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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채원연구소공감]대표 :: 세종이야기꾼 :: 실록연구자 :: 소통 디자이너 :: 010-8014-7726 :: chewonoh@gmail.com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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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오마이뉴스 메인에 게재되었습니다.

(세종이야기꾼 오채원이 오마이뉴스에 연재 중인 '실록 읽어주는 여자' 시리즈. 이번에는 세종시대의 외교에 대한 글입니다. 기사 바로 가기: omn.kr/1o3jk)

 

최근 미국의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회고록 <그것이 일어난 방>(The room where it happened)이 출간되며, 미국뿐 아니라 한국 정계에도 큰 파문이 일었습니다. 청와대에서는 '회고록의 사실 왜곡이 극심하다'는 의견을 미국 국가안보회의(NSC) 측에 전했다고 알린 바 있는데요. 일반 대중들은 회고록을 통해 한미 외교에서 어떤 어려움이 있었고 이를 한국 정부가 타개하려 어떻게 고군분투해왔는지 추측해볼 수 있었습니다.
 
이와 연관 지어, 600년 전 조선과 명나라 간에 이루어졌던 외교사에서 몇 가지 사건을 살펴보려 합니다. 지난 기사에서 세종실록에 등장했던 '사람 조공'을 다룬 데 이어(관련 기사: "조선국에 가서 잘생긴 여자 몇 명 간택해 오라" omn.kr/1o05l), 이번에는 매 조공에 대해 들여다보겠습니다.

 

매사냥의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 기념우표. 출처 : 한국우표포털사이트

 

2010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매사냥은 삼국시대로 그 연원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매사냥은 생업의 한 수단일 뿐 아니라, '일응이마삼첩(一鷹二馬三妾)' 곧 '첫째 매 사냥, 둘째 말 타기, 셋째 첩 두기'라 하여, 당시의 '고급 유희' 중에서도 첫 번째로 치는 것이었는데요. 매가 사람 대신 하늘을 날아 사냥하기에, 지금의 아바타 게임과 유사한 재미를 선사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임금이 말하였다... "조공을 바치는 일은 대충대충 할 수 없다... 하물며 황제의 칙명에 '짐이 조선을 대우함이 후한 편인데 어찌 매 바치는 한 가지 일을 아직까지 어렵게 여기는가'라고 하였으니, 그 일에 마음을 쓰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명백하다." (세종실록 9년 8월 1일)

 
고려 때 매사냥이 가장 융성했고, 원나라에 사냥용 매를 조공으로 바쳤습니다. 이러한 흐름은 명에 대한 조선의 외교로도 이어집니다. 조선 매는 영민함과 사냥 능력이 탁월하기로 유명했으므로, 명 황제가 매우 반기는 조공 물품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임금이 직접 나서서 챙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화원(圖畫院, 그림 그리는 일을 맡은 관청)에 명하여 각종 매를 그려 전국에 나누어 보내서, 그림에 의거해 매를 잡아, 중국에 공물 바치는 일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세종실록 9년 2월 21일)
 
강원도 감사에게 임금의 뜻을 전하였다. "도의 각 고을에 나누어 기르는 참매 중에 몸집이 커서 조공으로 바칠 만한 것은 골라서 서울로 올려 보내라." (세종실록 9년 7월 5일)
 
함길도(현재의 함경도) 감사에게 전하였다. "초여름에 수컷 새매와 참매를, 품질이 좋고 몸이 커서 조공으로 바칠 만한 놈을 골라서 서울로 올려 보내라." (세종실록 9년 7월 11일)
 
충청도 감사에게 전하였다. "도에서 기른 조공용 수컷 새매 4연(連)을 밤의 서늘함을 이용하여 서울로 올려 보내라." (세종실록 9년 7월 13일)

 
찍어낼 수 있는 공산품도, 심으면 수확할 수 있는 곡식도, 길러낼 수 있는 가축도 아닌 터라, 매의 확보는 변수가 큰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현재의 시·도지사에 해당하는 전국의 수령·감사·절제사에게 상시로 매를 잡아 서울로 보내도록 독려했습니다. 고을을 다스리는 일에 집중해야 할 그들로서는 업무 과중에 대한 부담이 클 수밖에 없겠지요. 중앙 정부에서는 채방사(採訪使)라 하여, 지방의 실정이나 특산물을 조사하는 임시직 관리까지 파견하며, 매 포획을 도모합니다.
 

사헌부 장령(현재의 검찰·감사원에 해당하는 사헌부의 정4품 벼슬) 윤수미가 아뢰었다. "지금 조공으로 보낼 흰매를 잡는 일 때문에 채방사를 전국에 나누어 보냈는데... 다만 금년은 가뭄이 심하여 백성들의 생계가 염려스러운데, 채방사를 나누어 보내면 어찌 백성들에게 폐해가 없겠습니까... (채방사를) 보내지 마시고 폐해를 제거하소서." (세종실록 9년 7월 28일)
 
지신사(임금의 비서실장) 정흠지가 아뢰었다… "고려 말에 처음으로 처녀를 뽑아 (중국으로) 보내는 법이 생겼사오나, 그 폐단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계속됩니다. 하물며 해청은 포획이 매우 어려워서 이런 이유로 지방 백성들에 대한 민폐가 막심합니다." (세종실록 10년 11월 11일)

 
'매 사냥' 탓에 고통받은 민간, 그럼에도 세종의 염려는...

담당 공무원은 물론 민간에서도 매 포획에 따르는 고충을 호소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지성사대(至誠事大: 지극정성을 다해 사대함)의 기조 아래 세종은 신하들 반대에도 불구하고 매 잡기를 강행합니다. 조선 송골매는 해청(海靑) 또는 해동청(海東靑)이라 불리며 최고로 손꼽혔습니다. 따라서 명 황제는 물론 그에게 과잉 충성하는 사신들은 매 중에서도 특히 해동청 조공을 꾸준하고 거세게 압박해왔습니다.
 

찬성(조선 최고의 행정기관인 의정부의 종1품 관직) 권진이... "해동청이 우리나라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고 말을 만들어 황제께 아뢰시어 뒷날의 폐해를 막으소서." …임금이 말하였다. "어허, 이 무슨 말인가. 사대는 마땅히 성심껏 하여야 할 것이며, 황제께서 우리나라에서 (해동청이) 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으니 속일 수는 없다." (세종실록 8년 9월 29일)
 
임금이 말하였다… "나의 궁 안의 심부름꾼과 환관도 많이 명나라 조정에 들어가서 (황제를) 가까이에서 모시고 있으니, 우리나라의 일을 모를 것이 무엇인가? 내 이미 황제를 위하여 (해동청을) 잡았으니 즉시 바치지 않으면 내 마음이 미안하기도 하려니와, 또 황제께서 '일전에 분부한 해동청은 어찌하여 바치지 않느냐'라고 이르신다면, 내 장차 무슨 말로 대하겠는가." (세종실록 10년 11월 11일)


세종은 매를 잡는 족족 명 황제에게 보내려 하지만, 신하들 의견은 다릅니다. 명에서는 매가 쉽게 잡히는 줄 알고 앞으로 더 많이 보내라 압력을 가할 것이므로, 매가 잘 안 잡힌다고 거짓말을 하고 잡은 매의 일부만 보내자고 주장합니다. 이에 대해 지성사대라는 명목을 들어 매 조공을 강행했지만, 세종에게 실은 두 가지 염려가 있었습니다. 우선, 아무리 내밀한 정보라도 결국 명으로 새어 들어간다는 점입니다. 혹여 거짓에 기반한 외교로 대했다는 사실을 상국(上國), 즉 조공 받는 큰 나라가 알게 된다면, 어떠한 불이익이 올지 모릅니다.
 

임금이 말하였다... "(해동청 조공에) 마음을 다하지 않는다면 혹여나 (명에서) 채방사를 보낼지 모른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폐해가 더욱 심할 것이다." (세종실록 11년 11월 16일)

 
세종의 두 번째 걱정은 명에서 직접 채방사를 보낼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는 괜한 근심이 아니었습니다. 명나라 사신 농간에 의해, 황제는 조선 접경지대로 군인과 사냥꾼을 대거 파견합니다. 해동청을 잡는다는 명목으로 우리 국토까지 헤집고 다닐 수 있기에, 조선 백성들의 피해도 충분히 짐작 가능합니다.
 

황제의 칙서에서… "이제 내시 창성·윤봉·장동아·장정안 등을 보내는데 (명나라) 관군 백오십 명을 거느리고 모련위(毛憐衛, 현재의 랴오닝·지린·헤이룽장 일대) 등의 지역에 가서 해동청·토표(스라소니) 등을 잡게 하겠다. 칙서를 받거든 (조선의) 왕은 곧 적당한 사람을 뽑아 보내서 호송하되... 사용되는 양식은 번거롭지만 왕이 공급하기를 바라며, 만일 날이 춥거든 쓰기에 알맞은 옷·신 같은 것과 아울러 잡은 해청·토표 등을 가지고 돌아오는 도중에 먹일 고기와 모이로 적당한 것을 왕이 또한 적절하게 마련해 주며, 사람을 시켜 국경에 나가기까지 호송하라." (세종실록 13년 8월 19일)
 
좌대언(임금 비서) 김종서를 내전(임금의 생활공간)에 불러들여 보고 말하였다... "(명에서) 짐승 잡는 군사를 많이 거느리고 와서 지나가는 고을에 민폐를 많이 끼칠 것이다. 올해에 이와 같이 하고 내년에도 이처럼 하여, 해마다 와서 우리 백성을 거듭 괴롭힐까 심히 두려우니, 이 폐단을 구제하는 방책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경은 이 뜻을 가지고 대신들에게 의논하게 하라." ... 그때 밤이 2경(밤 9~11시)이 넘었는데도 임금이 잠을 자지 못하고 어린 내시 인평만이 곁에서 모셨다. (세종실록 13년 8월 20일)

 
명에서는 파견할 사신·군인·사냥꾼의 식량과 옷, 그리고 해동청과 스라소니를 잡게 되면 그 먹이까지 우리에게 제공하라고 요구합니다. 본래 조선 북쪽 땅은 척박한데 그들 요구까지 들어주려면, 수령과 백성들의 고통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것이 분명합니다. 게다가 그들은 종종 조선 공무원과 민간인에게 행패를 부리고 가축 등을 수탈해 가는데 처벌은 받지 않아, 민심은 소요할 것입니다. 이러한 일이 올해 한 번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매년 일어난다면 그 감당은 어찌해야 할까요.

세종은 현재의 NSC와 같은 회의를 소집해 대책 마련에 골몰하며, 밤이 늦도록 잠들지 못합니다. 명 사신은 한술 더 떠서, 우리 땅인 함경도까지 와서 매를 잡겠다고 예고합니다.
 

접반사(외국 사신을 접대하는 임시 관직) 정연이 돌아와서 아뢰었다. "사신이 '내년 5월에 조선에 와서 6월에 머무르고 7월에 돌아가는데, 함길도에서 매를 잡으려 한다'라고 합니다." (세종실록 13년 12월 25일)

 
당시 조선은 동아시아의 보편적 국제 질서에 따라 명과 형식적인 상하 관계를 맺었습니다. 이에 따라 조선이 명의 제후국이라는 외교 형식을 취하나 통치의 자주권은 인정됐습니다. 예컨대 조선은 명으로부터 내정 간섭을 받지 않고, 해를 세는 호칭인 연호(年號)와 왕의 인장인 국새(國璽) 등을 별도로 만들어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명에서 온 수백의 사신·군인·사냥꾼 무리가 조선 산과 들을 무자비하게 헤집고 다니게 되었습니다. 삶의 터전을 유린하는 일, 곧 국토에 대한 주권 침탈 행위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예조 판서(현재의 외교부 장관) 신상이 말하였다. "지난해는 사신 네 사람이 함길도에 와서 매를 잡았사온데, 올해에도 왔사오니, 어찌 뒷날에 또 오지 않을지 알겠습니까... 함길도에 비밀리에 분부하시어, 고의로 잡기 어려운 척 하고 잡았더라도 놓아버리라 하시어, 긴 앞날의 폐단을 없애주소서." ... 그 뒤에 경성(지금의 함경북도 경성군) 사람이 해동청 1연을 잡았으나, (사신 접대를 맡은) 이징옥이 일부러 놓아주었다. (세종실록 14년 11월 18일)
 
이징옥이 아뢰었다. "소신이 어리석고 판단력을 잃어, 매의 수가 너무 많은 것이 싫어서 고의로 놓아 보냈습니다." ...(임금이) "내가 즉위한 이래로 사대의 일에서 조금도 거짓을 행한 것이 없는데, 이징옥이 큰일을 그르쳤으니 어찌해야 할 것인가." ... 좌의정(현재의 총리와 유사) 맹사성 등이 "매를 놓아준 것으로 죄를 다스린다고 말하면, (명 사신) 창성 등이 이를 듣고는 반드시 이전에도 이와 같은 거짓이 있었으리라 의심할 것입니다." …(의견이 분분하여) 밤은 삼경(밤 11~1시)을 향하는데, 임금이 아직도 궁궐에 앉아서 이징옥을 의금부(지금의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에 가두도록 하였다. (세종실록 14년 11월 18일)

 
잡은 매 일부러 놓아준 관료... 세종 "용서할 수 없다"

명 사신과 수행원들의 욕심이 과한 데다가 민간에 대한 행패도 심합니다. 앞으로도 계속 조선 국토와 국민을 유린하며 매를 잡으러 올까 염려한 현장의 관리는 잡은 매를 날려 보내다 발각되었습니다. 그간 쌓아온 지성사대에 대한 신뢰를 잃을 것이 염려되는 세종은 관리를 처벌하려 합니다.
 

의금부에서 이징옥의 죄를 심문하여 아뢰니, 직첩(관직 임명장)을 거두고 지방으로 유배 보내도록 명하였다. (세종실록 14년 11월 20일)
 
(명 사신) 윤봉이 말하였다. "(이징옥에게) 죄가 있다 하더라도 관대히 용서하시기를 비옵니다." 임금이 지신사(임금의 비서실장) 안숭선에게 명하여 답신하였다. "사신을 속인 일은 과연 하늘을 속인 것과 같으니 다른 잘못에 비할 바가 아니다… 사신이 요청한다 하더라도 내가 용서할 수 없노라." (세종실록 14년 11월 21일)

 
세종은 국방에 큰 공이 있어 신뢰하는 신하 이징옥이지만 황제의 명을 어기는, 즉 명과의 외교를 그르칠 수 있는 사건을 일으킨지라 귀양을 보냅니다. 이에 대해 사신은 어쩐 일인지 그를 처벌하지 말라고 청합니다. 자신의 과욕과 횡포가 개입된 이 사건이 황제에게 탄로날까봐 염려된 모양입니다. 그러나 세종은 예사 잘못이 아니라며 처벌을 강행합니다.

 

18세기 문인 화가 심사정沈師正의 그림 ‘토끼를 잡은 매 그림豪鷲搏兎圖’의 일부 확대.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임금이 말하였다... "(공녀를) 간택하는 즈음에도 백성에게 끼친 폐해가 막심했지만, 조공 바치는 일이 중대하기 때문에 힘을 다하여 조치하였던 것이다. (매 조공의 폐해는) 이것과 비교한다면 만분의 일도 안 된다." (세종실록 9년 7월 28일)
 
"민간의 폐해를 나 역시 안다. 그러나 대의로 말할 것 같으면, 민간의 폐해는 가벼운 일이나, 사대를 성실히 하지 않는 일은 무거운 것이다." (세종실록 8년 9월 29일)


세종은 대표적인 애민(愛民) 군주로 꼽힙니다. 그런 그가 백성들이 입을 피해에 대한 고려보다 사대 의무의 수행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어떠한 것이 진정한 국익 추구일까요? 과연 세종은 사대주의자였을까요?
 

임금이 여러 대신에게 일렀다. "근래 황제가 북쪽을 정벌하였다는 말을 들었는데... 지난번 안남(安南, 베트남)에 출정한 것은 황제의 실책이었다. 우리 동방(조선)을 생각하면, 땅은 메마르고 백성은 가난하며 상국(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으므로, 진실로 마음을 다해 사대하여 한 나라를 보전하는 것이 마땅하다." (태종실록 14년 6월 20일)

 
당시 명은 적극적인 팽창 정책을 펼치며 1407년에 베트남을 정복했고, 몽골도 정벌하려 다섯 번에 걸쳐 황제가 직접 전장으로 나선 바 있습니다. 또한 '정화(鄭和)의 원정'이라 해 약 30년간 일곱 번이나 대함대를 파견하여 멀리 케냐 해안까지 정벌을 떠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조선은 명과의 관계에서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습니다.

4.27 남북정상회담 즈음에 문재인 대통령은 '노벨상은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받고, 우리는 평화만 가져오면 된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또한 지난 한국전쟁 70주년 기념사에서는 '세계사에서 가장 슬픈 전쟁을 끝내기 위한 노력'을 경주하자고 호소했습니다. 강대국 중심의 패권적 질서 속에서 '전쟁 없는 나라'를 향한 최고통수권자의 고뇌를 600년 시간을 사이에 두고 목도하게 됩니다.
 
(* 다음 기사에서는 명나라 사신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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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국면의 장기화에 따라, 예정돼 있던 행사들이 줄줄이 취소되고 있는 요즘입니다.

제 생계에도 대중의 문화적 갈망에도 보릿고개가 들었습니다.

다행히 인문학 콘서트 [역사로 노닐다]는 처음부터 유튜브 생중계로 기획되어서, 랜선으로 여러분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지난 7월 행사에는 관객을 열 분 모실 수 있었지만, 이달에는 사회적 거리두기의 강화에 의해, 완전히 스탭들로만 현장을 채웠습니다.

그래도 유튜브로 만날 수 있어서 감사하고 또 감사했습니다.

 

투입 대기 중. 두근두근하는 와중에도 '앙상블 IF'의 오프닝 연주가 정말 청아하고 좋았습니다.

두 달간 정약용과 그의 저작 속 생각을 만났습니다.

지난 7월에는 한신대 김준혁 교수님과 '목민심서와 리더십'에 대한 말씀을 나누었고요.

이달에는 경인교대 김호 교수님과 '흠흠신서와 법정의'를 주제로 대담을 나눴습니다.

정조와 다산이 꿈꾸었던 세상, 그에 따른 법의 역할과 범위, 코로나 장발장 등 최근 사건에서의 공정성 논의 등 약 600년의 시공간을 오갔는데요.

김호 교수님께서 차분하면서도 명료하게 정리해주셔서, 전공분야가 다른 제게도 참 많이 공부가 됐습니다. 

 

제 표정이 왜 저렇게 썩었는지... 아마도 살인 사건에 대한 말씀을 들을 때였나 봅니다.

행사 2주 전에 기획자, 김호 교수님과 함께 셋이서 사전 미팅을 했더랬습니다.

교수님의 시니컬하면서도 유머러스한 말씀에 매료됐었는데요.

그 부분을 최대한 살리고자, 교수님의 논문과 보조자료들을 읽고 원고를 작성했습니다.

유튜브로 만나신 여러분도 저와 같이 교수님의 매력, 다산에 대한 흥미, 현실세계에 대한 참여의식 등을 느끼셨기를 기대합니다.

 

리허설 때에도 철저히 마스크를 썼다지요. 방송에서는 저 답답하고 더운 마스크를 쓰지 않아서 얼마나 감사했는지.

 

관객의 빈 자리를 채우기 위해 제가 더욱 기운을 내야 했습니다.

들어주는 이가 없는 곳에서 강의나 발표 등을 하려면 정말 어색하거든요.

약 두 시간의 방송을 마치고 보니 이마와 등에 땀이 흥건하더라고요.

어서 코로나 국면이 진정되어, 다음에는 관객 여러분을 가까이에서 모시고 눈맞춤하며 소통하기를 기원합니다.

 

* 일시 : 2020.08.26(수). 오후 04:00-05:50

* 장소 : 남양주시립박물관 (남양주시 공식 유튜브 채널에서 다시보기 가능)

* 행사 : 온택트 인문콘서트 [역사로 노닐다 - 정약용, 새로운 세상을 꿈꾸다 : 爲民위민]

* 출연 : 연주 - 앙상블 IF

           강연 - 경인교대 김호 교수

           진행 - 실록읽어주는여자 오채원

* 기획, 연출, 사진 : 하정아

* 보도 : https://www.fnnews.com/news/202008222028194082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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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세종이야기꾼 오채원이 오마이뉴스에 연재하고 있는 '실록 읽어주는 여자' 시리즈 기사 중 일부이며, 오마이뉴스 메인에 게재된 바 있습니다. 기사 바로 가기: omn.kr/1o05l)

 

(중국 진시황릉의 병마용, 즉 병사·말 형상의 부장품. 여기에서 용俑은 장례에 부장품으로 쓴 사람의 형상을 가리키는데, 사람 순장을 대체한 것이다. 출처 : 연합뉴스)

황제가 죽자 순장된 궁인이 30여 명이었다. 죽는 날 모두 뜰에서 음식을 먹였다. 식사가 끝난 뒤 함께 마루에 끌어 올리니, 곡하는 소리가 궁궐을 진동시켰다. 마루 위에 나무로 만든 작은 평상을 놓아 그 위에 서게 하고, 그 위에 올가미를 만들어 머리를 그 속에 넣게 하고 평상을 떼어 버리니, 모두 목매 죽게 되었다. (조선 여자) 한씨가 죽을 때 김흑에게 말하였다. “유모, 나는 가오. 유모, 나는 가오.” 말을 마치기도 전에 곁에 있던 환관이 걸상을 빼내어서 최씨와 함께 죽었다. (세종실록 6년 10월 17일)

 

명나라의 제3대 황제인 영락제가 죽자, 후임자인 홍희제는 영락제의 후궁들을 함께 묻습니다. 저세상에 가서도 황제에게 봉양해야 하는 그들 중 한 사람인 조선사람 한씨의 유모 김흑이 생환하여, 순장되던 상황을 위와 같이 증언합니다. 실록 기사에 등장한 한씨와 최씨, 그들을 역사는 공녀貢女라 부릅니다. 여기에서 貢이란, 아래에 있는 사람이나 국가가 윗권력에게 바치는 물품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 공녀는 사람이 아닌 것이지요. 원나라 때 활성화되었던 사람 조공은 국가가 명으로 교체된 이후에도 이어졌습니다.

 

“왕이 먼젓번에 보낸 음식을 만들어 올리는 여자들은 모두 음식을 조화롭게 만드는 것이 정성스럽고 아름다우며, 제조하는 것이 민첩하고, 두부를 만드는 것이 특히 정교하고 아름답다.” (세종실록 16년 12월 24일)

 

명의 제5대 황제인 선덕제는 조선에서 보낸 집찬비執饌婢, 즉 음식 만드는 계집종의 솜씨를 마음에 들어 했습니다. 조선 정부는 이들 외에도 가무를 제공하는 창가비娼歌婢, 여러 잡무를 처리할 계집종, 그리고 황제의 후궁으로 삼을 양반가문의 아름다운 처녀를 명 황실로 보냈습니다.

 

(명나라 환관 겸 사신) 황엄이 황제의 명을 알렸다. “네가 조선국에 가서 국왕에게 말하여, 잘 생긴 여자가 있으면 몇 명을 간택해 데리고 오라.” 임금이 머리를 조아리고 말하였다. “어찌 감히 마음을 다해 명을 받들지 않겠습니까?” (태종실록 8년 4월 16일)

 

임금이 말하였다. “사대事大의 예禮를 내 감히 게을리 할 수 없어서 이미 처녀 다섯 명을 준비해두었다.” (태종실록 17년 5월 2일)

 

임금이 황제에게 보낼 처녀를 직접 간택하였다. (세종실록 8년 12월 9일)

 

사대 곧 큰 나라를 섬긴다는 외교 정책에 따라, 조선에서는 중국의 공식 및 비공식 요구에 성실히 응해야 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처녀 조공인 것이지요. 영락제부터 선덕제에 이르기까지 조선에서는 26년간 7회에 걸쳐 114명의 공녀를 보냈습니다. 세종시대만 따져보아도 임금이 직접 면접을 본 횟수가 16회나 될 만큼 황제에게 보내는 처녀의 선발은 국가 차원의 중요한 사안이었습니다.

 

'이게 나라냐?'

 

(명나라 환관 겸 사신) 황엄 등이 의정부(국가 최고 행정기관)와 더불어 경복궁에서 전국의 처녀를 함께 선발하였다. 황엄이 처녀들 중에 미인이 없다고 노하여, 경상도로 왕이 파견한 환관 박유를 잡아다 결박하고 취조하였다......곤장을 치려다 그만두고, 교의(임금이나 3품 이상의 고위 관리가 앉는 의자)에 걸터앉아 정승을 앞에 세우고 욕을 보이고 나서 태평관(사신의 숙소)으로 돌아갔다. (태종실록 8년 7월 2일)

 

오늘날의 국무총리 격인 의정부 대신에게 하대하며, 왕명을 받잡고 처녀를 고르러 지방으로 파견된 이를 직접 처벌할 만큼 명나라 사신의 위세는 대단했습니다. 황제를 대행한다는 명목을 띠고 온 그들이니까요. 그러므로 조선 정부에서는 조공할 처녀의 선발에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었으며, 다음과 같은 순서 및 기준에 따랐습니다.

 

진헌색(중국에 보낼 진상품을 마련하기 위한 임시 관청)을 설치하여 계집아이를 모으고, 전국의 시집장가를 금지하였다......경차관(특수 임무를 주어 지방에 파견한 관리)을 각각의 도에 나눠 보내서 처녀를 뽑게 하였다. 공공 및 민간의 천민과 노예는 제외하고, 좋은 집안의 13세 이상 25세 이하 처녀를 모두 고르게 하였다......조금 뒤에 또 임금이 환관을 전국에 보내서 처녀를 간택하니, 전국의 민심이 흉흉하게 동요하여 몰래 혼인을 맺는 자가 매우 많았다. (태종실록 8년 4월 16일)

 

이날 (사신이 면접하는 자리에서) 평성군 조견의 딸은 중풍이 든 것같이 입이 반듯하지 못하고, 이조 참의(행정안전부 격인 이조에 속한 정3품 관리) 김천석의 딸은 중풍이 든 것같이 머리를 흔들었으며, 전 군자감(군수품 관리 기관) 이운로의 딸은 다리에 병이 든 것처럼 절룩거리니, 황엄 등이 매우 노하였다. 헌사(현재의 검찰·감사원)에서 조견 등이 딸을 잘못 가르친 죄를 물어, 아전을 보내서 도망 못 가도록 지켰다. 조견은 개령(현재의 경북 김천)에 이운로는 음죽(지금의 경기도 이천)에 강제 거주시키고, 김천석은 정직시켰다. (태종실록 8년 7월 2일)

 

13세 이상 25세 이하의 ‘양갓집 규수’를 찾기 위해 전국으로 관리가 파견되자, 민심은 흉흉해지고 차출을 피하기 위한 온갖 방책이 등장합니다. 집안에서는 국가의 금혼령을 어기고 몰래 혼인을 시키기도 하고, 공녀 후보로 발탁된 여성들은 면접관 앞에서 신체 혹은 정신에 장애가 있는 양 행동합니다. 국법 혹은 왕명을 어겨 처벌을 받는 것보다, 말도 안 통하는 타국으로 보내져 언제 죽을지 모르는 목숨붙이로 연명해나가는 일이 비교 안 될만큼 무서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조용한 울음으로 저항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세 사신과 일곱 명의 처녀가 (경복궁의 동쪽 문) 건춘문에서 길을 떠나니, 그들의 부모와 친척들이 거리를 막고 울면서 보냈으며, 구경하는 사람들도 모두 눈물을 흘렸다. (세종실록 9년 7월 20일)

 

세 사신이 (간택된 처녀) 한씨를 모시고......(명나라로) 돌아가니......서울에 사는 사람들이 한씨의 행차를 바라보고 탄식하며 말하였다. “그의 언니 한씨가 영락제의 후궁이 되었다가 순장당한 것만도 애석한 일인데, 이제 또 (동생마저) 가는구나.” 눈물을 흘리는 자도 있었으며, 그때 사람들이 그를 산송장이라 하였다. (세종실록 10년 10월 4일)

 

앞서 보았던 영락제의 후궁 한씨가 순장당한 4년 뒤, 그의 동생마저 공녀로 차출되어 베이징으로 떠납니다. 그 누구보다도 지근거리에서 보았던 사건에 이제는 당사자가 되어 떠밀려 들어갑니다. 자신도 죽은 목숨이라 여겼겠지요. 이 광경을 지켜보는 이들은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게 나라냐?’고요.

 

약자에게 자행한 정치경제적 폭력, 정당화될 수 없어

 

(명나라) 사신 이충·김각·김복 등이 황제의 칙서를 받들고 처녀 몸종 9명, 창가비 7명, 집찬비 37명을 거느리고 왔다. (세종실록 17년 4월 26일)

 

세종 17년인 1435년에 공녀 53명이 귀환한 후, 명 황실에 대한 처녀 조공은 한동안 중지되었다가 청나라로 전환된 뒤에 재개됩니다. 그리고 그 역사는 일제강점기의 근로정신대·일본군성노예, 미군 주둔 시의 ‘양공주’로 재현됩니다.

 

어떤 이들은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소수의 희생으로 국가를 유지했다고, 약소국의 외교란 그런 것이라고요. 그렇다고 하여 약자에게 자행한 정치경제적 폭력이 모두 정당화될 수는 없습니다. 심지어 국가 및 사회 차원의 거래라는 구조를 가리고, 개인의 선택 혹은 책임으로 돌리려는 시도도 자행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따라서 피해자란 없다고 주장합니다. 피해자의 존재를 인정하건 안하건, 피해 당사자에게 입을 다물도록 강요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최근 ‘정신대 문제’가 그 어느 때보다 뜨겁게 재점화되었습니다. 특정 역사를 부정하려는 시도 또한 격렬하게 이루어집니다. 우리 사회가 현 사안을 회피한다면, 우리의 누이가 딸이 이웃이 유린당하는 일은 다시 발생할 수 있습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여성을 비인간화하는 공녀는 특수한 한 시기에 국한된 문제가 아님을 우리는 목도해왔습니다. 이번이야말로 ‘침묵의 카르텔’을 깨고 아픈 역사를 직시할 때입니다.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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