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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채원연구소공감]대표 :: 세종이야기꾼 :: 실록연구자 :: 소통 디자이너 :: 010-8014-7726 :: chewonoh@gmail.com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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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로비'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7.08.17 [ 실록공감 08_조선시대의 개고기 로비 ]
  2. 2017.08.12 [ 실록공감 07_광해군과 음식로비 ]

[ 실록공감 08_조선시대의 개고기 로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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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共享生生之樂, 세종실록 24년 1월 7일]

세종과 더불어, ‘나와 다른 당신’과 공감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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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회(실록공감 07_광해군과 음식로비)에 이어, 특이한 뇌물에 대한 이야기를 하나 더 해볼까 합니다. 조선의 11대 임금인 중종中宗과 사돈지간으로 위세 등등했던 김안로金安老는 개고기를 무척 좋아했다고 전해집니다. 그 사실을 안 몇몇 사람들은 그에게 개고기를 뇌물로 바치고 요직에 올랐지요.


이팽수李彭壽를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임금 비서실의 문서관리자, 정7품)에 제수하였다.

사관은 논한다. 이팽수는 해당 부서인 승정원의 추천도 없었는데, 김안로가 마음대로 추천한 것이었다. 김안로는 개고기를 좋아했는데, 이팽수가 봉상시참봉奉常寺參奉(국가제사 관장하는 관청의 말단직, 종9품)으로 있을 적에 크고 살진 개를 골라 사다가 먹여 늘 그의 구미를 맞추었으므로 김안로가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어느 날 갑자기 청반淸班(지위는 낮으나 추후 고위직에 등용될 수 있는 관직)에 올랐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가장주서家獐注書’라 불렀다. (중종실록 29년 9월 3일)


가장주서의 가장家獐은 ‘삶은 개고기[烹炙犬肉]’를 가리킵니다. 결국 이팽수는 ‘개고기 공무원’이라는 우스꽝스러운 별명이 붙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팽수만 김안로에게 ‘개고기 로비’를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어서 이팽수의 동료였던 진복창이라는 인물에 대한 기록을 보겠습니다.


진복창陳復昌을 봉상시주부奉常寺注簿(국가제사 관장하는 관청의 실무책임자, 종6품)에 제수하였다.

사관은 논한다. 김안로가 권세를 휘두를 때 이팽수가 봉상시 참봉이었는데, 김안로가 개고기 구이[狗炙]를 좋아하는 줄을 알고 날마다 그것을 만들어 제공하였고, 마침내 김안로의 추천을 받아 요직[淸顯職]에 올랐다. 그 뒤 진복창이 봉상시 주부가 되어서도 개고기 구이로 김안로의 뜻을 맞추어 온갖 요사스러운 짓을 다 하는가 하면, 매번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김안로가 개고기를 좋아하는 사실까지 자랑삼아 설명하였다. (중종실록 31년 3월 21일)


진복창陳復昌이 감히 분수에 넘친 계획을 품고 밀어주는 세력을 얻을 것을 생각하여 처음에는 김안로를 섬겼는데, ‘개고기 구이[犬炙]’가 이팽수에 미치지 못한다’는 질책을 받기까지 하였다. 【진복창이 봉상시주부로 있을 때 이팽수와 동료였는데, 김안로를 섬겨서 그 세력으로 좋은 벼슬을 얻으려고 다투어 개고기 구이로 아첨하였다. 진복창은 자신의 개고기 구이의 맛이 최고라 생각하고 올렸지만, 김안로는 오히려 이팽수의 개고기 구이의 맛에 미치지 못한다고 평하였다.】 (명종실록 5년 5월 24일)


진복창 또한 이팽수처럼 개고기 요리를 김안로에게 바쳤습니다.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자랑까지 했지요. 하지만 어쩌나요. 김안로의 입에는 이팽수의 요리가 맞았던 모양입니다. 진복창은 김안로에게 ‘이팽수의 개고기보다 맛없다’는 질책까지 받지요.

밤낮없이 고관대작의 집들을 찾아다니며 인맥을 쌓았으나(명종실록 5년 5월 24일), “나중에 크게 쓰이지 못하였다”(중종실록 31년 3월 21일)는 진복창에 대한 사관의 평가에서 연민마저 느껴집니다.


로비lobby를 조선시대에는 ‘분경奔競’이라 칭했는데요. 이는 '분주히 쫓아다니며 이익을 추구함'을 가리키는 ‘분추경리奔趨競利’의 줄임말입니다. 다른 말로 ‘관직 사냥’을 가리키는 ‘엽관운동獵官運動’이라고도 불렀습니다.

뇌물과 청탁으로 권력을 획득하거나 이득을 취하려는 시도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나 봅니다. 조선 초 정종定宗이 분경을 금지하는 교서敎書(임금의 공식문서)를 내렸는데(정종실록 1년 8월 3일) 실효성이 별로 없었습니다. 이후 태종太宗 시대에 들어 ‘김영란법’, 즉 분경금지가 법제화됩니다(태종실록 1년 5월 20일). 하지만 분경은 그 특성상 비밀스럽게 이루어지는지라 조선시대 내내 존재했습니다. 인간에게 인정욕, 권력욕, 상승욕 등이 존재하는 한, 분경은 앞으로도 사라지지 않겠지요.


* 참고문헌 :

1.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2. 아시아경제, 2017-08-10, 「김영록 농림축산식품부 장관 “김영란법 상한액, 선물은 올리되 경조사는 낮추겠다”」.


(사진 : 아시아경제)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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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록공감 07_광해군과 음식로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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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共享生生之樂, 세종실록 24년 1월 7일]

세종과 더불어, ‘나와 다른 당신’과 공감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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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孝宗의 사위인 정재륜鄭載崙이 궁궐을 드나들며 들은 이야기들을 정리한 책 『공사견문록公私見聞錄』에는 세종대부터 효종대까지의 다양한 생활사가 적혀 있습니다. 그 중 광해군光海君에 얽힌 이야기를 한 토막 소개하고자 합니다.


광해군이 폐위廢位되어 유배됐을 때 따라간 궁궐의 계집종 중에서 성질이 사납고 교활한 자가 있었다. 정성껏 봉양하지 않으므로 광해가 꾸짖었더니, 계집종이 거친 소리로 말했다. “왕위에 있을 때에 여러 관청과 전국에서 매달 공물供物을 바쳤는데 무엇이 부족하여 염치없는 것들에게까지 찬거리를 요구하였습니까? 심지어 ‘김치 판서[沉菜判書]’니 ‘잡채 참판[雜菜參判]’이니 하는 말까지 있었습니다. 무엇이 부족하여 벼슬을 구하거나 송사하는 자에게 뇌물을 요구해 민심을 크게 무너지게 했습니까? 그리고 당신이 잘못하여 국가를 이 지경으로 만들고, 나를 여기까지 오게 하여 고생시키고는 도리어 정성껏 받들지 않는다고 책망하니, 양심에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하니, 광해군이 머리를 숙이고 한마디 말도 못하고 다만 혀를 찰 뿐이었다.


계해반정癸亥反正(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축출하고 왕위에 오른 인조仁祖의 아들이 바로 효종이지요. 그 효종의 사위인 정재륜이 저자이므로 어쩌면 광해군에게 불리하게 기록했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실록에도 광해군 때의 ‘잡채 판서(장관)’ 그리고 ‘더덕 정승(총리)’이 기술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정재륜의 사견만은 아닌 듯합니다.


이충李沖은 광해군 말년에 온갖 수단을 다 부려 임금에게 아첨하고 못된 비위를 맞추었다. 겨울철에는 반드시 땅 속에 큰 집을 마련해 놓고 그 속에다 채소를 심었는데, 새로운 맛을 취한 것이었다. 반찬을 매우 맛있게 장만해 아침저녁으로 올렸는데, 그로 인해 총애를 얻어 높은 품계에 올랐다. 그가 길에 오가면 비록 삼척동자라도 반드시 ‘잡채 판서’라 손가락질하면서 너나없이 침 뱉고 비루하게 여겼다. (광해군일기[중초본] 즉위년 12월 10일)


이충은 진기한 음식을 만들어 사사로이 궁중에다 바치곤 했는데, 【사관 왈: 왕은 식사 때마다 반드시 이충의 집에서 만들어 오는 음식을 기다렸다가 수저를 들곤 했다.】 당시에 어떤 사람이 다음과 같이 시를 지어 조롱하였다.

사삼 각로의 권세가 처음에 중하더니

잡채 상서의 세력은 당할 자 없구나.

여기에서 각로는 한효순韓孝純을, 상서는 이충을 지칭하는 것이었다(한효순의 집에서는 사삼沙參(더덕)으로 밀병蜜餠(꿀떡)을 만들었고, 이충은 채소에다 다른 맛을 가미하였는데, 그 맛이 희한하였다). (광해군일기[중초본] 11년 3월 5일)


당대의 풍자시에 의하면, 광해 초년에는 한효순이 더덕 꿀떡으로 임금의 총애를 입어 정승이 되었는데, 말년에는 이충이 잡채 덕분에 판서 자리에 올라 그 위세가 대단했습니다. 그리고 이후 유배지에서는 모시는 노비마저 식욕에 충실한 광해군을 얕보았다는 기록까지 남은 것이지요. 실리외교를 추구했다는 평가와 동떨어진, ‘음식로비’에 약했다는 광해군의 이야기가 낯섭니다. 그런가 하면, 그 음식들이 얼마나 맛있었기에 지존의 자리에서 누릴 만큼 누렸을 사람이 반했을까 그 맛이 궁금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의할 점은 ‘잡채’가 현재의 형태와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현재 흔히 먹는 잡채는 당면이 주재료인데요. 이 당면은 약 100년 전에야 우리 음식에 등장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조리서이며 17세기에 저술된 『음식디미방飮食知味方』의 잡채에는 당연히 당면이 들어가 있지 않겠지요. 이 책에 따르면 잡채는 ‘나물 모음’에 가깝습니다.


앞으로 이틀 후인 8/11이 말복입니다. 올해의 마지막 복날이라 생각하니, 상투적인 삼계탕 말고 다른 음식이 먹고 싶어지는데요. 땀으로 배출된 무기질을 보충하고, 피로회복과 체온하강을 돕는 채소. 이 채소로 만든 잡채를 이번 복날 메뉴로 삼아볼까 합니다.


* 참고문헌 :

1. 『공사견문록公私見聞錄』

2.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3. 동아일보, 2017-04-05, 「[황광해의 우리가 몰랐던 한식]잡채에는 당면이 없었다」.


(사진 : 동아일보)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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