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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채원연구소공감]대표 :: 세종이야기꾼 :: 실록연구자 :: 소통 디자이너 :: 010-8014-7726 :: chewonoh@gmail.com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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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록공감 01_세종의 지방수령 면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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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共享生生之樂, 세종실록 24년 1월 7일]
세종과 더불어, ‘나와 다른 당신’과 공감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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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이 백성을 구휼하는 방법에 대해 질문하자, 변계량卞季良은 관리의 “사람됨을 잘 알고 쓰는 것”이 제일이라고 대답합니다. 정초鄭招는 “새로 임명된 수령은 전하께서 반드시 직접 면담하시와, 어질고 어질지 못한 것을 살피신 다음에 부임케 하면 수령으로서도 적격자를 얻을 것이며, 백성도 진실한 혜택을 받게 될 것”이라고 그 방법을 제시합니다(세종실록 1년 1월 30일). 


실제로 그 후부터 세종은 발령지로 내려가기 전의 지방 수령을 직접 면대하여 “수령은 임금의 근심하는 마음을 나누어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니, 그 임무가 지극히 중대하다. 그대들은 나의 마음에 부응하여 백성을 어루만지고 폐해를 제거하는 데 힘쓰라”며 ‘협치’를 당부합니다(세종실록 7년 12월 7일). 또한 이미 근무 중인 수령에게서는 해당 지역의 현황에 대해 보고를 받기도 합니다. 


그렇게 만 6년간 시행해오던 어느 날, 세종은 고위직뿐 아니라 하위직 수령에게까지 면담을 확대하겠다고 이야기합니다. “이전에는 2품 이상인 (고위직의) 수령만을 접견하였으나, 내가 자세히 생각하여 보니, 시골의 먼 곳을 내가 친히 가서 다스리지 못하고 어진 관리를 선택하여 나의 근심을 나누어 보내는 것이니, 그 임무가 가볍지 않다. 그런 까닭에 2품 이하의 수령도 친히 보고 보내도록 하겠다”는 말씀이지요(세종실록 7년 12월 10일). 이렇게 세종은 중앙 정부와 지방간의 소통을 정례화・법제화・정책화 하여, 민생에 가까운 정치를 실행하고자 노력합니다.


오늘(6/14) 신문에서는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후 첫 시도지사 간담회를 열었다는 소식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자리에서 시도지사들은 각 지역의 현안을 공유하며 그 해결책을 구하는 한편, 국정 운영에 협조할 의사를 피력했다고 합니다. 이에 문 대통령은 강력한 지방분권제를 약속하고, 더 나아가, 시도지사 간담회를 일회성 행사가 아닌 정례화하고, 향후 개헌을 거쳐 제2국무회의로 제도화하겠다는 의지도 밝혔습니다.
어딘가에서 많이 본 모습 아닌가요? 어릴 적 꿈이 역사학자였다는 문 대통령께서 역사의 교훈을 잊지 않고, 세종처럼 소통하는 정치를 이어가 주시길 바랍니다.


-참고문헌-
1.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2. 뉴스핌, 2017-06-14, 「문 대통령 "시·도지사 간담회 정례화…제2국무회의 예비모임"」.
3. 연합뉴스, 2017-06-14, 「이시종지사, 오송3산단 조성 지원 등 대통령에 건의」.
4. 이데일리, 2017-06-14, 「최문순 강원도지사, 文대통령에 “돈·권력, 분산시켜 달라”」.

(사진 : 뉴스핌)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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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적인 가뭄이라는 뉴스가 연이으며, 기우제를 지내야 하는 것 아니냐는 걱정까지들 했는데, 어제부터 반가운 비가 내려준다.

그야말로 희우喜雨가 아닐 수 없다.

이 반가운 비, 사람들을 기쁘게 해주는 비, 즉 희우라는 이름의 정자가 현재의 합정동에 있었으며, 심지어 그 이름을 세종께서 지으셨다는 기사가 <세종실록>에 남아 있다.


임금이 (농사 상황을 시찰하러 나가셨는데) 홍제원洪濟院·양철원良哲院에서 영서역迎曙驛 갈두 들에 이르기까지 고삐를 잡고 천천히 가는 길에 ·보리가 무성한 것을 보고, 임금이 흔연히 기쁜 빛을 띠고 정자 위에 올라 잔치를 벌이는데, 마침 비가 좍좍 내려서 잠깐 사이에 들에 물이 흡족하니, 임금이 매우 기뻐서 이에 정자의 이름을 희우정喜雨亭이라고 지었다. (세종실록 7년 5월 13일) 


희우정이라는 이름은 실록에 그 유래가 기록되어 있지는 않다. 

하지만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인 두보甫(712-770)의 시 <춘야희우春夜喜雨(봄밤에 내리는 반가운 비)>에서 따온 것으로 추정한다.

역시 당송팔대가로 평가되는 두 사람, 즉 구양수歐陽修(1007-1072)와 소식蘇軾(1037-1101)의 편지를 엮은 책인 <구소수간歐蘇手簡>을 세종께서 어린 시절에 독파하셨다는 실록의 기사(세종실록 5년 12월 23일단종실록 1년 6월 13일명종실록 1년 6월 9일)를 보면 개연성은 충분하다고 본다. 


節 좋은 비는 시절을 알아
生 봄이 되니 이내 내리네.
夜 바람 따라 몰래 밤에 들어와
聲 촉촉히 만물을 적시네, 소리도 없이.

黑 들길은 구름이 낮게 깔려 어두운데
明 강 위의 배만 홀로 불빛만 밝네.
處 새벽에 붉게 젖은 곳을 보니
城 꽃들이 겹겹이 금관성에 피었네.


<춘야희우>는 조선 후기의 문인 화가인 심사정(, 1707-1769)의 그림에 일부가 화제畫題로도 적혀 있다.

<강상야박도江上夜泊圖(강 위에서 밤에 정박한 (배의) 그림)>의 상단에서 黑 가 보인다(고 한다. 찾은 그림마다 상단이 잘려서 전체가 내 육안으로 확인되지는 않는다).

심사정의 불행했던 가정사를 생각하면 '희우'라는 단어가 어울릴까 싶다가도, 그렇게 예술은 승화되는 것인가 보다 하는 생각도 든다.

(1747년, 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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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실록공감-나와 세종을 실록實錄하다]의 출정식 겸 공개강연이 있었습니다.

제가 옛날옛적 실록을 처음 접하며 겪었던 어려움을 고백하고, 앞으로 우리가 더불어 나아가길 기대하는 목표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함께 자리한 분들께 짐을 마구마구 지워드렸더랬지요.


'나, 이대 나온 여자야'가 회자되었던 이유는 아마도, 과거 소외되었던 여성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했던 이화여자대학교의 문제의식과 배치되는 태도가 그 말에 담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는 이번 기회를 통해, 단순히 실록과 세종을 학습하는 지적 만족 혹은 도구적 이용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삶에 의미 있는 점 하나를 찍고 싶습니다. 
 지식의 소비자에 그치지 않고, 내 생각을 만들어나가는 시간이 되길 기대합니다.


'논문도 써야 하고 여력이 없는데...' 라는 저를 채찍질해서 마당을 펼쳐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이산화탄소 농도 짙은 공간 안에서 벌건 얼굴로 늦은 시간까지 임해주신 모든 분들께도 감사합니다.
다음주부터는 본격적으로 세종을 만나러 갑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어제보다 조금은 '친절한 채원씨'가 될 지 모릅니다ㅎ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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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개강의 이후, 본격적인 첫 시간이었던 지난주는 태종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였다.
'聖君성군 세종' 신화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태종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일그러진 진주(Baroque)' 태종, 그리고 '극복인(Übermensch)' 세종은 아픔[痛]을 공유한 父子부자이자 동지였다.
장석주 시인의 <대추 한 알>처럼, 그들 안에는 "태풍 몇 개", "천둥 몇 개", "벼락 몇 개"가 들어 있었다.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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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하는 최초의 '한글 의궤'로 평가 받는 정리의궤(整理儀軌)에 대한 기사를 접했다(http://goo.gl/ceinxJ). 실록에는 정리의궤와 관련하여 어떠한 기사가 있을까 궁금하여 찾아보았다.

(경인일보 2016-07-15) 


영의정·예조 판서·장용위 제조·정리소(整理所) 의궤 당상(儀軌堂上)을 소견(召見)하였다. 상[정조]이 이르기를, "자궁[모친 혜경궁 홍씨]께서 회갑을 맞는 탄신일이 머지 않으니 아랫사람의 심정으로서는 마냥 기뻐 축하드리고 싶을 뿐이다. 그런데 연회나 진하하는 의식에 대해서는 자궁께서 옛날 일을 슬퍼하시어 한결같이 굳게 거절하고 계시니 규례처럼 하기에 어려운 점이 있다. 따라서 아랫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매우 섭섭하기는 하지만, 만약 진하나 연회와 같은 이름은 붙이지 않고 실제로 축하드리고 잔치를 베푸는 일을 행한다면, 내가 어버이의 뜻을 따르는 도리에 있어서나 경사를 축하하는 방도에 있어 어찌 양쪽 다 온당하게 되지 않겠는가.마땅히 18일에 치사(致辭)를 직접 올릴 것이며 표리(表裏)와 전문(箋文)도 직접 올리겠다. 그리고 음식 차리는 일도 그날 행할텐데, 찬품(饌品)에 대해서는 일찍이 현륭원(顯隆園)에 행차했을 때 정리소(整理所)에서 차려 올렸던 예가 있으니, 이번에도 본영(本營)에서 거행하되 제조(提調)가 잘 살피도록 하라. 자궁의 내·외 친족으로서 이번에 반열에 참여시킬 대상자는 동성(同姓) 10촌(寸)과 이성(異姓) 6촌으로 제한하라. 그러나 홍희영(洪喜榮) 부자는 모당(慕堂)을 받들어 제사올리는 사람인만큼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점이 있으니 그들도 자리에 참여토록 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정조 19년 6월 7일)



정리주자(整理鑄字)가 완성되었다. 전교하기를, "우리 나라에서 활자로 책을 인쇄하는 법은 국초(國初)부터 시작하여 태종조(太宗朝) 계미년에 경연에 소장하고 있던 고주본(古註本) 《시(詩)》·《서(書)》·《좌전(左傳)》의 글자를 대본으로 하여 이직(李稷) 등에게 명해서 10만 자를 주조하게 하였으니, 이것을 계미자(癸未字)라고 한다. 세종조(世宗朝) 경자년에는 이천(李蕆) 등에게 명하여 이를 고쳐 주조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경자자(庚子字)이고, 갑인년에는 경자자가 섬밀(纖密)하다는 이유로 경연에 소장하고 있던 《효순사실(孝順事實)》·《위선음즐(爲善陰隲)》 등의 책을 내다가 이를 자본(字本)으로 삼아김돈(金墩) 등에게 명하여 20여 만 자를 주조하였으니, 이것이 갑인자(甲寅字)인데 이를 사용한 지 3백 년이 되었다. 내가 임진년에 동궁에 있으면서 대조(大朝)에 앙청하여 대내에 있던 갑인자로 인쇄한 《심경(心經)》 《만병회춘(萬病回春)》 두 책을 내다가 이를 자본으로 삼아 5만 자를 주조하여 보관하였으니, 이것이 임진자이다. 내가 즉위한 원년인 정유년에는 관서백(關西伯)에게 명하여 본조 사람 한구(韓構)의 글씨를 자본으로 삼아 8만여 자를 주조하게 하여 역시 내각(內閣)에 보관하였다. 대체로 전후로 주조한 활자의 동체(銅體)가 일정하지 않아서 인쇄하려면 젖은 종이를 써서 고르게 붙이고 한 판을 찍을 때마다 별도로 몇 사람을 세워서 주묵(朱墨)으로 활판의 형세에 따라 교정을 하게 하는데도 오히려 비뚤어지는 염려가 있었으며 걸핏하면 시일이 걸리곤 하였다. 그래서 인쇄를 감독하는 여러 신하들이 누차 이를 말하였었다. 임자년에 명하여 중국의 사고전서(四庫全書) 취진판식(聚珍板式)을 모방하여 자전(字典)의 자본을 취해서 황양목(黃楊木)을 사용하여 크고 작은 글자 32만여 자를 새기어 ‘생생자(生生字)’라고 이름하였다. 을묘년에는 《정리의궤(整理儀軌)》  《원행정례(園幸定例)》 등의 책을 장차 편찬·인행하려는 계획 아래 명하여 생생자를 자본을 삼아서 구리로 활자를 주조하게 하여 크고 작은 것이 모두 30여 만 자였는데 이를 ‘정리자(整理字)’라 이름하여 규영(奎瀛) 신부(新府)에 보관하였다." 하였다. (정조 20년 3월 17일)

(경인일보 2016-07-15) 


전교하기를, "우리 나라의 경적(經籍) 인쇄는, 국초에 고려의 옛 제도를 따라서 교서관(校書館)을 두어 관장하게 하였었는데, 고려에서는 이를 비서성(秘書省)이라고 하였고, 궁예(弓裔) 때에는 금서성(禁書省)이라고 하였으니, 최초에는 궁중에 설치하였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태종(太宗)3년에 별도로 주자소(鑄字所)를 궁중에다 설치하고 고주본(古註本) 《시경》·《서경》·《좌전》을 본으로 구리로 활자를 만들어 전적(典籍)을 널리 인쇄하였으니, 이것이 또한 처음으로 글자를 주조한 유래이다. 세종조(世宗朝)에는 경자자(庚子字)·갑인자(甲寅字)가 있었고, 문종조(文宗朝)에는 임신자(壬申字)가 있었고, 세조조(世祖朝)에는 을해자(乙亥字)·을유자(乙酉字)가 있었고, 성종조(成宗朝)에는 신묘자(辛卯字)·계유자(癸酉字)가 있었다.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치평요람(治平要覽)》·《주자대전(朱子大全)》 등 책은 다 궁중에서 인쇄한 것이니, 비부본(秘府本)이라고 불리워지는 본국 초기의 판본들이 다 정밀하고 보기에 편리한 것은 까닭이 있다. 내가 동궁으로 있던 때에 교서관에 명하여 세종조 갑인자를 본으로 하여 15만 자를 주조하게 하였으니, 바로 《경서정문(經書正文)》의 인본이다. 즉위하던 해인 정유년에 관서 관찰사에게 명하여 다시 갑인자를 본으로 삼아 15만 자를 더 주조하게 하여 내각에 보관하게 하였으니, 바로 《팔자백선(八子百選)》 및 새로 인쇄한 《경서대전(經書大全)》의 인본이다. 갑인년에 직접주자(朱子)의 편지 백 편을 골라 내각에 소장되어 있는 주자(鑄字)를 가지고 인쇄하여 배포하고자 하여 창경궁에 있는 옛 홍문관을 수리하여 주자를 옮겨놓으라고 명하였었다. 을묘년 봄에 자전을 모시고 수연(壽筵)에서 돌아온 후 《정리의궤(整理儀軌)를 편찬하려고 인역(印役)을 설치하여 동으로 30만 자를 주조하였는데, 이것을 정리자(整理字)라고 한다. 먼저 《지희갱재축(志喜賡載軸)》과 전후의 갱재시(賡載詩)를 인쇄하고, 또 《어정규장전운(御定奎章全韻)》을 내려보내어 인쇄한 후 그 판각을 보관하게 하였다. 올해는 또 정유자로 《어정사기영선(御定史記英選)》을 인쇄하여 배포하였다. 어정서(御定書)의 간인(刊印)이나 활인(活印)이 있을 때마다 반드시 여기에서 했던 것은 국초부터 정해져 내려오던 법을 내가 계승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그 명칭은 내가 일찍이 지어 주지 않았기 때문에 각신들이 우선 감인소(監印所)라고 불러 왔다." 하고, 이때에 와서 국초에 설치하던 때의 옛날 호칭을 그대로 써서 주자소(鑄字所)라고 부를 것을 명하였다. (정조 20년 12월 15일)



우의정 이시수를 정리의궤청 총리 대신으로 삼았다. (정조 23년 6월 20일)


《정리의궤(整理儀軌)를 교정(校正)한 당상(堂上) 이하에게 시상하였다. (순조 28년 5월 16일)


전교하기를, "《진찬의궤(進饌儀軌)》의 수정은 《을묘 정리 의궤(乙卯整理儀軌)에 의거대로 하라." 하였다. (고종 15년 3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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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받는 남자의 비밀~

"(충녕)대군이 평소에 부인(소헌왕후)을 공경히 대하여, 그녀가 드나들 때에는 반드시 일어나서 보내고 맞이하였다[大君平居, 敬待夫人, 其進退, 必起送迎。]." (태종 18/6/3)


가까운 사이일 수록 예의를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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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윤이 또 말하였다. “한 그릇의 밥을 두 사람이 같이 먹으면 비록 배는 부르지 않더라도 오히려 한 사람이 혼자만 배부른 것보다는 나을 것입니다[一簞之食, 二人共食, 雖不能飽, 猶愈於一人獨飽也。]." (태종 15/1/16)


우리의 옛 어른들은 혼자만 배부른 것을 원치 않았다.

비록 내 입에 들어가는 양이 줄더라도, 함께 나누는 쪽을 택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여민동락(與民同樂)'일 것이다.

넘쳐나는 여유로움을 일시적으로 맛만 보여준 맹자(孟子(맹자 양혜왕 장구 하편(梁惠王 章句 下篇))의 여민동락과 다르다.

우리식의 여민동락 정신은, 함께하여 어려움도 넘기기에, 본류인 맹자를 넘어섰다.


김득신(金得臣), 성하직리(盛夏織履 여름날의 짚신 삼기)종이에 담채, 18세기, 22.4x27cm, 간송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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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대에는 인재가 있기 마련이고, 그는 충분히 그 시대의 일을 성취해낼 수 있다. 그런데도 늘 옛사람들을 우러러보며 지금 사람들은 따라갈 수가 없고, 자질이 떨어져서 큰일을 하기에 역부족이라고만 한다. 이 역시 잘못이다. 대개 인재는 구하면 있다. 다만 구별이 쉽지 않고, 다 찾아서 쓰지 못하는 것이 염려스러울 뿐이다."

[一]

(정조正祖, 홍재전서弘齋全書卷 178, 일득록得錄 18, 훈어訓語 5)

(일득록은 정조의 개인 문집인홍재전서(弘齋全書)』에 수록된 부분으로, 得錄이라는 말 그대로 하루를 반성하고 그날 얻은 깨달음을 기록한 정조의 일기이다.)


최근에 둘이 함께 길을 걷다가 옆 사람이 천 원짜리 지폐를 줍는 것을 보았다.

처음엔 신기하다가 그 다음엔 당황스럽다가 절망스럽기까지 했다.

나도 같은 길을 걸었는데, 나도 두 눈으로 앞을 보았는데, 나는 못 본 것을 내 옆 사람은 보았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그리고는 휘둥그레진 내게 그 돈을 건넸다ㅎㅎ).

내게는 눈이 달려 있지만, '보는 눈'은 없는 것이다.

나는 눈 뜨고도 얼마나 많은 부, 기회, 사람을 놓쳤을까?


정조께서도 말씀하셨듯이, 국가와 기업에서는 인재가 없다고 하소연한다.

사실, 인재는 있지만, 그를 알아보고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리더가 없는 것 뿐이다.

우리는 주변에 좋은 사람이 없다고들 이야기한다.

하지만 작은 욕망에 가리워진 내 눈이 따라가지 못하는 것 뿐이다.

눈 씻고 귀 열고 레이다를 촤악 펼치고 주변을 둘러봐야지.

좋은 사람을 찾았다면 그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다가가야 할 것이다.

만약 내 힘만으로 관계의 발전 혹은 개선이 힘들다면, 주변에 도움을 청하고.

'용기 있는 자만이 미인을 쟁취한다'는 말은 남성이 여성에게 어필할 때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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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양녕대군)가 주상(主上, 태종)을 모시고 식사를 하는데 예(禮)에 맞지 않는 것이 많았다. 주상께서 이를 보고 말하기를,
“내가 젊었을 적에 편안히 놀기만 하고 배우지 아니하여, 거동(擧動)이 절도가 없었다. 지금 백성의 임금이 되어서도 백성들의 바람[民望]에 합하지 못하니, 마음속에 스스로 부끄럽다. 네가 비록 나이는 적으나, 그래도 원자(元子)이다. 언어(言語) 거동(擧動)이 어찌하여 절도가 없느냐? 서연관(書筵官)이 일찍이 가르치지 않더냐?”
하니, 세자가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하였다.
(태종 5/10/21, 양녕 만 11세 때)

서연관(書筵官)에게 명하여 세자에게 학문에 힘쓰기를 경계하도록 하였다. 문학(文學) 정안지(鄭安止)·사경(司經) 조말생(趙末生)에게 이르기를,
“이제부터 서연(書筵)에 입직(入直)하는 관원은 세자가 식사하거나 움직이거나 가만 있을 때에도 좌우를 떠나지 말고, 장난을 일체 금하여 오로지 학문에만 힘쓰도록 하라. 세자가 만약 듣지 아니하거든 곧 와서 계달(啓達)하라.”
하고, 또 시관(侍官)을 불러 꾸짖었다.
“요즘 듣건대, 세자가 공부하기를 매우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니, 사실은 너희들의 소치이다. 세자가 만약 다시 공부에 힘쓰지 아니하면, 마땅히 너희들을 죄줄 것이다.”
(태종 6/4/18)

태종은 젊은 시절에 바깥으로만 나돌고, 자신의 수양은 커녕 가정 교육에도 신경 쓰지 않았나보다.

이제 정신 차리고 좋은 아버지 노릇을 하려 하나, 아이는 엄격한 아버지를 무서워하기만 한다.

요즘 말로, 아이의 교육에 필요한 것은 엄마의 정보력, 아빠의 무관심, 할아버지의 재력이라고 한다.

아이를 부인, 학교, 과외 선생님에게 맡기고, 자기 스스로를 돈 버는 기계로 전락시킨다.

그러나 가정 교육에서 선행되어야 할 것은 아빠의 보듬어줌이 아닐까?

자신이 경외하는 사람에게서 사랑을 받을 때에 아이의 자존감은 자리잡고, 세상에 맞설 용기가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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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사람이 말하기를, ‘부자(父子)의 사이에는 마땅히 날마다 서로 친근하여야 한다.’ 하였는데, 양녕(讓寧) 세자가 되었을 때 어전에 나아가 알현(謁見)하는데 절도가 있었으나, 그 후에 과실(過失)이 없지 아니하여서 들어가 알현하지 못하였으므로, 날로 부자 사이가 서로 멀어지고 막힌 것은 내가 친히 본 바이다. 

나는 날마다 세자(문종)와 더불어 세 차례씩 같이 식사하는데, 식사를 마친 뒤에는 대군 등에게 책상 앞에서 강론하게 하고, 나도 또한 진양대군(晉陽大君, 세조)에게 공부를 가르쳐 준다. 이것도 역시 도움되지 않는 바가 아닐 것이다. 혹 해가 기운 오후쯤에 대군 등과 더불어 후원(後園)에서 활도 쏘고 하는 것이니 -후략- 

(세종 20/11/23)


역시 정(情) 중의 정은 '밥정'이다.

밥상머리에서 마음도 나오고, 교육도 나온다.

가족이 함께 밥 먹을 시간도 없을 만큼 바쁜 현대인은 부자유친(父子有親)의 기회를 잃고 있는 셈이다.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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