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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채원연구소공감]대표 :: 세종이야기꾼 :: 실록연구자 :: 소통 디자이너 :: 010-8014-7726 :: chewonoh@gmail.com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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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정국이 장기화되며 많은 이들이 생계 곤란을 겪고, 정부에서는 긴급지원금 지급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에, 세종시대의 공무원들과 정치인들이 어떻게 재난에 대처했는지 정리한 기사가 오마이뉴스 메인에 게재되었습니다. 세종이야기꾼 오채원이 들려드리는 <실록 읽어주는 여자> 연재 기사 바로 가기 : http://omn.kr/1nhia)

 

“(내가 재위한 기간 중에) 천재지변이 없는 해가 없었다.” (세종실록 7년 6월 23일)

 

위와 같이 한탄한 것처럼, 세종은 거의 매년 자연재해 그리고 이로 인한 흉작으로 근심이 컸습니다. 세종실록에서는 크게 세 번의 대기근을 관찰할 수 있는데요. 피해 지역이 주로 경기·강원도 일대였던 세종 5~7년(1423-1425년), 곡창지대인 충청·전라·경상도 등 하삼도下三道 중심이었던 세종 19년, 경기·충청·강원·황해도 등 광범위했던 세종 26년을 들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세종 5~7년 무렵은 집권 초기로, 경험이 축적되기 전이었기에 대처하는데 고충이 컸을 것입니다.

( 보릿고개에 나물을 캐는 아이들을 담은  1930 년 사진 .  출처  :  서울역사박물관 아카이브 )

중앙집권체제를 지향한 조선은 국가 차원에서 선제적으로 재난에 대처합니다. 임금이 신뢰하거나 경륜이 있는 인물을 발탁해 현장에 급파한 후 피해 상황을 조사하고, 지방 수령(현재의 도지사·군수)이 백성들을 적극 구제하도록 감찰 및 지원합니다. ‘골든타임’을 놓치면, 주린 백성들은 전염병에 집단 감염되거나, 식량을 찾아 이산가족이 되어 지방으로 떠돌거나, 혹은 경제력 있는 자의 노비로 자진해 들어갑니다. 이는 세금원의 축소로 이어져, 국가의 운영마저 위태로워집니다. 그리고 위정자가 제대로 공부했다면, ‘임금은 어머니가 갓난아이를 돌보듯이 백성을 보호해야 한다[如保赤子]’는 유교 경전 『대학大學』의 가르침을 새기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세종은 궁에서 신하들의 보고만 받고 있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책망이 자신들에게 올까봐 부정적인 소식 전하기를 종종 피하니까요. 이에 세종은 민폐를 최소화하기 위해, 단출한 차림에 호위하는 신하들 없이 당직 경호원만 대동하고, 서대문 밖으로 나옵니다. 육안으로 살펴보니 역시나 현장은 보고와 달랐습니다.

 

“올해 벼농사는 모두들 ‘매우 잘 되었습니다’라고 했건만, 오늘 보니 눈물이 날 지경이다.” (세종실록 7년 7월 1일)

 

울고 싶은 심정으로 현장을 돌아보며 농부의 하소연이나 고충을 직접 듣습니다. 이렇게 시찰을 마치고는 점심 수라도 들지 않고 궁으로 돌아옵니다. 밥맛이 나겠습니까? 믿었던 신하들의 보고와 다른 현실에 맞닥뜨린 충격, 그리고 백성들에 대한 미안함과 측은함이 컸겠지요. 이 외에도 재난이 발생하면, 그는 ‘구언求言’이라 하여 자신에게서 고칠 점을 두루 경청하며 성찰하고, 열흘 가까이 앉은 채 밤을 샜으며, 처소를 초가 같은 허름한 곳으로 옮기거나 반찬 수를 줄이며, 백성들과 고통을 함께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관리들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위에서 본 것처럼, 실태를 축소 보고 혹은 은폐하기도 하고, 굶주리거나 병든 백성들에 대한 긴급 지원·구조 등을 성실히 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에 대처하기 위해, 세종은 감찰관을 파견해 현황을 파악한 후, 대민 지원에 불성실하거나 실패한 책임자에게 엄한 벌을 내립니다.

 

의금부義禁府(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에서 보고하였다. “금성金城(현재의 강원도 금성면) 현령縣令(군수와 유사) 이훈, 감고監考(지방의 곡식·세금 담당자) 김거상과 윤생사 등이 긴급지원을 잘하지 못해 백성을 굶어 죽게 만들었습니다. 이는 (법전 ≪대명률大明律≫의) 제서유위율制書有違律(임금의 명령을 어긴 자를 처벌하는 법규)에 해당되니 장 100대에 처하소서.” 이훈에게는 속贖(형벌 대신 벌금 납부) 받지 말고 장 90대에 처하며, 나머지 사람들은 법대로 처단하라고 명하였다. (세종실록 5년 6월 6일)

 

백성 구제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자는 왕족이라도 처벌을 피해갈 수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 세종 26년의 대기근 시, 경기도 관찰사(현재의 도지사)로 재임한 이는 태조의 외손, 즉 세종과 사촌지간인 이선李宣입니다. 세종이 경기도에 잠시 머물며, 농사 상황과 굶주리는 백성들의 수 등을 이선에게 묻자, 조금 가물기는 하나 별 문제가 없다고 답합니다. 그런데 감찰을 다녀온 신하의 보고는 딴판이었습니다. 파종을 못한 땅이 경기도의 1/3-2/3에 달하고, 영양실조로 인한 병자들도 속출하더라는 것입니다. 게다가 백성들이 이러한 사정을 임금에게 직접 호소할까봐 행차 시에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통제까지 했음이 밝혀집니다.

 

“내가 백성들의 일에 관해서는 나와 가까운 친족이라 하더라도 용서하지 않았으니, 만약 굶어 죽는 이가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경을 용서하지 않겠다.” (세종실록 26년 5월 5일)

 

임금부터 공적인 마음으로 백성 구제를 지휘하며, 이에 성실하게 응하지 않는 자에게는 엄한 처벌을 내리니, 책임자들은 자연 자신의 직무에 힘쓸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세종 19년의 대기근 대처가 이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입니다. 이상 기후로 전년부터 우물과 하천이 마르고, 경기·경상·전라도의 일부 지역을 제외한 전국이 농사에 실패합니다. 게다가 메뚜기 떼가 창궐하고, 전염병이 굶주린 이들을 덮쳐 사망자가 속출합니다. 나무껍질을 벗겨 먹는 것도 한계에 다다른 나머지, 자신의 아이를 나무에 묶어놓고 도망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물가급등과 곡식품귀 현상이 일어나고, 지방 정부의 창고가 바닥이 나서 급기야 중앙 정부에 비축해둔 곡식을 옮겨다 백성들을 먹일 수밖에 없습니다. 아비규환과 같은 전국적 재난 국면은 전심전력하는 수령들과 이들을 엄격히 감찰하는 감독관들이 있어서, 차차 진정세로 돌아섭니다.

 

“수령들이 감고(곡식·세금 담당자)들을 인솔해서 마음을 다해 조치하고 몸소 백성들을 먹였으므로, 이에 힘입어 살아난 백성들이 많았다.” (세종실록 19년 2월 9일)

 

세종 19년의 대기근에 대한 사관의 평가는 인간의 저력을 역사적으로 드러내줍니다. 국가지도자, 관계부처 및 최전선의 책임자가 “마음을 다해 조치”했기에, 잔혹한 천재지변 속에서도 많은 생명을 살려낼 수 있었습니다. 문제의 시작은 자연에 있더라도 종결은 인간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이처럼 15세기 당시 선진국이었던 조선의 위상은 백성들의 소소한 일상을 걱정하는 위정자들의 성심誠心에서 비롯되었습니다.

 

(2019년 OECD 주요국 중, 한국의 정부 부채 비율은 매우 낮으며 재정건전성이 우수한 편이다. 출처 : 프레스맨)

 

코로나19 정국이 장기화되며 무급휴직자·영세사업자·특수고용노동자·프리랜서 등을 포함한 국민 다수의 생계가 위태롭습니다. 이러한 ‘코로나 보릿고개’를 넘기 위한 정부의 추가경정예산 편성에 대해, 일부 정치인들은 ‘퍼주기 추경’ 혹은 ‘세금 폭탄’이라 공격하고, 또 특정 관료 집단은 ‘재정건전성 유지’라는 신념에 빠져, 추경의 규모를 축소하려는 듯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나라에서는 긴급재난지원금 혹은 재난기본소득의 지급 범위와 금액을 놓고 논란이 이어지는 가운데, OECD 주요 국가들은 신속하게 예산안 처리에 나섰습니다. 지난 4월 23일 한겨레의 보도에 의하면, 보수적으로 재정을 운용해온 독일 연방정부이지만 경기부양책을 이틀 만에 하원과 상원까지 통과시켰습니다. 이에 따라, 독일 국민은 1인당 최대 1만5천유로 곧 한화로 약 1천993만원인 지원금을 신청한지 사흘 만에 받을 수 있습니다. 심지어 일본은 OECD 국가 중 국가 채무 비율이 가장 높지만, 1인당 10만엔 즉 한화로 약 113만원을 5월 7일부터 지급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와 같이 많은 국가들이 선제적이며 신속하게 코로나19 경제 대책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다행히 4월 30일, 우리 국회에서도 추가경정예산안을 통과시켜, 5월 11일부터 전국민이 긴급재난지원금을 신청할 수 있을 전망입니다. 1인 가구는 40만원, 2인 가구는 60만원, 3인 가구는 80만원, 4인 이상 가구는 100만원이 지급된다고 합니다만, 수개월간 생계가 끊어진 그리고 앞으로가 더 막막한 이들에게 이것으로 충분할 수 없습니다. 책임자들은 선조들처럼 ‘어머니가 갓난아이를 돌보는’ 간절한 마음으로 국민의 삶을 살펴주길 바랍니다.

건전재정이라는 나중을 위한 씨앗 저축에 치중하면, 보릿고개는 영영 넘을 수 없는 고개가 되어 버립니다. 달리 말해, 국민의 현재를 걱정하지 않으면 국가에게 미래는 없습니다. 국가는 백성(국민)으로 근본을 삼고, 백성(국민)은 먹고 사는 문제로 하늘을 삼는 법이므로, 결국 정치의 존재 이유는 민생에 있는 것입니다(세종실록 26년 윤7월 25일).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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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메인 화면

(제40회 장애인의 날을 맞아, 세종이야기꾼 오채원이 작성한 '세종도 장애인이었다'는 오마이뉴스 탑 기사로 채택되었으며, 세종시대의 장애인에 대한 인식을 살펴보고자 하였습니다. 기사 바로 가기 : http://omn.kr/1nf5d)

 

 

“반걸음 거리에서도 사람이 있는 것만 알겠고 누가 누구인지는 분간하지 못한다.” (세종실록 21년 6월 21일)

 

“봄부터 어두침침한 곳에서는 지팡이가 아니고는 걷기 어려웠다.” (세종실록 23년 4월 4일)

 

“내가 눈병을 얻은 지 이제 4, 5년이나 되었다. 올해 1, 2월에는 왼쪽 눈이 거의 실명하다시피 하였다.” (세종실록 23년 4월 9일)

 

“눈동자가 뿌옇게 흐려지고 막으로 덮였는데......지금에 이르러서는 더욱 눈이 보이지 않으니, 이것은 내가 죽을 때까지 고칠 수 없는 병이다.” (세종실록 25년 8월 29일)

 

바로 앞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하고, 한쪽 눈은 실명에 가깝다고 말하는 그는 누구일까요? 바로 조선의 제4대 임금인 세종입니다. 나이 마흔 무렵부터 겪은 저시력 증상이 점점 심각해진 중도 시각장애인인데요.

세종은 이러한 가운데에도 세계사·과학사·문명사적으로 인정받는 선진 문물의 발명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해시계 겸 별시계인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제작(세종 19년), 하천 수위의 측정기인 수표水標 제작(세종 23년), 달력 및 해설서인 『칠정산七政算』 편찬(세종 24년), 훈민정음 창제(세종 25년), 천문학서 『제가역상집諸家曆象集』 편찬(세종 27년), 의학사전 『의방유취醫方類聚』 편찬(세종 27년), 무기 제조·사용 설명서인 『총통등록銃筒謄錄』 편찬(세종 30년) 등의 업무를 지휘합니다.

 

“눈병이 더욱 심해지고, 이로 인해 여러 병세가 번갈아 괴롭히므로 정치에 부지런할 수가 없다.” (세종실록 24년 6월 16일)

 

치료 효과가 있다는 초수리(현재의 청주 초정리)의 약수를 마시고 온천욕도 하지만 증상은 조금 호전되는 것 같다가도 그때뿐이었습니다. 병증은 그를 신체적으로 또 정신적으로 괴롭힙니다. 아무리 성군聖君이라 평가받는 세종이지만, 안질환과 그 합병증으로 인한 능률의 저하는 어쩔 수 없다고 토로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능이나 무가치를 의미하는 바는 아닙니다.

 

관습도감사慣習都監使(음악을 다루는 관청의 관리) 박연이 글을 올렸다. “옛날의 제왕은 모두 맹인으로 악사樂師를 삼아서, 거문고를 타며 시를 읊는 직무를 맡겼습니다. 그들은 보지 못해도 소리를 잘 들으며, 또한 세상에 버릴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세종실록 13년 12월 25일)

 

위와 같이, 장애가 있건 없건 모든 인간은 각자의 존재이유를 지닌다는 인식이 전통시대에도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에서도 장애인에 대한 복지 정책이 있었습니다. 독질인篤疾人·잔질인殘疾人·폐질인廢疾人 등과 같은 중증 장애인은 조세와 병역을 면제하고, 국가에서 식량을 지급해주기도 했습니다. 시정侍丁이라 하여, 장애·불치병으로 경제력을 상실한 부모의 부양을 위해 아들에게 군역을 면제시켜주는 제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장애인을 시혜의 대상으로 여긴 것은 아닙니다. 조선이 지금보다 직업군의 수가 적은 시대였으므로 제약적이기는 하나 장애인 고용 정책은 실시되었습니다. 우선, 국가 차원의 기우제나 민간인의 질병치료 등을 위해 시각장애인이 경전을 읽어주는 맹인독경盲人讀經이라는 직업군이 있었습니다. 정부에서는 이들이 모이는 명통사明通寺를 관리하였고요. 음악을 다루는 관청인 관습도감慣習都監에 소속되어 궁중에서 음악을 연주하는 관현맹管絃盲, 천문을 관장하는 관청인 서운관書雲觀의 소속으로 점술을 다루는 과명맹課命盲 등은 시각장애인을 위해 국가에서 마련한 관직입니다. 세종시대에 시각장애인 점술사 지화池和와 이신李信 등은 궁중의 음식을 담당하는 관청인 사옹원司饔院에서 일을 하였고요. 허조許稠는 태종 및 세종을 보좌한 인물로, 좌의정이라는 고위직 관리까지 역임했는데, 어깨와 등이 굽어 ‘송골매 재상[瘦鷹宰相]’으로 불린 척추장애인입니다.

(1930 년 ,  독경하는 맹인 ,  출처  :  서울역사박물관 아카이브 )

2019년에 발표된 한국장애인고용공단 고용개발원의 2018년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장애인구는 2,585,876명으로 전체 인구의 5.0%를 차지하는데, 장애인구는 점차 증가세를 보입니다. 장애인구의 연령대를 보면, 15-64세 이상은 51.3%, 65세 이상이 46.7%로, 장애인의 대부분이 중도장애를 입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경향신문의 보도(2020.04.19)에 따르면, 중앙부처의 장애인 고용률은 2018년 현재 3.43%밖에 되지 않습니다. 연합뉴스의 보도(2020.04.19)를 보더라도, 2019년 기준으로 대기업의 장애인 고용률이 2.5%로, 중소기업보다 오히려 낮습니다.

 

장애인이 안정적으로 근무할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하는 것이 정부와 기업의 역할 아닐까요? 그리고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서로를 가까이에서 직접 볼 수 있어야 공감력 높은 사회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취지로, 장애 학생과 비장애 학생이 한데 어우러져 공부하는 통합 학급을 일부 운영하고 있지만, 이제 걸음마 단계입니다. 게다가 코로나19 정국에 장애인은 채용과 교육에서 비장애인보다 더욱 소외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2018년 기준 장애인의 연령대 비율. 출처 : 한국장애인고용공단 고용개발원)

올해 4월 20일은 마흔 번째 장애인의 날이었습니다. 우리 사회가 ‘포용국가’로 나아가려면, 장애인을 돌봄이나 시혜의 대상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갈 존재로 바라보아야 함을 종종 주장합니다만, 실제 인식이 어느 수준까지 와 있는지 저 스스로부터 돌아보게 됩니다. 앞서 한국장애인고용공단 고용개발원의 통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장애인구의 대다수가 중도장애인입니다. 이는 바로 나도 장애인이 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장애인과 함께하는 일은 곧 나를 위한 길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담화를 통해 ‘장애인이 걷기 편한 길은 비장애인도 편하게 걸을 수 있다’고, 그래서 장애인과 비장애인은 ‘서로에게 소중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훈민정음 창제에 몰두했던 세종은 시각 장애를 겪으며, 한자 ‘까막눈’ 백성들의 처지에 깊이 공감했으리라 추측해봅니다. 글을 앞에 두고도 읽지 못하는 괴로움을 함께 겪은 백성들과 세종은 ‘서로에게 소중한 사람’이 되었고, 이로 인해 600년 후의 우리도 한글의 시혜를 입고 있습니다. 선조들처럼 우리도 장애와 비장애의 공감을 통해 미래 가치를 만들어갈 수 있길 기대해봅니다.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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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대 국회의원선거를 맞아, 세종이야기꾼 오채원이 작성한 '600년 전 실시된 국민투표를 아시나요?'는 세종시대의 국민투표를 다루었으며, 오마이뉴스에 4.15총선 특집기사로 게재됐습니다. http://omn.kr/1nbf8)

 

미국의 제16대 대통령인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이 말했다지요? ‘투표는 총알보다 강하다The ballot is stronger than the bullet’고. ‘한 표’에 담긴 민의가 세상을 역동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투표는 국가의 주인으로서 권리를 행사하는 수단이기에, 정책·법률의 입안 과정 및 결과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투표는 현대 민주주의에서의 주요 의사결정 방법입니다. 그런데 이 투표가 왕정 국가인 조선에서도 실시됐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600년 전인 1430년(세종 12년) 3월 5일, 현재의 기획재정부에 해당하는 호조戶曹에서 보고가 올라옵니다. ‘손실답험법損失踏驗法’을 폐기하고, ‘공법貢法’이라는 새로운 세법을 도입하자는 내용입니다. 기존의 손실답험법은 파견된 답험관이 그해의 농사 작황을 현지에서 육안으로 보고 등급을 매기는 ‘답험법’, 그리고 그 등급에 따라 세금을 감면해주는 ‘손실법’이 결합된 세법입니다. 답험관의 도덕성이나 능력에 따라 세금이 들쑥날쑥 책정되고, 또 답험관의 체류 비용을 지자체에서 부담하는 등 폐단이 지적되어 왔습니다. 따라서 앞으로는 공법에 의거해 일괄적으로 “전답田畓 1결結(비옥 정도에 따른 토지 면적 단위, 1결≒1㏊)마다 조세로 10말(1말≒18ℓ)을 거두게 하되, (척박한) 평안도와 함경도는 1결에 7말을 거두게 하여” 피폐한 백성들의 삶에 숨구멍을 내주자는 제안입니다. 이에 대해 세종은 다음과 같이 명을 내립니다.

 

“의정부(최고 행정기관) 및 육조六曹(행정 실무를 담당하는 여섯 관청), 서울에 있는 모든 관아, 서울 안의 모든 퇴직 관리, 전국의 감사·수령·관리로부터 시골에 사는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두 (공법 도입에 대한) 찬반을 물어서 보고하라.” (세종실록 12년 3월 5일)

 

위와 같이, 담당자가 직접 집집마다 방문하여 공법 도입에 대해 찬성인지 반대인지 의견을 수렴해오도록 명합니다. 전국민을 대상으로 한 이 찬반 투표에서 주목할 점은 투표의 주체 및 방식입니다. 지배계급·식자층인 전·현직 관리뿐 아니라, 지방에 사는 백성들에게까지 넓힌, 그리고 어찌 보면 직접·참여·숙의 민주주의에 가까운 방식이라는 점이 눈에 띕니다. 전국민을 대상으로 한 우리나라 최초의 투표는 이렇게 실시됩니다.

 

5개월 후인 8월 10일, 전국에서 투표 결과가 보고됩니다. 약 17만 가구를 대상으로 찬반을 취합한 결과, 찬성 95636명에 반대 73451명, 즉 약 10:7의 비율로 공법 도입에 대한 찬성이 우세했습니다. 다수결의 원칙에 의해 법제 개혁의 정당성을 확보한 것입니다.

 

그런데 세종의 다음 행보가 또 흥미롭습니다. 반대표를 행사한 좌의정(의정부의 두 번째 고위직) 황희 등의 의견에 따르라는 결정을 내린 것입니다. 이에 따라, 공법을 도입하기보다 기존 손실답험법의 보완, 곧 답험관의 선발·평가·관리하는 방침을 손봅니다(손실답험법의 폐단이 지속적으로 지적되어, 추후에 공법 도입을 재시도합니다). 이처럼 세종은 법제의 개혁에 임하여, 대단위 의견수렴 과정을 거치며, 추후 발생할 수 있는 문제를 미리 포착하고자 합니다. 또한 그 과정을 숙의의 기회로 삼아, 배제된 의견에도 주목해 법제의 완결성을 높입니다.

 

4개월 후인 12월, 보완된 손실답험법에 의거한 과세표준이 국가보다 백성에게 유리하다며, 예조禮曹(현재의 외교부·교육부·문화체육관광부·보건복지부) 판서(지금의 장관)인 신상申商이 이의를 제기합니다. 이에 대해 세종은 다음과 같이 답합니다.

 

“답험이 백성에게 유리하게 된 것은 잘못이 아니다. 백성이 만족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세종실록 12년 12월 18일)

 

투표의 결과가 나오기 전에, 세종은 “백성들이 불가하다고 한다면 그것(공법)을 실행할 수 없다.”(세종실록 12년 7월 5일) 고 말한 바 있습니다. 법제 도입 및 실행의 제1 원칙은 ‘국가가 아닌 백성들에게 이로울 것’이므로, 백성들에게 의견을 물은 것이지요. 결국 왕정국가의 최고통수권자이지만 세종은 백성을 통치의 대상으로 한정짓지 않고, 국정 운영의 참여자로 여긴 셈입니다.

 

제21대 총선의 투표 독려 이미지. 출처 : 중앙선거관리위원회 홈페이지 www.nec.go.kr

전세계가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인해 행정이 마비되다시피 하고, 일부 국가들은 선거가 연기된 가운데, 우리나라만 예정대로 총선을 치르게 됐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나라가 민주주의의 변방이 아닌, 새로운 모범 혹은 표준으로 각광받고 있습니다. 그 원동력은 세계보건기구(WHO) 등으로부터 ‘방역의 교과서를 쓰고 있다’고 평가받는 국가의 행정력에도 있지만, 또한 국가의 방침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시민들의 주체성에도 있습니다.

 

이 점을 유념하여, 투표로 선출될 21대 국회의원들은 국민을 통치의 대상이 아니라, 국정 운영의 파트너로 받아들여주시길 바랍니다. ‘국가가 아닌 백성에게 이로울 것’이라는 방향을 설정했던 600년 전 세종의 정치철학을 새겨주시길 바랍니다. 국민은 단지 ‘한 표’에 그치는 존재가 아니니까요.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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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방관의 국가공무원 전환을 맞아, 세종이야기꾼 오채원이 작성한 '조선시대에도 소방관이 있었을까?'는 세종시대의 소방청 및 소방관의 이야기를 다루었으며, 오마이뉴스 메인 기사로 채택되었습니다. https://bit.ly/3aYCw7C)

 

지금으로부터 약 600년 전인 세종 8년 2월 12일, 한성부漢城府(지금의 육군수도방위사령부)에서 보고가 올라옵니다. 한양에서 방화 사건이 하룻밤에도 두세 건 일어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로부터 3일 후 한양에서 큰 불이 납니다. 현재의 공정거래위원회와 유사한 경시서京市署(지금의 탑골공원 부근)와 북쪽의 행랑(상가와 유사)들, 중부·남부·동부의 민가들을 합해 총 이천 채 이상의 건물이 연소되고, 사망자는 서른 두 명이나 됩니다. 여기에 신상을 확인할 수 없는 이는 포함되지 않았다고 하니, 인명 피해 또한 컸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위급한 때 국가의 최고통수권자인 세종은 하필 강원도로 군사훈련인 강무講武를 떠나 한양에 없습니다. 이에 중전인 소헌왕후는 세종을 따라 나서지 않은 신하들을 소집하여 불끄기를 진두지휘합니다. 이날 점심 때 일어난 불은 저녁에 진화가 되었고, 다행히 나라의 뿌리를 상징하는 종묘가 연소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18세기 말에 제작된 한양 지도 《도성도都城圖》에 방화 지역 표기.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www.heritage.go.kr

다음 날 세종은 화재에 대한 보고를 받고, 강원도에서 서울로 돌아갈 채비를 합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또 큰 불이 일어납니다. 지금의 구치소에 해당하는 전옥서典獄署와 행랑 여덟 간, 종루鍾樓(현재의 보신각) 동쪽의 민가 이백여 호가 연소됩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당시 한양 내 민가가 17,015호였는데, 이를 기준으로 본다면 이틀간 민가의 약 14%가 연소된 셈입니다. 피해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화재로 인한 도둑이 기승을 부렸는데, 불이 번지지 않은 집에서도 황급히 피난하다가 재산을 전부 망실했습니다.

 

서울은 극도로 혼란한 상황이었겠지요. 이에 세종은 화재를 입은 백성들에 대한 식량・치료・장례 등의 지원, 그리고 집 복구를 위한 재목을 마련할 방도를 지시합니다. 이처럼 긴급 구제책을 실시하는 한편, 다음과 같이 나중을 위한 체계와 기반시설을 구축합니다.

 

임금이 다음과 같이 명령을 내렸다. “서울의 행랑에 방화벽을 쌓고, 도성 안의 도로를 넓혀 사방으로 통하게 만들라. 궁궐 담장이나 돈·곡식이 있는 관청들과 가까이 붙어 있는 가옥을 잘 헤아려 알맞게 철거하라. 행랑은 10간(1간≒1.8m) 마다 개인 집은 5간 마다 우물을 하나씩 파고, 관청들 안에는 우물을 두 개씩 파서, 물을 저장해 두라. 종묘 및 대궐의 안과 종루의 문에는 소방 기구를 만들어 비치해서, 화재가 발생하면 바로 달려 나가 끄게 하라. 군인과 노비가 있는 관청들에도 불을 끄는 여러 장비를 갖추었다가, 화재 소식을 들으면 각각의 소속인들을 동원해 가서 끄게 하라.” (세종실록 8년 2월 20일)

 

위와 같이, 불이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건물에 방화벽을 쌓고, 우물을 파서 소방용수를 확보하며, 소방 기구를 비치합니다. 또한 도로를 확장해 소방도로를 확보합니다. “병오년(세종 8년) 화재가 난 뒤로......민가에 도로를 개통한 까닭으로 이 실화失火에 사망한 자가 없다”는 세종 13년의 자체 평가에서 드러나듯이, 이 방침은 효용성이 드러납니다.

또한 불탄 가옥의 보수를 위해, 특별히 가마를 설치해 싼 값에 기와를 보급합니다. 당시 기와가 고가였기 때문에 서민들은 대개 띠·짚·억새 등으로 지붕을 얹었고, 이는 도시 미화뿐 아니라 화재 방비에 취약한 터였습니다. 이처럼 앞으로 또 발생할지 모를 화재에 대비하기 위한 종합대책을 마련했습니다.

 

가장 획기적인 정책은 지금의 소방청과 같은 소방 전담 기구 ‘금화도감禁火都監’을 신설하고, 24명으로 조직을 구성한 일입니다. 아울러 금화군禁火軍(현재의 소방관)이 통금시간에도 출동할 수 있도록 신분증을 제공하는 등 상설기관으로서 소방의 기능을 수행하도록 합니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그 5년 뒤인 세종 13년, 금화군에 대한 정책을 보강합니다. 급수를 지원해줄 인원과 소방장비 지급에 대한 세부 사항, 그리고 소방에 공로가 있는 자의 포상책 등을 국가 차원에서 마련합니다. 그러나 인력이 타 부처의 일을 겸직하는 한계가 있었지요. 조직원 중 8명을 금화도감의 일을 전담시키는 등 인사직제를 개편합니다. 제도도 중요하지만 결국 일은 사람에게 달렸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화재의 원인인) 음양이 조화를 잃은 것은 내가 부덕不德한 탓이로다. 내가 비록 변변치 못하나, 대신들이 도와준다면 천재지변도 없어질 수 있다.” (세종실록 8년 2월 28일)

 

전통시대에는 위정자가 마음을 다하지 않으면, 하늘이 천재지변을 통해 성찰의 기회를 준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세종은 당시에 통용되던 이러한 사고도 부정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사람이 온 마음을 다해 사태를 해결하려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진실로 사람이 제 할 일을 다한다면[人事旣盡], 천운이 따르지 않더라도 재해를 막을 수 있다.” (세종실록 26년 윤7월 25일)

 

2019년 강원도에서 일어난 대형 화재의 진압을 위해 전국에서 출동한 소방차의 행렬. 출처 : 연합뉴스 https://bit.ly/3bPlGIA

대통령 공약사항 중 하나였던 소방청 독립이 지난 2017년에 이루어졌습니다. 세월호 참사를 겪으며, 지난 박근혜 정부는 소방방재청을 해체하고, 신설한 국민안전처에 소방 사무를 흡수시킨 바 있는데요. 문재인 정부에서 국민안전처를 폐지하며, 행정안전부 소속으로 소방청을 신설한 것입니다. 소방 조직이 독립 기구로 개편된 것은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이라고 합니다.

 

이어서 올해 4월 1일, 국가직과 지방직으로 나뉘었던 소방 공무원을 국가직으로 일원화했습니다. 최근까지 대부분의 소방관이 지방공무원의 신분이었기에, 지방자치단체의 부족한 예산으로 인한 고충이 컸습니다.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며, 목장갑을 끼고 화재현장에 나선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들리기도 했지요. 그런 가운데에도 소방 공무원들은 인명을 구하기 위해 애써왔습니다. ‘사람이 제 할 일을 다하기人事旣盡’ 위한 환경을 국가는 조성해주어야 합니다. 기구가 소방청으로 격상된 데 이어, 소방 공무원이 국가직으로 전환된 만큼, 국가가 소방관의 안전과 자존감을 지켜주기를 기대합니다. 소방관은 국민을 보호하는 국민이니까요.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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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기념일이 아니지만 많은 이들이 기다리는 날이 있습니다. 발렌타인데이와 화이트데이가 여기에 속할 텐데요. 로마의 ‘발렌티노 성인St. Vanentine 축일’을 일본의 한 제과회사가 왜곡시켰다는 지적이 있지만, 그래도 우리들은 초콜릿이나 사탕 등을 이성에게 선물하며, 이 두 날을 사랑 표현의 기회로 삼습니다.

옛 사람들은 어떻게 이성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했을까요? 약 삼천년 전의 사람들이 남긴, 동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시집 『시경詩經』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投我以木瓜, (그녀가) 나에게 모과를 던져 주기에,

報之以瓊琚. 나는 아름다운 옥 노리개를 드렸습니다.

匪報也, 그것은 보답이 아니라,

永以爲好也. 오랫동안 좋은 사이가 되고 싶어서이지요.

 

投我以木桃, 나에게 복숭아를 던져 주기에,

報之以瓊瑤. 나는 아름다운 옥을 드렸습니다.

匪報也, 그것은 보답이 아니라,

永以爲好也. 오랫동안 좋은 사이가 되고 싶어서이지요.

 

投我以木李, 나에게 오얏(자두)을 던져 주기에,

報之以瓊玖. 나는 아름다운 패옥을 드렸습니다.

匪報也, 그것은 보답이 아니라,

永以爲好也. 오랫동안 좋은 사이가 되고 싶어서이지요.

 

(『시경詩經』 「모과木瓜」)

 

(영친왕비 패옥. 출처 : 국립고궁박물관 홈페이지 www.gogung.go.kr)

옛날 중국에서는 여성이 마음에 드는 남성에게 과일을 던지는 풍습이 있었다고 합니다. 서진西晉 시대의 문인이자 중국 ‘초절정 미남’의 대명사로 꼽히는 반악潘嶽이 나타나면, 온 동네 처녀들이 몰려와서 어찌나 많은 과일을 던졌던지 수레(지금의 자가용)가 가득 찼다고 하는데요. 이 이야기는 ‘반랑(반악)에게 과일을 던지다’라는 ‘척과반랑擲果潘郎’, ‘과일을 던져서 수레가 가득하다’는 ‘척과영거擲果盈車’ 등의 고사성어를 남겼습니다.

 

선물을 받으면 이에 대한 응답이 있어야 되겠지요? 위의 『시경』 구절을 보면, 과일을 받은 남성이 허리에 차고 있던 옥을 여성에게 선사합니다. 옛 사람들은 허리띠에 옥을 달고 다녔는데, 이를 패옥佩玉이라 합니다. 과일을 준 상대에게 옥을 선물하는 행위, 마치 여성이 발렌타인데이에 초콜릿을 선물하면, 남성이 화이트데이에 명품백으로 응하는 것과 비슷할까요?

 

『시경』 속 남성은 자신의 행위가 기계적 ‘기브 앤 테이크’가 아니라, 오랫동안 인연을 다져가기 위한 정표情表라고 말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대하겠다는 대인배의 마음이 엿보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 과일을 던졌을까요? 고대로부터 여성을 꽃에, 남성을 벌 혹은 나비에 비유하는데, 그들의 조합으로 열매가 열리지요. 결국 ‘배필이 되어 당신과 사랑의 결실을 맺고 싶어요’ 라는 고백으로 보입니다. 혹시나 이 글을 읽고 마음에 드는 이성에게 과일을 던지실 분이 계시다면, 맞아도 안 아픈 과일로 잘 고르셔야겠습니다.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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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12월에 중국에서 신종 전염병의 발생이 보고된 이래, 전 세계에서 ‘코로나19 정국’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전염병을 역병疫病, 역질疫疾, 괴질怪疾 등으로 불렀는데,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는 무려 1,600건 이상의 관련 기록이 있습니다. 유독 전염병이 크게 돌던 시기는 대체로 전쟁이나 이상 기후로 인해 농사에 실패하여 식량이 부족한 때였습니다. 굶주려 면역력이 떨어진 사람들 사이에서 전염병이 돌게 되는 것이지요.

전통시대에는 역병을 역귀疫鬼라는 귀신이 일으킨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매해 연말에는 아래의 실록 기사처럼, 역귀를 몰아내는 계동대나의季冬大儺儀를 궁궐에서 거행했습니다.

 

군기감軍器監(군수물자를 제작하는 국가기관)에서 화약을 궁궐의 뜰에 설치해 역신을 쫓아냈는데, 이는 연례 행사였다. 이에 여진족과 일본 사신에게 구경하게 했는데, 불화살이 섞여 발사되자, 모두 놀라고 두려워서 부산하게 달아나다가 옷이 불타버린 자도 있었다. (태종실록 131229)

 

이는 사전에 전염병을 대비하기 위한 국가적 행사였습니다. 현재의 청와대처럼 조선시대에도 중앙 정부가 전염병 관리의 컨트롤 타워였거든요. 이렇게 역귀를 물리치기 위한 의례를 치렀음에도 전염병이 돌면, 공무원들을 각 지방으로 파견해 제사를 지내서 역신을 달랬습니다.

그래도 역병에 걸리면 역신이 따라오지 못하게 도망을 다니는데 이를 피병避病이라 합니다. 세종 2(1420) 여름에 학질(말라리아)에 걸린 어머니 원경왕후를 세종이 직접 모시고 궁궐을 나와서 한 달 넘게 거처를 옮겨 다니느라 고생한 기록들이 있습니다. 역신이 모르게 하느라 캄캄한 밤에 이동하다가 엉뚱한 집에 들어가기도 했고요. 심지어는 원경왕후의 남편이자 세종의 아버지인 태종도 모자의 행선지를 뒤늦게야 알게 되었을 정도입니다.

 

전통시대라고 하여 이처럼 전염병에 비과학적으로 대응한 것만은 아닙니다. 우선, 민생 안정을 위해, 백성의 군역軍役·부역夫役을 정지하고 공납貢納을 연기, 즉 군복무와 세금납부의 의무를 일시 감면했습니다. 보건위생 차원에서 보자면, 역병으로 사망한 자는 임금이 거주하는 서울 성 밖에 묻거나 화장하고, 환자는 성 밖으로 격리시켰습니다. 지방에 의사를 임시 파견하고, 현재의 질병관리본부에 해당하는 활인서活人署와 국립중앙의료원 격인 혜민서惠民署에서 환자를 치료하고 굶주린 이들을 보살폈습니다. 이를 구료救療라고 하는데, 국가에서 제정한 표준 매뉴얼에 따라 성실하게 백성을 구료하지 않거나, 현황에 대해 제대로 보고하지 않은 관리는 문책했습니다.

 

각도의 감사에게 임금의 뜻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민간에 전염병이 발생하거든 구제하여 치료해 주라는 조항을 여러 번 법으로 세웠는데, 각 고을의 수령들이 하교의 취지를 살피지 않는다. 올해는 전염병이 더욱 심하건만 수령들이 구료하기를 좋아하지 않으니, 일찍이 내린 각년의 조항을 살펴서 백성들을 구료해 살리도록 마음을 쓰라.” (세종실록 14421)

 

조선이 미개한 국가여서 전염병이 돌면 제사를 지내거나 역신을 쫓는 행사를 치른 것이 아닙니다.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라면, 국가의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은 무엇이든 해야 했음을 드러내는 사건들일 뿐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전염병도 결국 마음의 문제로 귀결됩니다. 막연한 불안감에 휩싸여서 가짜 뉴스에 현혹되기보다, 안전보건수칙을 지키며 내 이웃을 돌아보는 과학적이고 또 인간적인 태도가 그 어느 때보다 요구되는 요즘입니다.

 

(‘결국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따스함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라는 이동학 님의 자가격리 소회와 관련 사진.

출처 : 수원시 블로그 https://blog.naver.com/suwonloves/221814342498)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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