자(癸酉字)가 있었다.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치평요람(治平要覽)》·《주자대전(朱子大全)》 등 책은 다 궁중에서 인쇄한 것이니, 비부본(秘府本)이라고 불리워지는 본국 초기의 판본들이 다 정밀하고 보기에 편리한 것은 까닭이 있다. 내가 동궁으로 있던 때에 교서관에 명하여 세종조 갑인자를 본으로 하여 15만 자를 주조하게 하였으니, 바로 《경서정문(經書正文)》의 인본이다. 즉위하던 해인 정유년에 관서 관찰사에게 명하여 다시 갑인자를 본으로 삼아 15만 자를 더 주조하게 하여 내각에 보관하게 하였으니, 바로 《팔자백선(八子百選)》 및 새로 인쇄한 《경서대전(經書大全)》의 인본이다. 갑인년에 직접주자(朱子)의 편지 백 편을 골라 내각에 소장되어 있는 주자(鑄字)를 가지고 인쇄하여 배포하고자 하여 창경궁에 있는 옛 홍문관을 수리하여 주자를 옮겨놓으라고 명하였었다. 을묘년 봄에 자전을 모시고 수연(壽筵)에서 돌아온 후 《정리의궤(整理儀軌)를 편찬하려고 인역(印役)을 설치하여 동으로 30만 자를 주조하였는데, 이것을 정리자(整理字)라고 한다. 먼저 《지희갱재축(志喜賡載軸)》과 전후의 갱재시(賡載詩)를 인쇄하고, 또 《어정규장전운(御定奎章全韻)》을 내려보내어 인쇄한 후 그 판각을 보관하게 하였다. 올해는 또 정유자로 《어정사기영선(御定史記英選)》을 인쇄하여 배포하였다. 어정서(御定書)의 간인(刊印)이나 활인(活印)이 있을 때마다 반드시 여기에서 했던 것은 국초부터 정해져 내려오던 법을 내가 계승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그 명칭은 내가 일찍이 지어 주지 않았기 때문에 각신들이 우선 감인소(監印所)라고 불러 왔다." 하고, 이때에 와서 국초에 설치하던 때의 옛날 호칭을 그대로 써서 주자소(鑄字所)라고 부를 것을 명하였다. (정조 20년 12월 15일)



우의정 이시수를 정리의궤청 총리 대신으로 삼았다. (정조 23년 6월 20일)


《정리의궤(整理儀軌)를 교정(校正)한 당상(堂上) 이하에게 시상하였다. (순조 28년 5월 16일)


전교하기를, "《진찬의궤(進饌儀軌)》의 수정은 《을묘 정리 의궤(乙卯整理儀軌)에 의거대로 하라." 하였다. (고종 15년 3월 13일)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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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공공정책 2016년 7월호에 게재된 글을 소개합니다.)


심통밥통(心通-通) - 측은지심, 소통 그리고 공공성


배고픈 누구라도 살을 퍼가는 뒤주

2014년 여름, 나는 쌀통을 보러 전남 구례로 떠났다. 오로지 두어 달 전에 신문에서 본 그 쌀통 하나 때문에 떠났다.

도착한 곳은 ‘구름 속의 새처럼 숨어사는 집’이라는 뜻을 가진 ‘운조루(雲鳥樓)’로, 조선 영조 때에 낙안(樂安, 현재의 전남 순천) 군수를 지낸 류이주(柳爾胄, 1726-1797) 선생이 직접 지은 자택이다. 올해로 240년 된 이 고택은 본래 아흔아홉 칸에서 현재 육십 여 칸으로 축소되었다고는 하나, 나에게는 궁궐로 느껴질 만큼 넓었다. 집 앞에는 커다란 연못이 있고, 큰사랑채의 누마루에 오르면 지리산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하지만 이런 풍광은 당장 내 관심사가 아니었다. 내가 온 목적은 쌀통을 보는 것이었으니. 나는 집 안에 들어서자마자 눈 레이더를 가동하여 목표물을 탐색했다.

드디어 발견한 ‘타인능해(他人能解)’ 뒤주. ‘(집안 사람 외의) 다른 사람도 열 수 있다’는 뜻을 담은 한자 넉 자가 마개에 쓰인 덩치 큰 통나무 뒤주이다. 배고픈 이는 누구나 쌀을 퍼갈 수 있도록, 이 댁의 주인장은 큰 집, 그리고 큰 뒤주에 어울리는 큰 마음을 베풀었던 것이다. 덕분에 대대로 며느리들은 쌀 두 가마니 반이 들어가는 이 뒤주가 비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 숙제였다고 한다. 그리고 현재는 관람객들이 보기 쉽도록, 뒤주를 행랑채에서 안채로 통하는 길목에 놓아두었지만, 예전에는 사랑채의 헛간 안에 두어, 쌀을 퍼가는 이가 집 안 사람들과 마주치지 않도록 했다고 한다.


(뒤주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도록 옆에 선 필자. 뒤주의 정면 하단에 위치한 마개에는 세로로 ‘他人能解’라고 쓰여 있다.)


낮은 굴뚝의 의미

타인능해 뒤주 곁에서 한참 시간을 보내고 있으려니, 5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한 남성이 다가왔다. “뭐하는 분이요?” 뒤주의 나뭇결을 손으로 쓰다듬고, 뚜껑을 열어 속을 들여다보고, 이리저리 사진을 찍고, 내력이 적힌 표지를 찬찬히 읽는 내가 유난스러워 보였나보다. 설명을 붙이기 귀찮아서 학생이라고 답했다. “내가 하나 더 보여드리리다. 따라오쇼.” 잠시 당황하다가 이내, 처음 본 아저씨를 따라 집의 더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여기에서 굴뚝을 찾아보쇼” 아니, 사람을 대청 앞에 세워두고는 굴뚝을 찾으라니. 황당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니 섬돌 밑에 뚫린 벽돌 반만한 구멍을 가리킨다. “내가 문화재 수리하러 전국을 다니는 사람이라 이런 집을 잘 알지. 아가씨가 하도 열심이길래 내가 특별히 알려주는 거요.” 알고 보니, 그는 이 고택을 수리하던 중에, 학습 모드인 나를 보고는 보충 학습까지 시켜준 것이었다.


(굴뚝의 높이를 가늠하기 위해 앉은 필자)


예전부터 궁궐의 굴뚝이 낮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땔거리, 먹을거리가 없는 백성들에게 보일세라, 밥 짓는 연기가 높이 올라오지 않도록 한 것이라지. 그런데 이렇게 꽁꽁 숨어 있는 굴뚝은 처음 보았다. 불을 땔 때마다 매운 연기가 방 안으로 들어오거나 마당에 자욱해서, 집 안 사람들이 불편했겠구나 싶었다. 그나마 장점이라면 모기 등의 날벌레가 자동 퇴치된다는 정도일까?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기록을 보면, “채찍으로 호랑이를 쫓아낼”만큼 용맹했다는 운조루의 주인장 류이주 선생의 이야기가 나온다. 


총융사 홍봉한이, 영남의 무인인 류이주가 용기와 힘이 뛰어나서, 일찍이 조령[현재의 문경새재]에서 채찍으로 호랑이를 쫓아냈다고 장하게 여기며 말하였다. 그러자 임금[영조]이 류이주를 대궐로 불러, 조령에서 호랑이를 쫓아낸 상황을 말하도록 하였다. 또한 그에게 병법서를 읽도록 시키고, 등용을 명하였다. [摠戎使洪鳳漢盛言嶺南武人柳爾冑, 勇力絶人, 嘗於鳥嶺以鞭逐虎, 上命爾冑入侍, 使陳鳥嶺逐虎狀, 又使讀兵書, 仍命調用。] (영조실록 31년 2월 2일)


배곯는 이에게는 호랑이보다 더 무서웠을 배고픔을, 류이주 선생과 그 자손들은 채찍대신 따뜻한 밥으로 쫓아내려 한 것이 아닐까? 타인능해 뒤주와 낮은 굴뚝으로 대변되는, 처지가 어려운 이와 함께하는 마음 덕분에, 동학혁명·여순사건·한국전쟁 등 한국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겪으면서도 이 집은 온전했다고 한다. 남을 살리면서 나도 사는 상생의 선순환인 셈이다.


하늘과 땅, 그리고 소통

이왕 여행담을 꺼낸 김에, 하나 더 소개하고자 한다. 필자는 최근에 강원도 고성(高城) 죽왕면 오봉리에 위치한 왕곡(旺谷)마을에 다녀왔다. 대체로 200여 년 전에 지어진 기와집·초가집 60여 채에 주민들이 조상대대로 거주해오고 있는 이곳에는 한옥교회인 ‘오봉교회’가 있다. 이곳의 입구에 들어서면 나무 음각 십자가를 만날 수 있는데, 땅을 디디고 있어 사람들 가까이 낮은 곳으로 임한 예수를 형상화한 것으로 보인다. 30여 년간 이곳에서 목회를 해 오신 장석근 목사님께 이 음각 십자가의 의미에 대해 여쭈었다. “음각이라 내가 십자가가 될 수 있죠.” 우리 일행은 뚫린 십자가 모양에 자신의 몸을 대보았다. “위가 터진 것도 의미가 있어요. 하늘과 통하잖아요.”


(교회 입구에 서 있는 나무 음각 십자가)


주역(周易)의 태(泰)괘를 닮았다. 태괘는 괘상(卦象)이 건하곤상(乾下坤上), 즉 하괘(下卦)가 하늘을 의미하는 건(乾 ☰), 상괘(上卦)가 땅을 의미하는 곤(坤 ☷)으로 구성되어 있다. 땅이 위에, 하늘이 아래에 있으니 제 자리를 잃어 잘못된 것처럼 보이지만, 옛사람들은 달리 생각했던 모양이다. 본래 하늘의 기인 양기(陽氣)는 위로 올라가는, 그리고 땅의 기인 음기(陰氣)는 아래로 내려가는 성질이 있다. 하늘을 아래로 두니 위로 올라가려 하고, 땅을 위로 두니 아래로 내려가려 한다. 옛사람들은 이렇게 두 기운이 움직이며 교감하고 소통하여 조화를 이룬다고 보았다.

흔히 음과 양을 대립적인 관계로 간주한다. 그러나 이들은 서로 의존적인 상의(相依) 관계이기도 하다. 음이 없으면 양이 있을 수 없고, 또 양이 없으면 음이 있을 수 없다. 음 또는 양의 독립 개체로는 생명의 생성이 불가능하고, 반드시 양자의 감응과 변화의 과정 속에서만 가능하다. 마치 남성과 여성이 만나야 생명을 잉태할 수 있으며, 자석이 N극과 S극의 다른 극끼리 만나면 붙는 것처럼 말이다. 결국 태괘는 소통·조화·만사형통을 의미하기에 이른다.

또 하나, 괘의 모양을 보아서도 윗부분이 뚫려서, 하늘과 통한다는 의미 또한 갖는다. 이처럼 땅에 뿌리를 박은 오봉교회의 십자가는, 자신과 이질적인 하늘에게 마음을 열고 소통하는 모습을 형상화 한 것으로 보인다.

목사님과 자연, 철학, 소통 등등에 대한 담소를 나누다가 어느덧 30분 정도 시간이 흘렀고, 뒷일정을 위해 우리는 교회를 나서야 했다. “줄 건 없고......” 목사님은 교회소식지를 두 장 쥐어주셨다. 얇은 A4용지를 반 접은 소식지는 군데군데 비뚤한 손 글씨가 보이고, 옛날 야학의 ‘가리방 등사기’로 찍은 듯 볼품없었다. 집에 와서 펼쳐보니, 그 흔한 광고는 찾아볼 수 없고, 주로 생명에 대한 글만 띄엄띄엄 실려 있다. 그 중, 기독교 신자가 아닌 내게도 울림이 있는, 내 배를 채울 때마다 배곯는 이웃을 생각할 것을 요청하는 <오봉교회 밥기도>를 적어본다.


한 방울의 물에도

하늘과 땅이 어울려 있고,

한 톨의 낟알에도

온갖 숨결이 담겨 있으니

이 밥을 고마움으로 받습니다.


가난한 이웃을 그리며

많은 가운데에서도 알맞게 떠서,

천천히 꼭꼭 씹어서

공손히 먹겠습니다.


이 밥이 우리를 살리듯

우리도 세상의 밥이 되겠습니다.

우리의 밥이신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 아멘


밥에 담긴 마음

끼니 걱정하는 이가 줄었다는 요즘도 우리는 여전히 이렇게 인사한다. “아침 먹었어?”, “밥은 먹고 다니니?”,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적당히 해”. 이처럼 우리네 ‘밥’에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이 담겨 있다.

맹자(孟子)는 성선(性善)의 근거로서 “사람에게는 차마 타인의 불행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마음이 있다” 면서, 다음과 같은 예를 들었다. “지금 사람들이 갑자기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져 들어가려는 것을 본다면, 모두 깜짝 놀라며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길 것이다. 이는 그 아이의 부모와 친해 보려고 해서 그런 것도 아니고, 마을 사람이나 친구들에게 칭찬을 받기 위해서 그런 것도 아니고, 또 구해 주지 않는 데 대한 비난의 소리를 듣기 싫어서 그런 것도 아니다[今人乍見孺子將入於井,皆有怵惕惻隱之心。非所以內交於孺子之父母也,非所以要譽於鄉黨朋友也,非惡其聲而然也。]"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 

이 상황에서 어린아이가 아니라, 큰 돌이 우물을 향해 굴러가는 것을 본다고 가정해보자. 그래도 사람들이 동일한 반응을 보였을까? 사람들이 자동적으로 불쌍한 마음을 가지는 까닭은 우물에 빠지려는 것이 생명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맹자는 “측은지심이 없다면 사람이 아니다[人皆有不忍人之心。…… 無惻隱之心,非人也。]" (『맹자』 「공손추 상」) 라며 우리 모두에게는 생명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고 보았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행동력이다. 단순히 측은지심을 갖는 것을 넘어, 실천하려는 의지・용기가 중요한 것이다. 맹자는 그것을 ‘확충(擴充)’이라는 개념에 기대어 설명한다. 내게 있는 측은지심을 확충시킬 수 있다면 “온 세상을 지키기에 충분하고, 만약 그것을 확충시키지 못한다면 자기 부모를 섬기기에도 부족하다[凡有四端於我者, 知皆擴而充之矣, 若火之始然, 泉之始達. 苟能充之, 足以保四海, 苟不充之, 不足以事父母。]" (『맹자』 「공손추 상」) 고 했다. 자신의 착한 마음을 발견하고, 가까운 사람들과 소통하며 그것을 실천하고, 또 더 넓게 확장하여 세상에 가득 채우면 내 가정, 이웃, 사회, 천하가 모두 행복해 질 수 있다는 것이 맹자의 주장이다.


측은지심의 군주 세종

조선의 4대 임금인 세종(世宗, 1397-1450)은 30여 년간 측은지심을 가지고 서민의 밥을 챙겼다.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 되고, 밥은 백성의 하늘[民惟邦本, 食爲民天。]" (세종실록 1년 2월 12일)이라던 그는 재위 기간 중에 “재해와 괴이한 일이 없는 해가 없었다[災異之變, 無歲無之。]" (세종실록 7년 6월 23일) 고 한탄할 만큼 거의 매년 농사로 걱정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재위 7년 되던 해(1425년)에는 기록적인 가뭄이 들었다. 궁에서 보고만 받고 있을 수 없었던 세종은 어느 날 직접 농사 현장으로 나갔다. “이날 행차에 (호위하는 신하들 없이) 단지 당번인 경호원만 거느리고, (임금의 행차에는 꼭 대동하는) 해 가리개[繖]와 부채[扇]를 받치지 않은” 단출한 차림이었다. 돌아보다가 “벼농사가 잘 되지 못한 곳을 보면, 반드시 말을 멈추고 농부에게 상황을 물었다.” 그리고는 “점심 수라를 들지 않고 돌아왔다[是日之行, 只率入番內禁衛司禁, 勿用繖扇。 見禾稼不盛之處, 必駐馬問於農夫, 不晝膳而還。] (세종실록 7년 7월 1일). 아마도 백성들에 대한 미안함과 측은함이 컸으리라. 이와 관련해 세종실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임금[세종]이 (경복궁의) 경회루 동쪽에, 쓸모없는 재목으로 별실 두 칸을 짓게 하였는데, 주춧돌도 쓰지 않고 띠로 덮게 하였으며, 직접 명령하여 장식을 모두 검소하게 하였다. 이때부터 근정전이 아니라 별실에 기거하였는데, 문 밖에 (왕의 불편함을 염려한 보좌진이 준비한) 거적자리가 있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내가 명한 바가 아닌데, 어찌 이것을 만들었느냐? 지금부터는 내가 명한 것이 아니면, 작은 물건이라도 안에 들이지 말라."[上命於慶會樓東, 以散材作別室二間, 不用柱礎, 覆以茅草粧(飭)〔飾〕 , 悉皆親命, 務令儉素。 至是, 不御正殿而御別室, 見戶外有藁席曰 "非予所命, 何以作此? 自今非予所命, 雖少物勿納于內。] (세종실록 3년 5월 7일)


"전하[세종]께서 가뭄으로 인하여 찬을 줄이신 지가 여태까지 여러 날이라, 신들은 전하의 건강 상태가 좋지 못하실까 걱정되옵니다[殿下因旱減膳, 于今累日, 臣等恐聖候不調。]" (세종실록 18년 4월 27일)


이처럼 그는 백성들이 배를 곯으면, 자신의 처소를 초가 같은 곳으로 옮기거나, 반찬 수를 줄이는 것으로, 측은지심을 자신의 삶에 들여왔다. 한편, 세종은 사회에서 배제된 계층인 죄수에게도 측은지심을 베풀었다. 


“내가 전에는 더위를 무서워하지 않았는데, 몇 년 전부터 더위가 들기 시작하여, 손을 물에 담그니 더운 기운이 저절로 풀렸다. 이로 말미암아 생각하건대, 죄수가 옥에 있으면, 더위가 들기 쉬워서 생명을 잃는 수가 있으니, 참으로 불쌍한 일이다. 더운 때가 되거든 동이에 물을 담아 감옥에 놓고 자주 물을 갈아서, 죄수로 하여금 때때로 손을 씻게 하여, 더위 먹지 않게 하는 것이 어떠한가? 전에 이 법이 있었는지 상고하여 아뢰라[予前此不畏暑, 自年前始中暑, 以手弄水, 暑氣自解。 因念罪囚在牢獄, 暑氣易著, 或致殞命, 誠可哀也。 當其暑時, 以盆盛水置獄中, 屢更其水, 使囚人或盥其手, 俾暑氣不得着如何? 前有此法歟? 其考以啓。]" (세종실록 30년 7월 2일)


한여름의 맹렬한 더위 속에서 나의 고통을 미루어 남을 측은히 여기고, 또 그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는 마음. 이것이 측은지심의 진정한 의미일 것이다. 측은지심을 영어로 번역하면 compassion이라고 할 수 있다. 글자를 해체해보면, ‘com(함께) + pass(고통을 겪다·견디다) + ion(명사형 어미)’으로, 다시 조합해서 해석하면 ‘고통을 함께함’의 의미이다. 다른 이의 고통을 함께 느낀다는 것은 결국 ‘공감(共感)’이며, 또한 측은지심이 소통의 출발점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상대의 아픔을 공감할 수 있어야 진정한 소통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내 배가 고프다고 느끼면 동시에 남의 배고픔을 생각할 줄 아는 마음으로 소통하는 것을 나는 ‘밥통(-通)’이라 부른다. 달리 말하면,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는 측은지심을 기반으로 한 소통 ‘심통(心通)’인 것이다. 이처럼 소통은 측은지심을 타고, 자기 한 몸을 넘어 타인에게까지 세계를 확장시키는 연결고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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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

삶.사람.생각 / 2015. 8. 29. 14:48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고, 통하면 오래간다[窮則變,變則通,通則久。]." (『주역(周易)』 「계사 하(繫辭 下)」)

VS

"더 많이 변할수록 더 똑같은 것이다[ Plus ça change, plus c'est la même chose]." (프랑스 속담) (문화로 보면 역사가 달라진다』, 조한욱, 책세상문고, 2000, 51쪽.)

간판 바꾸기만 반복하는 우리나라 정당들처럼, '근본적인 변화' 없는 변화는 신뢰를 받을 수 없기에 오래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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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상을 물리고 친척들이 다 돌아간 후, 부모님은 '극장 구경'을 가셨다.

많은 집들이 그러하겠지만 아빠와 엄마는 영화 취향이 다르다.

아니, 취향을 논하기 전에, 아빠는 영화에 별 관심이 없다.

종종 혼자서도 극장에 갈만큼 영화를 좋아하시는 엄마를 따라, 아빠는 대체로 1년에 한 두 번 명절 때나 의무방어전으로 떼우신다.

그렇게 끌려가신 아빠는 영화 상영 내내 상모를 돌리고, 엄마는 그런 아빠가 이제는 창피하지도 않은 것 같더라.


그나마 요즘에는 극장 동행이 뜸하시기에 지난주에 살살 군불을 지폈다.

"연휴도 긴데, 두 분이 영화 보러 안 가세요?"

"그러게. 오랜만에 영화 보러 갑시다~"

(아빠는 자체 음소거)

그래, 서프라이즈로 영화 예매를 해드리자!

어떤 영화가 좋으려나~?


엄마는 <쎄시봉>을 원하셨지만, 아빠는 <국제시장>에 그나마 관심을 보이시더라는 정보를 입수했다.

"<쎄시봉>은 나중에 나 혼자라도 보고 오지뭐~"

그렇게 두 분은 서로서로 절충하여 '극장 구경'을 다녀오셨다.

취향, 가치관, 소통법 등 많은 것이 전혀 다른 두 사람이 만나 오랜 세월을 함께 산다는 것.

포기와 인정, 배려와 희생 그 사이 어디엔가 두 사람이 서 있기에 가능한 것일까?

한때는 엄청나게 투쟁을 했을 그들일진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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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월 세종사랑방. 세종유통분3>

 

2014년 사자성어 전미개오(轉迷開悟 : 불교 용어. 어지러운 번뇌에서 벗어나 열반의 깨달음에 이름).

교수신문은 올해 초, 속임과 거짓에서 벗어나, 진실을 깨닫고 새로운 한해를 열어가자는 의미에서 전미개오를 '2014년 희망의 사자성어'로 택한 바 있다.

 

다가오는 2015년은 을미년(乙未年)으로, 양의 해.

양과 관련된 고사성어 양두구육(羊頭狗肉 : 양 머리를 걸어놓고 개고기를 판다는 뜻으로, 겉은 훌륭해 보이나 속은 그렇지 못한 것 겉과 속이 서로 다름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음).

2014년 우리는 전미개오하지 못하고, ‘청와대 문건’, ‘땅콩회항사건 등 양두구육에 분노하며 2015년을 맞이하게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년에는 진실이 주는 감동을 느낄 수 있는 일들이 많아지기를 기원하며, 관련된 세종 말씀을 함께 나눠보고자 한다.

 

언로를 중시했기에, 신하가 면전에서 자신에게 반박하고, 때때로 불손하게 굴어도 양해했던 세종이지만, 신하의 거짓 보고와 소통 왜곡은 경계하였다.


거가(車駕)가 죽산현(竹山縣) 대민천변(大民川邊)에 머무르니, 경기 관찰사 이선(李宣)이 와서 뵈었다. 임금이 도내의 우량(雨量)과 파종한 상황, 기민(飢民)의 유무를 물으니, ()이 아뢰기를, “전달 20일 사이는 조금 가물었사오나, 22일에는 온 도()에 모두 비가 와서, 비록 흡족하지는 못하더라도 흙을 적시는 데 족하였고, 이달 초2일에는 양지(陽智)와 죽산(竹山) 같은 곳에도 비가 와서 아직은 한기(旱氣)가 없사오나, 파종은 도내 각 고을에서 혹은 10분의 1, 혹은 아직 파종하지 못했습니다. 기민(飢民)은 삼가서 유서(諭書)를 받자와 사람을 보내어 규찰(糾察)하오나, 아직은 기민이 없사옵니다.” (세종 26/5/4) (수령의 거짓 보고)

 

임금이 처음 초수(椒水)에 행행할 때에는 원근의 백성들이 거가(車駕)를 바라보고 길을 메웠더니, 돌아올 때는 한 사람도 와서 보는 자가 없었다. 임금이 승정원에 그 사유를 물으니, 이 앞서 경기 감사 이선(李宣)이 각 고을에 이첩(移牒 알림)하기를, “종량(種糧)이 부족한 인민들이 거가 앞에서 하소연할까 염려되니 현재에 있는 잡곡으로 고루 주게 하고, 그 떠들썩하게 하소연하는 자를 금하게 하라.”(입막음) 한 것이었다. 임금이 보고 승지들에게 이르기를, “이선이 백성들의 관망하는 것을 금하게 한 것은 필시 자기의 허물을 덮어 가리려는 것이겠으나, 내가 일찍이 들으니 나라에서 사람을 보내어 백성들에게 이()되는 것과 해되는 것을 살피게 하려는 것을, 수령들이 미리 효유하여 은휘(隱諱)하게 한 것을 내가 이제야 처음으로 그 실상을 알았다.” (세종 26/5/5) (소통 왜곡 시도가 탄로남)

 

이선을 파직하였다. (세종 26/5/7)

 

세종은 신하들에게만 정직을 요구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도 백성에게 진실하고자 하였다.

 

임금이 되어 아랫사람 대접하기를 이같이 공고하게 하는 것은 옳지 않다.” (세종 29/5/12) (백성을 교묘하게 속여 인기에 영합하는 일은 하지 않겠다.) (나이 어린 도적의 처벌 문제를 두고)

 

정직은 윤리성뿐 아니라 성실과도 연결된다.

 

신하된 자가 임금의 명령을 받고서 일을 할 바에는 마땅히 심력을 다해서 도모하여 기필코 성사해 내어야 할 것이니, 만약 그렇지 못한다면 그것은 임금을 속이는 것이다.” (세종 26/9/6) (평안도·함길도의 도관찰사와 도절제사에게 송골매 사냥을 독려하며)

신자(臣子)가 군부(君父)의 명령을 받아 할 일이 있으면 마땅히 마음을 다해 도모하고 반드시 성취하기를 기약하여야 할 것이니, 만일 그렇지 않게 되면 이것은 군부를 속이는 것이다.” (세종 27/7/19) (채방 별감(採訪別監)을 함길도·평안도에 보내어 해청(海靑) 사냥을 독려하며)

 

이것이 성의정심(誠意正心 : 대학(大學)8조목. 뜻을 성실히 하고 마음을 바르게 가짐) 아닐까.

세종이 생각하는 재상의 기본 덕목이 바로 성의정심.

 

임금이 좌대언 김종서에게 이르기를, “경이 최윤덕을 아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사람됨이 비록 학문의 실력은 없으나 마음가짐이 정직[操心正直]하고 또한 뚜렷한 잘못이 없으며(청문회에서 문제될 일 없음), 용무(用武)의 재략(才略)은 특이합니다.” 고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곧고 착실하여 거짓이 없으며, 근신(謹愼)하여 직무를 봉행(奉行)[直實無僞, 謹愼奉職]하므로 태종께서도 인재라고 생각하시어 정부(政府)에 시용(試用)하였노라. 그는 비록 수상(首相)이 되더라도 또한 좋을 것이다.” (세종 14/6/9) (가방끈 짧고 언변이 좋지 않지만, 추후 의정부 우의정 제수(세종 15/5/16), 좌의정 제수(세종 17/2/1))

 

공부 많이 하는 것도, 일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먼저 사람이 되어야 한다.

지금의 선비들은 말로는 경학을 한다고 하나, 이치를 궁극히 밝히고 마음을 바르게[窮理正心] 한 인사(人士)가 있다는 것을 아직 듣지 못하였다.” (세종 7/11/29)


나부터 궁리정심, 성의정심하여,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결국 평천하(平天下)되는 2015년을 기대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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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에 세종사랑방에서 강연해주신 안상수 PaTI 날개님도 인용했던 구절 '도가도, 비상도(道可道, 非常道)'. 

노자(老子)도덕경(道德經)첫 장 첫 줄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로, '를 도라고 말할 수 있으면 그것은 진정한 도가 아니다'라는 뜻이다.

도를 도라고 당연시하지 말라는 노자처럼,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것을 당연함으로 두지 않는 사람, 끊임없이 의심하는 사람을 우리는 흔히 '철학자'라고 부른다(학자, 기업가, 디자이너 등도 그러하다. 자신의 철학이 없다면 우리는 그를 학자라고, 기업가라고, 디자이너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래서 세종은 의심대마왕이고 철학자이다.

오늘 노자, 장자 전문 철학자인 최진석 교수님(서강대학교 철학과)이 오셔서 세종실록에서 노장 관련 기사를 찾아보았다. 


(세종 7/1/17)

주자소(鑄字所)에서 인쇄한 장자(莊子)를 (세종께서) 문신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세종 14/3/19) 

불교는 유도(儒道)와 더불어 양립(兩立)하여 그 내력이 이미 오래지만, 도가에서 별을 제사하는 것은 더욱 그 옳고 그른 것을 알지 못하겠다. 도가(道家)가 별을 제사하는 사유(事由)를 경(지신사 안숭선)이 옛일을 상고하여 아뢰도록 하라. 내가 장차 대신들에게 의논하려고 한다.”


(세종 7/7/15) 

도교와 불교는 모두 믿을 것이 못된다. 그런데 도사의 말은 더욱 허황하다. 우리나라의 소격전(昭格殿)의 일은 또한 도교이다. 그러나 별[]에게 제사하는 것은 큰일이므로 역대로 전해 와서 지금까지 폐하지 않았다.”

 

이처럼 세종은 의구심은 갖되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연구한다.

그는 도교 뿐 아니라 풍수지리, 수학 등 당시 주류 학문이 아닌 분야에서도 의구심을 품고 공부하고자 했다.

 

(세종 12/10/23) 

임금이 계몽산(啓蒙算 계몽산법;수학)을 배우는데, 부제학 정인지(鄭麟趾)가 들어와서 모시고 질문을 기다리고 있으니, 임금이 말하기를, “산수(算數)를 배우는 것이 임금에게는 필요가 없을 듯하나, 이것도 성인이 제정한 것이므로 나는 이것을 알고자 한다.” 하였다.

 

정인지의 도움을 받아 수학 공부를 한 것처럼, 세종은 혼자 해결하려 하지 않았다

소위 '배운 사람' 혹은 전문가라는 사람들은 독단에 빠지기 쉽다

그러나 세종은 다른 이들과 함께 소통하여 오류를 최소화하고 생각의 폭을 넓혔다

'여민가의(與民可矣백성과 함께하면 된다)'가 바로 세종의 소통 철학의 핵심이다.


(세종 12/12/20) 

경상도 감사가 아뢰기를, “토지를 다시 측량한 뒤 새로 개간한 밭을 알아내기가 매우 곤란하오니, 오래전부터 경작하던 토지의 예에 따라 세를 받아들이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어째서 알아내지 못한단 말이냐. 만일 그것이 의심스럽다면 백성과 같이 하면 될 것이니[與民可矣], 이렇게 하도록 호조에 이르라.”

 

장자(莊子)》에 나오는 제나라 환공과 수레바퀴 깎는 노인의 이야기에서 나온 말'고인지조백(古人之糟魄)'. 

장자는 옛 사람들의 이야기는 술지게미, 즉 찌꺼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는데, 여기에서 더 나아가 최진석 교수님은 '성현의 말씀은 과 같다'고 도발하셨다.

현장에서 내 몸을 부딪혀 살아있는 진실을 구하고, 전문가의 독단을 소통을 통해 해결해야 성현의 말씀이 배설물로 그치지 않고, 거름으로서 사람들에게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

이것이 '현대 철학자 세종'에게서의 울림이다(최진석 교수님의 EBS 강의 제목 '현대 철학자 노자'에서 따옴).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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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대에는 인재가 있기 마련이고, 그는 충분히 그 시대의 일을 성취해낼 수 있다. 그런데도 늘 옛사람들을 우러러보며 지금 사람들은 따라갈 수가 없고, 자질이 떨어져서 큰일을 하기에 역부족이라고만 한다. 이 역시 잘못이다. 대개 인재는 구하면 있다. 다만 구별이 쉽지 않고, 다 찾아서 쓰지 못하는 것이 염려스러울 뿐이다."

[一]

(정조正祖, 홍재전서弘齋全書卷 178, 일득록得錄 18, 훈어訓語 5)

(일득록은 정조의 개인 문집인홍재전서(弘齋全書)』에 수록된 부분으로, 得錄이라는 말 그대로 하루를 반성하고 그날 얻은 깨달음을 기록한 정조의 일기이다.)


최근에 둘이 함께 길을 걷다가 옆 사람이 천 원짜리 지폐를 줍는 것을 보았다.

처음엔 신기하다가 그 다음엔 당황스럽다가 절망스럽기까지 했다.

나도 같은 길을 걸었는데, 나도 두 눈으로 앞을 보았는데, 나는 못 본 것을 내 옆 사람은 보았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그리고는 휘둥그레진 내게 그 돈을 건넸다ㅎㅎ).

내게는 눈이 달려 있지만, '보는 눈'은 없는 것이다.

나는 눈 뜨고도 얼마나 많은 부, 기회, 사람을 놓쳤을까?


정조께서도 말씀하셨듯이, 국가와 기업에서는 인재가 없다고 하소연한다.

사실, 인재는 있지만, 그를 알아보고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리더가 없는 것 뿐이다.

우리는 주변에 좋은 사람이 없다고들 이야기한다.

하지만 작은 욕망에 가리워진 내 눈이 따라가지 못하는 것 뿐이다.

눈 씻고 귀 열고 레이다를 촤악 펼치고 주변을 둘러봐야지.

좋은 사람을 찾았다면 그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다가가야 할 것이다.

만약 내 힘만으로 관계의 발전 혹은 개선이 힘들다면, 주변에 도움을 청하고.

'용기 있는 자만이 미인을 쟁취한다'는 말은 남성이 여성에게 어필할 때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리라.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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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에서 캐럴(헬렌 헌트)이 멜빈(잭 니컬슨)에게 칭찬 한 마디 해보라고 하자, 멜빈이 끙끙대다가 한 말, "You make me want to be a better man".
여기에서 알 수 있는 몇 가지 :


1. 남자에게는 칭찬하는 것이 중노동이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가 칭찬으로서, 자신에 대한 존중을 확인시켜주길 여자는 바란다.


3. 마음만으론 관계가 유지 그리고 발전되기 힘들다. 특히 여자는 마음을 말로 표현해주기를 바란다. 
영화 <광식이 동생 광태>의 대사 "여자는 짐작만으로 움직이지 않아요." 에서 볼 수 있듯, 남자가 상대에게 품은 감정을 확실한 언어로 표현하는 것은 둘 사이에서 공증과 같은 효력이 있다.


4. 누군가가 여자에게 '당신을 위해(or 당신의 마음을 얻기 위해), 나는 더 나은 사람이 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라고 말한다면, 웬만한 여자들은 그를 감싸 안아줄 것이다. 연인 관계가 아니더라도.


경청도 습관이고, 메모도 습관이다.
즉, 훈련에 의해 몸에 익게 만들 수 있다.
표현 또한 그러하다.
주변 사람들에게 입이 비뚤어지고 귀가 닳을 만큼 표현하고 살자.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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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요즘, 세종이 어떻게 마음 챙김을 했고, 어떻게 소통을 했고, 어떻게 주변인들과 선한 영향력을 주고 받았는지에 대한 강의를 많이 합니다.

주로 실록 속에서 이야기들을 발굴하여, 교육생 분들과 소통하는 강의를 추구합니다. 

제 자신이 학창 시절에 역사, 세계사, 국사 과목을 즐기지 않았던 터라, 편안하게 스토리를 들려드리는 방식을 취하는 것이지요. 

강의 문의를 주시는 분들을 위해 안내서를 첨부합니다.


1. 세종의 셀프리더십

2. 세종의 가족 소통 이야기

3. 세종의 소통리더십


세종리더십_셀프_소통_가족_오채원연구소공감.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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