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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채원연구소공감]대표 :: 세종이야기꾼 :: 실록연구자 :: 소통 디자이너 :: 010-8014-7726 :: chewonoh@gmail.com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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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금요일 오후에 예감터여민의 개관 행사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예술과 감성의 놀이터'를 표방하는 만큼, 개관일부터 예술과 감성 그리고 재미를 전해드리고자 준비하고 있는데요.

조선시대 태조와 세종 때 축성한 한양도성 다산성곽길에서 우리의 옛놀이와 옛음악, 그리고 역사를 만날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가 되리라 기대합니다.
아, 저는 사회자로서 여러분을 맞이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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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17.9.1. pm 4:00-6:00
*주최 : 문화예술감성단체 여민
*후원 : 서울시 중구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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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11에 강의한 세종실록 11년에 대한 내용입니다. 다음과 같이, 세종 10년에 이어 명나라 사신의 횡포가 극에 달했던 해였습니다.


(명나라 사신) 윤봉이 요구한 물건이 2백여 궤(櫃)나 되었다. 궤짝 1개를 메고 가는데 8인을 사용해야 하는데, 궤짝을 메고 가는 사람들이 태평관(太平館)에서부터 사현(沙峴)에 이르기까지 연달아 이어져 끊어지는 일이 없었다. 사신(使臣)의 물품 요구가 많은 것이 이보다 더 심한 때는 없었다.(세종 11/7/16)


다행히 명나라 황제는 '공식 도장을 찍은 문서에 의거해서만 사신에게 물건을 주라'는 칙서를 보냅니다. 그간 진심으로 외교에 임한 결과였습니다.


임금이 왕세자와 백관을 거느리고 모화관(慕華館)으로 나아가서 칙서를 맞이하였다. -중략- "이제부터 조정에서 보내는 내관(內官)·내사(內史)란 사람들이 왕의 나라에 이르거든, 왕은 다만 예(禮)로 대접할 것이요 물품을 주지는 말라. 조정에서 구하는 물건은 오직 어보(御寶)를 누른 칙서에 의거하여 응당 부쳐 보내고, 만약 짐(朕)의 말이라고 말로 전하면서 구하거나,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것은 다 들어주지 말라. 왕의 부자(父子)가 조정을 공경히 섬겨 오랜 세월을 지냈으되, 오래 갈수록 더욱 간독히 함을 짐이 길이 아는 바로서 좌우의 근친자들이 능히 이간할 바 아니니 왕은 염려하지 말라." (세종 11/12/13) 


이렇게 어려운 문제들을 하나하나 해결하면서 더불어 미래를 위한 준비도 놓치지 않습니다. 바로『농사직설農事直說』의 찬술입니다.


여러 도(道)의 감사(監司)에게 명하여 주현(州縣)의 늙은 농부들을 방문하게 하여, 농토의 이미 시험한 증험에 따라 갖추어 아뢰게 하시고 -중략- 중복된 것을 버리고 그 절실히 필요한 것만 뽑아서 찬집하여 한 편(編)을 만들고 제목을 《농사직설이라고 하였다. (세종 11/5/16)


급무急務와 선무先務를 파악하고 그에 맞추어 일을 진행해나가는 세종의 진면목이 드러나는 한 해. 바로 세종 재위 11년이었습니다.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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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관직 명칭 및 그 업무 내용 등 :

_역주 경국대전 번역편,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역사연구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06. (절판. 헌책방 혹은 도서관에는 구비되어 있음)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3587939


_위의 책보다 더 보기 편한 '관직 사전'류가 몇가지 있습니다. 살펴보시고
 마음에 드시는 것을 고르면 좋겠습니다.


2. 실록, 사관의 체계 등 :
_조선왕조실록 어떤 책인가, 이성무, 동방미디어, 1999. (절판. 헌책방 혹은 도서관에는 구비되어 있음)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83293


3. 한국학중앙연구원 조선왕조실록사전 :
http://encysillok.aks.ac.kr/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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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27에는 세종 9년을 함께 읽었습니다.

이날 강의 내용에는 명나라 조공 및 사신의 횡포, 양녕대군으로 인한 논쟁, 황희의 사위인 서달徐達의 살인 및 그 조작 등 굵직한 사건들이 많았습니다

그 중에서도 저는 집현전응교集賢殿應敎 권채權採의 잔혹한 행적과 관련된 세종의 언급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권채는 "시문詩文을 다 잘하여 문형文衡을 받아 왔다"(세종 20년 5월 10일)고 평가를 받을 만큼 당대 최고의 문장가이며, 세종의 총애를 받았던 인물입니다.

그의 정부인은 심한 투기로 첩인 덕금을 동물 이하로 학대했고, 권채는 이를 알면서방관했지요. 

거의 시체에 가까운 덕금의 모습이 우연히 발각되었고, 그 처리 문제로 인해 논쟁이 일어납니다.

이에 대해 세종이 말씀하시지요.


"임금의 직책은 하늘을 대신해 만물을 다스리니, 만물이 그 처소를 얻지 못하여도 대단히 상심할 것인데 하물며 사람일 경우야 어떻겠는가[人君之職, 代天理物, 物不得其所, 尙且痛心, 況人乎]. 진실로 차별없이 만물을 다스려야 할 임금이 어찌 양민良民과 천인賤人을 구별해 다스릴 수 있겠는가.” (세종실록 9년 8월 29일)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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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록공감 08_조선시대의 개고기 로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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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共享生生之樂, 세종실록 24년 1월 7일]

세종과 더불어, ‘나와 다른 당신’과 공감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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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회(실록공감 07_광해군과 음식로비)에 이어, 특이한 뇌물에 대한 이야기를 하나 더 해볼까 합니다. 조선의 11대 임금인 중종中宗과 사돈지간으로 위세 등등했던 김안로金安老는 개고기를 무척 좋아했다고 전해집니다. 그 사실을 안 몇몇 사람들은 그에게 개고기를 뇌물로 바치고 요직에 올랐지요.


이팽수李彭壽를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임금 비서실의 문서관리자, 정7품)에 제수하였다.

사관은 논한다. 이팽수는 해당 부서인 승정원의 추천도 없었는데, 김안로가 마음대로 추천한 것이었다. 김안로는 개고기를 좋아했는데, 이팽수가 봉상시참봉奉常寺參奉(국가제사 관장하는 관청의 말단직, 종9품)으로 있을 적에 크고 살진 개를 골라 사다가 먹여 늘 그의 구미를 맞추었으므로 김안로가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어느 날 갑자기 청반淸班(지위는 낮으나 추후 고위직에 등용될 수 있는 관직)에 올랐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가장주서家獐注書’라 불렀다. (중종실록 29년 9월 3일)


가장주서의 가장家獐은 ‘삶은 개고기[烹炙犬肉]’를 가리킵니다. 결국 이팽수는 ‘개고기 공무원’이라는 우스꽝스러운 별명이 붙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팽수만 김안로에게 ‘개고기 로비’를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어서 이팽수의 동료였던 진복창이라는 인물에 대한 기록을 보겠습니다.


진복창陳復昌을 봉상시주부奉常寺注簿(국가제사 관장하는 관청의 실무책임자, 종6품)에 제수하였다.

사관은 논한다. 김안로가 권세를 휘두를 때 이팽수가 봉상시 참봉이었는데, 김안로가 개고기 구이[狗炙]를 좋아하는 줄을 알고 날마다 그것을 만들어 제공하였고, 마침내 김안로의 추천을 받아 요직[淸顯職]에 올랐다. 그 뒤 진복창이 봉상시 주부가 되어서도 개고기 구이로 김안로의 뜻을 맞추어 온갖 요사스러운 짓을 다 하는가 하면, 매번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김안로가 개고기를 좋아하는 사실까지 자랑삼아 설명하였다. (중종실록 31년 3월 21일)


진복창陳復昌이 감히 분수에 넘친 계획을 품고 밀어주는 세력을 얻을 것을 생각하여 처음에는 김안로를 섬겼는데, ‘개고기 구이[犬炙]’가 이팽수에 미치지 못한다’는 질책을 받기까지 하였다. 【진복창이 봉상시주부로 있을 때 이팽수와 동료였는데, 김안로를 섬겨서 그 세력으로 좋은 벼슬을 얻으려고 다투어 개고기 구이로 아첨하였다. 진복창은 자신의 개고기 구이의 맛이 최고라 생각하고 올렸지만, 김안로는 오히려 이팽수의 개고기 구이의 맛에 미치지 못한다고 평하였다.】 (명종실록 5년 5월 24일)


진복창 또한 이팽수처럼 개고기 요리를 김안로에게 바쳤습니다.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자랑까지 했지요. 하지만 어쩌나요. 김안로의 입에는 이팽수의 요리가 맞았던 모양입니다. 진복창은 김안로에게 ‘이팽수의 개고기보다 맛없다’는 질책까지 받지요.

밤낮없이 고관대작의 집들을 찾아다니며 인맥을 쌓았으나(명종실록 5년 5월 24일), “나중에 크게 쓰이지 못하였다”(중종실록 31년 3월 21일)는 진복창에 대한 사관의 평가에서 연민마저 느껴집니다.


로비lobby를 조선시대에는 ‘분경奔競’이라 칭했는데요. 이는 '분주히 쫓아다니며 이익을 추구함'을 가리키는 ‘분추경리奔趨競利’의 줄임말입니다. 다른 말로 ‘관직 사냥’을 가리키는 ‘엽관운동獵官運動’이라고도 불렀습니다.

뇌물과 청탁으로 권력을 획득하거나 이득을 취하려는 시도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나 봅니다. 조선 초 정종定宗이 분경을 금지하는 교서敎書(임금의 공식문서)를 내렸는데(정종실록 1년 8월 3일) 실효성이 별로 없었습니다. 이후 태종太宗 시대에 들어 ‘김영란법’, 즉 분경금지가 법제화됩니다(태종실록 1년 5월 20일). 하지만 분경은 그 특성상 비밀스럽게 이루어지는지라 조선시대 내내 존재했습니다. 인간에게 인정욕, 권력욕, 상승욕 등이 존재하는 한, 분경은 앞으로도 사라지지 않겠지요.


* 참고문헌 :

1.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2. 아시아경제, 2017-08-10, 「김영록 농림축산식품부 장관 “김영란법 상한액, 선물은 올리되 경조사는 낮추겠다”」.


(사진 : 아시아경제)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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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13일에는 세종 7년에 대해 강의하였습니다.

이 해에는 화폐개혁으로 인한 기사가 눈에 띄었는데요.


앞서 아버지 태종 때에 저화楮貨, 즉 닥나무 껍질로 만든 종이 돈을 발행한 바 있지요.

'겨우 종이 쪼가리'가 현물을 대체하여 돈으로서 기능한다는 사실이 일반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위조도 용이한 탓에 저화는 원활하게 유통되지 않았습니다.


이에 세종은 종이보다 돈의 느낌이 나는 동으로 조선통보寶라는 동전을 주조하여 화폐개혁을 시도합니다.

그러나 현물 경제에 익숙한 백성들에게는 이 또한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많은 학자들이 세종대의 대표적인 실패 사례로 이 화폐개혁을 꼽으며, 돈이 원활하게 유통되는 경제 구조가 형성되지 않았던 것을 그 주요 원인으로 봅니다. 

결국, 당시는 돈이 유통되기에는 경제 체계가 미숙했던 때였던 것입니다.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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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특한 공연 및 강연이 8/16(수)에 예정되어 있습니다.

제가 진행하지는 않지만, 무척 유익하고 유의미한 행사이며, 게다가 참가비가 무료(!)인지라 많은 분들과 기회를 공유하고자 합니다.


'영혼의 탈식민지화'는 제 주요 관심분야인데요.

군국주의, 식민지배, 그리고 독재를 겪은 우리는 아직도 오롯한 '나'로 살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더 나아가 정형화된 인간상을 설정한 근대식 교육, 매체의 프레임에 의해, 우리의 사고와 영혼은 외부에 주인을 두고 살아 왔지요.

 

공연장이 남산 부근의 다산성곽길에 있습니다.

유익한 공연과 성곽길 나들이를 함께 즐길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 행사 상세 정보 :

http://blog.naver.com/yeominrak21/221070530553


후카오 요코深尾葉子 선생님 관련 기사 :

https://goo.gl/qRM4TP


* 신청 :

https://goo.gl/ydxf83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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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2(토)에 신청서 마감 및 검토를 마친 후, '통通'을 받은 분들께 직접 알려드릴 예정입니다.

세종을 포함한 옛 왕들은 책문을 통해 국정 운영에 도움이 될만한 말을 청취하고자 하였습니다.

여러분께서 제출해주실 신청서가 [실록공감], 세종, 공부 등에 대해 경청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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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에 강의했던 세종 3년 차에 대한 내용입니다.

이 해의 열쇠말을 저는 ‘실정實情’으로 설정했습니다.

백성들이 실제 처한 상황, 그리고 거기에서 비롯된 정서를 파악하고자 노력하는 신입 군주의 노력이 돋보인 해였기 때문입니다.


뉴스에 자주 오르는 보직으로 민정수석이 있습니다.

이때의 민정은 '民政'이 아니라 '民情'입니다.

즉 민중의 뜻을 파악하고 공유하는 업무가 바로 민정수석임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정치뿐 아니라, 우리네 삶에서 원칙과 더불어 중요한 것은 그것이 ‘실제, 현실에 부합하는가?’일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상대에 대한 공감능력이 필요합니.

앞으로 세종이 신료들, 백성들과 어떻게 공감해나갈지 기대해주세요.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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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25에는 재위 2년째를 맞은 세종을 알아가는 시간이었습니다.

이때 어머니인 원경왕후가 돌아가시는 큰 일을 겪는데요.

맏이 양녕대군 편에 서서 세자 교체를 반대했던 어머니께 보이는 세종의 효성에 아버지 태종이 감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내가 대비와 주상의 간 곳을 몰랐는데, 오늘에야 알고보니 주상이 대비의 학질()을 근심하여 몸소 필부의 행동을 친히 하여, 단마(單馬)로써 환자 두 사람만을 데리고 대비를 모시고 나가 피하여 병 떼기를 꾀하니, 심히 그 효성()을 아름답게 여긴다." (세종2/6/7)



여기에 대해 중용中庸』의 '성誠' 개념을 연결하여 이날의 마무리를 지었습니다.

誠者,天之道也;誠之者,人之道也。(성이라는 것은 하늘의 도이고, 성을 행하는 것은 사람의 도이다.)

정말 정성 가득한 세종의 모습이 그려진 해였습니다.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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