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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채원연구소공감]대표 :: 세종이야기꾼 :: 실록연구자 :: 소통 디자이너 :: 010-8014-7726 :: chewonoh@gmail.com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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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08.12 [ 실록공감 07_광해군과 음식로비 ]
  2. 2017.07.12 [ 실록공감 05_세종과 고기사랑 ]

[ 실록공감 07_광해군과 음식로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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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共享生生之樂, 세종실록 24년 1월 7일]

세종과 더불어, ‘나와 다른 당신’과 공감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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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孝宗의 사위인 정재륜鄭載崙이 궁궐을 드나들며 들은 이야기들을 정리한 책 『공사견문록公私見聞錄』에는 세종대부터 효종대까지의 다양한 생활사가 적혀 있습니다. 그 중 광해군光海君에 얽힌 이야기를 한 토막 소개하고자 합니다.


광해군이 폐위廢位되어 유배됐을 때 따라간 궁궐의 계집종 중에서 성질이 사납고 교활한 자가 있었다. 정성껏 봉양하지 않으므로 광해가 꾸짖었더니, 계집종이 거친 소리로 말했다. “왕위에 있을 때에 여러 관청과 전국에서 매달 공물供物을 바쳤는데 무엇이 부족하여 염치없는 것들에게까지 찬거리를 요구하였습니까? 심지어 ‘김치 판서[沉菜判書]’니 ‘잡채 참판[雜菜參判]’이니 하는 말까지 있었습니다. 무엇이 부족하여 벼슬을 구하거나 송사하는 자에게 뇌물을 요구해 민심을 크게 무너지게 했습니까? 그리고 당신이 잘못하여 국가를 이 지경으로 만들고, 나를 여기까지 오게 하여 고생시키고는 도리어 정성껏 받들지 않는다고 책망하니, 양심에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하니, 광해군이 머리를 숙이고 한마디 말도 못하고 다만 혀를 찰 뿐이었다.


계해반정癸亥反正(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축출하고 왕위에 오른 인조仁祖의 아들이 바로 효종이지요. 그 효종의 사위인 정재륜이 저자이므로 어쩌면 광해군에게 불리하게 기록했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실록에도 광해군 때의 ‘잡채 판서(장관)’ 그리고 ‘더덕 정승(총리)’이 기술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정재륜의 사견만은 아닌 듯합니다.


이충李沖은 광해군 말년에 온갖 수단을 다 부려 임금에게 아첨하고 못된 비위를 맞추었다. 겨울철에는 반드시 땅 속에 큰 집을 마련해 놓고 그 속에다 채소를 심었는데, 새로운 맛을 취한 것이었다. 반찬을 매우 맛있게 장만해 아침저녁으로 올렸는데, 그로 인해 총애를 얻어 높은 품계에 올랐다. 그가 길에 오가면 비록 삼척동자라도 반드시 ‘잡채 판서’라 손가락질하면서 너나없이 침 뱉고 비루하게 여겼다. (광해군일기[중초본] 즉위년 12월 10일)


이충은 진기한 음식을 만들어 사사로이 궁중에다 바치곤 했는데, 【사관 왈: 왕은 식사 때마다 반드시 이충의 집에서 만들어 오는 음식을 기다렸다가 수저를 들곤 했다.】 당시에 어떤 사람이 다음과 같이 시를 지어 조롱하였다.

사삼 각로의 권세가 처음에 중하더니

잡채 상서의 세력은 당할 자 없구나.

여기에서 각로는 한효순韓孝純을, 상서는 이충을 지칭하는 것이었다(한효순의 집에서는 사삼沙參(더덕)으로 밀병蜜餠(꿀떡)을 만들었고, 이충은 채소에다 다른 맛을 가미하였는데, 그 맛이 희한하였다). (광해군일기[중초본] 11년 3월 5일)


당대의 풍자시에 의하면, 광해 초년에는 한효순이 더덕 꿀떡으로 임금의 총애를 입어 정승이 되었는데, 말년에는 이충이 잡채 덕분에 판서 자리에 올라 그 위세가 대단했습니다. 그리고 이후 유배지에서는 모시는 노비마저 식욕에 충실한 광해군을 얕보았다는 기록까지 남은 것이지요. 실리외교를 추구했다는 평가와 동떨어진, ‘음식로비’에 약했다는 광해군의 이야기가 낯섭니다. 그런가 하면, 그 음식들이 얼마나 맛있었기에 지존의 자리에서 누릴 만큼 누렸을 사람이 반했을까 그 맛이 궁금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의할 점은 ‘잡채’가 현재의 형태와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현재 흔히 먹는 잡채는 당면이 주재료인데요. 이 당면은 약 100년 전에야 우리 음식에 등장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조리서이며 17세기에 저술된 『음식디미방飮食知味方』의 잡채에는 당연히 당면이 들어가 있지 않겠지요. 이 책에 따르면 잡채는 ‘나물 모음’에 가깝습니다.


앞으로 이틀 후인 8/11이 말복입니다. 올해의 마지막 복날이라 생각하니, 상투적인 삼계탕 말고 다른 음식이 먹고 싶어지는데요. 땀으로 배출된 무기질을 보충하고, 피로회복과 체온하강을 돕는 채소. 이 채소로 만든 잡채를 이번 복날 메뉴로 삼아볼까 합니다.


* 참고문헌 :

1. 『공사견문록公私見聞錄』

2.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3. 동아일보, 2017-04-05, 「[황광해의 우리가 몰랐던 한식]잡채에는 당면이 없었다」.


(사진 : 동아일보)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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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록공감 05_세종과 고기사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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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共享生生之樂, 세종실록 24년 1월 7일]

세종과 더불어, ‘나와 다른 당신’과 공감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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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이 고기를 좋아했다면서요?”

많은 분들이 제게 ‘세종 고기덕후설’의 진위에 대해 물어옵니다.

우선, 답은 ‘예’입니다.

실록을 보면, 세종의 ‘고기 사랑’은 아버지의 입을 통해 주변인들에게 널리 알려집니다.

“주상(세종)이 젊었을 때부터 고기가 아니면 밥을 먹지 못했다”고 태종이 증언한 이후(세종실록 2년 8월 29일), 주변인들은 열심히 고기를 챙기지요.


고기는 맛있기도 하지만, 여러 효용 가치를 내포합니다.

“먹는 것은 백성의 근본이 되고, 곡식은 소의 힘에서 나오므로” 농경사회에서 소는 무척 귀한 존재였습니다.(세종 7년 2월 4일)

국법으로 그 도살과 판매를 관리할 정도였지요.(세종 7년 2월 8일)

또한 닭・꿩・양의 고기는 의원醫員들이 갈증을 멎게 하는 약으로 세종에게 추천한 식품이었습니다.

그러나 닭은 이어댈 수 없고, 꿩은 사냥해야 하고, 양은 우리나라에서 나지 않는 등의 이유로, 너무 약이 호사스럽다며 받아들이지 않으셨지요.(세종실록 13년 3월 26일)


옛사람들은 불행한 일을 맞았을 때 삼가는 모습을 보이며, 이러한 고기와 같은 고급 음식을 드시지 않았습니다.

세종도 어머니인 원경왕후(세종실록 2년 8월 29일), 태조의 맏딸 즉 고모인 경신공주(세종실록 8년 3월 25일), 이복동생인 혜령군(세종 22년 6월 29일), 며느리인 세자빈 권씨(세종 23년 7월 29일) 등 가족 및 친인척의 상사를 당했을 때에 짧게는 며칠 길게는 한 달 이상 고기 없이 식사를 하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함께 일해 온 신료의 초상에도 반드시 3일 간은 소찬을 드셨습니다.(세종실록 8년 3월 25일)


세종은 초상 외에도 이상기후나 흉작을 맞으면, 고기 반찬을 정지시킵니다.

신하들은 태종의 유교를 언급하며 고기를 드시라 간청하지만, 세종은 이를 강력하게 뿌리칩니다.

이처럼 본인은 갖가지 이유를 대며 소찬素饌을 고집하지만, “나이 많은 늙은 대신은 하루라도 고기가 없어서는 안 된다”며 주변인의 섭생을 챙깁니다.(세종실록 28년 3월 27일)


사랑하는 부인 소헌왕후가 먼저 저 세상으로 떠났을 때의 일입니다.

본인이 소찬을 드시는 것은 물론, 자녀들에게 묽은 죽만 마시게 하고 5일만에야 비로소 밥을 먹게 하셨던 분이(세종실록 28년 3월 24일), 늙은 신하들에게는 “50세 된 사람은 고기가 아니면 배부르지 않다”며 고기를 권합니다.(세종실록 28년 3월 28일)


이는 맹자가 한 말과도 맥이 닿는데요.

“50세가 되면 비단 옷이 아니면 따뜻하지 않고, 70세가 되면 고기가 아니면 배부르지 않다. 따뜻하지 않고 배부르지 않은 것을 ‘헐벗고 굶주림[동뇌凍餒]’이라 한다.”(『맹자孟子』「진심 상盡心上」)

맹자는 노인을 잘 보살피는 것을 ‘왕도정치王道政治’라는 이상향의 근본으로 제시한 바 있는데요.

세종 또한 약자가 ‘배부르고 등 따신’ 사회를 추구했습니다.


오늘(7/12)이 초복初伏으로, 무더위의 개시를 알리는 절기입니다.

‘보양식을 먹는 날’을 넘어, 노약자의 사망률이 급증하는 시기가 이제 시작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진정한 ‘고기 덕후’라면, 고기 먹기 힘든 이들의 처지를 떠올려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세종이 고기를 좋아했다면서요?”

예, 앞서 본 것처럼, 세종에게 ‘고기는 사랑입니다’.


* 참고문헌 :

1.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2. 아시아경제, 2017-07-12,「어르신들 원기회복 위한 초복 삼계탕 봉사」.


(사진 : 아시아경제)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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