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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채원연구소공감]대표 :: 세종이야기꾼 :: 실록연구자 :: 소통 디자이너 :: 010-8014-7726 :: chewonoh@gmail.com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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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메인 기사로 게재됐습니다.

('세종이야기꾼' 오채원이 오마이뉴스에 연재 중인 '실록 읽어주는 여자' 시리즈. 이번 기사도 오마이뉴스 메인에 게재됐습니다. 기사 바로 가기 : omn.kr/1o6sh)

 

 

전 세계적인 코로나19의 창궐, 극우세력의 '역사 뒤집기', 일본의 무역 도발, 게다가 한반도 평화체제 정착의 난기류까지 더해져, 그 어느 때보다 한국 외교의 역량과 방향성에 대한 다각적인 논의가 이어지고 있는 요즘입니다. 이에 지난 기사("명나라 사대는 성심껏" 잠 못 이룬 세종의 속뜻 http://omn.kr/1o3jk)에 이어, 600년 전 조선의 외교에 대해 살펴보고 있습니다.
 
일전에 중국으로 보내는 '사람 조공'에 대해 소개한 바 있는데요("조선국에 가서 잘생긴 여자 몇 명 간택해 오라" http://omn.kr/1o05l). 조선에서는 그들 공녀(貢女) 외에 '화자(火者)'라는 부류의 사람들도 다수 중국의 황제에게 보내야 했습니다.

 

흠차내사(사신으로 파견한 환관) 한첩목아 등이 예부(중국 교육부·외교부)의 자문(외교문서)을 가지고 오니..."조선 국왕에게 알려서, 화자를 데려오게 하고...짐이 안남(베트남)에서 화자 삼천 명을 데려왔으나, 모두 우매하여 쓸 데가 없다. 오직 조선의 화자가 총명하고 민첩하여 일을 맡겨 부릴 만하다"...임금이 사적으로 한첩목아에게 말하였다. "황제의 뜻은 어떠합니까?" 한첩목아가 말하였다. "삼사백 명 선 아래로 내려가지 않을 것입니다." 임금이 말하였다. "이들은 심으면 나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많이 얻을 수 있겠습니까?" (태종실록 7년 8월 6일)

 
중국에서 온 사신이 황제의 뜻이라며 화자를 삼사백 명이나 보내라 합니다. 이에 대해 태종은 '씨를 심으면 수확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어찌 그리 많은 화자를 구할 수 있겠느냐'며 난감해 합니다.

이들의 대화에서 화자란 거세한 어린 남성으로, 중국에 데려갈 환관 후보자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왜 호칭이 화자일까요? 그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습니다. 생식기를 제거한 후 황궁에서 노역을 시키는 죄인의 남자 자손인 엄할화자(閹割火者)의 줄임말이라 보기도 하고요. 책 <세상에 버릴 사람은 아무도 없다>에서는 '남자의 성기를 거세할 때 불로 지져 마무리했다 해서 붙여진 명칭'이라고 주장합니다. 그 외에, '남자(人)'에게서 고환을 가리키는 점 두 개가 떨어져 나간 것을 형상화하여 '화(火)'자를 쓴다는 설도 있습니다.

 

19세기 조선 환관의 초상화 ‘내시진영도內侍眞影圖’. 출처 : 조선민화박물관

첨지사역원사(외국어 통번역 담당 기관인 사역원의 종4품 벼슬) 배온을 보내 어린 화자를 거느리고 북경에 가게 하였다. 그 주본(황제에게 올리는 글)은 다음과 같다. "영락 21년(1423년) 8월 18일에 흠차소감(사신) 해수가 본국(조선)에 도착하여 황제의 명을 받들어 '네가 조선국에 가서 국왕에게 말하여 서른 내지 쉰 명의 어린 화자를 뽑아서 거느리고 오라' 라고 전했으므로, 삼가 이를 뽑아 어린 화자 조지 등 스물네 명을 보내드립니다. 그 이름과 나이는 조지·김수명 21세, 임귀봉 19세, 김유·임득생·안경·김중 등은 18세, 박의·하오대·이군송 등은 17세, 이선·정융·정입 등은 16세, 최의산·이충진·김고성 등은 15세, 박수민·박전명 등은 14세, 김녹·최존자·강중·이전금·신득명 등은 13세, 이추 11세입니다." (세종실록 5년 9월 9일)

 
공녀처럼 화자도 원 간섭기부터 비롯된 '사람 조공'입니다. 위와 같이 실록에 기록되어 있어서, 조선에서 명으로 보낸 화자들의 인원과 나이 등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관련 연구에 의하면, 고려에서는 원나라로 9회에 걸쳐 100여 명, 조선에서는 명으로 15회에 걸쳐 207명의 화자를 보냈습니다.
 

고려의 환관은 본래 계보가 백성이 아니면 천민·노비였다...원 세조(世祖)에게 (고려인 환관) 몇 명을 바쳤는데, 이들은 궁궐 안에서 시중드는 일과 궁궐 재물을 관리하는 일을 매우 잘하였다. (원 황제의)...은총이 매우 후하였다...이를 선망하고 따라 배워...불과 수십 년 사이에 거세한 무리들이 매우 많아졌다. 원의 정치가 점차 어지러워지며 환관들이 권력을 장악...나라(고려)에서 (원 황제에게) 청할 일이 있을 때마다 반드시 그들의 힘에 의지...고용보 등과 같은 자들은 모두 원래의 주인(고려)을 향해 짖으며 (원 황제에게) 헐뜯고 거짓말을 꾸며 재앙을 만들어냈다. (고려사 권122, 열전35, 환자 서문)
 
예부(중국 교육부·외교부)의 자문(외교문서)..."일찍이 조선국에서 화자 수십 명을 찾아 가지고 궁 안에 들어오게 한 의도가 관직을 임명하여 궁 안에 거처하면서 여러 일을 맡아 다스리게 하는 데 있었으니, 국내(중국)와 국외에서 알지 못하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이후로부터 자주 이 사람을 사자(使者)로 삼아 본국(조선)에 나아가게 했다." (태조실록 7년 6월 24일)

 
그들은 본래 고려·조선의 천민 혹은 평민 출신인데, 영민한 덕분에 황제의 총애를 받고 고위 관직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통역을 거치지 않고도 소통이 가능하고, 우리나라와 중국 양국에 대한 이해도가 높으며, 자신이 모시는 황제의 의중을 잘 알기에, 고려·조선에 사신으로 파견되기도 했는데요. 대체로 공녀나 사냥용 매·개 등 조공품의 검수·수송을 담당했습니다. 조선 초기의 경우, 명에서 파견된 다수의 사신들이 고려인 혹은 조선인 화자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윤봉이라는 인물은 무려 열두 번이나 사신의 자격으로 조선에 왔습니다.
 

윤봉은 본국(조선)의 화자이다. 옛날 서흥(황해도 서흥군)에 있을 때에는 몹시 가난하고 천하더니, 명나라 영락제 재위 기간에 발탁되어 북경에 나아가 지금까지 황제 세 명을 모셨다. 황제를 속여 해동청(송골매)·스라소니·검은 여우 등을 잡는다는 일로 해마다 우리나라에 와서 한없이 탐욕을 부리고 제멋대로 행동했다...본국의 사람으로서 본국에 해가 되어, 우리 백성으로 하여금 응대하기에 지쳐 죽게 하였으니...옛날부터 천하 국가의 혼란은 환관들 때문인데, 황제의 명을 받들고 오는 자가 모두 이런 무리이니 중국의 정치도 알만하구나. (세종실록 14년 12월 2일)

 
위의 기록은 윤봉에 대한 사관의 평가입니다. 조선 화자 출신인 명 사신의 대체적인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데요. 신분 상승하여 조선을 방문한 그들은 자신들을 낯선 타국으로 보낸 고국에 대한 저항감 때문인지 보상 심리의 발로인지 극심한 탐욕과 행패를 부렸습니다. 황제의 명을 사칭하여 귀한 물건들을 마구잡이로 요구할 뿐 아니라, 노골적으로 사적 욕구를 채우는 일에도 꼼꼼했습니다. 노후 대책 마련을 위해 논밭과 금전 등을 달라 하고, 친인척에게 관직 하사를 요청하는가 하면, 자신의 고향을 승격시켜 달라는 등 요구가 끝이 없었습니다.

 

조선 출신 사신들의 횡포

 

대한제국 시대에 촬영한 경기개성 태평관의 사진.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윤봉이 요구한 물건이 약 이백 상자나 되었다. 궤짝 한 개를 메고 가는데 여덟 명을 부려야 하는데, 궤짝을 멘 사람들이 태평관(태평로에 있던 사신 숙소)에서부터 사현(홍제동에서 오르는 무악재)에 이르기까지 이어져 끊임이 없었다. 사신의 요구가 많은 것이 이때보다 심한 적이 없었다. (세종실록 11년 7월 16일)

 
명 사신이 조선 정부로 받은 어마어마한 물품을 공수하는 장면이 실록에 그려져 있습니다. 한 상자를 운반하는데 여덟 명이 필요하며 짐이 이백 상자이니, 인부가 무려 천육백 명이나 동원됐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사신의 숙소인 태평관이 있던 현재의 대한상공회의소에서 무악재역까지 약 3km로 측정되고요. 짐을 멘 천육백 명의 사람들이 약 3km의 긴 줄을 이루는 광경을 보며, 당시 조선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임금이 늘 (사신) 창성이 염치없이 재물 탐하는 것을 걱정했다. 이날 창성이 대언(임금 비서) 김자를 보고 성내었다. "전하는 어찌하여 내 말을 듣지 않는가." (세종실록 10년 9월 23일)
 
"명 사신 이상이라는 자는 가는 곳마다 번번이 사람을 구타한다니...창성이 영접도감의 은 식기를 훔쳐갔으며, 또 지나가는 지방에서 의자라든가 걸상 같은 물건도 좋은 것이 있으면 보는 대로 탈취해 가고, 또 민간인의 말을 빼앗아 간 것" (세종실록 11년 8월 12일)
 
임금이..."창성이 청구하는 것은 끝이 없고, 하나라도 마음에 불쾌함이 있으면 바로 조선의 관리를 매질하는 등 모욕이 지나치니, 어떻게 대처했으면 좋겠는가?"...황희와 맹사성 등이 함께 의논해 아뢰었다..."분노를 품고 원한을 쌓아서 중국 조정에다 거짓으로 호소한다면, 중국 밖에 있는 나라에서 일일이 변명하기가 어려워 훗날에 큰 걱정거리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하오니 능욕을 꾹 참고 우대하여 보내는 것이 옳겠습니다." (세종실록 11년 6월 19일)

 
조선인 출신뿐 아니라 중국인 사신도 황제의 위세를 믿고 오만방자한 행태를 보였습니다. 정부에 갖가지 물품을 요구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머물던 곳에서도 좋은 물건이 보이면 훔쳐가고, 민간인의 재물까지 빼앗아갑니다.

게다가 그들은 조정의 인사에 개입하고, 임금의 대리인인 대언 등 조선의 관료에게 서슴없이 폭력도 행사했는데, 이는 국가와 최고통수권자에 대한 모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참다 참다 대책 수립을 위한 국정 회의를 합니다. 사신들에게 논리적으로 따질지, 아니면 그들의 행태를 황제에게 알릴지 등을 놓고 수차례 토론하지만, 매번 '전략적 인내'로 의견이 모아집니다.
 
우선, 그들은 비공식 통로를 통해 중국 황제와 관료들에게 로비를 할 수 있습니다. 중국 황실과 조정의 내밀한 정보를 들을 수도 있기에, 조선 정부에 도움이 되는 측면이 있고요. 무엇보다 그들이 조선에 불리하거나 거짓된 정보를 황제에게 흘리면, 황제와 물리적 거리가 먼 조선 정부에서는 그 뒷감당이 힘듭니다. 그러니 입술을 깨물며 그들의 '갑질'을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내가 사대의 예를 함이 지나치다고들 말한다는데, 최근 중국이 매년 사신을 보내 상을 내려줄 정도로 특별히 융숭하게 대우하는 일이 일찍이 없었다"..."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들어와서 나에게 말하고, 몰래 논의하는 일은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세종실록 10년 윤4월 18일)

 
사신들의 부당한 청구를 번번이 수용하자, 사대주의적 세계관을 가진 관료 사회마저 동요합니다. 심지어 명에 대한 사대가 너무 심하다며 임금의 '뒷담화'를 하고, 이것이 세종의 귀에 들어갑니다. 하지만 태종 때부터 이어온 사대 외교의 효과는 명 황제의 '신뢰 계좌'에 차곡차곡 쌓인 모양입니다. 어느 날 황제로부터 반가운 소식이 들려옵니다.
 

황제가 칙서에서 말하였다. "이제부터 (명나라) 조정에서 보내는 환관 등이 왕의 나라에 도달하거든, 왕은 예의로만 대접하고 물품은 주지 말라. 조정에서 구하는 모든 물건은 오직 어보(황제의 도장)를 찍은 칙서에 의거해 마땅히 부쳐 보내고, 짐의 말이라며 (사신이) 말로 전하면서 구하거나,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것은 다 들어주지 말라. (조선) 왕의 부자가 (명) 조정을 공경히 섬겨 오랜 세월을 지냈으되, 갈수록 더 극진히 함을 짐이 깊이 아는 바이며, 가까이에 있는 환관들이 이간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니 왕은 염려 말라." (세종실록 11년 12월 13일)

 
사신들로 인한 곤욕을 황제도 알게 된 모양입니다. 황제의 도장을 찍은 외교문서에 기재된 청구 물품 외에, 황제의 말이라 사칭하며 사신이 요구하는 물품은 내어주지 말라는 황제의 공식 문서가 도달합니다. 그래도 안심하지 못할 것 같자, 그간 조선에서 대대로 보여 온 지성사대로 미루어 진정성을 믿으니, 환관들의 거짓에 휘둘리지 않겠다는 말까지 덧붙입니다.
 

우대언(임금 비서) 황보인에게 사신을 문안하라 명하니..."창성이 말도 하지 않고 보지도 않으며, 또 답례도 하지 않았습니다." 창성이 입국한 뒤로 높고 낮은 임금의 대리인을 볼 때마다 모두 그러했으니, 이는 모두 물품을 주지 않아서 화난 때문이었다. (세종실록 12년 7월 24일)
 
우부대언(임금 비서) 남지를 보내 사신을 문안하고..."앞서 온 황제의 칙서에서 '(사신의) 입으로 전하는 짐의 말은 모두 듣지 말라.' 하셨사오니, 사신의 말을 통해 물품을 바치는 것이 사대의 예에 합당하겠습니까?"...(사신이) "이 나라는 지극히 불손하다. 나중에 (명에 대해) 반역하려는 것이겠지?" (세종실록 12년 8월 4일)

 
사신들은 여전히 황제의 전언이라며 외교문서에 기입되지 않은 물품들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조선의 조정에서는 이전의 외교문서에, 사신이 구두로 청구하는 물품은 주지 말라는 황제의 당부가 있었다며, 이를 어기면 사대의 예에서 어긋난다는 논리로 대응합니다. 자신들이 모시는 황제의 명이니 이들도 도리가 없습니다. 조선 관료들에게 분풀이를 해대며, 꼬투리를 잡을 기회만 엿봅니다.
 

진응사(매 조공을 위해 보낸 사신)의 통사(통역사)가 북경에서 돌아와 아뢰었다. "태감(환관의 우두머리) 윤봉이 황제의 명을 전했습니다. '(조선) 왕이 지성으로 대국(중국)을 섬기는데 한 가지도 어김이 없었으며...짐이 항상 두르는 허리띠의 고리를 지금 특별히 함에 넣어 준다.'" (세종실록 12년 4월 20일)
 
임금이 가까이의 신하들에게 말하였다..."창성이...'황제께서 하사하신 허리띠의 고리를 왜 차지 않으십니까?'...이 사람이 기필코 내 과실을 찾아내서 이를 드러내려는 수작이다." (세종실록 12년 7월 28일)

 
물품 요구에 세종이 묵묵부답으로 대응하자 사신은 태세를 전환하여, 황제가 특별히 하사한 허리띠의 고리를 왜 차지 않느냐고 따집니다. 작은 실수라도 잡아내려 눈에 불을 켠 그들 때문에 대책 회의를 소집하기도 합니다. 이에 대해 세종은 정도 곧 올바른 도리에 입각해 대처하는 것이므로 당당하다고 말합니다.
 

임금이 (비서실장) 안숭선에게 말하였다..."우리나라에서 황제의 칙서를 공경히 받들어 물품 주는 것을 행하지 않은 것을 누가 그르다고 하리오. 고금과 천하에 정도로써 행하는 것을 그르다고 하는 자가 있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세종실록 13년 8월 4일)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았습니다. 우려했던 일이 벌어진 것이지요. 누군가가 조선의 매 조공이 부족하다며 황제를 부추긴 모양입니다. 황제는 중국의 지배 권역이지만 여진족이 거주해온 땅으로 사람들을 보내 매를 잡겠다며, 이때 필요한 식량과 인원 등을 제공하라고 합니다. 조선인이 섣불리 이곳에 들어가면 여진족으로부터 공격을 당할 수도 있으나, 그렇다고 황제의 명을 거스를 수도 없는 외교안보적 위기에 처한 것입니다.
 

좌대언 김종서·우대언 남지·좌부대언 송인산 등이 아뢰었다..."사신이 오는 것이 어느 해나 없을 때가 없었으며 매번 상을 내렸는데, 금년에는 유독 없으니 아마 (황제에게) 이간질의 말이 있는 모양입니다. 그들이 채포군(사냥꾼)을 보내 매와 표범을 잡으니 이것은 의심할 만한 단서입니다." (세종실록 13년 10월 16일)
 
좌대언(비서) 김종서를 불러들여 보고 말하였다..."황제가 사신을 보낼 때마다 칙서에서 (조선이 행한 지성사대의) 아름다움을 칭찬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이번 칙서에 있는 말은 마치 고아를 농락하는 것 같으니, 언제 황제가 이렇게까지 한 적이 있느냐?" (세종실록 13년 8월 19일)


원한을 품고 조선에 불리한 일을 저지르는 사신들을 구슬리기 위한 비상대책회의를 수시로 소집합니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국가와 최고통수권자의 가장 아픈 곳을 강력하게 찔러버립니다. 황제에게 바칠 매를 잡는다며 우리의 함경도에까지 군사와 사냥꾼 수백 명을 이끌고 들어옵니다. 어떻게 이간질을 했는지 황제와 쌓은 그간의 탄탄한 신뢰를 무너뜨리고, 우리의 국토주권을 짓밟은 것입니다.


세종의 정신 승리?

 

청국 사신. 출처 : 가회민화박물관

아마도 그들은 승리했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이제는 조선이 자신들의 무서움을 알리라, 그래서 요구를 모두 수용하리라 기대하며 의기양양했겠지요. 그러니 세종은 황제가 제시한 원칙과 사신들의 요구가 상충되지 않을 그 어느 지점을 찾아야 했습니다.
 

임금이 가까이에 있는 신하들에게 말하였다..."기후의 춥고 더움에 따라 의복을 주는 것이야 잘못 될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더군다나 주인이 손님에게는 본래 선물하는 도리가 있는 것이다. 이제 사신이 머무르면서 겨울을 지내게 되는데, 어찌 모른 체하고 따뜻한 옷을 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신에게는 예전처럼 선물하고, 두목(중국 사신단을 수행하는 군인 겸 상인)에게는 조금 줄여서 주는 것이 좋겠다." (세종실록 14년 6월 11일)

 
사신이 자신과 수행원들이 겨울을 나기 위해 필요한 방한용품을 요청하자, 이를 줄 것인가 말 것인가 조선의 조정에서는 토론이 벌어집니다. 이때 세종은 제3의 길을 제시합니다. '사신이 원하는 물품을 주자. 그러나 이는 굴복하여 사신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이 아니다. 외교문서에는 기재되지 않은, 사신이 구두로 요구하는 물건은 일체 주지 말라는 황제의 엄명을 어기는 일 또한 아니다. 오히려 황제의 대리인이라는 귀한 손님을 대하는데 야박하면 곤란하다' 라며 동서고금 통용된다는 '집 주인의 손님 접대 의무론'을 내세웁니다.
 
이는 세종의 '정신 승리'일까요? 제게는 명분과 실리가 양립하는, 즉 중용(中庸)의 미를 외교에서 발휘하려던 한 국가지도자의 안간힘 그리고 묘수로 보입니다.

600년 전 중국과의 외교사를 접하며, 현재 우리가 처해 있는 다자 외교를 돌아보게 되는데요. 일본 정부뿐 아니라 네오콘을 배경으로 하는 미국의 외교관들이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체제 안착을 위한 노력을 사사건건 방해해왔음이 존 볼턴 전 미국 안보보좌관의 회고록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났습니다.

그런가하면 우리 정부의 진척 속도가 불만족스러운 북한은 '봄이 온다'며 잡았던 손을 놓고 무력행사를 예고합니다. 두더지잡기 게임처럼, 한 곳을 막아내면 금세 다른 곳에서 악재가 튀어나오는 형세입니다. 살얼음 낀 겨울 내를 건너는 듯한 우리의 외교, 이제 어떻게 명분과 실리를 잡는 중용의 미를 발휘해야 할까요?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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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오마이뉴스 메인에 게재되었습니다.

(세종이야기꾼 오채원이 오마이뉴스에 연재 중인 '실록 읽어주는 여자' 시리즈. 이번에는 세종시대의 외교에 대한 글입니다. 기사 바로 가기: omn.kr/1o3jk)

 

최근 미국의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회고록 <그것이 일어난 방>(The room where it happened)이 출간되며, 미국뿐 아니라 한국 정계에도 큰 파문이 일었습니다. 청와대에서는 '회고록의 사실 왜곡이 극심하다'는 의견을 미국 국가안보회의(NSC) 측에 전했다고 알린 바 있는데요. 일반 대중들은 회고록을 통해 한미 외교에서 어떤 어려움이 있었고 이를 한국 정부가 타개하려 어떻게 고군분투해왔는지 추측해볼 수 있었습니다.
 
이와 연관 지어, 600년 전 조선과 명나라 간에 이루어졌던 외교사에서 몇 가지 사건을 살펴보려 합니다. 지난 기사에서 세종실록에 등장했던 '사람 조공'을 다룬 데 이어(관련 기사: "조선국에 가서 잘생긴 여자 몇 명 간택해 오라" omn.kr/1o05l), 이번에는 매 조공에 대해 들여다보겠습니다.

 

매사냥의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 기념우표. 출처 : 한국우표포털사이트

 

2010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매사냥은 삼국시대로 그 연원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매사냥은 생업의 한 수단일 뿐 아니라, '일응이마삼첩(一鷹二馬三妾)' 곧 '첫째 매 사냥, 둘째 말 타기, 셋째 첩 두기'라 하여, 당시의 '고급 유희' 중에서도 첫 번째로 치는 것이었는데요. 매가 사람 대신 하늘을 날아 사냥하기에, 지금의 아바타 게임과 유사한 재미를 선사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임금이 말하였다... "조공을 바치는 일은 대충대충 할 수 없다... 하물며 황제의 칙명에 '짐이 조선을 대우함이 후한 편인데 어찌 매 바치는 한 가지 일을 아직까지 어렵게 여기는가'라고 하였으니, 그 일에 마음을 쓰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명백하다." (세종실록 9년 8월 1일)

 
고려 때 매사냥이 가장 융성했고, 원나라에 사냥용 매를 조공으로 바쳤습니다. 이러한 흐름은 명에 대한 조선의 외교로도 이어집니다. 조선 매는 영민함과 사냥 능력이 탁월하기로 유명했으므로, 명 황제가 매우 반기는 조공 물품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임금이 직접 나서서 챙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화원(圖畫院, 그림 그리는 일을 맡은 관청)에 명하여 각종 매를 그려 전국에 나누어 보내서, 그림에 의거해 매를 잡아, 중국에 공물 바치는 일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세종실록 9년 2월 21일)
 
강원도 감사에게 임금의 뜻을 전하였다. "도의 각 고을에 나누어 기르는 참매 중에 몸집이 커서 조공으로 바칠 만한 것은 골라서 서울로 올려 보내라." (세종실록 9년 7월 5일)
 
함길도(현재의 함경도) 감사에게 전하였다. "초여름에 수컷 새매와 참매를, 품질이 좋고 몸이 커서 조공으로 바칠 만한 놈을 골라서 서울로 올려 보내라." (세종실록 9년 7월 11일)
 
충청도 감사에게 전하였다. "도에서 기른 조공용 수컷 새매 4연(連)을 밤의 서늘함을 이용하여 서울로 올려 보내라." (세종실록 9년 7월 13일)

 
찍어낼 수 있는 공산품도, 심으면 수확할 수 있는 곡식도, 길러낼 수 있는 가축도 아닌 터라, 매의 확보는 변수가 큰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현재의 시·도지사에 해당하는 전국의 수령·감사·절제사에게 상시로 매를 잡아 서울로 보내도록 독려했습니다. 고을을 다스리는 일에 집중해야 할 그들로서는 업무 과중에 대한 부담이 클 수밖에 없겠지요. 중앙 정부에서는 채방사(採訪使)라 하여, 지방의 실정이나 특산물을 조사하는 임시직 관리까지 파견하며, 매 포획을 도모합니다.
 

사헌부 장령(현재의 검찰·감사원에 해당하는 사헌부의 정4품 벼슬) 윤수미가 아뢰었다. "지금 조공으로 보낼 흰매를 잡는 일 때문에 채방사를 전국에 나누어 보냈는데... 다만 금년은 가뭄이 심하여 백성들의 생계가 염려스러운데, 채방사를 나누어 보내면 어찌 백성들에게 폐해가 없겠습니까... (채방사를) 보내지 마시고 폐해를 제거하소서." (세종실록 9년 7월 28일)
 
지신사(임금의 비서실장) 정흠지가 아뢰었다… "고려 말에 처음으로 처녀를 뽑아 (중국으로) 보내는 법이 생겼사오나, 그 폐단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계속됩니다. 하물며 해청은 포획이 매우 어려워서 이런 이유로 지방 백성들에 대한 민폐가 막심합니다." (세종실록 10년 11월 11일)

 
'매 사냥' 탓에 고통받은 민간, 그럼에도 세종의 염려는...

담당 공무원은 물론 민간에서도 매 포획에 따르는 고충을 호소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지성사대(至誠事大: 지극정성을 다해 사대함)의 기조 아래 세종은 신하들 반대에도 불구하고 매 잡기를 강행합니다. 조선 송골매는 해청(海靑) 또는 해동청(海東靑)이라 불리며 최고로 손꼽혔습니다. 따라서 명 황제는 물론 그에게 과잉 충성하는 사신들은 매 중에서도 특히 해동청 조공을 꾸준하고 거세게 압박해왔습니다.
 

찬성(조선 최고의 행정기관인 의정부의 종1품 관직) 권진이... "해동청이 우리나라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고 말을 만들어 황제께 아뢰시어 뒷날의 폐해를 막으소서." …임금이 말하였다. "어허, 이 무슨 말인가. 사대는 마땅히 성심껏 하여야 할 것이며, 황제께서 우리나라에서 (해동청이) 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으니 속일 수는 없다." (세종실록 8년 9월 29일)
 
임금이 말하였다… "나의 궁 안의 심부름꾼과 환관도 많이 명나라 조정에 들어가서 (황제를) 가까이에서 모시고 있으니, 우리나라의 일을 모를 것이 무엇인가? 내 이미 황제를 위하여 (해동청을) 잡았으니 즉시 바치지 않으면 내 마음이 미안하기도 하려니와, 또 황제께서 '일전에 분부한 해동청은 어찌하여 바치지 않느냐'라고 이르신다면, 내 장차 무슨 말로 대하겠는가." (세종실록 10년 11월 11일)


세종은 매를 잡는 족족 명 황제에게 보내려 하지만, 신하들 의견은 다릅니다. 명에서는 매가 쉽게 잡히는 줄 알고 앞으로 더 많이 보내라 압력을 가할 것이므로, 매가 잘 안 잡힌다고 거짓말을 하고 잡은 매의 일부만 보내자고 주장합니다. 이에 대해 지성사대라는 명목을 들어 매 조공을 강행했지만, 세종에게 실은 두 가지 염려가 있었습니다. 우선, 아무리 내밀한 정보라도 결국 명으로 새어 들어간다는 점입니다. 혹여 거짓에 기반한 외교로 대했다는 사실을 상국(上國), 즉 조공 받는 큰 나라가 알게 된다면, 어떠한 불이익이 올지 모릅니다.
 

임금이 말하였다... "(해동청 조공에) 마음을 다하지 않는다면 혹여나 (명에서) 채방사를 보낼지 모른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폐해가 더욱 심할 것이다." (세종실록 11년 11월 16일)

 
세종의 두 번째 걱정은 명에서 직접 채방사를 보낼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는 괜한 근심이 아니었습니다. 명나라 사신 농간에 의해, 황제는 조선 접경지대로 군인과 사냥꾼을 대거 파견합니다. 해동청을 잡는다는 명목으로 우리 국토까지 헤집고 다닐 수 있기에, 조선 백성들의 피해도 충분히 짐작 가능합니다.
 

황제의 칙서에서… "이제 내시 창성·윤봉·장동아·장정안 등을 보내는데 (명나라) 관군 백오십 명을 거느리고 모련위(毛憐衛, 현재의 랴오닝·지린·헤이룽장 일대) 등의 지역에 가서 해동청·토표(스라소니) 등을 잡게 하겠다. 칙서를 받거든 (조선의) 왕은 곧 적당한 사람을 뽑아 보내서 호송하되... 사용되는 양식은 번거롭지만 왕이 공급하기를 바라며, 만일 날이 춥거든 쓰기에 알맞은 옷·신 같은 것과 아울러 잡은 해청·토표 등을 가지고 돌아오는 도중에 먹일 고기와 모이로 적당한 것을 왕이 또한 적절하게 마련해 주며, 사람을 시켜 국경에 나가기까지 호송하라." (세종실록 13년 8월 19일)
 
좌대언(임금 비서) 김종서를 내전(임금의 생활공간)에 불러들여 보고 말하였다... "(명에서) 짐승 잡는 군사를 많이 거느리고 와서 지나가는 고을에 민폐를 많이 끼칠 것이다. 올해에 이와 같이 하고 내년에도 이처럼 하여, 해마다 와서 우리 백성을 거듭 괴롭힐까 심히 두려우니, 이 폐단을 구제하는 방책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경은 이 뜻을 가지고 대신들에게 의논하게 하라." ... 그때 밤이 2경(밤 9~11시)이 넘었는데도 임금이 잠을 자지 못하고 어린 내시 인평만이 곁에서 모셨다. (세종실록 13년 8월 20일)

 
명에서는 파견할 사신·군인·사냥꾼의 식량과 옷, 그리고 해동청과 스라소니를 잡게 되면 그 먹이까지 우리에게 제공하라고 요구합니다. 본래 조선 북쪽 땅은 척박한데 그들 요구까지 들어주려면, 수령과 백성들의 고통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것이 분명합니다. 게다가 그들은 종종 조선 공무원과 민간인에게 행패를 부리고 가축 등을 수탈해 가는데 처벌은 받지 않아, 민심은 소요할 것입니다. 이러한 일이 올해 한 번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매년 일어난다면 그 감당은 어찌해야 할까요.

세종은 현재의 NSC와 같은 회의를 소집해 대책 마련에 골몰하며, 밤이 늦도록 잠들지 못합니다. 명 사신은 한술 더 떠서, 우리 땅인 함경도까지 와서 매를 잡겠다고 예고합니다.
 

접반사(외국 사신을 접대하는 임시 관직) 정연이 돌아와서 아뢰었다. "사신이 '내년 5월에 조선에 와서 6월에 머무르고 7월에 돌아가는데, 함길도에서 매를 잡으려 한다'라고 합니다." (세종실록 13년 12월 25일)

 
당시 조선은 동아시아의 보편적 국제 질서에 따라 명과 형식적인 상하 관계를 맺었습니다. 이에 따라 조선이 명의 제후국이라는 외교 형식을 취하나 통치의 자주권은 인정됐습니다. 예컨대 조선은 명으로부터 내정 간섭을 받지 않고, 해를 세는 호칭인 연호(年號)와 왕의 인장인 국새(國璽) 등을 별도로 만들어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명에서 온 수백의 사신·군인·사냥꾼 무리가 조선 산과 들을 무자비하게 헤집고 다니게 되었습니다. 삶의 터전을 유린하는 일, 곧 국토에 대한 주권 침탈 행위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예조 판서(현재의 외교부 장관) 신상이 말하였다. "지난해는 사신 네 사람이 함길도에 와서 매를 잡았사온데, 올해에도 왔사오니, 어찌 뒷날에 또 오지 않을지 알겠습니까... 함길도에 비밀리에 분부하시어, 고의로 잡기 어려운 척 하고 잡았더라도 놓아버리라 하시어, 긴 앞날의 폐단을 없애주소서." ... 그 뒤에 경성(지금의 함경북도 경성군) 사람이 해동청 1연을 잡았으나, (사신 접대를 맡은) 이징옥이 일부러 놓아주었다. (세종실록 14년 11월 18일)
 
이징옥이 아뢰었다. "소신이 어리석고 판단력을 잃어, 매의 수가 너무 많은 것이 싫어서 고의로 놓아 보냈습니다." ...(임금이) "내가 즉위한 이래로 사대의 일에서 조금도 거짓을 행한 것이 없는데, 이징옥이 큰일을 그르쳤으니 어찌해야 할 것인가." ... 좌의정(현재의 총리와 유사) 맹사성 등이 "매를 놓아준 것으로 죄를 다스린다고 말하면, (명 사신) 창성 등이 이를 듣고는 반드시 이전에도 이와 같은 거짓이 있었으리라 의심할 것입니다." …(의견이 분분하여) 밤은 삼경(밤 11~1시)을 향하는데, 임금이 아직도 궁궐에 앉아서 이징옥을 의금부(지금의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에 가두도록 하였다. (세종실록 14년 11월 18일)

 
잡은 매 일부러 놓아준 관료... 세종 "용서할 수 없다"

명 사신과 수행원들의 욕심이 과한 데다가 민간에 대한 행패도 심합니다. 앞으로도 계속 조선 국토와 국민을 유린하며 매를 잡으러 올까 염려한 현장의 관리는 잡은 매를 날려 보내다 발각되었습니다. 그간 쌓아온 지성사대에 대한 신뢰를 잃을 것이 염려되는 세종은 관리를 처벌하려 합니다.
 

의금부에서 이징옥의 죄를 심문하여 아뢰니, 직첩(관직 임명장)을 거두고 지방으로 유배 보내도록 명하였다. (세종실록 14년 11월 20일)
 
(명 사신) 윤봉이 말하였다. "(이징옥에게) 죄가 있다 하더라도 관대히 용서하시기를 비옵니다." 임금이 지신사(임금의 비서실장) 안숭선에게 명하여 답신하였다. "사신을 속인 일은 과연 하늘을 속인 것과 같으니 다른 잘못에 비할 바가 아니다… 사신이 요청한다 하더라도 내가 용서할 수 없노라." (세종실록 14년 11월 21일)

 
세종은 국방에 큰 공이 있어 신뢰하는 신하 이징옥이지만 황제의 명을 어기는, 즉 명과의 외교를 그르칠 수 있는 사건을 일으킨지라 귀양을 보냅니다. 이에 대해 사신은 어쩐 일인지 그를 처벌하지 말라고 청합니다. 자신의 과욕과 횡포가 개입된 이 사건이 황제에게 탄로날까봐 염려된 모양입니다. 그러나 세종은 예사 잘못이 아니라며 처벌을 강행합니다.

 

18세기 문인 화가 심사정沈師正의 그림 ‘토끼를 잡은 매 그림豪鷲搏兎圖’의 일부 확대.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임금이 말하였다... "(공녀를) 간택하는 즈음에도 백성에게 끼친 폐해가 막심했지만, 조공 바치는 일이 중대하기 때문에 힘을 다하여 조치하였던 것이다. (매 조공의 폐해는) 이것과 비교한다면 만분의 일도 안 된다." (세종실록 9년 7월 28일)
 
"민간의 폐해를 나 역시 안다. 그러나 대의로 말할 것 같으면, 민간의 폐해는 가벼운 일이나, 사대를 성실히 하지 않는 일은 무거운 것이다." (세종실록 8년 9월 29일)


세종은 대표적인 애민(愛民) 군주로 꼽힙니다. 그런 그가 백성들이 입을 피해에 대한 고려보다 사대 의무의 수행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어떠한 것이 진정한 국익 추구일까요? 과연 세종은 사대주의자였을까요?
 

임금이 여러 대신에게 일렀다. "근래 황제가 북쪽을 정벌하였다는 말을 들었는데... 지난번 안남(安南, 베트남)에 출정한 것은 황제의 실책이었다. 우리 동방(조선)을 생각하면, 땅은 메마르고 백성은 가난하며 상국(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으므로, 진실로 마음을 다해 사대하여 한 나라를 보전하는 것이 마땅하다." (태종실록 14년 6월 20일)

 
당시 명은 적극적인 팽창 정책을 펼치며 1407년에 베트남을 정복했고, 몽골도 정벌하려 다섯 번에 걸쳐 황제가 직접 전장으로 나선 바 있습니다. 또한 '정화(鄭和)의 원정'이라 해 약 30년간 일곱 번이나 대함대를 파견하여 멀리 케냐 해안까지 정벌을 떠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조선은 명과의 관계에서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습니다.

4.27 남북정상회담 즈음에 문재인 대통령은 '노벨상은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받고, 우리는 평화만 가져오면 된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또한 지난 한국전쟁 70주년 기념사에서는 '세계사에서 가장 슬픈 전쟁을 끝내기 위한 노력'을 경주하자고 호소했습니다. 강대국 중심의 패권적 질서 속에서 '전쟁 없는 나라'를 향한 최고통수권자의 고뇌를 600년 시간을 사이에 두고 목도하게 됩니다.
 
(* 다음 기사에서는 명나라 사신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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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 읽어주는 여자'는 세종이야기꾼 오채원이 매주 오마이뉴스에 연재하고 있는 시리즈입니다. 기사 바로 가기 omn.kr/1nooz)

 

임금(태종)이 일찍이 충녕대군(이후 세종)에게 말하였다. “너는 할 일이 없으니, 평안하게 즐기기나 하여라.” 그리하여 서화書畫(글과 그림), 화석花石(무늬 돌), 금슬琴瑟(서로 짝을 이루는 현악기) 등 모든 놀이의 내용을 갖추지 않음이 없었기에, 충녕대군은 예술에 정통하였다. (태종실록 13년 12월 30일)

 

태종은 왕자시절의 세종에게 ‘방목형 교육’을 제공합니다.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라는 태종의 자상해 보이는 말은, 왕이 될 가능성을 ‘꿈도 꾸지 마라’는 셋째 아들에 대한 경고였던 셈입니다. 덕분에 세종은 예술을 기반으로 한 ‘자기주도적 학습’으로 청소년기를 보낼 수 있었습니다.

이에 비하여, 양녕대군은 11세의 나이에 세자로 책봉된 이후, 가업 승계 교육을 받아야 했습니다. 태종에 이어 임금이 되어야 한다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맏아들의 숙명이었지요.

 

태종은 34세의 나이에 세자로 책봉된 바 있습니다. 제2대 임금인 정종이 자신에게 적자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며 동생인 정안공靖安公(이후 태종)을 후계자로 지목한 것인데요. 정종실록을 보면, 정안공이 세자의 자리에 있었던 기간이 9개월 남짓인데, 그나마 교육받은 횟수는 3회밖에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태종이 고려시대에 문과 급제한 엘리트라 해도, 그가 접한 학습은 공무원의 직무에 한정된 내용이었습니다. 따라서 왕위에 오른 후에는 세자 교육의 부족을 체험하고, 자신의 후계자는 체계적으로 양성하리라 다짐했을 것입니다.

 

조선시대에는 세자를 위한 교육제도이자 교육장인 서연書筵, 세자 교육을 맡은 관청인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여기에서 교육을 수행할 세자사世子師(정일품正一品, 의정부 영의정 겸직) 및 세자부世子傅(정1품, 좌·우의정 중 1인 겸직), 세자이사世子貳師(종1품, 찬성이 겸임), 세자빈객世子賓客(정·종2품), 보덕輔德(종3품), 필선弼善(정4품), 문학文學(정5품), 사서司書(정6품), 설서設書(정7품) 등을 두었는데요. 현재 1인자의 맏아들이자 미래의 1인자를 길러내는 일이므로, 변계량 등 당대 최고의 학자들을 선생님으로 모셨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양녕대군에 대한 세자 교육은 실패로 끝납니다.

현대 교육학에서는 교육의 주체를 대체로 학습자·학부모·교사로 봅니다. 양녕의 교육이 실패로 끝난 이유를 이 세 측면에서 살펴보겠습니다.

 

‘가문의 영광’ 위해 ‘입시 지옥’에 빠지다  

양녕대군은 임금이 갖추어야 할 지식·태도·역량의 함양이라는 단일한 목표를 향한, 그리고 본인의 선택과 무관한 공부를 해야 했습니다. 요즘 식으로 보자면 ‘가문의 영광’을 위해 ‘입시 지옥’에 빠진 수험생과 같다고 할까요? 차이가 있다면, 경쟁자도 동료도 없으며, 합격은 ‘떼어 놓은 당상’인 점일 것입니다. 그러니 학습에 대한 동기부여가 부족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게다가 양녕은 대체로 책상 앞에 앉는 공부에 별 취미가 없어 보입니다.

 

임금이 글을 외우도록 명했는데 세자가 외지 못하였다. 임금이 (양녕의 시중을 드는) 환관의 종아리를 때리고 명을 내렸다. “나중에도 이와 같으면 반드시 서연관을 벌하겠다.” (세자시강원의) 문학 허조許稠를 시켜 이 말로써 세자에게 경고했다. (태종실록 5년 9월 14일)

 

사간원司諫院(왕권을 견제하는 언론기관)에서 상소하였다......“신들이 일전에 서연 일기를 보니, 닷새 동안에 잇달아 경전 해석한 날이 적습니다.” (태종실록 12년 5월 19일)

 

세자가 팔뚝에 매를 받치고 궁궐 문 밖으로 나가고, 또 아프다며 핑계대고 강의를 듣지 않았다......세자가......“내가 병이 있으니 회복되면 저녁에 당직하는 서연관과 함께 복습을 하겠다.” 라고 말하였으나, 저녁이 되어도 그대로 하지 않았다. (태종실록 16년 10월 21일)

 

(매 사냥꾼을 찍은 1930년 사진. 출처 :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역사아카이브)

양녕대군의 장래는 태종을 이어서 보위에 오르는 오로지 한 길밖에 없었습니다. 이는 양녕에게 한 편으로 큰 혜택이지만, 또 달리 본다면 자신이 조절할 수 없는 상황이기도 합니다. 이를 해석하는 것은 자신의 선택입니다. 건강한 현실 감각을 가졌다면, 양녕은 한정적 환경 내에서도 스스로 목표를 설정하고 학습에 몰입할 수 있었습니다. 의욕이 있으면 인내심을 갖고 끈질기게 도전하게 되는 법입니다.

그러나 양녕은 복습을 한다거나 몸이 아프다거나 하는 등의 이유를 들어 종종 강의에 결석합니다. 이러한 사실이 태종에게 알려져서, 자신을 보좌하는 환관이 대신 매를 맞거나, 스승들이 파면되기도 합니다. 그때마다 양녕은 잠시 조심하는 것 같다가도, 다시 사냥 등의 유희에 탐닉하며 공부를 게을리 하기 일쑤입니다. 신하들이 말려도 몰래 사냥을 나갔던 태종의 기질을 양녕은 일부 물려받은 모양입니다.

 

임금이 말하였다......“세자의 천성을 보아하니, 틀림없이 사냥을 좋아한다.” (태종실록 15년 10월 17일)

 

세자가 보덕 조서로에게 “내가 활을 쏘고자 하는데 어떠한가?” 하니, 조서로가 “대군의 상제가 이미 삼칠일을 지났으니 쏠 수 있습니다.” 하여, 세자가 내사복문內司僕門 밖으로 나가서 230여 보步를 쏘았다. (태종실록 18년 2월 28일)

 

우빈객 계성군 이내李來 등이 나아가 말하였다. “음악과 여색, 매와 개는 마땅히 멀리하고 끊어야 합니다. 요즘 듣자하니, 저택 안에 연주자를 끌어들여 거문고를 타고 피리를 불고, 또 매 2련連을 두셨다 합니다. 이 말이 밖에 들리면 저하가 공부한 보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태종실록 11년 10월 17일)

 

양녕은 어찌나 사냥을 좋아하는지 그와 유사한 놀이도 즐겼는데, 심지어 친동생인 성녕대군이 사망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도 애도하기보다 활을 쏘러 나갑니다. 사냥에 쓰이는 매와 개 기르기, 그리고 그 외의 온갖 유희에 탐닉합니다. 여성편력으로 인해 부모님의 걱정을 사기도 하지요.

 

사헌부에서 아뢰었다. “동궁東宮(세자의 궁) 북쪽 담 밑에 작은 지름길이 있으니, 반드시 몰래 숨어서 드나드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임금이 동궁의 어린 환관을 불러들여 국문하게 하니, 과연 예빈시禮賓寺(왕실 잔치 등에 음식 공급을 맡은 관청)의 종 조덕중......등이 몰래 평양 기생인 소앵을 동궁에 바친 지 여러 날이 되었다.......세자가 밥을 먹지 아니하니, 정비(모친 원경왕후)가 환관을 시켜 세자에게 말하였다. “너는 어리지도 않은데 지금 어째서 부왕께 이와 같이 노여움을 끼치느냐?” (태종실록 13년 3월 27일)

 

양녕대군에게 부족했던 이것  

‘개구멍’까지 파고 궁 안으로 기생을 들여온 사건이 발각됩니다. 이 지경이 되자, 아들 셋을 잃고 난 뒤에 얻은 아들이라 양녕을 애지중지해온 모친이라도 두고만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양녕은 반성의 기미도 없이 ‘단식투쟁’을 벌입니다. 이러한 양녕의 절제·사유·성찰 없음은 추후 세자에서 폐위되는 빌미가 됩니다.

 

옛 사람들에게 성찰은 공부의 시작점이자 종착지였습니다. 보는 이가 없는 곳에서도 몸과 마음을 바로 잡도록 스스로에게 촉구했습니다. 단순한 지식 충족에 그치지 않고, 부끄러움을 아는 윤리적 자아를 갖추는 것이 공부에서 필수적이었습니다. 그래서 국가의 최고통수권자인 임금에게도 전문적으로 비판을 가하는 사간원이라는 언론기관을 두었고, 관직에 오르지 않은 학생, 더 나아가 유식하지 않은 ‘풀 베는 촌부와 나무꾼’, 즉 백성의 의견도 들어야 했던 것입니다. 이는 자신의 오류를 인식하고, 현실 세계에 대한 감각을 개발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현대적 교육학의 관점에서도, 공부의 목적은 보다 나은 자신으로의 변화 혹은 성장에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자신을 돌아보고 점검하는 태도, 또 주변의 조언을 경청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양녕에게서 부족해 보입니다.

 

임금이 말하였다. “세자가 식사를 하지 않는 것은 (혼난 후) 분함을 이기지 못해서이다......세자의 불손한 마음은 세자라는 자신의 자리를 지나치게 믿기 때문임이 분명하다. 만약 뉘우치지 않는다면, 왕족 중에 (세자로) 적당한 사람이 어찌 없겠는가?” (태종실록 13년 8월 15일)

 

세자가 말하였다. “요즘 내가 아무 일도 한 것이 없는데, 주상께서 진노하신 이유를 아직 자세히 모르겠다.” 세자빈객 이내李來가 말하였다. “바로 그것이 저하가 가진 나쁜 병의 원인입니다. 저하의 뱃속에 가득 찬 것은 모두 사사로운 욕심뿐입니다......전하의 아들이 저하뿐인 줄 아십니까?” (태종실록 15년 1월 28일)

 

세자가 말하였다. “(태종의 신뢰를 받지 못하는 것은) 나에게 과실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일러바치는 사람이 있어서이다.” (태종실록 17년 3월 23일)

 

양녕은 부끄러움을 알아야 한다는 질책·비판·우려에 귀 기울이지 않고, 오히려 남을 탓합니다. 밖에서는 양녕의 외줄타기가 위태로워 보이나 이를 자신만 모르는 듯합니다. 태종과 선생님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양녕은 세자라는 자신의 지위가 언제까지나 확고하리라 믿었기에 마음공부를 게을리 한 것 같습니다. 세자로서 누릴 수 있는 권리, 그리고 이에 따른 의무의 균형을 모르는 양녕의 패착은 다음과 같이, 선생님들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한 탓도 있어 보입니다.

 

(양녕대군의 교육 실패에 있어서 교사의 역할에 대해서는 다음 편에서 이어집니다.)

 

(글씨에 능했다고 전해지는 양녕대군의 친필을 새긴 ‘숭례문’ 목판. 출처 : 문화재청)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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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갓!

오마이뉴스에서 상을 주셨습니다!
'2020년 5월 이달의 새뉴스게릴라 수상자'로 선정되었는데요(제가 해석하기론 '이달의 신인 기자상' 정도 될 것 같습니다).
제 글에 '좋아요' 꾸욱 해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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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채원 시민기자는 <실록 읽어주는 여자>라는 연재를 통해 조선왕조실록에 담긴 다양한 사회상을 현대인의 눈높이에 맞게 풀어내고 있습니다. 자신을 "사람들이 저마다의 세종을 스스로 발견하도록 공감의 역동을 선사하는 세종이야기꾼"이라고 밝힌 오채원 시민기자를 2020년 5월 이달의 새뉴스게릴라로 선정합니다.

 

"굶어 죽는 이가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용서하지 않겠다" http://omn.kr/1nhia
아들아, 모든 업보는 내가 지고 저세상으로 가마 http://omn.kr/1nk49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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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사는 오마이뉴스에 연재하고 있는 '실록 읽어주는 여자' 연재 시리즈 중 일부입니다. omn.kr/1nmuf)

 

임금은 본디 유학儒學을 좋아하여, 늘 맑은 첫새벽에 신하들과 함께 나라의 정사를 돌보고, 자주 경연經筵에 나아가서 경전의 해석 및 토론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퇴근 후) 일상 공간에서는 밤중이 되어도 독서를 그치지 않는다. 태상왕(태종)이 임금의 정신 피로를 염려해 금지시키며 말하였다. "과거 응시자는 이와 같이 해야 되겠지만, (임금이 되어서) 고됨이 어찌 이와 같은가." (세종실록 3년 11월 7일)
 
유교 문화권에서 중시하는 지도자의 주요 덕목 중 하나는 배움을 즐기는 태도입니다. 유학의 교과서라 할 수 있는 <논어論語>의 첫 장 첫 글자가 '배울 학學'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학이시습지불역열호(學而時習之不亦說乎)', 즉 '배우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배운 것을 익히면 정말로 기쁘지 아니한가?'라는 구절이 바로 그 예입니다.
 
단지 머리로 지식을 흡수하는 일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체화하는 단계까지 이르러야 '배움'이라 할 수 있으며, 그 과정에서 기쁨이 느껴지는 경지에 도달해야 진정한 배움인 것입니다. 이는 '아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보다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보다 못하다(지지자불여호지자 호지자불여락지자, 知之者不如好之者,好之者不如樂之者)'라는 <논어>의 구절을 보아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배움을 즐긴 대표적 인물로 손꼽히는 세종은 건강이 걱정될 만큼 그 정도가 심했습니다. 세종실록에 의하면, 그는 매일 새벽 1~3시에 일어나 빈틈없이 하루를 보냈는데요. 책을 좌우 양옆에 펼쳐 놓고 식사를 하며, '퇴근 후에도 하는 일 없이 멍하니 앉아 있는 시간이 없다'고 고백할 만큼, 그는 쉴 틈 없이 학습에 몰두했습니다. 온갖 서적은 물론이고 심지어 조선의 역대 외교문서까지 살펴본 그는 '문자중독자'에 가까워 보입니다. 이처럼 고시생 이상으로 책을 파고드는 아들이 안쓰러운 아버지 태종은 공부를 금지시킵니다. 이러한 양상은 세종의 왕자 시절부터 시작됐습니다.
 
임금은 천성이 학문을 좋아하여 세자로 있을 때 항상 글을 읽되 반드시 백 번씩을 채우고, 『좌전左傳』과 『초사楚辭』같은 책은 또 백 번을 더 읽었다. 예전부터 몸이 불편할 때에도 글 읽기를 그만두지 않았는데, 병이 점차 심해지자 태종은 내시를 시켜 갑자기 책을 모두 거두어 가지고 오게 하였다. 그리하여 『구소수간歐蘇手簡』 한 권만이 병풍 사이에 남아 있었는데, 임금은 천백번을 읽었다. (『연려실기燃藜室記述』 「세종조世宗朝 고사본말故事本末」)
 
아들이 어찌나 독서에 열심인지 몸이 아파도 멈추지 않습니다. 보다 못한 아버지는 책을 모두 압수합니다. 그 과정에서 어쩌다 빠뜨린 책 한 권을 발견해 읽고 또 읽은 나머지 1100번에 달한다는, 많은 학부모님이 부러워할 만한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유교 문화권에는 '군사君師(임금이자 스승)'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한 나라의 임금은 동시에 스승이기도 해야 한다는 뜻인데요. 이는 권력의 중심축에 지식이 있으므로, 지식의 양과 질이 정치적 무기가 될 수 있음을 내포합니다. 결국 세종에게 지식은 처절한 생존의 도구인 셈입니다.
 
아울러 '군사' 개념은 임금의 주요 책무가 백성을 계몽시키는 일임 또한 드러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왜 문자의 이름을 훈민정음訓民正音, 곧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고 지었는지 짐작 가능합니다. 그렇기에 세종이 '겨레의 스승'으로 불리며, 그의 탄신일을 스승의 날로 삼은 것입니다. 이처럼 세종과 배움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세종이 왕자 시절에 1100번을 읽었다고 전해지는 "구소수간歐蘇手簡"은 중국 송나라의 구양수歐陽脩와 소식蘇軾이 주고받은 편지를 모은 책이다. 사진은 구양수와 소식의 편지를 모은 또 다른 책 "구소잡초歐蘇雜抄"이다. ⓒ서울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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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제7회를 맞는 세종영릉 별빛음악회.

야외에서 만나는 세종이야기+창작국악, 그리고 별자리관측체험을 통해, 초여름밤의 정취를 만끽하실 수 있습니다.
이번주 토요일에 여주 영릉으로 놀러오세요~
아, 야외 행사인만큼 두툼한 겉옷과 돗자리를 준비하시고요.
(신청 폭주로 인해 오버부킹되어 있습니다만, 연락 주시면 자리 만들어 볼게요^^;)


* 일시 : 2019.5.25. 저녁 7시
* 장소 : 여주 세종대왕릉 내 세종대왕역사문화관 앞 잔디마당
* 출연 : 오채원, 이신예, 아이삭 스쿼브, 국악실내악여민 등
* 주관 : 문화예술감성단체여민

* 참조 :

http://www.fnnews.com/news/201905201435492960?fbclid=IwAR0kaiTx5oAL7vxzH8S1bfZSrueFttdZfl-G8kkqDkKEI4bA6-bfrZ4arV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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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역사문화콘텐츠에 관심 있는 분들, 여기 보셔요~

4/25(목) 개강(예정)하여 34주간 이어질 '세종실록 함께 읽기'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혼자가 아닌, 더불어 읽고 토론하는 실록공감의 시간.
그 안내도를 이달 3/28(목) 시민청(시청역)에서 90분간 소개해드립니다.

강의콘텐츠, 공연콘텐츠, 브랜딩, 리더십, 역사문화해설 등에서 갈급함이 있는 분들께 의미있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나도 실록이라는 것을 읽어보고 싶다'는 분들도요.


공개강의에 초대합니다!

[세종을 읽는 다섯 가지 키워드] 강의입니다.

'다름-실행-소명-마음-동지' 라는 다섯 개의 키워드로 세종실록 속의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34주간 세종실록을 어떻게 읽어나갈지 힌트를 드릴 테니, 꼭 신청해주세요 
신청 링크 --> https://goo.gl/forms/tDSEUpwVKKn5Tvzj1 (곧 마감 예정)

아!
3/28의 공개강의는 무료로 진행되고요.
4/25 개강 예정인 실록 읽기는 유료과정으로 진행됩니다. 관련하여서는 추후에 안내해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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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즉위 600주년을 기념하는 창작 판소리 콘서트 <세종이도가>.

세종과 관련된 이야기 그리고 음악으로 이틀간 관객과 만났습니다.
세종실록 속 이야기를 토대로 창작한 판소리, 노래곡, 연주곡, 그리고 실록이야기로만 채워진 전무후무한 무대에 설 수 있어 감사했습니다.
세종이 경복궁 근정전에서 즉위하신 날은 음력 1418년 8월 10일, 양력으로 환산하면 바로 2018년 9월 9일입니다.

그 뜻깊은 날, 무대에서 세종을 이야기할 수 있어서, 세종을 연구하는 제 입장에서는 더욱 행복했습니다.



*장소 : CKL스테이지(서울 중구 청계천로 40 CKL기업지원센터)

*출연 : 오채원(세종이야기꾼), 이소영&장재훈(무용), 이신예&정승준(소리), 아이삭(랩), 국악실내악 여민(연주)
*기획 및 제작 : 문화예술감성단체 여민

*참조 : http://sports.donga.com/3/all/20180821/916064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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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20일, 강원도 홍천에 다녀왔습니다.

세종즉위 600주년을 맞이하여 기획된 공연 [세종, 풍류를 만나다].

대공연장을 꽉 채워주신 많은 관객들께 세종이야기를 전하고 왔습니다.



금번 공연은 세종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그에 기반한 창작 국악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저는 세종이야기꾼으로서 세종의 여러 이름, 즉위 과정, 과학 업적, 국가 비전 등을 세종실록에 근거하여 전해드렸습니다.

중간중간 실록의 한 대목을 읽어드릴 기회들이 있었는데요.

주요 관객이 청소년, 특히 중학생들이라 내용을 보다 쉽게 설명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리허설 때에도 이 점에 특히 유의하였고요.



훈민정음 해례를 작창한 판소리와 랩 등 음악, 그리고 출연자가 나올 때마다 환호해주는 관객들 덕분에 흥겹게 공연을 마무리했습니다.

초청해주신 (재)홍천문화재단 측에서도 관객의 호응이 뜨겁다고 무척 좋아들 해주셨습니다.

모두모두 감사합니다.

책상머리에서 벗어나 우리 역사, 문화, 인물에 대해 이야기로 대중과 소통하는 일은 앞으로도 계속됩니다 주욱~



*일시 : 2018.6.20. pm2:00-3:30

*장소 : 강원도 홍천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

*출연 : 오채원(이야기꾼), 이승주(무용), 최민종(판소리), 서은미(판소리), 박천경(거문고), 김빛여울(소리), 아이삭(랩), 국악실내악 여민(연주)

*주최 및 기획 : (재)홍천문화재단

*주관 : 문화예술감성단체 여민

*참조 : http://www.shinailbo.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84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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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5은 스승의 날입니다.

이 날이 스승의 날로 정해진 이유는 바로 세종과 연관이 있습니다.

'겨레의 스승'으로 불리는 세종의 탄신일이기 때문이지요.



세종의 탄신을 축하하기 위한 행사가 올해에도 국립한글박물관에서 진행되었습니다.

바로 [백성을 사랑한 과학 군주, 세종] 음악회입니다.

저는 올해도 세종이야기꾼으로 참여하였습니다.



세종은 백성들의 더 나은 삶을 위해 다양한 분야에서의 창제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이날 저는 역법서(달력)인 『칠정산 내외편七政算內外編』, 해시계 앙부일구仰釜日晷, 훈민정음訓民正音 등의 창제 원리와 의의 등을 전해드렸습니다.

조선왕조실록 속 기사들도 일부 발췌해서 읽어드리고요.



많은 가족 관객들이 오셔서, 제가 중간중간 던진 질문에 활발하게 답변 들려주시고 음악도 즐겨주셔서, 음악회를 흥겹게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내년에 또 만나요~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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